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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카페 게시글
시 창작 연구 스크랩 * 이윤학 시인 ( 시모음 )
은하수 추천 0 조회 171 16.03.05 14: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윤학 시인 ( 시모음 )

 

 이윤학

1965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으며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청소부」 「제비집」이 당선되어 시단에 등장했고,
시집으로 『먼지의 집』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 .
(1992) 먼지의 집
(1995)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
(2000)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
(2003) 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
(2000) 소리 소문 없이 그것은 왔다

 

 

 

 

짝사랑

둥근 소나무 도마 위에 꼽혀 있는 칼
두툼한 도마에게도 입이 있었다.
악을 쓰며 조용히 다물고 있는 입
빈틈없는 입의 힘이 칼을 물고 있었다.

생선의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고 오는 칼.
목을 치고 몸을 토막내고
꼬리를 치고,
지느러미를 다듬고 오는 칼.

그 순간마다 소나무 몸통은
날이 상하지 않도록
칼을 받아 주는 것이었다.

토막 난 생선들에게
접시나 쟁반 역할을 하는 도마.
둥글게 파여 품이 되는 도마.
칼에게 모든 걸 맞추려는 도마.
나이테를 잘게 끊어 버리는 도마.

일을 마친 생선가게 여자는
세제를 풀어 도마 위를
문질러 닦고 있었다.

칼은 엎어 놓은 도마 위에
툭 튀어나온 배를 내놓고
차갑고 뻣뻣하게 누워 있었다

 

 

 

 

정지된 표면

책꽂이를 정리하다,
잘못 뽑아 든 1994 가계부.
[행복이 가득한 집]에서 나온
매일행복해지는가계부.

난로 위에는
은색 주전자가 올려져 있다.
찻잔에서 세 줄의 김이
가늘게 가늘게 피어오르고 있다.

턱을 괴고 앉아 있는
여자의 구김없는 얼굴.
저 여자는 누구일까? 사람일까?
식탁 위에 펴진 가계부, 살진
고양이가 졸린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
창밖에선 눈이 내리고 있다.
공중에 떠 있다, 그 여자는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다.

표지는 표면이고,
그것은 대개 거짓이다.

 

 

 

 

첫사랑

그대가 꺾어준 꽃,
시들 때까지 들여다보았네

그대가 남기고 같 시든 꽃
다시 필 때까지

 

 

 

 

제비

집 질 자리를 고르는 듯, 지붕 위에 앉은
한 쌍의 제비가 재잘거리는 걸 본다
제비의 말은 너무 빠르다. 제비의 말은
너무 길다. 나는 알아듣지 못한다.
제비들은 어떻게 그걸 다 기억하는지, 알아듣는지
모른다. 언젠가 살아본 곳이라는 듯
오랜만에 찾아와 할 얘기가 끝없이
밀려 있다는 듯. 제비는 나란히 앉아
재잘거린다. 제비들이 보고 있는 곳이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상처를 감추려는 사람은 어느새
말이 많아진다는 생각, 허공 속으로 눈길을 돌린다는
생각…… 제비는 하늘 높이 날아가고 있다

 

 

 

 

 

아침고요수목원

언젠가는 슬쩍 갈 수도 있겠지요.
진창으로 폭우가 들이치는 날 길에 물이 흐르는 날
길이 뒤집히고 파이고 동강 나는 날
아침고요수목원에 가는 날 있겠지요.

계곡 가득 메우고 하염없이 쏟아지는 물 더미
물굽이 물의 험한 주름살 보고 올 날 있겠지요.

민박집 평상 조잡한 꽃무늬 장판 위에 앉아
삽겹살 굽고 모기향 피우고
젖은 담배 말려 피울 날 있겠지요.

온몸에 소름이 돋고 딸꾹질이 멈추지 않고
맑은 소주잔 들이켜면
언젠가 비가 그칠 날 있겠지요.
물이 줄어들 날 있겠지요.

내 가슴 잃어버린 맑은 음 찾아 들을 날 있겠지요.
맑은 음 전신을 전율시킬 날 있겠지요.

 

 

 

 

민들레

언젠가
누군가의 머리핀에서 떨어져나온 것 같다

저 유치한 민들레꽃!

