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2일 직암선교후원회 제10차 해외선교 몽골 쇼보 방문단은 사전 모임을 가지며 남산 안중근 기념관을 관람하였습니다.
안중근(토마스)의사께 묵념을 하고 기도를 올린 후 단체사진을 찍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왼손 약지 손가락 한마디가 없습니다. 안 의사는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손가락을 자른 후 태극기에 피로 대한독립 네 글자를 썼습니다. 뒤에 있는 태극기가 바로 그 혈서 입니다.
안 의사는 여순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고향에서 보내온 우리나라 수의를 입고 다음날 형장으로 가셨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삔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 회복을 위하여 힘쓸 것이다."
두 동생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안 의사의 무덤은 아직도 찾지 못한 상태입니다. 일제는 안 의사의 무덤이 밝혀져 그 곳이 독립운동의 성지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진은 안 의사의 마지막 면회 사진입니다. 어린시절 '토마스'라고 세례명을 지어주신 빌렘신부님과 두 동생 정근 공근에게 유언을 하고 있는 사진입니다.
"대한독립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천국에서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의사는 기도를 마친 후 순국하셨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가계도 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한사람도 빠짐없이 천주교 신자이십니다.
이 그림은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린 안 의사의 황해도 해주에 위치한 집입니다. 산 아래 대갓집이 안 의사의 집이고 집 바로 위에 청계동 성당이 있습니다.
청계동 성당은 한옥성당 입니다. 청계동 본당 신자들 사진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옥중에서 자신의 삶을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 기록하시고, 동양대세와 평화정책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셨습니다.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론을 유지하기 위하여
삼 년 동안 해외에서 풍찬노숙을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도달치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어머님 전상서
찬미 예수님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 저녁 문안 인사 못다한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불초한 자식을 너무나 염려해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니다~~
아들 도마 올림
분도 엄마에게 부치는 글
찬미 예수님
천주의 안배로 배필이 되고 다시 주님의 명으로 이제 헤어지게 되었으나
또 머지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 영복의 땅에서 영원에 모이려 하오.~~
장부 도마 올림
홍신부님 전상서
찬미 예수님
자애로우신 나의 신부님이시여
저를 잊지마시기를 바라오며
저 또한 결코 잊지않겠습니다.~~
죄인 안 도마 올림
봄날 남산에서
안중근 의사를 만나고
그 분의 하느님도 만났습니다.
모두들 벅찬 마음을 안고
남산을 내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