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연군 묘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 이구의 묘소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기리에 있으며, 충남도 기념물 제80호다. 인근에는 추사 김정희의 고택이 있다. 남연군 묘는 해발 600여m의가야산 석문봉에 있다. 이 봉우리 좌우로는 옥양봉과 가야봉으로 청룡과 백호의 봉우리들이 옥좌의 병풍이다. 솟은 봉우리에서 좌우의 굴곡 기세가 길게 이어져 내려온다. 남연군 묘로 가는 입구에는 저수지가 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완벽한 위치의 묘소다.
남연군은 1822년 순조 22년에 죽었다. 흥선대원군이 남연군의 묘를 이곳에 이장한 것에 대하여 전해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헌종 1849년에 안성 청룡산에 있는 부친 남연군의 묘소에 성묘 가는데, 길가에 한 스님이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흥선이 가까이 가서 보니 남다른 스님 같아서 데리고 점사에 가 밥을 함께 먹고, 얘기를 해 보니 풍수지리에 밝았다. 이에 흥선이 부친 묘를 이장해야 하겠다고 말하니, 이튿날 스님은 같이 가서 남연군 묘소를 보고 좋지 않다고 말하고, 한 곳에 왕이 날 자리가 있다면서 덕산 가야동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절 법당 뒤의 지점을 지시하고는, 이장할 날짜를 정하고 약속했다. 약속한 날 흥선이 관을 운반해 가니, 스님은 절 법당에 불을 질러 태우고, 타지 않는 구리 부처만 쇠망치로 부숴 골짜기에 묻었다. 그리고 지정한 자리에 묘를 썼다. 이때 가야동에 오래 살고 있던 윤식이 와서 ‘왕기(王氣)’가 있다는 이 산에 묘를 쓸 수 있느냐고 항의하니, 스님은 남연군 역시 왕자왕손이니 상관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렇게 해 1852년에 고종이 태어났고, 1863년에 왕위에 오르니, 흥선이 대원군이 되었다. 이후로 그 스님과 매우 가까워졌으며, 1865년 그 묘를 다시 크게 만들고 각종 석물을 해 세웠다. 그리고 근처에 새로 보덕사를 지어 사치스럽게 시설을 꾸몄다. 이렇게 되니 오래 살았던 윤식은 세력에 밀려 그 곳을 떠났다. 이 스님의 이름이 정만인이라고 하며, 왜승과 양승이라는 말이 있다. 이때 흥선이 그 스님에게 소원을 말하라 했는데, 스님은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을 인판해 출간하게 해달라고 했다. 곧 흥선이 명령을 내려 팔만대장경을 인판하는데, 경판을 모두 쌓아놓았던 판각에서 끌어내 먹을 묻혀 인쇄하게 되니, 결국 경판 쌓았던 건물이 비게 되었다. 이때 스님은 가운데 건물이 비었을 때 그 안에 들어가서, 땅바닥을 파고 애초에 그 속에 묻어 두었던 보물인 ‘해인(海印)’을 꺼내 홈쳐 달아났다. 이 스님이 본래 해인사의 보물인 ‘해인’을 홈치려고 했는데, 경판들이 가득 쌓여 있어 바닥을 팔수가 없어서, 흥선을 대원군이 되게 해 경판 인쇄를 핑계로 다 들어내게 하고, 들어가 땅 속의 ‘해인’을 홈치려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 ‘해인’은 그것을 가지면 신통조화의 재능을 부릴 수 있는 보배인데, 해인사에 언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고, 경판은 신라 지장왕 때 바다를 건너 들어왔다고 한다. 전설에는 ‘해인’이 묻혀 있었을 때에는 판각 건물에 새가 배설물로 더럽히는 일도 없었고, 거미가 줄을 치지도 않았으나, ‘해인’을 훔쳐간 후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가야산은 호중(湖中) 명산인데 흥선이 천장(遷葬)할 때와 고종이 탄생할 때, 그리고 고종이 등극할 때 울음소리가 났다고 한다. 1868년의 사건 전에도 울었다고 하는데, 이 해 4월 서양 도적들이 배를 타고 구만포로 들어와 이 무덤을 도굴해 갔다. 도굴 당한 후 다시 무덤을 만들 때 관이 어디로 가고 없었는데, 일하는 사람들이 그냥 봉분을 만들어 아무 일 없는 것으로 보고했다. 이렇게 도굴 사고가 있는 것은 혹시 앞서 구리 부처를 부숴 버린 일에 의한 재화가 아닌지 알 수 없다. 우리나라 근대사에 한 획을 그은 오페르트 도굴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다. 독일인 상인이었던 오페르트는 1866년 두 차례의 통상교섭에 실패하자 당시 실권자였던 대원군을 압박하기 위하여 1868년에 도굴을 감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신과 부장품들을 협박용으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도굴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더욱 강화된 계기가 됐다.
남연군 묘 아래에는 상여가 있다.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광천리 남은들마을에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는 상여다. 중요 민속자료 제31호다. 이 상여를 보존해 오고 있는 마을의 이름을 따서 남은들상여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상여는 조선 고종의 할아버지이며,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의 묘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가동으로 옮길 때 쓰여졌던 것이다. 묘역까지는 버스 주차장에서 한참을 걸어서 올라갔다. 남연군의 묘는 높은 곳에 있어서 산과 들 풍경이 장관이었다. 하산하여 본 상여는 어릴 적 고향 장례식에서 보았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진품은 다른 곳에 잘 보관해두었고, 이곳의 상여는 모조품이다. 다시 걸어 내려오며 상큼한 시골의 향기에 젖었다. 이것으로 서초문인협회의 상반기 역사문화 답사는 마무리 되고 서둘러 상경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차안에서 게임과 노래로 문우의 정을 나누었다. 헤어지는 아쉬움에 양재역에서 우거지 탕으로 다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늦은 시간에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조금은 피곤하지만 뜻깊은 문학 나들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