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당나라 측천무후 때는 식인 문화의 절정기였다. 장에서는 인육을 팔았고(두발 달린 양고기라 불리우며, 팔렸고, 인육이 너무 많이 돌아 다른 고기의 값이 폭락할 정도였다고 한다)철경록, 조야첨재에 나오는 친구를 해로 만들어 먹은 설진, 첩을 삶아먹은 고찬, 병중에 자기 노비의 고기를 먹은 독고장 등이 모두 측천무후 시기의 인물들이었다.
황소의 난 때는 인육을 가공하는 기계를 끌고 다녔고, 절도사의 군대는 마을을 종종 습격해 절도사의 군대가 휩쓴 곳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한다. 명나라 말기의 명장 원숭환 장군은 청나라 ?조의 계략으로 처형당한 뒤 군중들이 몰려 와 그 살점을 발라가는 바람에 뒤늦게 시신을 수습하려 온 사람들은 그 뼈밖에 수거할 수 없었다고 한다. 또 자치통감 '당기'편에 보면 악질관리였던 내준신이 식인형을 당했다고 하는데 민중 들이 다투어 내준신의 고기를 산채로 잘라 먹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동이 났다. 눈 알을 도려내고 안면의 가죽을 벗겼으며 배를 찢고 심장을 끌어내니 마침내 진흙 같은 찌꺼기만 남았다 라고 전해진다. 참으로 끔찍한 사실이 아닐수 없다. 그밖에 인육은 납취, 인신매매 등으로 공급이 되었다고 한다. 또 죄수들을 인육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사실 그 당시 상황으로봐서 상당히 불평등하며, 억울하게 인육이 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여자의 경우 외모가 아름다우면 기루로 팔려가지만, 얼굴이 변변치 못하고, 일을 할만 큼 튼튼하지 못하면, 인육이 되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무수히 많으나 생략하겠다. 이런 야만적인 중국의 식인 문화는 문화 상대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중국의 식인문화는 미개종족의 식인문화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극심한 기아와 원수에 대한 복수로서의 식인문화라면 타국에도 그 예가 있고 바로 우리민족에게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임진왜란 당시 권율장군과 정기룡 장군은 왜군의 생간을 내어 씹어 먹는 것으로 유명했지요. 한데 중국의 식인문화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역사와 정치,문화 중국인의 사고방식에 미친 영향은 엄청납니다. 왜 중국인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며 부모자식간에도 안믿는지.. 식인문화를 살펴보면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또 입으로는 예를 외치면서도 같은 입으로 사람을 잡아먹는 그들의 심리상태토 이해가 가실 겁니다. 중국의 식인문화가 발달하게 된 배경에는 중원을 둘러싼 격한 쟁투에 따른 잔혹한 형벌제도의 탄생과 사람을 잡아먹는 형벌이 성문법으로 제정되어 법적으로 허용되었다는 점과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잦은 기근과 천재지변, 전쟁, 농업기술낙후로 인한 식량 부족 등이 한대 맞물리면서 확산되었다는 것입니다.
법적으로 식인이 허용되고 식량부족에 기근, 전란이 잦아들면서 차츰 식인문화는 아무 저항감 없이 중국민중에게 뿌리 박히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정쟁, 전쟁에서 패배한 정적, 적국군병 및 국민 등은 "잡아 먹히는 인육"이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고 상황에 따라선 자국국민을 임의로 대량 징발해서 하루에 수천명씩 군대의 식량으로 사용되어진 것도 중국역사를 살펴보면 결코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
1) 중국문명의 발전과 그 식인문화의 전파는 그 족적이 일치한다. 식인문화의 시작은 거의 대부분이 황하유역의 산동, 하남, 하북, 산서, 섬서성이 중심이었습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점차 남쪽으로 남하해가는 특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어 식인문화는 중국문화의 전파에 따라 남하하여 회화유역에서 장강을 넘어 산동, 복건성으로 파급되어 집니다. 그 파급경로는 중국인들의 강남개발과 이주의 역사와 함께 합니다. 즉 중국인이 많이 이주하면 인구가 급증하고 과잉개발에 의해 자연환경이 파괴되며 자연생태학적 균형이 깨어져 기근이 발생하고 식인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한나라 시대 고조 2년부터 흥평원년에 이르는 400년 도안 식인현상은 대부분 중국문명의 시작인 황하에서만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흥평 2년 이후에는 장강, 황하일대에서도 발생하고 강남, 광동, 복건성에서 식인현상이 나타는 것은 중국세력이 남하한 3-4세기 이후 동진시대 이후가 됩니다.