자, 여기 있다
받아라

너 가져라 

 

 



리어카 위에 꽃상여를 올려놓고
밀고 가는 사람들을 만났다

비상등을 켜고
중앙선을 넘어
그들을 앞지른다

평생을 열매 만드는 공장,
과수원이 옆으로 펼쳐진다
물 속처럼 드러나는 하늘을
룸미러를 통해 쳐다본다

나는 지금,
어디로 밀려가고 있는가

뒷좌석 뒷유리 밑에서
바람이,
책장을 찢어발기고 있다

이제 나에게는
길에서 혼자 죽을 수 있는
독단도 남지 않았다

내가 달리는 속력을 앞질러 가는
내 생의 무지한 조급함과 언제나
협상 테이블을 마련할 수 있을까

급브레이크를 밟은 타이어 자국이
내 흐릿한 의식 속에 휘어진,
두 줄의 검은 혓바닥을 처넣는다





물풀을 위하여

흙탕물이 떠내려가는
조그만 다리 밑을 쳐다보고 있었다.

장마가 지난 뒤
장마가 남기고 간 비닐류들
플라스틱류들,
나뭇가지에 뒤엉켜 있었다

머릿속과도 같이,
엉망진창이 되었어도
언젠가 맑은 물이 되어 흐를 것이었다.

장마가 훑고 지나간 뒤,
미끌거리는 물때 때문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물풀의 줄기들
고통의 춤을 즐기고 있었다.

무엇이든 끌어가고 싶어하는
세월의 힘이여, 그것 없으면
물풀들은 타 죽을 것이었다.

 

 



달팽이의 꿈

집이 되지 않았다 도피처가 되지도 않았다
보호색을 띠고 안주해버림이 무서웠다
힘겨운 짐 하나 꾸리고
기우뚱 기우뚱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얼굴을 내밀고 살고 싶었다 속살을
물 위에 싣고 춤추고 싶었다
꿈이 소박하면 현실은 속박쯤 되겠지
결국은 힘겨운 짐 하나 벗으러 가는 길
희망은 낱개로 흩어진 미세한 먹이에 불과한 것이다
최초의 본능으로 미련을 버리자
또한 운명의 실패를 감아가며
덤프 트럭의 괴력을 흉내라도 내자
아니다 아니다 그렇게 쉬운 것은
물 속에 잠겨 있어도 늘 제자리는 안 될걸
쉽게 살아가는 방법이 있을까?
입으로 깨물면 부서지고 마는
연체의 껍질을 쓰고도
살아갈 수 있다니 

 

 

버려진 다리 위에

버려진 다리 위에 쭈그리고 앉은 노파가
붉고 매운 고추를 헤쳐 말리고 있다.
한 부대즘 될까, 군데군데 허옇게 말라버린
고추도 있다. 다리는 축 늘어져 있다. 금방이라도
검은 물 위로, 무거운 어깨의 짐을 내려놓을 것처럼
잔뜩 휘어져 있다.

떨어져 나간 난간. 엿가락처럼 구부러진 철근들이
앙상한 뼈들이, 낡은 골조 속에서 터져나와
녹슬어 있다. 굳은살처럼 여기저기
구멍을 때운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튀어나온 돌들이 매끄럽게
닳아 있다. 바닥엔 아직도 구멍이
여럿 뚫려 있다.

아득한 구멍 속에서, 거품을 몰고
깊이도 없이,
강물이 흐르고 있다.

굽은 허리를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노파가
실눈을 뜨고 일어선다. 가을 해가
버려진 다리 위에 떠 있다

 

 

 

 

직산 가는 길

이 한 줄의 길
이 한 타래의 길
거두어들일 수 없네

어디로든 도망치자고,
나를 자꾸 끌고 가던 이 길
끝나는 곳까지 가지 못했네

쭉 뻗은 미루나무
가지마다에
나를 조르던 너의
빛나는 눈빛, 깃을 터는 그
조르던 말들......

