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다소간의 편견에 불과한 느낌일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미국인들은 소위 '만지는 것', '만질 수 있는 것'을 참 좋아하는 사람들같다.
이렇게 달랑 한문장으로 한 문화에 속한 사람들을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유치한 일인지는 -물론-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만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우리 생활에 필요하며, 유용한 것인지도 잘 알고 있다. 음........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 영화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방식이라는 것이 소위 '미국적 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라면-사실 이렇게 명명하기엔 약간의 무리가 없지 않겠지만-, 그 방식의 특징에 해당하는 것이 뭘까...하는 질문에 대한 약간의 생각, 그저 그 뿐이다. 정말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일은 가능할까?
우리말로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라고 번역된 이 영화의 제목은 'pay it forward'이다. 대충 말하여 '그저 주어라', '(앞뒤 재지말고) 베푸시오' 쯤의 뜻을 가진 것으로 생각되는 이 말은, 말 그대로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핵심적 강령 쯤 된다고나 할까?
알콜중독증이 있는 엄마와 살고 있는 한 꼬마가 중학교 첫 사회시간에 좀 인상적인 선생님으로부터 꽤 인상적인 한학기 과제를 부여받는다. 그것은....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계획해서 행동으로 실천하기. 학생들은 다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분위기....왁자지껄.. 이 장면에서 선생님은 뭐라뭐라 하면서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모종의 깊은 인상을 받은 듯한 우리의 꼬마....개떡같은 세상을 향해 뭔가 해보려고 시도하는데....이 꼬마가 생각한 것은 이런 것이다. 말하자면, 한 사람이 정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세명에게 선행을 베풀고, 이 세명이 마찬가지로 다른 세명에게 선행을 베풀고, 다시 세명은 또 각각 세명에게....이런 식으로 나가면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착한 일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될 수 있으리라. 소년은 직접 행동에 옮긴다. 빈민촌에 있는 사람을 불러 밥을 먹이고, (엄마 몰래) 집에서 재우고, 저금통 털어서 옷사입도록 하고, 직장도 가질 수 있고, 하여간 새 삶을 살도록.......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뭔가 진정 도움이 되는 일을 하라고 자신의 계획을 전파시킨다. 지금 내가 하는 이러한 설명에 다소간이라도 우리 꼬마의 행동에 대한 조소 혹은 우스움의 정서가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정말 오해이며 내 필력의 부족으로 인한 것이다. 꼬마의 계획과 실천은 어느 누구보다도 진지한 것이었으며, 결코 그저 심심풀이로, 과제니까 해본 것이 아니었다. 그의 엄마, 그 둘을 떠난 술주정뱅이 아빠, 빈민촌에 사는 할머니, 얼굴에 깊은 화상자국을 지닌 인상적이었던 선생님, 힘센 친구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불쌍한 친구......이런 사람들이 바로 꼬마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은 겉으로는 멀쩡해도 항상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개떡같은 이 세상의 일부였다. 아마도 꼬마가 기획한 이 '좋은 세상 프로젝트'의 기본 골격을 떠올려 본다면, 사람들간의 관계, 선행으로 이어진 관계가 줄줄이 이어질 것이라는 상상을 해 볼 수 있으리. 예컨대, 이런 거. 어느 기자가 범죄사건 현장에 도착했는데, 범인이 차를 타고 도주하면서 그 기자의 차를 박아서 거의 박살내고 가버렸다. 비는 추적추적 오는데....'shit! shit! shit!'....(냠냠...욕해서 미안) 그 순간 한 노신사가 나타나 번쩍이는 재규어의 키를 내민다. 그저 가지라고...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요즘 세상에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기자 자신은 더욱 이 노신사의 선행을 믿지 못하고, 뭔가 이 사람이 노리는 바가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응아(??) 밟은 기분으로 계속 이 사람을 추적, 추궁....마침내 선행베풀기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이 노신사에게 선행을 베푼 사람에게 찾아가고, 다시 또 그 사람에게 선행을 베푼 사람을 찾고......기자에게는 요즘 세상에 특이하고도, 신비 & 비밀스럽게, 누가 강요하지 않는데도, 이런 선행이 어딘가에서 베풀어진다는 사실이 기사화되면 좀 속된 말로 대박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나부나. ...중간 생략....하여간 이 기자의 추적으로 인해 사랑베풀기의 전모가 밝혀지고, 결국 그것이 귀엽기 짝이 없는 한 중학생의 사회과 과제로부터 시작되었다는.....약간 의미있는 사실이 밝혀지고, 우리 꼬마는 급기야 매스컴도 타게 된다. 그리고, 여차여차 해서 선생님과 꼬마의 엄마도 맺어지고(이 부분에서 로맨스가 있는데 할말 다하기는 힘들것같아 생략한다), 세상 사람들도 이 사랑베풀기에 나름대로 감동을 해서(?-정말 했나?) 하나의 캠페인으로 정착되려는 시점에서 우리의 자랑스런 꼬마 봉변을 당하니.....우짤꺼나. 이런 줄거리를 거진 다 써버린 셈이 되어 버렸네. 미안.