2) 인구과밀지역과 일치한다. 식인현상은 대부분 인구과밀지역과 일치해서 발생합니다. 변경지역이나 미개발지역이 아닌 인구 과밀 개발지역에서 출현합니다. 특히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인 장안, 낙양, 개봉, 북경, 남경, 양주, 항주 등의 도시가 식인문화의 다발지역임은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3) 정치 환경변화와의 인과관계가 있다. 노신은 고대 중국국가 성립 이후의 사회를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 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즉 노신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국가라고 하는 사적인 권력에 의해 구축된 고대국가 폭력기관이 광대한 대중을 국가라고 하는 우리에 가두고 수탈의 대상으로 삼고 우리 속의 극빈한 군중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작용을 통해서 인구와 식량의 자동제어를 하고 자생 자멸해 간 결과를 이루어냈다고 하는 것입니다. 노신은 수탈의 가혹화와 인구 과밀화가 가져온 식량위기 및 자연-사회환경의 악화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사회를 형성하고 중국의 식인문화를 창출했다고 주장합니다.
은나라시대의 식인사례를 게재했습니다만 그것은 정사에 기록된 사례는 아닙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즉, 정사에 최초로 기록된 식인사례를 올리고자 합니다. 은왕조의 주(紂)왕은 대신인 구후의 딸이 절세미인이란 말을 듣고 아내로 삼았는데 그 아내가 너무도 정숙하고 외설을 좋아하지 않아 자신의 성적취향에 맞지 않자 격노하고 그녀를 살해하고 그녀의 아버지 구후를 해(醢:소금에 절인 육젓)으로 만들어 먹어버립니다. 신하인 곽후가 이를 강력히 말리자 주왕은 곽후를 포(脯:찢어 말린고기)로 만들어 먹어버립니다. 그밖에도 주왕은 자신에게 간하는 신하 익후를 자(炙:불고기)로 만들어 먹어버립니다. 또 신하 귀후는 포로 매백은 해를 만들어 먹어버렸습니다. 또 주왕은 신하인 황비호의 아내 경씨를 희롱하다 거절당하자 그녀를 해로 만들어 남편인 황비호에게 하사하고 먹게 합니다. 이에 황비호는 격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주왕을 제거하게 됩니다. 동물세계에서나 통하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인간에도 적용되는 적나라한 사례입니다. 신하 귀후는 포로 매백은 해를 만들어 먹어버렸습니다.또 주왕은 신하인 황비호의 아내 경씨를 희롱하다 거절당하자 그녀를 해로 만들어 남편인 황비호에게 하사하고 먹게 합니다. 이에 황비호는 격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주왕을 제거하게 됩니다. 동물세계에서나 통하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인간에도 적용되는 적나라한 사례입니다.
영화 <신장개업>을 보면 괴기스러운 분위기의 아방궁이라는 ‘중국집’은 자장면 맛이 일품이다. 그 원인은? 경쟁업체에서 추적하여 알아보니 인육, 즉 사람고기를 썼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집’으로 불리는 중화요리 식당은 음식 맛이 좋을 때 흔히 ‘인육을 쓴다.’는 루머가 흘러나오기 일쑤였다. 그런데 실제로 중국인들은 청조 말까지 인육을 시장에서 거래했고, 중화민국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직후까지도 일부 지방에서는 인육을 먹었다!