망설임은 이제 나에게서 떠나가고 없네

 

 



저수지

하루종일,
내를 따라 내려가다보면 그 저수지가 나오네
내 눈 속에 오리떼가 헤매고 있네
내 머릿속엔 손바닥만한 고기들이
바닥에서 무겁게 헤엄치고 있네

물결들만 없었다면, 나는 그것이
한없이 깊은 거울인 줄 알았을 거네
세상에, 속까지 다 보여주는 거울이 있다고
믿었을 거네

거꾸로 박혀 있는 어두운 산들이
돌을 받아먹고 괴로워하는 저녁의 저수지
바닥까지 간 돌은 상처와 같아
곧 진흙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섞이게 되네


 


떨림

잠자리가 느티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동그랗게 튀어나온 두 눈동자를 굴린다.
검게 그을리고 툭툭 터져 갈라진
느티나무 그루터기 동그라미 나이테.
잠자리는 원을 그리며 갈라진 나이테 속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리라.
갈 수 없는 어딘가에
아직 살아 있는 뿌리가 있는 것이리라.
다리에 돋은 자잘한 침으로
여기저기 찔러보고 있는 것이리라.
느티나무 그루터기 가장자리에 돋아난 직선
어린 가지에 달린 연초록 이파리들.
잠자리는 투명한 레이스 날개를
슬그머니 느티나무 그루터기 위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망설임의 저울질을 하고 잇는 것이리라.
갸우뚱갸우뚱 고개를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는 잠자리.
투명한 레이스 날개가 바람에
홀딱홀딱 젖혀져
부르르 떠는 잠자리 마음이
잠깐씩 내 마음에도 이어져
떨림을 전하는 것이리라. 

 

 

 

긴고랑길

오른손이 따르고
오른손이 잔을 들어
입에 붓는다.

그렇게 망가뜨리는 게
인생 아니겠는가!

초저녁의 포장마차에서
숟가락 젓가락통에
취한 머리를 누인 자,
천벌받는 자다.

방안에 틀어진 TV의
쇼 프로나 뉴스 같은 것과는
동떨어져 숨쉬는 자다.

술집에서도 일찍 쫓겨나
정신없음으로,
하루치의 불행을 까먹은 자,
그는 진정 구원받은 자다.
구원받길 갈망하는 자다.

이 길에도 언젠가, 단풍이 떨어져내려
앙상한 가지들 위로 얼어붙은
물 속의 하늘이,
쿵쿵 짖이겨져 갈라져
드높이 펼쳐지리라.

한쪽뿐인 불구의 가슴이
하염없이 시려오리라. 

 

 

돌멩이들

치이고 차여서
제자리를 떠난다

금이 가고 깨져서,
자신의 존재를 분리시킨다
자신의 생을 분가시킨다

비포장 길에 부려진 돌멩이들
닳아서 삭을
박힌 돌멩이들 곁에서
튀어나간다

 

 

 

 

밴댕이젓

드럼통에 담긴 비닐님은
이제 욕 다 보셨습니다

얼마나 그릇들을 옮겨다녀야
당신 밥상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간장 종지 같은 데
나를 가두지 마시길
채를 썰어 무치지 마시길

갈린 뱃속을 다물기 위해
흘러내린 잘디잔 가시들

당신만은 꼭
머리통을 잡고 드시길

자, 아
입 벌리세요

뚝뚝 젓물 떨어집니다

아무도 건너간 적 없는
당신과 나 사이의 냇물
금세 징검다리가 생깁니다

 

 

 

 

거울 보는 남자

변기 앞에 주그리고 앉아
뭔가를 토한다.

너는 어디까지 갔다
이제 돌아왔느냐,
연신 구역질이다.

또다른 누군가가 있어
눈물이 글썽이는 모습
더 속이 터진다.

이렇게 살면 안되는데,
죄를 짓는 것인데,
천벌을 받는 것인데,
침만 나온다.

물을 내린다.
다시금 거울이 차오른다

 

 

 

 

꼭지들

이파리 하나 붙어 있지 않은 감나무 가지에
무슨 흉터마냥 꼭지들이 붙어 있다

먹성 좋은 열매들의 입이
실컷 빨아먹은 감나무 젖꼭지

세차게 흔드는 가지를
떠나지 않는 젖꼭지들

나무는,
아무도 만지지 않는
쪼그라든 젖무덤들을
흔들어댄다
누군가를 떠나보낸
저 짝사랑의 흔적들을

 

 

 

 

휘어진 길

내 마음은
거기까지밖에 보지 못합니다
내 마음은
거기까지밖에 걷지 못합니다
내 마음은
거기서부터 진공상태입니다

휘어진 길을 따라
내 마음도 휘어져
튕겨집니다

나는 눈이 멀었습니다

그대가 떠나가고
커브에 오동나무가 서 있습니다
지금은 베어진 오동나무
보도 블럭에 덮인 오동나무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그 보랏빛 종들
수백 개 스피커에서
알지 못할 향기가 흐릅니다