이제 줄거리 그만 쓸란다.
영화 보면서 내내 품었던 질문은 이런 거다. '도대체 이 감독은 선한 행동, 착한 행동, 사랑의 행동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그리고 감독의 그 생각은 영화 어느 부분에 그 단서가 있을까?' 사실 우리는 모두 꼬마와 같이 생각해 볼 수 있고, 또 실천에 옮길 수도 있다. 사실 이 영화는 우리들 대부분이 그걸 생각할 수 있으면서도 행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 점에서 우리 꼬마의 도덕적 행위는 찬양받아 마땅하다고, 우리도 제발 좀 그런 실천과 결단의 용기를 본받자고 말하는 것 같다. 다소간 낭만적인 주장이다. 물론 이런 낭만적인 강령이 주는 소름 돋을 정도의 숙연함을 빈정거려 보려는 뜻은 결코 없다. 그렇기는 해도, 이 착한 세상 프로젝트는 너무 허구적이며, 내용이 빈한한 것이다. 뭔가 행위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값진 일이지만, 도대체 선한 행위는 어떤 행위가 선한 행위란 말인가? 예컨대, 한 도망치는 범죄자있다고 치자. 꼬마의 할머니(이분도 선행을 입은 사람이지만)는 영화에서 이 사람을 도와준다. 그런데, 이게 선한 행위일까? 솔직히 난 잘 모르겠다. 그렇기는 해도 좀더 생각해 볼 수는 있다. 범죄자가 도망치는 사태에는 거의 항상 쫓기는 경관이 있다.(쫓는 자가 있으니 쫓길테지) 이 경관이 담을 넘다가 무릎이 접질리는 상황에 처하여 더 이상 그 범죄자를 쫓지 못할 상황이 되면,이는 누군가 그를 도와야 하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그 경우-누군가가 그 경관을 대신해 범인을 쫓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할머니와 다른 그 누군가의 선행은 범죄자와 경관 두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셈이다. 이런 경우 누군가가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나란히 평행선을 그리며 이어진다. 적어도 그 갈등(?)이 종결되기 전까지는... 범죄자와 경관은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선한 행위를 해야할까. 살려고 도망치는 범죄자를 그냥 보내주는 것이 경관의 선행인가, 법을 지키려는 경관의 사명감 앞에 무릎을 꿇고 자수하는 것이 범죄자의 선행인가. 이 두 선행이 동시에 일어난다면, 그야말로 패러독스가 될 것이다. 이쯤에서 누군가는 이 두 사람의 선행이 동시에 그런 식으로 일어날리는 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행위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그러한 경우를 결코 배제하지 않는 것이다.(비록 확률은 낮을지 몰라도....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런 확률을 -그것이 단지 0.1%의 가능성 밖에 없다고 해서- 고려하지 말아도 좋은건가? 아니 오히려 이런 낮은 확률의 사태를 잘 이해하는 것이 사태 전체를 전혀 다른 식으로, 전혀 다른 지평에서 볼 수 있게 해 줄 수도 있음을, 그 가능성을... 인정해야 하지 않는가? 너무 어거진가?? ^^;) 착한 세상 만들기 프로젝트가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가능성의 긍정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면, 그것이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경우라고 하여 낮은 확률을 핑계삼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그 프로젝트가 존중해야 할 스스로의 근본 원리, 곧 가능성의 존중이라는 원리를 무시하는 것이 될 것이다. 아마 그래도 우리의 반대자는 쉽사리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위와 같이 범죄자가 경관에게, 경관이 범죄자에게 그 두 사람이 그 주어진 사태에서 가장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선행을 그런 식으로 택하는 일이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것이다'라고 항변하면서. 그래도 할 말은 있다. 이 말이 사실상 중요한 말이며 내가 하고 싶은 말인 셈. 당신이 생각하는 선한 행위란 어떤 의미이냐고. 내 안전이 보장된 상태에서 나오는 행위....그것이 선한 행위인가? 내 안전의 보장은 어느 정도까지의 안전을 말하는가? 호흡이 붙어 있는 상태까지? 유치장에 안들어갈 정도까지?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이런 것이다. 