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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을 다녀와서
나이 들수록 사는 곳의 모든 진애를 훌훌 털고 한 번씩 머리와 마음을 씻고 싶은 충동이 강렬해진다. 머리를 맑게 씻는 데는 여행만한 것이 없다. 스스로 계획해서 꼼꼼하게 챙겨가는 답사여행도 배우고 느낄 것이 많아 좋지만, 패키지여행도 마음의 휴식으로 그만이다. 남들이 계획해 준 곳 골라잡아, 가자는 대로 가고, 먹자는 대로 먹고, 자자면 자면서 여행에 묻히다 보면 일상에서 느끼던 감정 즉, 걱정, 욕심 다 잊고 어깨가 가벼워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런 씻김을 하고 나면 몇 달이나 몇 년을 살아내는 힘을 얻어 올 수 있다.
주변 사람들 살림살이 생각하면 왠지 미안하고 눈치가 보여 조심스럽기도 했지만, 그 바람이 워낙 커서 이제 눈을 질끈 감고 무작정 떠나기로 한다.
몇 해 동안 스페인을 가고자 벼르고 별렀는데 여러 사람들과 함께 계획한 일정이 무산 되고 말았다. 끝까지 아쉬움이 남았으나 스페인을 포기하는 대신 따뜻하고 가까운 대만으로 여정을 잡았다. 대만하면 박물관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지만 가볍게 한번쯤은 가보고 싶었던 곳이기도 했다. 우리부부만 가는 여행이니 만큼 값싼 여행사를 택했다. 여행의 품격은 여행사가 결정한다는 내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새벽 두 시 반에 버스를 타고 인천공항까지 가는 것이 조금 무리였다. 생리통 때문에 허리가 아프고 머리가 지끈거려 한편 두렵기도 했다. 비행기를 두 시간 삼십분만 탄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아침 일곱 시가 다되어 공항에 도착했다. 여행사와 만나기로 한 장소에 가보니 일행이 우리뿐이었다. 경제가 얼어붙은 데다 아이티 참사가 겹쳐 여행 성수기의 흥청거리는 분위기는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여러 여행사가 연합을 해 성사시킨 패키지였다. 수속을 모두 스스로 밝아 탑승을 했다. 혼자가 아니라서 남편이 그나마 손 싸게 모든 일을 처리하는 덕에 나는 따라만 다녀도 되었다.
대만에 대하여
대만은 타이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중국 푸젠성과 마주하는 나라다. 16세기 포르투갈인이 건너와 영향을 주었고, 같은 시기 네덜란드에 의해 점령당했으며, 17세기에는 스페인의 점령을 받기도 해서 일찍이 서양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곳이다. 1885년에 하나의 성으로 독립하였다가, 청일 전쟁 후에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51년간 왜의 영향을 받았다.
대만은 1949년 중국공산당에 패배한 국민당의 장제스 정권이 이전해 와서 수립한 국가로 공식 국호는 중화민국이다. 1992년 하나의 중국을 지향하는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하면서 대부분의 나라가 대만과 단교를 하는 바람에 국제적 고립이 되었으나 경제적 교역은 대부분 계속 유지하고 있다.
크기는 3만 6천 제곱킬로미터로 우리나라 전라도와 경상도를 합쳐놓은 정도 될까? 기후는 북부는 아열대, 남부는 열대 기후이고 5월부터 9월까지는 우기로 비가 많다. 주민은 원주민 고산족과 중국에서 건너온 이주민으로 구성되었으며, 언어는 중국어와 지방어 등 세 개정도가 사용되고 있다. 대만의 수도 타이빼이는 우리보다 시차가 한 시간 늦다.
장개석 총통의 일당 독재에 반대하는 대만인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1949년부터 계엄을 유지하였다가 1987년 해제하였다. 2000년에는 50년 만에 정권교체가 되어 야당인 민진당의 천수이벤이 통치를 하여 대만 독립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현재는 다시 국민당의 마잉주가 12대 총통인데 독립보다는 안정과 경제발전을 강조하는 대통령이다. 우리 가이드는 독립을 주장하여 불안을 자초하는 것 보다 경제개발을 강조하는 대통령에 더 만족한다고 한다. 수십 년 민중의 눈물과 목숨으로 겨우 세운 민주정부를 경제개발의 구호 한마디에 모든 것 다 내준 우리 정치현실과 엇비슷하다고 할까?