식인문화는 중국 4천년 역사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한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206년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 중국에서는 식인의 기록이 220차례나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다. 최초의 식인 이야기는 중국의 전설적인 왕조인 하나라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들을 죽인 원수를 죽여 육장(肉醬)을 만들어 원수의 아들에게 먹기를 강요한 여인 이야기다. 유교는 ‘복수주의’를 인정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장려한 면이 있어 복수에 의한 식인행위가 있었다. ‘부모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불구대천’, 不俱戴天)’는 생각으로 심하면 부친의 원수를 29대까지 갚기도 했다. 복수할 때는 한 칼에 숨통을 끊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천 갈래, 만 갈래로 잘랐으며 때로는 고기를 잘라먹고 심장과 간을 꺼내어 씹어 먹으며 뼈까지 갈아먹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 예로, 측천무후 당시 잔혹한 고문과 형벌로 유명했던 내준신이 처형되었을 때에는, 군중들(그에게 처형당한 이들의 가족들)이 다투어 그의 고기를 잘라먹었다고 한다.
황제는 법률로 ‘살육의 형’을 규정했다. 이는 주나라 때의 율령 체제부터 등장하지만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식인 기록이 나타난 최초의 정사인 <사기(史記)>는 중국 최초의 역사왕조인 은 왕조(주나라 이전의 왕조)의 마지막 임금 주왕이 신하들을 ‘해’(醢, 인체를 잘게 썰어 누룩과 소금에 절인 고기), ‘포’(脯, 저며서 말린 고기), ‘자’(炙, 구운 고기)로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해, 포, 자는 이후 중국 춘추전국시대까지의 인육 조리법의 대표 격으로 계속 등장한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공자는 이 ‘해(醢)’를 즐겨서 해 없이는 식사를 안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공자가 아끼던 제자 자로가 위나라의 신하로 있다가 왕위다툼에 휘말려 살해되고, 그의 시체는 잘게 토막 내어져 해로 만들어지고 말았다. 이 해는 사자에 의해 공자의 식탁에까지 전해졌다. 이 일 후로 공자는 그렇게 좋아하던 해를 먹지 않았다.
중국 역사사회에서는 생존경쟁의 패자가 승자의 먹이로 식탁에 오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리고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식인이 자행되기도 했다. 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 제나라 환공은 미식가로도 유명했다. 그가 진미를 찾자 요리사인 역아(易牙)는 자기의 장남을 잡아서 삶아 바쳤다. 역아뿐 아니라 극한 상황에서는 자기 살을 베어내거나 아내나 자식을 잡아 주군을 대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흔히 이런 경우는 충성으로 기려졌다. 인육은 가끔 약용으로도 쓰였다.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인체 각 부위의 약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통념에다 ‘효’라는 유교 사상의 실행으로서, 병으로 죽어가는 부모에게 자신의 넓적다리살 등을 잘라서 봉양하는 일은 더욱 흔했다. 단, 이런 일이 진정한 효행인가 하는 정치적인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당시의 황제 뜻에 따라 어떤 시대의 사람들은 ‘효자’로 표창을 받았고, 다른 시대 사람들은 신체를 훼손한 ‘불효자‘로서 매를 맞은 후 귀양을 갔다.
수·당대에는 인육시장이 출현했고, 인육애호가가 열전(列傳)에 기록되기도 했다. 송 말기부터 원대에는 <철경록(輟耕錄)>이라 하여 인육 요리법을 자세히 적은 요리책까지 출판되었다. 원나라를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자신이 목격한 복주(福州)의 식인 풍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지방에서 특별히 기록할 만한 것은 주민들이 그 어떤 불결한 것이라도 가리지 않고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의 고기라도 병으로 죽은 것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횡사한 사람의 고기라면 무엇이건 즐겁고 맛있게 먹는다. 병사들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머리 앞부분을 깎고 얼굴에 파란 표식을 하고 다니면서 창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인 뒤, 제일 먼저 피를 빨아먹고 그 다음 인육을 먹는다. 이들은 틈만 나면 사람들을 죽여 그 피와 고기를 먹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중국의 식인 풍습은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등 유명한 중국 고대의 소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삼국지>의 경우, 정사로 기록된 진수의 삼국지에는 유비가 즐겨먹은 음식이 인육으로 만든 포였다고 하며, 여포가 죽은 후 그 고기를 죄인들에게 먹였다고 한다. 소설 <수호지>에서는 인육으로 고기만두를 만들어 파는 악한이 등장하고, <서유기>에서는 고승(高僧)의 고기가 불로장생의 영약이라 하여 삼장법사가 끊임없이 요괴들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인육의 판매를 금지하는 법이 송나라 때에 만들어졌지만,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인육은 시장에서 공공연히 매매되었다. 1918년, 중국 근대의 사상가 노신은 <광인일기(狂人日記)>에 식인의 피해망상증에 걸린 광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식인 풍습이 만연한 사회상을 폭로했다. 그는 또한 ‘국가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라고 정의한 바 있다. 중국 5·4운동의 사상적 지도자 오우(吳虞, 1874∼1949)는 ‘유교 = 식인’이라 하며 강력히 유교를 비판했다. 식인풍습은 공산화된 중국에서 유교의 폐해 중 하나로 비판되었고, 최근에 이르러서야 점차 사라져갔다. 오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해 온, 유교문화의 종주국인 중국에서 식인 풍습이 꾸준히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역사의 단면이다.
