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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상 글 >
다시 대림절에...
글 : 이 클라우디아(해인) 수녀
<성 베네딕도 수녀회>
때가 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밝고 둥근 해님처럼
당신은 그렇게 오시렵니까?
기다림 밖엔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이들의 마음에
당신은 조용히 사랑의 태양으로 뜨시렵니까?
기다릴 줄 몰라 기쁨을 잃어 버렸던 우리의 어리석음을 뉘우치며
이제 우리는 기다림의 은혜를 새롭게 고마워합니다.
기다림은
곧 기도의 시작임을 다시 배웁니다...
마음이 답답한 이들에겐 문이 되어 주시고,
목마른 이들에겐 구원의 샘이 되시는 주님...
절망하는 이들에겐 희망으로,
슬퍼하는 이들에겐 기쁨으로 오십시오...
어서 오십시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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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영적지도신부 훈화 >
대림의 길목에서...
윤 클레멘트 (양호) 신부님
<전주교구 소속 지도 신부>
어느덧 한해의 달력은 오직 이제는 남은 한 장을 남기고, 계절의 낙엽은 땅으로 흩어집니다.
우리는 이 은혜의 때에 대림의 촛불을 켜고 오시는 주님을 맞으려 나아갑니다.
“늘 준비하고 깨어 있으라... ”
말씀의 울림이 들리고,
“구원의 날이 다가왔으니, 잠에서 깨어나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 ”’
사도 바오로의 편지가 낭독됩니다.
꿈결처럼 지나가는 우리네 세상에서 강물인 듯 흘러가는 세월의 길목에서 우리는 살아가는 날들 동안, 우리는 삶의 길을 가는 동안 깨어 있고, 준비해야 함을 생각합니다.
잠에서 일어나서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함을 바라봅니다.
영혼에는 기도의 손을 모으며,
머리에는 구원의 모자를 쓰고,
가슴에는 용서와 사랑의 마음을 열며,
마음에는 진리와 빛의 불을 밝히고,
손과 발은 봉사와 친절로 미소를 띄면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해야 함을 생각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언제 올지 모르고, 그날, 그 시각은 언제일지 모르니,
늘 준비하고 깨어있음으로 다시 새롭게 우리의 옷깃을 여미는 때,
이제는 우리 대림의 마음 문을 열고서,
대림의 촛불을 밝혀 들고
오시는 주님을 맞으러 나갑니다.
사랑하고 사랑해도 부족할 인생의 세월,
진리의 말씀만 나누어도 모자랄 삶의 날들,
우리는 아는 듯, 모르는 듯 상처와 아픔, 고통과 슬픔으로
어느 사이 마음의 문들은 빗장을 걸고 닫히고 잠긴 채 아파해 왔음을...
이제, 다시 일어나 대림의 촛불을 켜고 하느님의 빛으로 새롭게 화해와 용서의 불을 지피고 기도해야 하리...
마음속에 만들어진 분노와 미움의 칼은 용서와 사랑의 보습을 만들고,
가슴속에 쌓여진 상처와 아픔의 창은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의 빛으로 화해와 평화의 낫을 만들어야 하리...
마라나 타! 오 주님, 어서 오십시오.
어서 오시어, 우리와 나의 어둠에
대림초에 불처럼 타는 당신 사랑의 불을
불 지피게 하여 주십시오.
마라나 타! 오, 주님!
어서 오시어 우리와 제 안의 상처와 아픔을 낫게 하시고,
이제는 오로지 당신의 빛으로 거듭 나는 대림절의 새 마음, 새 영혼이게 하여 주십시오.
지금은 당신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계절.
지금은 당신이 내안에 새롭게 태어나심을 준비하며 깨어 기다리는 계절.
우리 안에, 제 안에 당신이 태어나실 영혼의 구유를 준비하고 마련하는 은혜의 때인 것을...
이 사랑의 계절, 이 은총의 절기에 우리 모두가, 제 영혼이
오로지 당신으로 온 몸, 온 삶, 온 영혼이 새롭게 옷 입는 계절이 되게 하소서.
오소서, 주 예수님 ! 어서 오십시오...