경제는 광공업과 서비스업이 주류를 이루며, 특히 제조업과 무역의 비중이 높다. 국민소득은 2만 달러를 넘는 아시아의 네 마리용 중의 하나로 일컫는다.
다섯 개의 여행사에서 각각 한 팀씩 총 19명이 버스에 올랐다. 때는 방학이고 1월에 여유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이 교사들이었던 모양이다. 묻지 않아도 한 팀 정도만 빼고는 일행이 모두 교사들로 보였다. 여러 여행사가 모집했다고는 하나 가격이 같고, 동행한 인솔자가 없다 뿐 현지 가이드가 있어 별 불편은 없었다. 남편과 단둘이 온 팀은 우리가 유일했다. 서울에서 온 여교사들이 나를 보고 깔깔 웃는다. “남편과 여행 온 사람을 잔치 집에 도시락 싸들고 왔다고 그래. 뭔 재미로 여행을 하냐?” “그래요? 도시락 있어도 맛있는 음식 있으면 먹을 수 있어요. 호호호!” 이렇게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남의 이야기를 엿보는 즐거움 또한 여행의 선물 아닐까?
타이빼이(太北)의 겨울 날씨는 늦여름이나 가을 같았다. 겨울 겉옷만 벗고 내리니 20도가 넘는 기온으로 땀이 줄줄 흘렀다. 게다가 버스의 에어컨이 고장이 났다. 가이드는 차가 썩었다며 먼저 투덜대지만 그렇다고 땀이 식지는 않았다. 다섯 살 박이와 일곱 살 박이를 데려온 엄마가 손부채로 연신 딸의 얼굴에 부채질을 하며 흐르는 땀을 닦는다. 아이도 보채지 않고 손가락에 닦은 땀을 똑 튕기며 장난질을 한다. 허나 아직은 여행 시작의 설레임으로 견딜 만하다. 오후에는 에어컨이 정상적으로 가동되어 더 이상 불편은 없었다.
국립고궁 박물관
수도 타이빼이에서 가장 자랑할 만한 유적이 국립고궁 박물관이다. 세계 4대 박물관 중에 하나인 이곳 박물관은 60-65만점(자료마다 다름, 62만점, 63만점, 65만점 등)에 가까운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전시된 공간은 비록 크지 않아 2만 5천점 정도를 전시하고 있으나 세계 박물관으로 꼽는 이유는 대부분의 대형 박물관들이 다른 나라 유물을 약탈하거나 수집해 전시하는데 비해 이곳 박물관은 모두 중국의 역사유물을 소장한다는 점에서 4대 박물관으로 꼽는다고 한다.
원래 북경의 자금성에 보관되어 있던 유물을 일본의 침략을 피해 이리저리 피난시키다가 1948 국공내전으로 장개석이 일부를 대만으로 이동시켜와 세운 박물관이다. 유물을 모두 전시할 공간이 없어 일부 유물을 제외하고는 한 달 혹은 두세 달 만에 교체하여 전시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유물이 지하저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장개석이 자신의 정통성의 담보물로 이 많은 보물을 부둥켜안고 배회하면서 결국 외세로부터 지켜낸 유산들이다. 만약 그가 지키지 않았으면 이 유물들이 일본 박물관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록 대만에 있다고는 하나 중국은 이곳을 남의 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중국 본토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으니 말이다. 무능한 황제 부의는 마지막으로 자금성에 거주하면서 많은 유산을 팔아 치우거나 사유물처럼 선사하고 빌려 주어 많은 소실이 있었다. 그에 비하면 장개석은 유물을 지켜낸 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의 왕궁들에 가보면 화려하고 유서 깊은 유물들이 넘친다. 그에 비해 우리의 창덕궁이나 경복궁에서 느끼는 텅 빈 공간의 허전함과 왜소함은 역사의 비애를 새삼 느끼게 한다. 일본으로 미국으로 프랑스로 영국으로 실체도 연유도 찾을 길 없이 뿔뿔이 흩어진 유물들이 우리의 아픈 역사를 말해 준다. 오늘 아침 신문에도 6.25때 미국이 안전을 위해 가져간 도자기 유물 보따리의 실체가 아직도 파악되지 않고 있음을 알리는 기사가 있었다.
몇 시간을 가지고 이곳 대만 국립 고궁박물관을 다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의 용산 국립박물관을 관람하는 시간을 헤아리면 이해가 갈 것이다. 중국의 힘은 역시 역사에서 나오는 것 같다. 아무리 자본의 시대가 중국을 압살해도 우리는 중국을 일컬어 ‘잠자는 호랑이’라고 불렀다. 지금 기지개를 켠 호랑이가 발톱을 세우고 세계를 향하여 야성을 지르고 있다. 그 힘의 일부를 이곳 박물관에서 엿본다.
