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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의 정확한 개념 연구 12연기 존재에 대한 올바른 제시 황희봉항님을 위하여
형성의 바탕을 초월한다 추천 0 조회 212 22.09.01 20:49 댓글 15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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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2.09.01 22:47

    첫댓글 이 짧은 시간에 소논문적인 글을 쓰다니 놀랍습니다.
    제가 아는 연기는 존재적 실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현상들이 인연화합으로 나타나고 스러지는 불가사의한
    사건입니다.
    어떻게 보면 약간 환영 같기도 하고 환타지 같기도 한 것인데
    워낙 리얼해서 그 안에 푹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 22.09.01 22:50

    아참 제 아이디는 환희봉행입니다.
    아무래도 한글로 개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원래대로

  • 22.09.01 23:16

    보통 현상을 파악하려면 생각이란 것을 해야 하는데 현상의 드러남은 생각보다
    빠르기 때문에 생각은 항상 현상을 따라가는 형편이죠.
    그런데 생각이란 것은 생각 보다 먼저 일어난 현상들을 선행존재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존재론적 시각으로 파악하기에 생각을 생각하는 자신으로
    여깁니다.
    이 모든 현상에서 주어를 제거하는 작업이 정견인 것이고 그렇지 않고 현상을
    주어와 목적어 관점에서 보는 것이 사견이지요.
    불교는 왜 명사가 붙으면 안되는지를 보여주는 수행과 교학체계라고 생각합니다.

  • 22.09.01 23:58

    느낌이 일어나면 느낌이 있습니다. 나쁜 느낌, 좋은 느낌 같은.
    느낀다는 현상이 있습니다. 느낌이 일어난 것입니다.
    느낌이 있고 느끼는 자가 따로 있느냐 ?
    그런데 느낌을 제외한 느끼는 자가 따로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느끼는 자는 일단 제외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느낌만 남습니다. 느낌은 일어났고 다시 사라집니다.
    이러한 반복패턴을 유지하게 됩니다. 여기에 느끼는 자를 갖다 붙이는
    것이 무명과 갈애라는 것이죠.
    지각(산냐)이나 생각(상카라)도 같은 맥락입니다. 일어나고 사라지고
    반복하고.
    주관과 객관이라는 양변으로 갈라치기하는 것이 어리석음이라는 것이고
    그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임에도 주객양변 구도로 파악하는 인지적 오류상태.
    오온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오온, 명색, 연기 등을 바르게 파악한다면 정견이 열린다고 봅니다.

  • 22.09.02 04:04

    어떤 견해를 지니고 고수 천착하시기 보다는

    부처님 교법에 의지하여 생성(유)되어가는
    진행과정으로 보고

    현재 지니는 이해와 사유의 과정이,많은 결점보다 더 심각한 저류로서 견해의 오류 즉 사견일 수 있음에
    유의하셔야 부처님 정법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22.09.02 05:11

    @존재가 끝났다 감사합니다
    그동안 견해를 한 수십번
    바꿨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계속 그럴 것입니다
    틀렸다고 생각하면 언제든
    수정할 것입니다

  • 22.09.02 11:24

    //보통 현상을 파악하려면 <생각>이란 것을 해야 하는데 현상의 드러남은 생각보다 빠르기 때문에
    생각은 항상 현상을 따라가는 형편이죠.//

    봉행님의 의견에 대한 논평은 아닙니다.

    서로 의견을 주고 받을 때 어떤 단어 - 예를 들면 <생각>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각자가 지니고 있는 범주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나면 의사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봉행님의 의견에 대한 논평이 아닙니다.

    <생각>이라는 단어를 사전에 찾아보면 그 범주가 좁지는 않을 겁니다.
    그럴때 만약 <생각>이 빠알리 단어로 대체했을 때 어떤 단어와 상응하는 단어인가 <생각>^^해 보면
    일단 언어적 활동인 어행이라면
    [현상을 파악하는데] 반드시 어행이 개입할 필요는 없지 싶습니다.
    그러나 어행이 아니고 <판단>이라는 의미의 <생각>이라면
    [현상을 파악하는데] 반드시 <판단>이 필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 22.09.02 10:36

    @봄봄
    말씀드리고자 하는 취지는
    각자 사용하는 단어에 대한 취향이나 범주의 차이가 있어서
    앞뒤 문맥을 살피지 않으면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이와 같이 남북방에서 5위 75법이니 100법이니 하는 표현들은
    이러한 실체적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불교 교학]에서 <이러한 단어는 이러한 범주의 이러한 의미이다.>라는
    일종의 사전적 정의로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 올린 sati에 대해서
    이 念은 두리뭉실하게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알아차림>은 더 더욱 아니라는 것에 대한 의견이었습니다.
    빠알리 니까야에 나오는 정의는 .........반복은 생략....
    우리말 <기억>과 거의 용례가 같은 단어라는 의견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상호대화에 사용하는 단어 하나라도
    그 범주가 각자 자신만의 범주로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면
    서로 다른 것을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에
    가능한 서로 공유하는 단어로 의견이 전달되어야 대화가 이루어지지
    그렇지 않은 아주 특수한 경우에 대해서는
    자신이 주장하는 번역어가 있다면
    그 단어를 아주 정밀한 근거에 의해, 범주를 제시하고서 의견을 이어가야 하지 싶습니다.