질식할 것 같아
눈을 뜨고 맙니다

 

 

 

 

망둥어

망둥어들이 말라간다. 햇빛 속으로 마른 입
벌리고 있다. 대나무 꼬챙이에 끼어 일렬횡대로
줄을 맞추고 있다. 가을 햇빛 뜨겁고
슬레이트 지붕 위, 푸른 페인트 칠 말려온다.
속이 타고 자꾸 입을 벌려도,
물이 없다, 물살이 없다.

돌아갈 곳이 없다.

 

 

 

 

첫눈

여자는 털신 뒤꿈치를
살짝 들어올리고
스테인리스 대야에
파김치를 버무린다.

스테인리스 대야에 꽃소금
간이 맞게 내려앉는다.

일일이 감아서
묶이는 파김치.

척척 얹어
햅쌀밥 한 공기
배 터지게 먹이고픈 사람아.

내 마음속 歡呼는
너무 오래 갇혀 지냈다.

 

 

 

 

터널

건널목 차단기가 내려집니다
닥나무 이파리들
다닥다닥 떱니다

하루종일
생담배를 태우는 공장 굴뚝, 햇살이
닥나무 이파리 틈바구니에서
갈라져 떨어집니다

벼이삭들 사이에서
바닥을 끌고
참새떼 날아오릅니다
하늘에 회오리 무늬가 그려집니다

빛을 떼내는 닥나무 이파리들,
사기그릇 깨지는 소리들

깃발이 올려집니다
열 몇 칸짜리 객차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갑니다

아득히
회오리바람이 사라져갑니다

객차들의 꽁무늬,
뻥 뚫린 터널이 사라져갑니다

아주 오래 된 터널입니다

당신을 만나야,
불이 밝혀지는 터널입니다

 

 

 

 

처절한 연못

내가 지금 끔찍한 것은
그에게 떠넘긴 상처 때문이다.
저 연못의 유릴한 표정은 연꽃이었다.
수면 위로 끊임없이 떠올라 터지던
작은 물방울들, 간 곳 없다.


이 연못을 걸어가면 포도농장이 나온다.
그리고 회관과 외딴 집들,
나는 회관까지 걸어간다.


저녁이 오고 있다.
거친 바람이 포플러 가지를 흔들고
마지막 햇빛이 포플러 가지를
바닥으로 끌어내려 앙상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파헤쳐진 연못이 보인다.
애를 긁어 낸 여자의 뱃속과도 같을
얼어붙은 연못의 처절한 바닥,
허연 얼음 위에
긁힌 살처럼 진흙 더미들이 올라와 있다.


손과 발에 마른 진흙을 붙힌 채
포크레인이 한 대,
수영 금지 푯말 위에
멈춰 서 있다.

 

 

 

 

혓바늘

혓바닥 위에 잘못 떨어진
우박 하나를 녹이기 위해
밤을 새운다

이 세상에서
같은 부위를 같이
앓는 사람은 몇 안된다
같은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너는 오랫동안 설치기만 했다
이게 설친 대가다, 아픈 곳에
자주 면회가던 혀끝이여, 이제
거울만이 너를 볼 수 있다

너의 거짓위로는 탄로났다
너는 그 동안,
어디든지 찾아갔었다

누군가,
네 혓바닥에 깊이
뜨거운 바늘 말뚝을 박아놓았다

 

 

 

 

하루살이

얼마나 열심히 죽어왔던가
그리고 얼마나 열심히 태어났던가

불빛을 둘러싸고
빙빙 도는 하루살이떼는
줄어들지 않는다

타 죽지 않으면
떨어져 죽을 목숨들에게
날개란 무엇인지......

삶이 한없이,
황홀해 보인다

 

 

 

 

잠자리 한 마리가 거미줄을 통과할 때

정들었던 지상에서 발을 떼는 순간부터 문제이다
잠자리 한 마리가 꿈틀거리기를 멈추었을 때
문이 열리듯, 거미줄이 팽팽해지고, 햇살이
거미줄을 통과해 간다 하늘은 언제나 한계를 보이는
유혹일 뿐이다 우리는, 그 유혹을 충분히 음미할 필요가 있다

날아오르며 땅을 두드릴 수는 있어도
수많은 벽을 일일이 두드리고 지나갈 수는 없다
잠자리 한 마리가 남기고 간 것은
거추장스러운 빈 껍질뿐이다

투명한 잠자리의 영혼은 얼마나 고독할까!