간석기 유물 몇 가지를 가지고 신석기를 가늠하는 우리 신석기 시대에 비해, 이미 중국은 옥을 갈아 폼 나는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청동기 시대의 수많은 청동유물 역시 반달돌칼이나 청동제 거울 같은 소박한 유물이 아니었다. 사치스런 장식품에서 솥이나 주전자 생활용품까지 매우 다양하고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박물관 입구를 들어서면 손문의 동상이 있다. 이곳에서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장개석이 대만을 세웠으나 대만에서 장개석은 외면당하고 있었다. 그 자리를 손문이 대신하고 있었다.
안내인이 굳이 마이크를 들고 소리 지르지 않아도 단체에 이어폰을 배부하여 가이드의 설명을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장치가 인상적이었다.
장개석 관저
장개석이 대만에서 외면당하는 이유는 이곳에 이주해 와서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 대만 주민을 품지 못하고 저항하는 주민 삼만 명 이상을 학살한 까닭이다. 무력만 믿고 중국에서 공산당을 상대했다가 민심을 잃고 공산당에 패배하여 세계의 미스테리를 만들었던 그였다. 장개석이 이곳 대만에 와서도 깨달은 바가 없었던 듯하다. 힘만으로 원주민을 압살하려 했지만 지금 남은 것은 철저하게 역사에서 외면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신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과 그의 아들은 비교적 호감을 얻은 듯 했다. 송미령은 중국 본토의 갑부의 딸로서 손문선생의 처제이기도 했다. 그녀는 남편이 잃은 인심을 만회하기 위해 대만 개발에 막대한 재산을 헌납했다. 마지막 미국으로 떠날 때 그녀는 빈손으로 감으로써 진심을 보이고자 했다.
자투리 시간을 내어 장개석이 거주하던 관저를 관람했다. 황야자를 비롯 아열대 식물이 우거진 정원을 걸었다. 주인이 거처하던 한때에는 기화요초가 피고 더 아름다웠을 곳이었으리라. 사람들에게 공개되면서 손상이 되기도 했지만 관람료를 받지 않은 곳이어서인지 관리가 소홀하여 방치된 곳이 많았다. 집은 사람이 살아야만 더 단단해지고 가꾸어짐에 틀림이 없다. 송미령은 원주민을 가슴에 담기위해 많은 노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정원 중심에 풀과 이끼로 원주민의 얼굴을 만들어 멀리서도 볼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그 얼굴이 아바타의 나비 족과 어쩜 그리 닮았는지 모른다. 문명의 이름으로 원주민의 삶을 철저하게 파괴하였으나 그들을 다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흔적이라고나 할까?
그들의 정신적인 성소 ‘용산사’에 가다
용산사는 18세기에 건축된 타이베이시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이다. 대만인들의 종교는 유교, 불교, 도교, 이슬람교 기독교가 있는데 이곳 용산사는 불,도교가 융합된 사원이었다. 이곳에 가면 대만인들의 생활 속 정신적인 구심점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중국의 건축물은 대부분 황제국을 상징하는 주황색을 쓰고 있다. 왕궁은 물론 사원이나 관저의 건물들이 황색을 띤다. 용산사는 초저녁에 들렀다. 주황색 기와지붕에 화려한 단청과 용트림 조각이 건물을 웅장하게 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대만인들의 생활 속에서 꼭 필요한 신들을 동시에 모시고 있었다. 옛날 어업을 주로 했던 섬나라인 까닭에 가장 전통적으로 믿어오던 바다 신, 합격과 승진을 비는 신, 미륵신, 다산 신, 남녀 인연을 맺게 해주는 신, 주판을 만들어 상업을 번창하게 해주는 관우신 등 다양한 신 앞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대만인들이 자연스럽게 꽃이나 향, 과자나, 과일, 채소 등의 여러 제물들을 들고 와 고개를 조아리며 기도를 하고 있다. 결코 턱없는 과욕을 부리지 않고 조용히 하루를 감사하게 마감하는 생활인의 자세가 엿보인다.