식인풍습은 5천여 년 간 합법적으로 존재했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행해졌습니다. 불과 얼마 전 홍위병이 날뛰던 시기에도 중국전역에 광범위하게 식인풍습이 실존했으며 신용문객잔으로 대표되는 흑점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 나이 30-40대에 속하는 층 일부는 그 당시에 태어났을 테고 그런 사회분위기 및 오랜 전통이 그들 사고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판단하고 나름대로 분석한 것인데요. 광인일기에 나타나는 주인공의 과대망상증은 노신이 정신병자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의 실제상황을 그대로 전하려했다는 점을 상기하시면 이해가 쉬우시리라 생각되어 집니다.(주인공은 주변 이웃이 자신을 살해하여 잡아먹으려한다는 피해망상증환자로 나옵니다.) 노신이 아큐근성과 식인풍습이 중국을 망치는 2대악으로 보고 이것을 근절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보면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중국인의 왜 남을 믿지 못하는가? 왜 돈을 중시하는가? 왜 먹는 것에 집착하는가. 왜 돈 앞에선 적전 분열하는가? 왜 눈앞에서 사람이 쓰러져 죽어가도 여러 사람이 주변에 빙 둘러서 무표정하게 바라보기만 할뿐 조치를 취하지 않는 그 특유의 무관심은 어디서 나오는가? 왜 중국의 대가족제도는 3대뿐아니라 주변 친인척이 한집에서 모여 사는가? 왜 부모 자식 간에도 못 믿는가? 그 엄청난 인내심의 근거는 무엇인가? 중국계 기업의 조직문화는 왜 친인척위주인가(그래서 중국계기업의 수명은 다른 나라 기업에 비해 짧습니다.) 등등의 문제 저변엔 식인풍습으로 인한 중국인이 인간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관점이 큰 작용을 했다라고 봅니다. (노신은 중국인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부연설명이 없어서 이해가 잘되실지 모르지만 짧게 몇가지만 대충 추려 말씀드리자면 오랜 기간의 식인풍습은 노신의 말대로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게 만들고 신의라는 것 자체를 없애 버렸습니다. 중국인들이 신의를 말할 때면 그들이 가장 위기에 몰렸을 때입니다. 그때만 예나 도덕 신의 등이 나옵니다. 식인풍습 즉 약육강식의 단순한 논리는 그들의 특징적인 속성. 즉 강자 앞에선 토끼가 되고 약자 앞에선 무서운 맹수가 되어버리는 것을 잘 설명해주는 근거가 아닐까요? 일단 전쟁, 기근으로 식인 풍습이 대대적으로 시작되면 잡아먹히는 인간의 종류와 순서에 일정한 법칙이 있었습니다. 일단 유괴하기 쉬운 어린이를 시작으로 여행자, 독신자 및 독거노인 등으로 순서가 옮겨갑니다.