 

 

 

 

바위산, 나무들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끝이 없는 안간힘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인가

낭떠러지에 매달려,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나무들
바위를 파먹고 살아가야 하는 나무들

녹빛의 이파리
그 불꽃이 꺼지지 않고,
오래 타들어간다

비틀린 몸이, 드릴처럼
바위 속으로 뿌리를
박아넣고 있다

금간 바위 틈으로
나무 뿌리가 박혀 있다

끝없는 집착의 길이
지하로 나 있다

 

 

 

 

잠긴 방문

잠긴 방문 앞에서 서성이는 사람이 있네
그는 방금 방문을 잠그고 나온 사람이네
열쇠를 안에 두고 방문을 잠근 사람이네
아무도 없는 방문 안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방문 안의 세계를 향하여, 그는 걸어가야 하네
어딘지 모르는 열쇠가게를 향하여 걸어가야 하네

 

 

 

 

견딜 수 없는 짐을 지고

무너지는 담을 떠받치고 있는
가느다란 나뭇가지 하나,
휘어지고 미끄러져 땅속으로
파고들어갔다

무너지는 담은 힘겨운 짐이었고
그 짐은 덜어지지 않았다

조금 더 기울었을 뿐
담은 무너지지 않았다

겨울이 지나가고,
마른 나뭇가지 밑에서
이파리가 피고 있다
푸른 불꽃이 타고 있다

더 미끄러질 곳 없어
허리 부러지는 나뭇가지,
결딜 수 없는 짐을 지고
절벽을 타오르고 있다

 

 

 

 

둥지

어느 날,
잉꼬 수컷이 죽었다
암컷은 둥지 속에 머리를 박고
나오지 않았다

악보를 그리는가
그림을 그리는가
글을 쓰는가

암컷의 꼬리
천천히 노를 젓는 것 같았다

좁쌀이 먹이통을 채우고 있었다
신선한 물이 매일 공급되었다

둥지 속에 박힌
암컷의 머리통
꼬리의 움직임을 멈췄다 

 

 

이미지

삽날에 목이 찍히자
뱀은
떨어진 머리통을
금방 버린다

피가 떨어지는 호스가
방향도 없이 내둘러진다
고통을 잠글 수도꼭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뱀은
쏜살같이
어딘가로 떠난다

가야 한다
가야 한다
잊으러 가야 한다 






자귀나무

저녁 잔 바람이 불어와 자귀나무 꽃
물위에 떠다니던 살얼음 한 조각
투명한 달을 향해 눈 사래를 친다.

길 아래 도랑에는 모기들이 들끓는다
모기들은 모기만 한 소리로 울고불고
별들은 차 추돌한 아스팔트 바닥
잘게 부서진 유리 알갱이 흩어져 빛난다.

뼛속에는 구멍이 있어
뼛속의 구멍은
별까지 가는 외길이고
나와 별 사이의 외길이고

상사병은 더 이상 번지지 않는다.
달에서는 휴화산 분화구가 사라지지 않는다.

상여들은 자귀나무 가지 위에 올라타고
어딘가로 떠나간다.

 

 

 

 

시월

낮잠에서 깨어나 듣는 털 난 매미소리.
귀 어두운 아버지가 틀어놓은
골방 안 라디오 소리.
스테레오 FM이 복음성가처럼
지천으로 퍼져나간다.

그런데 누가 바닥까지
서늘하게 에어컨을 틀어놓았나.

언젠가 시월 넘긴
털 난 매미소리에서
서늘한 냉기가 나와 바람이
선선해진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털 난 매미 소리는
볼륨조절이 안 된다.
온도조절이 안 된다.
감정조절이 안 된다.
낮잠에서 깨어나 듣는
털 난 매미소리.

이제 머지 않아
한 살씩 더 챙겨먹는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준다.

찔끔찔끔 떨어지다
물 한 방울 모아 마지막으로
허연 입가에 맺는 수도꼭지.