- 신부님의 '영성의 물가‘ 中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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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 1주일
2019. 12. 1
마태오 24, 37~44
♠ 복음 공부 : 깨어 있어라...!
* 37~39절 : 노아의 홍수 사건과(창세6-8장) 사람의 아들의 재림 사건은(다니7.13-14) 예기치 못한 순간에 닥쳐온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홍수로 심판받았을 만큼 악하게 행동했다는 평가보다 (창세6.9~7.24 : 1베드3.20-21), 일상생활에 젖어 살다가 갑자기 종말이 닥쳤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한편 심판과 구원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들일을 하거나 맷돌질을 하는 두 사람을 제시하는데, 들에 있는 사람은 믿는 이들과 믿지 않은 사람을 나타내고, 맷돌질하는 두 사람은 선행을 행하는 믿는 무리이며, 헛되이 맷돌만을 돌리는 무리를 나타낸다고 한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둘 중 한명을 데려가는 주체는 사람의 아들이 보낸 천사들이다(24,31).
* 40~44절 : “깨어 있어라”는 복음서 전후로 보아 기도만이 아닌, 윤리적으로 바른 삶을 살고(5.3~7.27), 식솔들을 책임감 있게 관리하며(24,45~51), 자신의 재능을 잘 활용하는(25,15~23)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이들을 사랑하는 삶을 즐긴다(25,31~42). 또한 매일의 생활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에 동참하여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 안으며, 복음 선포를 계속해 나가는 자세를 말한다. 신약성경 저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예기치 않게 닥치는 상황을 집안에 도둑이 드는 사건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흙집이라 쉽게 도둑이 들어올 수 있었다. 교부들은 도둑이 생각과 유혹이라는 창을 통해 우리 육신의 집에 들어오는 악마를 뜻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말과 귀, 생각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 복음 요약 : 오늘 대림시기 첫 날에 울려 퍼진 재림에 관한 복음을 읽노라면 세월호에 자녀를 잃은 부모님이 생각된다. “깨어있어라”,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지도 못했던 날에 도둑이 들어와 노아의 홍수에 휩쓸리 듯 쓸어버렸던 날, 미구에 하늘나라에서 만나게 될 자녀를 기다리면서 사랑하는 자녀와 하느님을 마주하게 될 날, 입고 갈 고운 예복을 마련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세상 종말의 날과 시간은 오직 하느님 아버지만 아신다고 한다. 우리는 알 방법이 없다. 그 날을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실한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 그 마지막은 노아의 때와 비슷하다고 말씀해주셨다. 사람들은 경고도 무시한 채 노아의 방주를 보고 비웃고 있었다. 아마도 오늘과 같은 삶이 내일도 계속 이어지리라고 생각하면서 안일한 삶을 사는 중에 방주의 문이 닫힌 그 날이 될 것이다. 결국, 종말은 어떻게 준비하고 있었는가에 따라 구원될 수도 멸망할 수도 있다.
“종말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도둑과 같다. 그러기에 늘 대비하고 깨어 준비하여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생각치 않을 때 오실 것이다. ”
♠ 대화 방향 : ① 깨어있는 삶은 무엇인가요? 나의 믿음 ,신앙, 삶을 성찰한 후 나누세요.
② 어떻게 종말을 준비해야 하는지 창세기 6~7장 노아의 삶과 나의 삶을 비교하여 보세요.
♠ 참고 문헌 : ▪ 마태오복음 맛들이기 (수원가톨릭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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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 2주일 / 인권주일 / 사회교리 주간
2019. 12. 1
마태오 3, 1~12
♠ 복음 공부 : 세례자 요한의 설교
* 1~6절 : 회개하고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세례자 요한이 한 말과 행동을 기록한 이 부분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고 외친다. 즉, 하느님이 통치할 때가 왔으므로 지금 나의 삶과 행동이 주님의 길을 걷고 있는지 점검하고 방향을 바꿔 하느님께 돌아오는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길을 곧게 내는 행위이다. 2~3절에서 요한의 이 일도 역시 예언의 성취로 받아들이고 있다. 요한은 낙타 털옷, 가죽 띠 등의 옷차림은 구약의 아합왕 때 활동했던 엘리야의 옷차림과 같았으며, 이스라엘에는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 예언자가 미리 와서 준비한다는 믿음이 있었다.(말라 2.23-24 : 집회48.10-11) 저자는 이런 표현들을 통해서 그 엘리야가 세례자 요한임을 암시하고자 했다.
