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 한율아! 잘 지냈니?
이달 들어 크게 떨어졌던 기온이 조금은 올라가서 날이 그리 많이 차지는 않구나. 축구월드컵대회에서 우리나라가 포르투갈을 꺾고 16강에 진출하는 쾌거가 있던 지난 토요일 새벽에는 첫눈이 내렸지. 브라질과의 8강전이 열렸던 그제 오전에도 눈이 내렸어. 이렇게 내린 눈이 녹으며 오늘과 같은 영하의 아침이면 땅 위의 것들을 모두 꽁꽁 얼려서 제법 겨울다운 모습의 풍경이 만들어지는구나.
겨울이 깊어지고 많이 추워져서 집 안에서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한겨울이 오기 전에 한두 가지 할 일이 있어. 밭에 밑거름을 주거나 과수 따위에 웃거름을 주는 일, 그리고 장작을 패는 일이야. 모두 눈이 오기 전에 하는 것이 하기도 쉽고 시기적으로도 알맞은 일이야. 퇴비를 밑거름이나 웃거름으로 눈이 오기 전에 미리 뿌려주면 눈이 내리고 난 뒤에 그 눈이 서서히 녹으면서 그 거름이 아주 천천히 땅속으로 스며들어. 그리고 새봄이 오면 농작물이나 과수들이 활동을 시작해서 그 거름기를 쉽게 빨아들일 수 있게 된단다. 한편 한겨울이 오기 전에 틈틈이 팬 장작은 일 년쯤 충분히 말려서 내년 겨울에 때면 불도 잘 붙고 화력을 높여 줄 수 있단다.
장작을 패는 일은 겨울철 이맘때쯤 할 수 있는 알맞은 일인 데다가 바깥 활동이 적어지는 시기에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심신 운동이야. 장작 패기만큼 좋은 온몸 운동은 없지 싶어. 도끼질은 팔, 다리, 어깨, 심폐 할 것 없이 몸의 모든 부분을 움직여야만 해.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장작을 패다 보면 어느새 온몸이 훈훈해지고 이내 더워져서 이마에는 땀까지 난단다. 차갑기만 했던 공기는 시원한 친구가 되고 몸도 마음의 느낌도 아주 편안해져. 힘껏 도끼를 휘둘러 내리치면 통나무는 외마디 경쾌한 비명을 지르며 쪼개지지. 도끼의 정타를 맞은 통나무는 나뭇결을 따라 환하게 그 속살을 드러내며 나자빠져. 두 팔로 도끼를 내리치는 한순간 몸과 장작이 맞닿는 느낌, 소리, 모습 따위가 온몸에 전해지면서 할아버지의 몸과 마음속에 남아있던 모든 찌꺼기나 스트레스가 한 방에 날아가 버리는 것만 같아.
장작을 패다가 숨이 찰 정도가 되면 통나무 임시 의자에 앉아 계곡 아래의 산봉우리와 나래실 마을의 모습을 멀리 내다보기도 한단다. 어느해 못지않게 숨 가쁘게 달려온 한 해, 문득 되돌아보니 올해도 농원에서는 많은 일을 한 것 같구나. 풀과 나무를 가꾸며 농원에서 보낸 올 한 해의 이야기는 지난주 편지에서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이런저런 농사에 관한 것도 하나둘 떠오르는구나. 할아버지는 전문적으로 농사를 짓는 전업 농업인은 아니지만, 농사를 짓는 마음 자세만큼은 그 어느 누구보다 더 진지하단다. 농사 방식 또한 주로 자신의 노동력에 의존하는 재래적인 방식을 고수한단다. 또 상업적인 판매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가소비를 위한 다품종 소량의 작물을 소소하게 재배해.
사실 농사라고 하면 모든 인류와 우리의 조상들이 아주 까마득한 옛날부터 해오던 삶의 수단이자 생활의 방식이었어. 과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촌에서 살았고, 농사를 지어서 생계를 이어 나왔어. 그래서 예로부터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해서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으뜸”이라고 여겼지. 또 농부는 농사를 짓는 농업인이기 이전에 자연에 순응해서 성실하고 슬기로운 삶을 살아가는 현자(賢者)의 대접을 받았어. 농사(農事), 농부(農夫)와 같은 한자어에서 ‘農’자는 노래 곡(曲) 자와 별 진(辰) 자가 합쳐진 말로 “별을 노래하는 일”과도 같은 예술적인 일이 농사요, 자연과 하나가 되는 예술가와도 같은 사람이 농부라는 뜻을 담고 있어. 할아버지는 돈벌이로 농사를 짓기보다는 자연과 함께 별을 노래하는 것과 같은 농사와 농부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농사를 지으려고 노력하고 있어.