종교의 참모습을 본 듯하다. 인류의 역사 이래 종교는 인간과 뗄 수가 없는 정신적 기둥이었다. 자신의 생활과 밀접한 곳에서 좀 더 전지전능한 존재를 갈망하며 만들어 낸 정신의 총아다. 생활 속에서 꼭 필요한 것을 갈구하고 희원하며 힘을 얻고 위안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참 종교가 아닐까? 강대국이 주도권을 잡고 세계를 점령하듯, 덩달아 나의 터전이나 역사와 무관한 신이 와서 우리의 정신을 점령하는 세태보다는 훨씬 인간적인 종교를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이 성소에서 기도하는 신도들 앞을 관광객이 무지막지하게 짓밟고 다니고 있다. 이는 사원차원에서 시정했으면 싶다. 성스러운 그들의 신전이 훼손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나의 기우일까?
밤에 열리는 화시지에 야시장
타이베이는 초고층 빌딩 숲이 빼곡한 현대 도시이지만 한편으로 전통적인 삶을 고스란히 간직하여 조화를 이룬 도시이기도 하다. 골목마다 밤이 되면 야시장이 열려 토착민들이 먹고 입고 마시고 즐기는 생활 잡화 공급처가 된다. 특히 야채와 육류, 해조류 등을 지지고, 볶고, 삶은 먹거리들이 풍부하여 현지인과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있다. 알록달록한 열대 과일이 푸짐했는데 덜 익은 사과 맛 나는 것, 물 빠진 수박 맛 나는 것, 모과향이 나는 별모양 과일, 잘 익은 호박 맛 나는 망고 등은 우리 입맛에는 덜 맞아서 색깔이 더 눈에 띤다.
야시장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대부분의 대만인들이 대부분 맞벌이 부부인 까닭에 여자들이 퇴근하여 바로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이곳에서 사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중국처럼 이곳의 여자들도 요리를 거의 하지 않는다. 명절이나 특별한 손님이 오는 날만 요리를 하고 이것도 가족이 좋아하지 않으면 아예 시도를 하지 않는다고 하니 여성들의 어깨에 오십견이 덜 생기지 않을까?
대만 동부의 광산도시 화련 ‘태로각’에 가다
대만은 비와 산과 지진이 많은 나라다. 지진을 절대 만나서는 안 되는 재앙이라 하지 않고, 지각이 숨 쉬는 자연스런 현상이라 믿고 있다. 만약 작은 지진이 잦지 않으면 한꺼번에 크게 터져 오히려 큰 재앙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지진에 대비해서 건물을 튼튼하게 짓고, 그 속에서 입는 피해는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산다.
좁은 나라에 3천미터가 넘는 산이 300개가 넘는다. 우리 민요 ‘신고산이 우르르르 함흥차 떠나는 소리에 -’ 노랫말 속의 신고산이 대만의 고산을 이야기 한다고 한다. 따라서 농업은 1% 정도밖에 안될 정도로 농지가 거의 없다. 비교적 광물자원은 풍부한 편인데 그중에서도 동부의 화련에는 석회석, 대리석, 옥광산이 많다. 화련에 가서 비취나 옥을 구입해도 좋을 듯싶다. 그렇다고 싸게 살 거라는 생각은 금물, 손톱만한 고양이 눈을 한 묘안석이 6 천만 원을 한다니 내가 산 6만원짜리 귀걸이는 장남감 정도 될까?
화련에는 주로 고산족(아미족) 원주민이 산다. 사람들은 매우 긍정적이고 밝고 건강하다. 특히 여성들은 더 생활력이 보이고 힘이 있는 반면 남성들이 어여쁘고 애교가 있어 보인다. 춤추는 내내 앙증맞은 애교와 괴성과 눈웃음으로 나를 반하게 했던 젊은 총각이 지금도 슬며시 생각난다.
화련에는 지진과 태풍이 많아 이주민들이 옮겨와 살 엄두를 못 내기 때문에 원주민만 8 만 명이 산다. 한 달 전 대만에 큰 지진이 났다는 보도를 접하고 대만을 갈 수 있을지 걱정했었다. 그 지역이 바로 화련이고 최고의 관광지 태로각에서 지진이 있었다고 한다.
화련으로 가는 길은 기차로 세 시간 반 거리이다. 아열대 지역인 만큼 햇살이 봄처럼 화사하다. 나뭇잎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가을을 지난 흔적으로 억새가 피어 하늘거리고 추수한 밭에 채소가 다시 자라고 있다. 작고 붉은 꽃들이 언덕빼기에 함초롬하게 피어있다.