 

 

 

 

붉은빛

가뭄의 저수지에서 붕어를 잡아다
고무통에 넣어둔 적이 있었다. 고무통에
찰랑거리도록 물을 퍼다 부어주었다.
붕어는 느리게 지느러미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붕어는, 고무통 벽에 부딪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붕어는 더 이상 아가미를 열려하지 않았다.
물 밖에 입을 내놓고
물 밖으로 나가고 싶어했다.

붕어의 눈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붕어는 고무통에서, 하루도 살지 못하고
물 위로 떠올랐다. 물 위에
허옇게 누웠다.

붕어가 죽자, 붕어의 눈에서
붉은빛이 사라졌다.

 

 

 

 

청소부

누워 있는 것도 벽이었다. 출근길 서둘러 밟고 온

보도블록에도 무늬가 있었다. 단색세포처럼 또박또박

놓여 있었다. 밟히면 들고 일어나기도 했다. 기우뚱

거리며 빗물을 토해 내기도 했다.
 
모든 것은 줄지어 서 있었다.

길을 만들며 스스로 자라야 했다.

한번쯤 앞서고 싶은 길

바람을 견딘 만큼 몸으로 주름이 잡혔다.

지워지는 혈관을 찾아 나는 불안하게 흔들려야 했다

햇살은 구름 사이로만 쏟아졌고 아이들은 티눈처럼

자라 있었다. 엉킨 뿌리를 들고 일어났다.

태풍이 겹겹으로 껴입은 주름을 더듬고 갔다.

그리고 바람이 통 없는 날 고개를 숙여야 했다.

아이들은 조금씩 흔들릴 때 아름다웠다.

껴안은 모든 것들 속에서 너희들은 동티처럼

부활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 소문 없이 떨어질

나를 위해 남아 있어야 했다. 깨끗한 너희들,

밟히는 족족 주름을 벗고 탄생하는 은행알들.

 

 

 

 

 

화살-생선구이

가죽이 터진 채 굳게 입을 다물고

버티고 있다 저 통통한 시체의 과거,

우리의 입맛은 과거를 동경하고 있다

저 놈도 언젠가, 물 속에 버려졌을 것이다 버림받고 떠돌다

무엇인가에 놀라 뜨인 눈이 쉽게 감기지 않는다

아픈 곳에 눈길을 줄 수도 없는 물고기 한 마리가

놀라움에 약한 가죽을 열고 괴로운 비밀의

하얀 속살을 불쑥 토해냈다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은

눈부심의 속살, 우르르 달려드는 눈길......


김이 빠져나오는 찢어진 가죽, 고통은 참을 수 없는 뜨거움인가!

몸을 감싸주던 체온이 사라진 후

동그란 물고기의 한쪽 눈이 남는다

놀라움에 조금씩 가죽을 찢었을, 잠들지 않는 눈

나는 얼마나 많은 저 눈깔을 빼먹었던가


깊은 물 속을 헤쳐온 물고기의 가시는 앙상하게

꼬리를 향하여, 무수히 활처럼 휘어져 있다

 

 

 

 

무화과

이끼가 피어나고 있다, 이끼가
담을 타고 올라가고 있다
아무도 넘보지 않는 담,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담 넘어,
무화과나무 열매들 벌어지고 있다

노인이 자전거를 타고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간다
젊은 여자가 자전거 핸들 사이에
목욕 가방을 끼고,
물 묻은 머리카락 휘갈기며
보도블럭 위를 달려간다

담 너머엔 한가로운 여름 벌판이
펼쳐졌으리라, 끝없는 잡풀들 사이로
한 번도 열리지 않은 길이 숨었으리라

벌과 나비가 머물렀다 가는
오목 볼록 꽃무늬 대접들,
뒤엉켜 춤을 추고 있으리라

초록색 대문이 열리고
갑자기, 아이가 뛰어나온다
슈퍼에 가는가, 수돗가에
망초꽃 몇 송이 피어 있다
장독들은 평생 동안의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겉모습뿐이다, 세월뿐이다
장독들은 벌어지는 무화과를 구경하고 있다,
검은 입 속, 이 사이에 낀 침묵들이,
번쩍번쩍 출렁거리고 있다

무화과 열매들은 움츠러들지 못한다
찢어지면서, 시뻘건 속을 드러내 놓는다
누가 저걸, 실과 바늘로 꿰맬 수 있을까

 

 

 

 

민들레

민들레꽃 진 자리
환한 행성 하나가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가벼운 홀씨들이
햇빛 에너지를
충전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정거장도
아닌 곳에
머물러 있는 행성 하나

마음의 끝에는
돌아오지 않을
행성 하나 있어

뿔뿔이 흩어질
홀씨들의
여려터진 마음이 있어

민들레는 높이
안테나를 세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칸나

숭례초등학교 정문 쪽 담 밑에는
오늘도 세 그루 칸나가
그을음 없는 불을 밝히고 있다.