위의 프로젝트는 중요한 한가지 질문을 빠뜨리고 있으며, 그 질문을 소홀히 하는 한 잘못된 길로 빠질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그 질문은 바로 '인간의 선함'에 대한 질문이다. 그러면 또 누군가는 내게 니가 생각하는 '인간의 선함'을 묻겠지? 좋은 질문이다. 그러나 그 질문은 함께 탐구할 질문이지, 내가 일러주거나 누군가 일러주어서 하나의 강령이 되고, 캠페인으로 성립되어, TV화면에 시각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때의 탐구는 곧 대화일 것이다. 지적인 토론 또는 대화는 엄밀히 말해 승자와 패자가 명확히 갈리는 검투사의 싸움이 결코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대는 누군가 일러준 독트린을 앵무새처럼 따르며 반복하려는가? 그것은 도대체 통계화가 불가능하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주의:통계의 유용함을 거부하고 원시인(?)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님) 적어도 우리는 도덕적 행위에 대해 생각할 때, '인간의 선함'에 대하여 모종의 '논리적인' 가정을 가질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을 한 시점에서의 집단적 심리상태와 바꿔치기 하려고 해서는 안될 것같다. 그리고 결코 그것을 구호 내지 강령화해서 현존하는 세상을 -좋은 뜻으로든 나쁜 뜻으로든- 뒤엎어버리는 도덕적 영웅, 또는 도덕적 테러리스트(?)의 꿈을 꿀 필요도 없는 것이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누군가를 그렇게 만들려고 카메라를 들이대는 일로 애쓰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의 선함' 또는 그에 따르는 도덕이란 예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이며, 우리가 알게 모르게 누리고 있는 우리 일상에 주어진 신의 선물과도 같은 것일 것이다. 우리는 익숙한 것일수록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같다. 감히 주제넘게 '지식'이라는 말을 새장의 비유를 써서 말하자면, 지식을 보유하되 새를 새장 안에 넣어 둔 채로 가지고 있는 것과 새장 밖에, 그의 팔뚝 위에 새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유하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르다. 이런 말하는 건.....흔히 '지행의 괴리'라고 할 때에는 거의 언제나 스스로 뭔가 알고 있다는 것, 어떻게 행위해야 할지 그 답이 분명한 것으로 가정되고 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도대체 '선한 행동'이란 분명한가? 만약 행위자 스스로 분명하지 못하다면, 다른 이들이 하는 방식대로 아무 저항감 없이 하면 되는 것인가? ....... 어쩌면 우리들은 탐구꺼리를 너무 먼 곳에서, 뭔가 기발해 보일 것 같은 것에서만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현재의 사태 또는 진행중인 상황을 한 발짝 물러서 보면, 그 자체 어딘가에 쓰이지 않는 것 같은 탐구, 어딘가에 쓰이지 않는다는 바로 그 점에서 가장 유용하고(invaluable) 가치로운 탐구, 바로 자기 자신에 관한 탐구도 있음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탐구는 사회계층 누군가의 전유물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될 것 같다. 인간이 인간이 되겠다는 데 누가 뭐라 할 것인가. 말하다 보니 정말 유치한 수준이 드러나는 것 같군. 쩝
현실적으로 도덕에 있어서 '만질 수 있는 것, 그것으로부터 시작하자'는 태도는 정당하며, 또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인 일이다. 하지만, 그 일(즉 학습 또는 교육)의 결과 혹은 목적을 '만질 수 있는 것으로 하자'는 주장은, 적어도 '도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언제나 부족하며,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가 내게 보여준 것은 '만질 수 있는 결론'의 한 사례였다. 굳이 그처럼 신파조의 운동형식으로 가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도무지 .....인간의 도덕생활이라는 것을 낭만적 감상에, 공짜 자동차에 팔아버리는 것같아서 기분이 찝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