작은 산에는 무덤이 곳곳에 마을을 이루고 있다. 우리의 무덤과는 달리 작지만 화사한 주택을 지어 가족묘를 이루는데 공동묘지는 마치 울긋불긋한 마을인 듯하다. 베트남 남부에도 무덤을 작은 집으로 만드는 걸 봤다. 이곳의 무덤 색깔이 더욱 선명하다. 무덤마을 곁에 사람이 사는 마을이 이어지는데 사람이 사는 곳이 더 누추한 느낌이다.
계곡을 타고 끝없이 이어지는 길, 곳곳에 터널이 있는데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 태평양의 망망대해가 갑자기 환하게 얼굴을 드러내어 탄성을 자아낸다. 그러다 다시 이어지는 계곡, 계곡의 바위들은 푸른 이끼를 잔뜩 입고 있다. 물은 맑지 않다. 석회석이 많아 물빛이 뿌옇다.
화련의 최고 관광지는 동양의 그랜드 캐년으로 불리우는 태로각(太魯閣)이다. 주황산 계곡에 19킬로미터의 끝도 없이 펼쳐지는 협곡으로 대만의 가장 인기 있는 명승지 국립 공원이다.
안개서린 산자락에 깎아지른 절벽, 비가 오면 그 절벽이 폭포가 되어 물줄기를 내 뿜는다. 아찔한 계곡을 발아래 두고 아슬아슬하게 자동차로 달리거나, 산책을 하면 발 내딛기가 무섭다. 계곡으로 곧 곤두박질 칠 것 같은 위태로움을 순간 잊게 하는 장엄한 풍광이 다시 앞에 펼쳐진다. 이 협곡을 이룬 산은 주황산이다. 태평양에서 발생한 태풍을 처음으로 맞받는 산인데 이 산이 거대한 태풍의 방향을 중국 본토, 일본, 한반도 어느 곳으로 틀 것인가를 결정한다. 태풍에 끄떡없이 버티기 위해서는 저렇게 탄탄하고 거대한 암벽이 필요하리라, 그 풍상을 거쳐 세계적인 협곡이 만들어졌으리라.
이 위험천만의 협곡사이를 순전히 사람의 힘만으로 동서횡단 도로를 뚫었다. 장개석 주도하에 4년 동안 군인과 죄수와 원주민을 이용하여 삽과 괭이만으로 도로를 만들었는데 이때 죽은이가 212명이었단다. 어떤 반대와 희생에도 불구하고 불도저처럼 토목사업을 밀어붙이는 우리의 대통령이 떠오른다. 경부고속도로를 만들 때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필요했지 않느냐며 토목사업의 명분을 강변하는 걸 보면서 용산 참상이, 대운하의 영상이 겹쳐 떠오른다. 이 참혹스러울 정도의 아름다운 경관에 인간의 필요를 위해 도로를 뚫는 것은 어떤 의미가 될까?
언덕위의 작은 마을 지우펀
타이베이에서 한 시간 거리에 지우펀이란 작은 마을이 있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지륭 항구를 내려다보는 언덕위의 마을이다. 한때 금광석을 채굴하던 광산 마을이었는데 채광사업이 시들해지면서 이곳을 관광지로 바꾸었다. 좁고 비탈진 언덕에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면 1킬로미터 정도의 오밀조밀한 작은 가게들이 나타난다. 한번쯤 집어 먹고 싶은 먹거리를 파는 가게와 인형, 토산품을 파는 가게가 즐비하다. 잔잔한 바다가 환하게 보이는 베란다에 찻상을 놓고, 찻집에서 비싼 차를 한잔 마시는 것도 재미가 있다. 한 사람당 한 주전자씩 꽃이 가득담긴 꽃차가 나왔다. 문인과 화가가 주로 드나드는 찻집이란다. 일본 교토의 어느 골목을 들어선 듯한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뮌헨의 어느 역사 골목을 들어선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 좁은 골목에 신기하게 장난감 같은 작은 차들이 드나들며 물건을 운반하고 있다. 온에어 한국 드라마를 촬영한 곳이라고 우리 관광객을 화사하게 맞는다. 도시의 찌든 매연을 피해 잠시 들러 한숨 돌릴 수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자연이 만든 조각 전시장 ‘야류’ 해상 국립공원