* 7~10절 : 불의한 지도자(독사의 자식)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 요한은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는데 그 사람들 중에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도 끼어 있었다. 요한은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온 것을 알고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비난한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긍지로 삼아 선택된 백성으로 구원이 보장되어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요한은 세례 받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회개에 수반되는 올바른 삶을 살아 열매 맺기를 촉구하나 회개하지 않고,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시간이 촉박하여 심판이 때가 가까웠음을 강조하고 있다.
* 11~12절 : 요한은 예수님이 오심을 예고하고, 그분은 구원자이시며 심판자이심을 선포한다.
요한은 회개를 위한 물세례를 베풀면서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을 들 자격조차 없는 종으로서, 자신의 뒤에 오실 분은 물로 씻기는 외적인 세례가 아니라, 마음을 변화시킬 성령과 불로 베푸실 메시아를 선포하고, 또한 알곡과 쭉정이를 가리려고 키를 들고 있는 종말의 심판관으로 오실 것을 예고하신다.
♠ 복음 요약 :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출현과 그분의 설교 및 메시아에 대한 예고를 말하고 있다.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요한이 예수님보다 더 훌륭한 인물로 여길 오해의 여지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높아지려 하지 않고, 이사 40,3을 인용해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파견된 자라고 말하며, 회개를 시키는 물세례를 베풀면서 율사와 바리사이인 아브라함의 자손의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출신지, 가문, 학력, 인맥 등을 소중하게 여기고 애착하며 행세하려는 현실에서 요한은 이런 기원은 좋은 것이 아니고, 하느님 앞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고 우리의 실천이라고 말씀하시며, 회개의 삶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자기의 삶을 반성하고 새로운 실천을 약속하면서 세례를 받으라 하신다. 지금은 대림절로 요한의 설교를 통해 우리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기간이고, 회개는 주님과 길을 걸어가는 자세로 지금 나의 삶과 행동이 주님의 길로 걷고 있는지 점검하고 되돌아오는 것이기에 적극적인 하느님의 선택이라 하겠다. 그래서 참다운 회개는 언제나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행위로 그분의 자비를 실천하는데 있다. 열매를 맺으라 하신다. 이제 인간의 선택, 응답만 남았다. 주님은 자비하시나 심판자이시다.
♠ 대화 방향 : ① 세례자 요한의 선포에 귀를 기울이고,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생각해 보세요.
②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드러내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요?
♠ 참고 문헌 : ▪ 마태오 복음 (이우식 지음/바오로출판사. 한남성서연구소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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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 3주일 / 자선 주일
2019. 12. 15
마태오 11, 2~11
♠ 복음묵상
1. 예수님께서 이미 문 앞에 계십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을 기다리며 기뻐하는 오늘의 전례는 우리가 성탄절을 맞아 더더욱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에 젖어 들게 합니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여우의 대사처럼 약속된 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기쁨으로 안절부절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바람직하지 못하고, 어렵고 답답한 상황에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간절하게 기다리게 됩니다.
2.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메마른 땅을 적시기 위해 무엇을 찾아다닙니까?
혹시 각자의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 이 곳 저 곳 소문난 곳을 찾아 헤매지는 않습니까?
훌륭한 강론, 분위기 있는 기도, 능력이 드러나는 모임 등을 찾아다니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나 정작 그러한 곳에서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면 허전한 마음으로 또 다른 곳을 찾아가게 되지요.
이리저리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이유는 전례와 공동체 모임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분을 기다려야 됩니까?” 라는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인내하는 믿음으로 기쁨의 소출을 기다립시다.
♠ 대화 방향 : 가난, 그리고 선택
오늘은 자선의 날입니다. 이사야나 예수님이나 메시아 시대의 기쁨의 징표로서 눈먼 이, 귀먹은 이, 말 못하는 이, 다리 저는 이, 나병 환자, 죽은 이, 가난한 이들에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말합니다.
