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문( 序 )
竹山安氏派譜序
竊觀國中士夫家,莫不有譜牒。此程夫子所謂 「使人不忘本,須是明譜牒,收世族之義」也。惟我竹山安氏,亦一國中士夫也,宐有譜牒,而余早居委巷,尙未之見焉。嘗聞宗丈故參判縝氏家有譜,未知何代所成,而以我始祖尙書左僕射上將軍諱令儀公祔於別錄云。蓋我安氏有三派,未知同郡而異系歟,抑同源流遠莫詳其所自分耶。三派中,一派則以 門下贊成延興府院君襄良公諱漢平為始祖,此乃參判縝氏之派也。一則以竹城君諱元衡諡文惠公後裔致宅之言,則 文惠公為其十四代祖。而麗朝以順興移封竹城君,故因以竹山為姓貫,雖為子孫,而莫得其詳。云然則文惠公派,知是同郡異系;至於襄良公,則與僕射公,無乃源同流遠,而莫詳其所自分也。益大當以此為訝矣。間就裏良公後裔允吉氏,叩其系出。分心砥行,以不墜祖考之心,則此為親親之大者。請言於作者,亦第二義也。言有以此為序。
歲甲(1848)申六月下浣 幸州奇正鎭 謹書 |
가만히 살펴보니 나라 안의 사대부 집안 가운데 족보가 없는 집이 없다. 이는 정자(程夫子)가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이 자기 뿌리를 잊지 않게 하려면, 족보를 분명히 하고 가문의 계통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말과 같다. 우리 죽산 안씨 또한 한 나라의 사대부 가문이니 마땅히 족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어려서부터 시골에서 살아 아직 그것을 보지 못하였다. 들리는 말에 종친 어른 고(故) 참판 안진(安縝, 1617~1685)씨 집안에 족보가 있었다고 하고 어느 때 만들어 진 것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우리 시조인 상서좌복야 상장군 휘 영의공(안영의;安令儀)이 별록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대개 우리 안씨는 세 갈래로 나뉘어 있다. 같은 고을이지만 계통이 다른 것[同郡而異系]인지, 아니면 근원이 같지만[同源流] 세월이 오래되어 갈라진 내력을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세 파 가운데 한 파는 문하찬성사 연흥부원군 양량공 안한평(安漢平)을 시조로 삼는데, 이는 참판 안진(安縝) 씨의 파이다. 또 하나는 죽성군 안원형(安元衡; 시호 문혜공)의 후예로 안치택(安致宅, 1702~1777)의 말에 의하면, 문혜공은 그의 14대조인데, 고려 때 순흥에서 죽성군으로 이봉되어 그로 인해 본관을 죽산으로 삼았다고 하나, 자손이면서도 그 자세한 내력은 알지 못하였다. 이로 보건대 문혜공의 파는 같은 고을이되 계통은 다른 듯[同郡異系]하다. 그러나 양양공(襄良公;안한평)은 복야공(僕射公;안영의)과 혹 근원은 같고 흐름이 멀어진 것[源同流遠]이 아닌지, 어디서 갈라졌는지 알 수 없어 더욱 의문이 된다. 이에 그 연원을 밝히고자 양양공의 후손 안윤길(安允吉, 1691~1751; 참판 安縝의 손자) 씨를 찾아가 그 계통의 연원을 물었다. 안윤길은 이에 말하기를, “마음을 나누어 가계를 바로 세우고 행실을 굳게 닦아 조상과 선대의 뜻을 떨어뜨리지 않는다면, 이는 곧 친족을 돈독히 하는 가장 큰 도리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저자에게 부탁해 말하게 한 것도 또 하나의 뜻이다. 그래서 이 말을 서문으로 삼는다.