그래서 할아버지가 짓는 농사는 그 규모가 적고 채소를 중심으로 여러 종류의 아주 다양한 작물을 심어서 가꿔. 나물과 과수 종류까지 말한다면 아마도 약 70종에 이를 듯해. 상추, 비트, 겨자채, 콜라비, 치커리, 아스파라거스, 개성배추, 무, 배추, 하루나(유채), 열무, 총각무, 갓, 쑥갓, 시금치, 아욱, 토마토, 방울토마토, 당근, 파, 마늘, 쪽파, 부추, 고추, 오이고추, 피망, 파프리카, 맷돌 호박, 단호박, 애호박, 가지, 오이, 감자, 홍감자, 고구마, 옥수수, 콩, 팥, 들깨... 올봄부터 비닐하우스 안에서 가꾸기 시작한 로즈메리, 바질, 애플민트, 페퍼민트, 캐모마일, 라벤더 따위의 허브. 씀바귀, 고들빼기, 참취, 곰취, 참나물, 곤드레, 부지깽이나물(섬쑥부쟁이), 눈개승마, 당귀, 산마늘, 도라지 따위의 나물과 뿌리채소. 블루베리, 아로니아, 대석 자두, 포모사 자두, 매실, 살구, 체리, 복숭아, 알프스오토메 사과, 꽃사과, 아그배, 왕보리수, 모과, 오디, 오가피, 표고, 느타리, 은행, 산수유 등등. 생각나는 것들만 해도 70여 가지가 되는구나. 이것들은 모두 올해 할아버지가 농원에서 하나하나 가꾼 것들이야. 과수나 여러해살이 나물과 같은 것들은 한번 심어두면 여러 해 반복해서 수확할 수 있는 것들이 적지 않지만 해마다 씨앗을 뿌리거나 모종을 심어 가꾸는 것들이 40종이 넘어. 같은 종류의 작물이라고 하더라도 품종이 다른 것을 함께 심기도 하고 같은 것들을 두세 차례씩 연이어 가꾸는 것을 고려한다면 새로 심어서 가꾸는 것들은 50가지가 넘는다고 할 수 있어.
해마다 거의 같은 종류의 것들을 심어서 가꾸지만 그해 그해 조금씩은 다르기도 해. 올해는 봄 채소와 국거리로 쓰는 하루나 배추(유채)라는 것을 이른 봄에 씨앗을 뿌려서 처음으로 가꿔보았어. 늦가을에 씨앗을 뿌리면 그 이듬해 봄에 일찍 거둘 수 있다고 해서 올 늦가을 그 씨앗을 뿌리기도 했어. 올해 새롭게 가꾸기 시작한 것은 산마늘(명이나물)이야. 3년생 산마늘 뿌리를 사다 심어서 산비탈에 산마늘 밭 하나를 만들었어. 여러 해가 지나야 수확을 할 수 있다고 하는 데 인내심을 가지고 가꿔나갈 참이야. 꽃 가꾸기를 말하면서 나물로도 사랑받는 섬쑥부쟁이(부지깽이나물)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만, 올해 그 나물 밭의 면적을 제법 늘렸어. 내년부터는 몇몇 사람들과는 그 나물을 나누어 먹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그리고 올해는 들깨의 재배 면적을 좀 늘려서 그 수확량도 제법 늘어났단다. 한 가마가 넘는 수량의 수확을 했어.
하지만 뜻과는 달리 성공적인 재배에 실패하기도 했어. 공들여 감자를 심었지만 너무나 과한 정성을 쏟은 까닭인지 감자 농사를 모두 망쳐버리고 말았어. 워낙 날씨가 많이 가무는지라 감자를 심고 물을 듬뿍 주었더니 쪼개서 심은 감자가 썩어서 대부분 싹이 나지 않았단다. 홍감자의 경우에는 작은 씨감자를 통째로 심었던 덕분인지 별 탈이 없었는데 말이야. 한편 옥수수를 무척이나 실하게 가꿨지만, 수확 직전에 모두 멧돼지의 먹잇감이 되고 말았지. 올핸 고라니 따위의 피해 예방을 위해서 작물 보호 그물망을 이중으로 보강하기도 했지만, 멧돼지의 공격을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어. 지난해 고라니의 먹잇감이 되고 말았던 김장 배추와 무를 올해는 피해를 보지 않고 무난하게 수확을 할 수 있었어.
