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에겐 하루 세번 기도 시간이 있었다고 하는데
3시(오전 9시), 6시(정오), 9시(오후 3시)가 그 시간이다.
사도행전 3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제 9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나갈 때
매일 성전 문 입구에서 구걸하던 선천적인 앉은뱅이를 만나는 사건이 나온다.
그때도 역시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했다.
그때 베드로가 말했다. "우리를 보라!"
이 대담한 요구에 귀가 솔깃하여 도대체 무엇을 주려고 저러는 것일까 하는 기대감으로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자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
그리고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그 앉은뱅이는 일어난다.
그리이스의 견유학파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집과 재산을 버리고
나무로 만든 술통에서 지내며 밥그릇 하나만을 가지고 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한 거지 소년이 맨 손으로 물을 떠먹는 것을 보고
자기는 너무 많이 가졌다고 탄식하면서 밥그릇을 깨뜨려버렸다고 한다.
알렉산더 왕이 찾아와 무엇을 도와줄까 물을 때 나무통에서 좀 비켜달라고 했는데,
그것이 자기를 도와주는 것이라는 의미다. 왜냐하면 햇빛이 가리니까.
기행을 일삼던 이 사람이 가진 것은 바로 이것 뿐이었다.
인간의 역사엔 피비린내 나는 소유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디오게네스와는 달리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기초적인 소유가 필요하다.
배고파 죽지 않기 위해 김 한 장에 간장만 있어도 깨끗한 밥 한 그릇이 필요하다.
인간관계를 맺고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고가의 것이 아니라도 몇 벌의 옷이 필요하다.
비를 맞지 않고 이 추운 겨울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단순하더라도 한 채의 주택이 필요하다.
사무를 보고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위해 간단한 나무 책상과 의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내장을 부풀려가면서 또는 음식을 토해내면서까지 진행하는 식생활은 비인간적 삶이다.
고가의 주택, 고가의 차, 명품 백 등 명품으로 도배된 의식은 사실 극빈자의 의식이다.
나아가 정치 권력, 경제 권력, 종교 권력을 움켜줘야 채워지는 자기만족은
진정한 것, 영원한 것을 가지지 못한 자들의 소치다.
나는 베드로의 그 한 마디를 사랑한다. "내게 있는 이것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아, 얼마나 단순하지만 얼마나 심오하고, 얼마나 간결하지만 얼마나 강력한 신앙이란 말인가?
나도 그러고 싶다. 그리고 실제로 베드로 신앙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런 믿음으로 살아가고 그런 믿음으로 행복하다.
이것이 진정한 부자의 진정한 능력이 아니더냐.
내게 있는 이것을 당신에게 주고 싶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2025. 2. 15
이 호 혁
첫댓글 아멘!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을 더 알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