갑신년 유월 하순에 행주 기정진 근서 |
2. 발문(跋)
跋
譜者,氏族之史也。忠孝節義、文章德行、科官踐歷、生甲卒年、居地墓所、婚姻,皆所以修也。噫,吾先華人也。龍西李公諱瑗,東渡之日,有子三公,以靖亂之功受姓安氏。對貫竹山、廣州竹城,而竹山新舊之別,詳悉譜序中,不必架疊而入居。東國以來,近今千有餘載,子姓蕃衍,或出而為忠君報國之良臣,或處而為力學篤行之名士,輩出相望,蟬赫當世,斯豈非祖宗種德之邁而餘慶之遺耶。今派譜之修,以起世譜之詳,世有八年,則譜牒不同敍也。而況天地晦塞,倫紀幾滅之際,修族之道,尤不可不講也。是故安文惠公之後孫,與東彥來會,與泉玉也。噫呼!諸公勿以今日之派譜為備,而究明乎理,二分殊,以綱達務,次敍前。今日之修安氏譜者,將不復於來者,不幸乎?蓋其世標源流,為譜之存延詳,若義不復斷云。
上章(庚)敦牂(午)復之下澣外裔蔚州金魯洙謹跋 |
족보란 한 집안의 역사입니다. 충효와 절의, 학문과 덕행, 관직 경력, 생몰 연도, 거주지와 묘소, 혼인 관계 등을 기록하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우리 선조는 본래 중국에서 왔다고 전하며, 농서 이공(휘 원)이 동쪽으로 건너와 세 아들을 두었고, 난을 평정한 공으로 안씨 성을 받았다고 합니다. 본관은 죽산과 광주 죽성이며, 죽산의 신·구 구분에 대해서는 이미 서문에서 밝혔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적지 않습니다. 우리 가문은 천여 년 동안 자손이 번성하여, 어떤 이는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고, 어떤 이는 학문과 덕행을 갖춘 인물이 되어 대대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이는 조상들이 덕을 쌓은 덕분이라 할 것입니다. 이번에 파보를 다시 만드는 것은 가문의 계통을 더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세월이 오래되면 기록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더욱 바로잡아야 합니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가문을 정리하는 일은 더욱 중요합니다. 후손들이 뜻을 모아 족보를 정리하였으니, 이를 완성으로 여기지 말고 앞으로도 이치를 따져 바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이번 편찬이 잘 이루어져 후대에 다시 고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족보는 가문의 근원을 밝히고 이어 가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오년(1930) 동짓달 하순에 외예(外裔, 외척후손) 울주 김노수(金魯洙)가 삼가 발문을 짓는다' |
본문에 언급된 양양공파(襄良公派)는 안준(安濬) : 소부소감 - 안시무(安時茂) - 안세윤(安世允) - 안자유(安自裕) - 안한평(安漢平) : 양양공(襄良公) - 안사경(安社卿) : 희정공(僖靖公) - 안극인(安克仁) : 문정공(文貞公) - 안숙로(安叔老) - 안망지(安望之) - 안맹담(安孟聃) : 연창위(延昌尉) - 안상계(安桑鷄) - 안방형(安邦炯) - 안종탄(安從坦) - 안언추(安彦錘) - 안경렴(安景濂) - 안대남(安大楠) - 안정섭(安廷燮) - 안진(安縝, 1617∼1685) - 3남 안상영(安相英) - 4남 안윤길(安允吉)로 이어지는 계통이다.
서문의 내용으로 짐작해 보면, 전남 함평 나산에 살았던 죽산안씨(신) 무은재 안치택(安致宅, 1702∼1777)의 설명을 들었던 죽산안씨(구) 복야공파 인물은 전라북도 고창에 살았던 황국재(篁菊齋) 안건(安建) 집안을 통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본문에서 문혜공파(文惠公派, 죽산안씨 신파)는 순흥에서 죽산으로 이봉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안치택(安致宅)의 19대조가 죽성군이라 했는데, 이것은 잘못된 기록으로 14대조가 된다.
| 안원형安元衡죽성군 | 안면安勉 | 안노생安魯生 | 안복초安復初 | 안맹손安孟孫 | 안순정安順貞 | 안린安鱗 | 안충달安忠達 | 안사면安士勔 | 안신후安信厚 | 안희적安希勣 | 안국상安國相 | 안여기安汝器 | 안만우安晩遇 | 안치택安致宅 |
맨 마지막 페이지에 '신미년(1931) 4월'이라는 기록으로 봐서 그 때 간행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기정진의 노사집에 기록된 죽산안씨족보의 서문은 많이 다른 것이 올려져 있어 구죽산안씨 다른 족보의 서문인가도 싶다.