그들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이 전해져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 참고 문헌 : ▪ 보득솔 ( 청년 성서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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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 4주일
2019. 12. 22
마태오 1, 18~24
♠ 복음 공부
* 18~19절 : 당시엔 처녀가 잉태한 것이 알려지면 돌로 맞아 죽었다. 그래서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알리지 않고 모르게 파혼하려고 마음먹었다.
* 20~23절 : 즈가리아와 엘리사벳에게 천사가 나타난 것처럼 요셉에게도 천사가 나타나서 “성령으로 아기가 잉태된 것임을 알려 주며 아들을 낳으면 ‘예수’ 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메시아가 오리라고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라는 뜻을 지닌 예수님이 오심을 알려준다.
* 24절 : 잠에서 깨어난 요셉을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 들였다.
♠ 복음 요약 : 다윗의 자손인 요셉과 마리아 성모마리아는 의로움의 상징인 안나와 요아킴의 자손이다. 몇 년 전 터키 에페소에 갔었을 때, 성모님과 사도요한이 함께 사셨던 성모님의 집을 방문했다. 그때 숙소에서 호텔 주인은 성녀 안나를 이슬람사람들은 ‘엄마’라고 존경한다고 한다. 하느님께서 주신 꿈은 이상한 꿈들과 분명하게 구별되며, 오랫동안 명백하게 기억된다. 오래 전 오상철 신부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역사 드라마를 보더라도 세자빈을 혹은 왕비를 간택하기 위해서 여러 명문가의 규수들을 전국적으로 방을 내려 선택하고 선택해서 뽑는데,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할 하느님의 모후를 뽑는데 하늘에서 그냥 뽑았겠는가? 하늘에서 정해 놓으신 분, 성모님을 뽑으신 것은 하늘에서 이미 간택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잉태하실 성모님은 원죄없이 잉태되신 분이셨다는 것이 나중에 성녀 벨라뎃다와 성녀 카타리나 라브레를 통하여 밝혀졌다.
♠ 대화 방향 : 내 삶의 여정에서 천사가 나타난 적이 있는가? 기억을 서로 나누어 공유해보자
♠ 참고 문헌 : ▪ 오상철 신부님 강론 ▪ 성녀 카타리나 라브레 9일기도, 기적의 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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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 가정 성화주간
2019. 12. 29
마태오 2, 13~15. 19~23
♠ 복음 공부
* 13절 : 천사가 요셉을 찾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마리아의 잉태 시,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또 이집트에서 돌아오라고 일러준 이도 천사였다. 요셉에게 말하는 천사의 말투는 남편에게가 아니라, 양아버지에게 대한 말투였다. 성가정은 즐거운 여행이 아니라, 피난길이었다. 아브라함과 야곱의 나라는 4백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파라오의 명예를 메고 괴로운 생활을 하였으나, 강력한 힘에 의해 기적적으로 해방되었다.
* 14절 : 우리는 성가정이 이집트의 어느 도읍에 숨어 살았는지 는 알 수 없다. 코프트 교회의 오랜 전통은 중앙 이집트의 앗숨나인 부근의 코스캄 수도원 소재지를 그 피난처로 지정하고 있다.
* 15절 : 헤로데가 죽은 날짜를 따져볼 때 성가정이 이집트에서 머문 기간은 몇 주간, 길어야 두 달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것으로 예언은 성취되었다. 호세아 예언서 11,1절에서 인용한 이 말씀은 하느님의 아들인 이스라엘이 출애급 당시에 이집트에서 구출되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은 새로운 출애급을 통해서 구출되게 할 것이다.
* 19절 : 역사가 요세푸스는 과월절을 며칠 앞두고 죽은 이 왕의 저주 받을 모습을 기록하였다. 요셉은 언제나 그러하듯 하느님의 이 새로운 지시에 순종하였다.