며칠씩 장맛비 내리고
칸나 불은 붉고 끝이 뾰족해
이 세상에서 처음 만나는
새싹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장맛비 내리기 전에
몇 달 동안,
할머니 한 분이 앉아 있었다.
광목 잡곡 자루들
골목길에 늘어놓고 앉아 있었다.
됫박에 소복이 잡곡을 담아놓고
담에 뒷머리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성큼성큼 비둘기들 다가와서
광목 잡곡 자루를 축내고 있었다.
하현달 모양 모자 차양
꾹 눌러쓴 할머니 한 분
담에 뒷머리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세상 좋은 공기 혼자 다 잡숩고 있었다.
앞에 놓인 잡곡들 다 뿌려진
드넓은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 벌린 채 깊은 잠 들어있었다.

세 그루 칸나 꽃이
세상에 나오기 바로
며칠 전의 일이었다.

 

 

 

 

해바라기

자기 자신의 괴로움을
어떻게 좀 해 달라고
원하지 않는 해바라기여

죽는 날까지
뱃속이
까맣게 타 들어가도
누군가를 부르지 않는 해바라기여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는 해바라기여

너 말라 죽은 뒤에
누군가 잘못 알고
허리를 끊어 가리라

너는 머리로 살지 않았으니
네 머리는 땅 속에 있었으니

뱃속을 가득 채운 씨앗들이
너의 전철을 밟더라도
너의 고통을 답습하더라도

너는 평생 동안
가장 높은 곳에
가장 먼 곳에
통증을 모셔 놓고 살았으니

 

 

 

 

연민

한 마리 개미를 관찰한다

돋보기로 보는 개미
흐릿하게 확대되어
어지러운 마음속에 사로잡힌다

얼마나 추웠을까?

초점을 맞춘다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

자신이 만든 그늘에 고개 숙이고
평생을 살 여자 있다면, 그
그늘 밑에 신문지 깔고 눕고 싶네

변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 지 가짜인지
알고 싶네

버드나무 그늘 벤치에서, 헤
입 벌리고 잠든 남자들

떠나기 위해
매미들은 악을 쓰며
울고 있네

그 여자의 숨소리,
아주 작은 머리카락 흔드는 소리

날개 없이 날아다니는 것들이
헤매게 하네

 

 

 

 

그 병원 앞

비 오는 밤에
기적소리를 듣는 병실들
형광등 불빛들, 넓은
창문 속에
목련이 활짝 피어난다

목련이 피어있다는 것만으로
그걸 한번 쳐다보는 것만으로
나는 얼마나 많은 신음 소릴 간직하고
있는 것인가

외면하려 해도 한 번은
슬쩍 쳐다보게 되는 곳
하지만 이제는, 창백한
저 꽃과 향기는 지나간 것이다

비 오는 밤에
기적 소리는 뿌리치며 지나간다
그리고 형광등 불빛들
무엇인가 담고자 노력하는 유리 창문들

신음 소리만큼 긴 기도문을
들어본 적은 아직 없다.

 

 

 

 

기침

주먹을 불끈 쥐고
기침을 시작하는 아버지.
금 캐러 광산에 다닌 아버지.
돌가루 쌓아놓고 사는 아버지.

새벽 4시를 알리는
아버지의 기침소리.
뭉텅이별이 쏟아지는
아버지의 기침소리.

네가 갓난아기였을 때
너희 아버지는 금 캐러 가기 전에
금 캐러 갔다와서
네 눈을 바라보곤 했다.

삼십 후반이 된 아들에게
아버지 얘기를 흘려놓고
어머니
비닐집 속으로 사라진다.

뿌옇게 물방울 열린 비닐집.
갈빗대 튀어나온 비닐집.

경운기 몰고 풀 깎으러 가는
넥타이 허리띠 졸라맨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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