참고 : 1902년 간행된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문집 《노사집(蘆沙集)》』에 실린 <죽산안씨족보서(竹山安氏族譜序)>... 안붕수(安鵬壽)과 안광협(安光協)이 청해서 노사 기정진이 짓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竹山安氏族譜序 a_310_396c
正鎭與安斯文鵬壽曁光協甫。後先相識。一日以其新印竹山安氏族譜一袠。踵門屬正鎭曰。吾安之以竹山爲貫者兩家。其一受封於錫姓之初。卽吾所本也。今日之譜是也。其一自順興中世移封。雖與吾未嘗不是同根。而枝柯則迥別矣。此吾譜之所當先講也。抑吾安自受姓之後。歷麗迄我。名德嗣興。簪組嬋嫣。有可以焜燿國乘。庇蔭來許者。無容雲仍瑣瑣致力於其間。第念中世以降。位不稱德。至行潛德。往往沈堙於後世。子孫爲是之懼。惟吾子圖惠之。正鎭作而對曰。不亦善夫。子之爲譜也。今之爲譜者莫不曰收宗族。曰明派系。亦有知收宗族。在於明派系者乎。族之有譜舊矣。文獻常患其不足。殽訛或參於其間。以殽訛之派系。猶曰吾將以收宗族。决知其無是理。一斑之窺。可以知全豹。一臠之味。可以推全鼎。子之致謹於派系若此。吾知此譜之必可以收宗族也。至若孝思不匱。願揚祖先之幽光。夫孰敢瑕疵。但立言以不朽人。世自有任之者。非正鎭所敢。抑又聞之。言有枝葉。不若行有枝葉。苟使安氏各自勉勵。秉心砥行。以不墜祖考之心。則此爲顯親之大者。請言於作者。亦第二義也。請姑以此爲序。 |
| 나는 안씨 집안 안붕수(安鵬壽), 안광협(安光協) 씨와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어느 날 그가 새로 인쇄한 《죽산안씨족보》 한 질을 들고 찾아와 나에게 부탁하며 말했다. “우리 안씨 가운데 본관이 죽산인 집안은 두 계통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을 처음 하사받을 때 봉해진 집안으로, 곧 우리가 뿌리로 삼는 가문이며 오늘 간행한 이 족보가 바로 그 계통입니다. 또 하나는 순흥에서 중세에 옮겨와 봉해진 집안으로, 근원은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계통은 크게 갈라졌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 족보에서 가장 먼저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또 우리 안씨는 성을 받은 뒤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인물들이 계속 나와 명성과 덕망을 드러냈습니다. 벼슬과 공적이 역사에 기록될 만하고, 그 음덕이 후손에게까지 미칠 만한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손 된 우리가 작은 공적을 굳이 덧붙이려 애쓸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중세 이후에는 덕에 비해 지위가 낮았던 분들도 있었고, 큰 행실과 숨어 있는 덕이 후세에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후손들이 이를 염려하니, 부디 선생께서 잘 살펴 바로잡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에 내가 답하였다. “참으로 뜻깊은 일입니다. 족보를 만드는 취지가 그러하다면 매우 바람직합니다. 요즘 족보를 만드는 사람들은 모두 ‘종족을 모은다’, ‘파계를 밝힌다’고 말하지만, 종족을 바로 세우는 길이 정확한 계통을 밝히는 데 있다는 사실을 과연 얼마나 알고 있겠습니까? 족보가 있는 전통은 오래되었지만, 문헌은 늘 부족하기 마련이고 잘못 전해지거나 섞인 내용도 적지 않습니다. 계통이 혼란스러운데도 종족을 모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작은 부분만 보아도 전체를 짐작할 수 있고, 한 조각 맛을 보면 솥 전체의 맛을 알 수 있습니다. 그대가 이처럼 계통을 엄밀히 밝히는 데 힘썼으니, 나는 이 족보가 반드시 종족을 바로 세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또 조상을 향한 효성과 그 공덕을 드러내고자 하는 뜻은 누가 감히 흠잡겠습니까. 다만 글로써 사람을 불후에 남기는 일은 본래 그것을 맡을 사람이 따로 있는 법이지, 내가 감히 할 바는 아닙니다. 또 들으니, 말에 가지를 붙이는 것보다 행동에 가지를 붙이는 것이 더 낫다고 합니다. 만약 안씨 각자가 스스로 힘써 마음을 굳게 지키고 행실을 닦아 조상의 뜻을 떨어뜨리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조상을 드러내는 가장 큰 길일 것입니다. 이 뜻을 편찬한 이에게 전해 주십시오. 이것이 두 번째 의미입니다. 우선 이 말을 서문으로 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