* 20절 : 너를 죽이려고 찾던 자들이 다 죽었다는 말로 마태오는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시킴으로써 ‘이집트로부터의 탈출, 노예 신분으로서의 해방,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라는 중요한 유사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스라엘로 돌아갈 때도 어느 마을로 돌아가라는 지시가 없다. 천사는 꼭 실천해야 할 말만 일러주고 있다. 요셉에게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복종과 일치를 실천할 기회를 주려고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 21절 : 요셉은 일어나 떠났다. 한 마디의 불평도 없이, 자기 의견을 말할 생각도 않고 기쁜 마음으로 고국으로 돌아갔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느님께서 도와주시리라 굳게 믿었다.
* 22절 : 돌아가는 길에 아르킬라오가 후계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르킬라오의 평판도 좋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러하듯 섭리는 알맞은 때에 개입하신다. 성가정은 꿈에 지시된 갈릴레아 지방으로 갔다.
* 23절 : 마태오가 ‘예수님이 나자렛 동네에서 살았다’고 알려주는 것은 ‘예수님이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리리라’ 고 한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 복음 요약 :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낳고 기른 성가정은 얼마나 복된 가정이었는가! 그러나 그 복된 가정도 결코 평안하지는 않았다.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고, 힘든 피난살이를 해야 했고, 베들레헴이나 예루살렘도 아닌, 이름 없는 나자렛 동네에서 살아야 했다. 그러나 이 가정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께 순종하며 살았다. 예수님을 가운데 모시고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고개 숙인 성가정은 모든 가정의 모범이다.
♠ 대화 방향 :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어떤 어려움을 겪었으며, 극복하는 삶을 살았는지 말씀과 경험을 연관시켜 묵상해봅시다.
♠ 참고 문헌 : ▪ 신약성서 주해집 (크리스챤 출판사) ▪ 주석성서 신약 (성요셉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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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 묵상자료 기고 >
주님,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
< 루카복음 23장 35~43절 >
장 도미니꼬 사비오 (철호)
광주 / F‧B회원
찬미 예수님! 가을이 짙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스라엘에서 돌아 온지 얼마 않아 아직 시차적응이 되지 못해 오늘도 눈을 떠보니 아침 9시입니다. 제가 가는 주일미사는 오전 9시미사인데, 부랴부랴 준비해서 10시반 미사 후 전남대 갬퍼스에 가서 산책을 하였습니다.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었고, 낙엽이 떨어지고 있는 캠퍼스 언덕은 무아지경이었습니다.
환하게 노랗게 색깔을 빛내는 모습을 자연뿐만이 아니고 주변에 있는 분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토요일은 전주에 약속이 있어서 처음 뵙는 강 교수님을 찾아 뵈올겸, 아나스타시아 쌤을 만나서 점심식사하려고 버스 안에서 전화를 했는데, 통화가 연결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도 두 번이나 전화를 했는데도 연결이 안돼서 아쉬었는데, 버스 안에서 연결이 되어서 너무 반가웠습니다.
더불어 아나스타시아 쌤을 도와주시는 세실리아 자매님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일송정에서 같이 식사를 하면서 가을날 은행잎처럼 빛나는 아나스타시아 쌤과 함께하여 행복했습니다. 오랜만에 뵈니 아나스타시아 썜이 그동안 아팠다고 합니다. 그래도 굳건하신 신앙심으로, 인생의 가을날에도 밝고 고운 은행잎처럼 빛나는 모습을 느꼈습니다.
차안에서 필립비서 4장을 같이 암송하면서 돈보스코의 향기를 느꼈습니다.
식사 후 세실리아 자매님께서 강 교수님 아파트로 데려다주었는데, 생전 처음으로 가보는 곳이었는데 모악산 부근이었습니다. 세실리아 자매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스라엘 마지막 날은 버스를 타고 베들레헴을 향했습니다. 베들레헴 가는 버스는 무슬림 버스를 타고가야 합니다. 그래서 무슬림버스를 타고 베들레헴에 내렸습니다. 무슬림버스를 탈 때 주의사항은 히잡을 머리에 두르고 있는 무슬림여자들 옆에 앉으면 안됩니다. 그들의 율법에는 남자 옆에 앉으면 안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터미널 주변에 있는 택시기사들이 서로 자기 택시 타라고 따라옵니다.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으면서 일본에서 왔냐, 중국에서 왔냐?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하면서 ‘주님탄생 기념성당’ 에 가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버스가 오질 않습니다. 그래서 택시를 타려고 생각하면서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전혀 영어를 못합니다. 마침 지나가는 무슬림한 사람이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핸드폰으로 ‘주님탄생 기념성당’을 영어로 알려주라고 하니 알려주었더니, 본인 핸드폰으로 검색을 하니 아랍어로 핸드폰에 나옵니다. 그것을 택시기사에게 보여주니 기사가알 았다고합니다. “얼마냐?” 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30세겔’이라고 하길래 택시를 탔습니다. 예수님 탄생기념 성당 입구에 가니 이스라엘 군인들이 검문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당 안에는 다른 나라에서 온 순례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동방박사와 함께 주님을 경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좋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위해 아랍 택시를 타고 터미널에 도착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숙소가 있는 엘리아스트리트에서 내렸습니다.