올 농사에서는 버섯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구나. 지지난해 겨울 참나무와 뽕나무를 잘라서 버섯 목을 만들고 지난해 이른 봄에는 표고와 느타리버섯의 종균을 넣어서 약 1년간 쌓아두었어. 그리고 올봄에 그 버섯 목을 ‘ㅅ’자로 반그늘에 세워서 한여름을 나게 했지. 한가을로 접어들면서 날씨가 선선해지자 버섯 목에서 표고와 느타리버섯이 솟아나기 시작했어. 버섯 목에 구멍을 뚫어서 집어넣은 종균이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버섯으로 피어났어. 손수 길러낸 버섯으로 버섯전골, 표고탕수와 같은 요리를 만들어 먹기도 헸지. 다래나 돌배와 같은 열매들을 산에서 얻기도 하지만 처음으로 숲의 도움으로 거둔 임산물을 맛난 먹거리로 즐길 수 있었어. 두세 해 동안은 계속해서 봄과 가을로 버섯을 수확할 수 있다고 하니 자연이 주는 귀한 선물을 기쁘게 받으려고 해.
마지막으로 지난 11월 초『자연의철학자들』이라는 텔레비전 다큐 프로그램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산촌 생활이 소개된 일을 잊을 수가 없구나. 한비와 한율이도「나래실에선 늙지 않는다」는 타이틀로 방영된 이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지만, 우리 가족의 산촌 시골살이 모습과 이야기가 화면을 통해 전국에 방송된 것은 참으로 특별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어. 평생의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는 하나의 특별한 작품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지. 둥이들이 다 자란 뒤에 그 영상을 보게 된다면 아마도 노년기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삶이 어땠는지를 어느 정도 알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해.
그 프로그램에서 사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어떤 시각에서 또 어떤 방식으로 자연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어. 자연이 품고 있는 생명의 신비로운 숨결을 느끼고, 진지한 삶과 숭고한 사랑의 자연 모습을 배우고, 자연 속 각자의 것들이 지니는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또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풀과 나무, 농작물 등을 몸소 돌보고 가꾸는 즐거움 따위를 이야기하고 싶었어. 하지만 TV 속의 영상은 정원을 가꾸고 농사를 짓는 돌봄과 가꿈의 모습 중심으로 산촌 생활의 낭만과 그 실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초점이 맞춰졌어. 이렇듯 그 내용 면에서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지만, 그것은 초가을부터 한가을까지 농원의 그윽한 정취와 아름다운 풍경을 뛰어난 영상미의 화면으로 많이 담아냈어.
이렇듯 올해는 여러 면에서 특별한 한 해가 아니었나 싶어. 초여름까지의 긴 가뭄이 이어졌지만,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올 한 해 계획했던 농사를 그런대로 잘 지을 수 있었고. 더욱이 올해는 그간 20여 년 동안의 주말 시골살이를 되돌아보고 70이라는 할아버지의 나이에 앞으로 10년, 더 나아가서 20년쯤의 미래를 새 마음으로 내다보는 뜻깊은 한 해였던 것도 같아. 이제 올 한 해도 거의 다 저물었으니 서서히 2023년 새해의 농사 준비를 시작해야겠구나. 잘 지내려무나. (2022.12.8.)
첫댓글 우선 그많은 70여가지 씨앗을 구분하기도 쉽지않겠네요! 장작을 미리 패서 일년후에 사용한다는 것도 처음으로 알고갑니다. 버섯까지 재배한다니 TV에 나오는 자연인을 보는듯 합니다. 하긴 자연철학자지요! 건강하게 따뜻한 한 겨울을 잘 보내세요 ~
나래실에서 삶은 늙지않은다에 공감
합니다. 우리나이에 즐겁게 하는일이
있으면 장수ᆞ건강의 비결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내내 건승하시길
귀촌생활에서 장작패기는 겨울철 좋은 운동이지요. 그런데 항상 귀촌생활 활동에는 조심해도 위험이 따르지요. 굵은 통나무는 쐐기를 박아서 쪼개는 것이 안전하더군요. 그리고 70고개를 넘으면서 힘이 많이 딸리는 것 같아 내년에는 조금 경작지를 줄이고 힘이 덜드는 작물을 재배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지요. 흰머리 소년이라 내가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놀명놀명하면서 노동보다는 즐기는 시간을많이 가지자고 나자신에게도 다짐해 봅니다. 그럼 힐링과 건강과 성찰이 함께 하는 동안거 기간이 되시기를
유년시절에 보았던 우리 할아버지(50세만 넘으면 할아버지였던...) 대부분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인생의 황혼기에서 무기력하게 자신의 건강도 잘 유지하지 못한 채 그럭저럭 세월을 보냈는데, 지금 우리 세대는 그렇지 않으니 세상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가를 실감합니다. 겉으로 보면 영낙없는 시골 농사꾼이지만, 내면에서는 인문학적 자연철학자로서의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순우의 삶이 너무 감명 깊습니다. 자기만의 독특한 삶을 뚜벅뚜벅 개척해나가는 도전정신에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