사실 대만의 볼거리는 많지 않은 편이다. 남쪽의 원주민의 거주지까지 가지 않는다면 꽉 채운 2박 3일 정도가 적당하다. 야류는 타이베이에서 한 시간 거리의 북쪽 해안에 위치한다. 수 만년 동안 자연의 힘과 침식에 의해 형성된 선상암의 기이한 바위 형상들이 다채롭다. 칼슘 성분이 많은 머리 부분에 비해 모래성질이 많은 아래 부분의 사암층은 풍화 작용으로 깎여나가면서 각가지 자연 조각을 형성한다. 코끼리 바위, 이집트 네페르타리 왕비의 두상, 주먹바위, 아이스크림 바위, 거북 바위, 생강바위, 미녀바위, 촛대바위, 계란바위 등 파도의 조각 솜씨를 원 없이 만끽할 수 있다. 아쉬운 점은 이 바위들이 십오 년 안에 자연에 의해 마모되고 훼손될 거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인공으로 보존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세계에서 제일 빠른 엘리베이터가 있는 101빌딩의 야경
여행의 마지막에 처음으로 비가 부슬거리며 내린다. 첫날 조금 더웠을 뿐 마지막까지 가을 날씨처럼 쾌청했는데 대만에서 흔하다는 비가 내린다. 기온이 급속도로 내려가 옷깃을 여미게 한다. 그래서 외투 하나씩을 꼭 준비하고 다녀야 한다고 하는 모양이다. 는개비 자욱한 거리를 헤치고 마지막 여정지 101빌딩에 오른다.
101빌딩 엘리베이터는 89층까지 57초 만에 오르는데 세계에서 제일 빠르다고 한다. 30불을 지불하고 오른 곳은 약 3백미터가 넘는 곳이었다. 발 아래로 구름이 자욱했다. 운무가 바람에 쏴악 거치는가 하면 다시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백두산 천지의 보일 듯 말듯 하던 장관을 보는 것 같다. 저 아래로 초고층 빌딩이 즐비하다. 지상에서 볼 때는 비좁은 도시에 1층 상가만 산만해 보였다. 위에서 보니 타이베이는 101빌딩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구획이 정리된 듯한 계획도시임을 알 수 있다. 한글로 설명해주는 이어폰을 끼고 사방을 돌며 도시 전체를 관람하고 나니 날이 어둑해졌다. 곳곳의 건물에 불이 들어오면서 야경이 펼쳐졌다. 탄성을 올리며 야경까지 구경하고 거대한 지진 방지 구형을 본다. 500톤짜리 구형은 지진이 일어나면 건물의 중심을 잡아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해준다고 한다.
3박 4일의 여행은 짧지도 길지도 않고 적당했다. 방학 내내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며 몸을 점검하고 수리하고 보수했는데 여행와서 신기하게 아픈 곳이 다 사라져버렸다. 몸이 고단하면 달게 자고, 배고프면 맛나게 먹고, 아 역시 나는 여행 체질인가?
늘 삐그덕 삐그덕 투닥거리는 우리 부부가 여행 와서 한 번도 싸우질 않았다. 사람들이 우릴 보고 금슬이 좋다나 어쩐다나. 내가 마음 다치지 않으니 남편을 들볶지 않고 들볶지 않으니 깨소금일 밖에. 덕분에 올 한해를 또 눈감지 않고 잘 살아 내야지.
첫댓글 스페인 여행 다녀오고 시차적응이 안돼 낮에는 졸졸 잠이오고 밤에는 눈이 말똥말똥 한 것 있지요
대만에도 볼 것이 많네요 김샘 여행기 참고 삼아 기회가 주어지면 한번 가보아야 되겠네요 저도 여행기를
써서 올려야 되는데 못올리고 있습니다. 틈틈히 정리해서 나중에 올릴 생각입니다.19일로 잡혀있는 답사
차질없이 추진되겠지요 임샘한테 문의전화왔던데...
허걱! 댓글 썼는데 다 날아갔씨요! 흑흑... 마지막 한 줄만 다시 씁니다.
잘 읽었습니다. 사진을 더 올려주시면 더욱 감솨~~~!!!!
알겄습니다.
답사 차질없이 장콩 선생님이 준비하고 있고요. 많은 선생님들이 참여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번 여행은 우리가 경비를 부담해야 하는 까닭에 조금 부담스럽긴 하겠어요. 명절 보너스 조금 아껴두셔요.
이거 원... 모두들 해외여행기만 올라오니 옴메 기죽어서리...그러나, 부러움이 더욱 앞서기만 합니다. 그리고, 남편되시는 이 선생님... 사진 표정이 너무 근엄하시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