숙소 지역은 다마스커스 구역입니다.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지역명칭들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쉬움이 남아서 세례자요한 기념성당과 성모님과 엘리사벳이 만났던 기념성당을 찾아서 길을 나섰습니다. 근데 상가가 즐비한 곳에서 세례자요한 기념성당은 그저 조그만 건물 하나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저녁시간이라 성당문은 잠겨 있었습니다.
인터넷에서 읽어본 한글로 된 즈가리아의 기도를 볼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혼자서 마당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겸손의 상징인 ‘세례자 요한’, 주님 앞에서 그토록 겸손한 자이기에 성인 중에서 유일하게 세례자 요한 탄생기념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살레시오 수도원 평일미사에서 매일 아침미사 끝 무렵에 바치는 즈가리아의 노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하루를 살아가는 힘이 됩니다.
한 주간도 은총의 한 주간이 되시길 바라며...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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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 기고 >
F․B 설립 50주년을 준비하면서... - 제 5 부 -
권 토마 (순)
안산 원곡본당 FB
< 용서한다는 의미는... >
어느 아줌마가 ‘예비자 교리반’에 들어와서 교리를 받습니다.
오랫동안 준비해온 교육이 막바지에 이르렀고, 이를 준비하고 도와주는 이들에게는 늘 고마운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신부님면담만 마치고 나면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성당에서 많은 사람들이 축하하는 가운데 세례식을 갖게 됩니다. 너무나 꿈에 그리던 모습인지요...
신부님의 면담 중에 ‘하느님의 은혜’ 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세례를 받을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동안 성실한 그녀를 보아온 신부님은 놀라워하면서 그녀를 설득하였지만, 그녀는 막무가내였고요. 그녀의 기를 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구체적인 원인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그녀는 울면서까지 “ 세례를 받을 수가 없다” 고 했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한번 생각해보라고 하고, 그녀를 돌려보냈습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서 기도도 드리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녀를 도와주던 봉사자가 생각났습니다.
'힘들 때 기도할 마음이 나지 않으면 주기도문을 바쳐라...' 라고 하셨지요.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
< 성서형제회 이름 아래에... >
제가 들어왔을 때에는 성서형제회에는 오랜 세월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전국조정봉사자가 있는 곳은 분명 전주였다. 그리고 차기 전국조정봉사자는 서울에서 선출되었다.
전주에서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과거 자료를 찾아서 성서형제회를 복원하려고 하고 있었다.
과거의 자료를 찾아서 새롭게 편집하고 있었지만, 그 이전 자료는 마땅한 것이 없어 보였고, 특히 그때에 한 좋은 자료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지금 거의 완성 단계에 놓인 전주 공동체본에서는 거의 대부분이 사진으로 형성된 것만으로 추측할 수가 있다.
지금 제가 이글을 작성하는 것은 진실이라기보다는 오로지 저의 추측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다.
짧은 기간 ‘전주공동체 주도형’에서 ‘서울공동체 주도형’으로 겪다 보니, 느낀 점은 그들 간에는 분명한 차이를 느낄 수가 있다는 것이다.