  • 22.09.02 10:58

    무엇이든지 <있다, 없다>라고 말하면 사견이라고 주장하는 분도 계시는데

    앞서 <sati>에 대한 의견을 올린 글에서도
    ------------
    혹자는 [kāyassa yathābhūtaṃ ñāṇāya]을 인용하여 사념처는 (如實)知라고 주장하나
    그렇지 않다. 있는 그대로 알기 위해서 필요한 법수가 sati이다.
    이러한 점은 대념처경의 반복되는 마지막 구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

    그 근거로
    ------
    그리고 마지막 반복적인 표현은 이와 같다.
    [ ‘atthi kāyo’ti vā panassa sati paccupaṭṭhitā hoti
    yāvadeva ñāṇamattāya paṭissatimattāya
    anissito ca viharati, na ca kiñci loke upādiyati.
    혹은 그는 ‘몸이 있구나.’라고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마음챙김만이 현전할 때까지
    이제 그는 [갈애와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

  • 22.09.02 10:59

    <‘atthi kāyo’>ti -- [신수심법이 있다.]라는 .....
    등의 용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우리말 '있다.'와 같은 용례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혹자는 <있다, 없다>라는 [有-無]는 극단(적 사견)이라는 경문을 근거로
    무엇이든지 <있다, 없다>라고 말하면 사견이라고 주장하는 분도 계십니다.

  • 22.09.02 11:17

    @봄봄
    불교 공부를 한다는 것은
    붇다나 붇다의 제자들에게 말씀을 듣거나 전승된 경전을 읽거나 보거나 하면서
    그 내용에 나오는 언어습관이나 단어에 대해서 깊은 고민 없이
    번역된 단어 - 번역어를 선택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작업 -를
    각자 본인이 알고 있는 어떤 단어로 이해하면
    <아기다리고기다리...>가 되고 말지 싶습니다.
    예를 들어 간단한 경문이야 그렇다 치고 조금만 긴 경문을 직접 번역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나의 경문은 그렇게 번역했다고 해도
    그 번역어를 다른 경문에 그대로 대입해보면
    번역이 영 이상하다는 것은 본인이 스스로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현존하는 번역어를 벗어나기 어려운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은 <마음에 잡도리>나 <마음챙김>이라는 표현이 이제 정착되어 버려
    다른 번역어로 바꾸면 오히려 불편한 경우도 생겨납니다.

    그렇다고 해서 作意나 念이라는 漢譯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더 혼용할 필요까지 생겨난 상황입니다.

    붇다나 붇다의 제자들에게 말씀을 듣거나 전승된 경전을 읽거나 보거나 하면서
    그 분들의 언어습관이나 단어의 사용 용례를 우리가 적응하려고 해야지
    본인의 언어습관이 단어의 범주를 고집하면
    가리키는 달은 고사하고.

  • 22.09.02 11:48

    248) 진리[諦]로 옮긴 sacca는 √as(to be)에서 파생된 중성명사이다.
    √as는 '있다, ~이다'를 뜻하는 영어 be동사와 꼭 같이 범어 일반에서 널리 사용되는 어근이다.
    이것의 현재능동분사가 sat이고 여기에다가 가능분사를 만드는 어미 '-ya'를 첨가하여 satya라는
    형용사를 만들었는데 이것의 빠알리형태가 sacca이다.
    그래서 형용사로 쓰이면 '존재하는, 진실한, 사실인' 등의 의미가 되고,
    중성명사로서는 '진실, 진리, 사실, 실제'란 의미로 쓰인다.

    초기불교를 위시한 모든 불교에서는 고 · 집 · 멸 · 도의 네 가지 성스러운 가르침을 sacca(Sk. satya)라 부르고 있다.
    한국에서는 진리(眞理)로 정착이 되고 있다.

  • 22.09.02 11:49


    한편, 범어 일반에서 많이 쓰이는 또 다른 be동사로 √bhū(to be, to become)가 있다.
    빠알리 삼장에서 보면 be동사는 거의 대부분 hoti(√bhū의 3인칭 현재형)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as(to be)의 삼인칭 현재형인 atthi보다 훨씬 많이 나타난다.
    어원으로 살펴보면 √as는 '이다 · 아니다'나 '있다 · 없다'는 존재의 개념에 가깝고
    √bhū는 '된다, ~라 한다'는 의미로서 진행의 개념에 가깝다 할 수
    그래서 모든 현상에 대해서 이다 · 아니다라거나 있다 · 없다라는 존재론적 사고를 피하는 불교에서는
    기본적으로 진행이나 생성, 그리고 되어감의 개념을 나타내는 √bhū를 더 선호한다고 볼 수 있다.
    수행이나 닦음을 뜻하는 bhāvanā도 이 어근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그러나 불교의 가장 근본 가르침인 사성제를 '되다'를 뜻하는 √bhū에서 파생된 술어를 사용하지 않고,
    '이다'나 '있다'를 뜻하는 √as에서 파생된 술어인 sacca로 표현한 것은
    이러한 네 가지 진리는 바뀌는 것이 아니라 확정된 가르침이요 불교만대의 표준이요
    세상에서 확정된 최고의 가르침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하겠다.

  • 22.09.02 11:57


    12연기 10번째 지분인 有(bhava)를 '존재'로 해석하고서도
    연기가 이해된다는 것이 신기함.

  • 22.09.02 12:08


    {Netti}
    saccasammohanalakkhaṇā avijjā, sā saṅkhārānaṃ padaṭṭhānaṃ.
    무명은 진리에 대한 미혹을 특징으로 한다. 그 [무명은] 지음(行)의 근접요인이다.
    punabbhavavirohaṇalakkhaṇā saṅkhārā, te {taṃ (ka.)} viññāṇassa padaṭṭhānaṃ.
    지음은 다음 존재의 키움을 특징으로 한다. 그 [지음은] 의식의 근접요인이다.


    * 行(saṅkhārā)은 (puna)再-有(bhava)를 증장시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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