크게 생각한다면, 개신교회 만큼 천주교회 안에는 보수와 진보라는 것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그 안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본당 안에서 여전히 중심을 이루고 있는, 소위 말하는 중산층에 의해서는 소공동체나 그동안 여러 교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노드는 아무런 작동을 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서형제회가 에쿠아도르가 있는 남미에서 여전히 소공동체 활동이 가난한 이들 중심으로 이루워지는 것과는 무관하지는 않는 것 같다. 같은 예수님을 바라보지만, 이들에 대한 관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도 그러했고, 수많은 문서 중에서 성서정경으로 받아들인 것 중에서도 그러했듯이 로마시대에서인지 그리스도공동체도 그 당시 제도인 노예를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 같았다.
노예도 자기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사도 바오로는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것을 다 고려해야 하는 천주교회이기에, 이런 환경 안에서 예수님 말씀만으로 살아가기에 더군다나 아나윔을 생활화하기에는 더더구나 어려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지난 창설자 신부님이 선교25년의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쓰신 선교사는 이에 대한 미련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지만, 어느 누구도, 특히 한국에 남아있는 우리에게는 큰 관심거리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지금 지난 초기서부터 활동해온 사람들의 영향력이 조금씩 쇠퇴해나가고 있고, 어떤 것이 성서형제다운 일인지도 모를 정도로 점점 희미해져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초창기 설립 지역이기도 한 광주교구는 보이지도 않고, 전주교구의 목소리는 희미해져 가기만 한다.
거의 코이노니아 활동을 하지 않는 곳에서 전국조정봉사자가 탄생되고, 지금 병환으로 인해 역할을 할 수 없는 지도신부며, 그리고 차기봉사자며...
어디로 달려 나가는지 알 수가 없어 보인다.
50주년 준비를 염려하시는 분이 극소수에 달하고, 나머지는 무엇에 신경을 쓰는지도 알 수가 없는 지경으로 달려가고 있다.
우리가 이런 일들을 잘하지 못하는 것이 경제적인 자금 부족만도 아닐 것이라는 것이다.
과거의 희생적인 봉사자며, 성서형제회에 적극적이시던 젊은 신부는 이제는 다 나이가 드셔서 원로 신부가 되고 은퇴하신 상태에 놓여있다
제가 이런 글을 남기는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
제가 초창기 활발했던 그 시기의 기록을 본 것도 아니고, 분명히 그 시대를 산 것도 아니지만, 이글을 남길 수밖에 없는 지금의 기분은 처참하기만 하다.
이를 잘 대처하지도 못하여 잡음만을 일으키는 저 자신에게도 분명히 잘못의 얼룩은 남아있으리라 여기지만, 이러한 저의 모든 잘못을 포함된 일들을 기록으로 남겨 보려고 할 뿐이다.
가장 중심에 선 전주공동체는 그래도 행사 때마다 몇 사람씩 참석하지만, 전주공동체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 양상이다.
겉으로는 전주공동체의 지도신부의 선임이 되지 않는 탓으로 두고 있지만, 진정한 이유는 어디서도 나타나 있지 않는 듯해 보인다.
지금 대전교구에 계시는 은퇴 신부님만이 걱정을 해주고 계시는 상황인 듯 보인다.
그 신부님은 지난 몇 번의 피정으로 저희에게 구체적인 주제까지 제시하시면서 이 문제점을 해결해 보려고 노력하셨지만, 우리들이 팔로우하지 못하고 있기에 여전히 불을 다시 지피는 수준에는 이루지 못하는 양상이다.
이런 일로 우리 어느 누구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지도 않지만, 이를 위해서 해로운 행동을 한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다.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상처를 입고 멀어져나가고 있는데,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려는 카톡의 기능도 부작용으로 인하여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지경에 놓이게 된다.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냥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할 뿐이라 여겨진다...
다들 내 탓도 아니라지만, 내 일도 아니라 여겨지는지 말입니다...
이럴 것이라면 왜 지난 해 동안 그렇게 어렵게 지탱해 오셨는지 그분들에게는 머리 숙여 죄송하다고 말씀드릴 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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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I 재정 회계 보고 >
☧ 매월 FB본부로 보내주시는 의연금은 본당별로 보내지 말고, 각 팀별로 회계 정산하시어,
금액이 많든 적든 매월 꾸준히 보내주셔야 합니다.…….
※ 2019년 10월 입출금 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