나중엔 비교적 소규모의 가족단위를 이루는..즉 처치하기 쉬운 가정을 다음차례가 되고 비슷한 규모의 가족 단위 간에는 관에 줄이 있어 파벌에 속한 자가 속한 가정이 그렇지 못한 가정을 잡아먹고.. 맨 마지막 단계에 가면 부모가 자식을.. 남편이 아내를.. 형이 동생을 잡아먹었습니다. 중국 특유의 대가족제도는 제가 보기엔 결국 식인풍습으로 부터 자기 자신과 가족을 지켜내려는 눈물겨운 제도이며 여러 명이 뭉쳐서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잡아먹힐 확률을 낮추고 생존확률을 높이려는데 주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잡아먹히는 순서상 쪽수가 많은 가정이 맨 나중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인내력에 대해 살펴보면..그들의 인내력을 임어당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임어당은 중국특유의 대가족제도.. 삼대뿐 아니라 외삼촌가족 숙부가족 고모가족 등등 그 많은 수의 가족이 한 가옥 내에 살면서 여러 사람과 부딪치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참아내면서 그들의 인내력이 성장했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즉 식인풍습은 중국특유의 대가족제도를 만들어내고 대가족제도는 구성원에게 매우 큰 인내를 강요했습니다. 식인풍습이 발생하게 된 명분은 제가 말한대로 고대 중국부터 형벌의 하나로 성문법화 된 것 이외에 중국 특유의 황제제도, 식인의 미화, 등이 있었겠지만 가장 큰 직접원인은 식량부족이었습니다. 그 당시 식량이란 것은 지금의 식량이란 가치나 개념과는 큰 차이가 있으리라 생각되어집니다.
즉, 식량==목숨이란 공식이 성립하였을 것이라 생각되어집니다. 현대에 들어서 농업기술이 발달하고 난 이후에 그 당시의 식량과 현재의 식량과는 다른 정도의 가치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 당시의 식량과 동일한 가치를 갖는 것을 현대에서 찾자면 그건 바로 "돈"이 아닐까요? 많은 사람들이 중국인은 날 때부터 장사꾼이라 돈을 밝힌다고 합니다만 저는 그들이 "돈 때문에 장사꾼이 되었다"고 보는 시각입니다. 오랜 전통의 식인풍습은 그들로 하여금 절박한 생존본능을 추구하게 만들었고 그 본능은 대대로 유전되었으며 세대가 지날수록 더욱더 강력해졌을 것입니다. 불과 30-40여 년 전까지 홍위병이 날뛰던 문화 혁명기에 농촌이 붕괴되자 여기저기서 서로 잡아먹는 식인풍습이 존재했던 중국이라면 그 본성과 본능은 지금 세대의 주축을 이루는 30-40대의 핏속에 생생히 살아있을 것이고 세상이 바뀌어 식량자체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과거 그들이 서로 잡아먹게 만들었던 그 "식량"과 같은 가치를 가지는 "돈"에 그토록 무섭게 집착하는 이유를 식인풍습과 연계시킨다면 너무 무리한 확대해석일까요?
식인순서의 맨 마지막은 부모 자식 간, 형제간, 부부간에 서로 잡아먹는 순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과거 식인풍습이 난무하던 시대의 식량과 같은 의미를 갖는 "돈"앞에서 부모 자식 간, 형제간, 부부간에 서로 믿지 않는 그들의 사고가 전 이해가 아주 잘되는데요,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중국인은 일제침략과 내전 그리고 문화혁명 등의 혼란기를 겪어서 그렇게 서로 믿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가지 묻죠.. 우리나라는 일제침략이 없었나요? 중국은 절반만 먹혔지만 우리는 아예 35년 동안 수탈을 당했습니다. 바로 이어 동족상잔의 비극 6.25사변이 터졌고 또 그 이후 4.19, 5.16 장기간의 군사파쇼독재 등등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민족은 그들과 다른가요? 제가 생각하기엔 그들이 그 지경까지 된 것은 우리가 겪은 것과는 분명히 강도나 내용이 다른 뭔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만..제가 생각한바가 유치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몇 가지 중국인의 속성을 식인문화와 관련지어 나름대로 분석해낸 바를 간단히 정리하여 짧게 올렸습니다. 일단 그다지 학문적이지 못하고 자의적인 해석일수 있으며 식인풍습 한가지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데 무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식인풍습 한가지로 모든 것을 해석 하려 한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어령님이 쓴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란 책을 읽어보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과거 일본이 잘나가던 시절에 많은 서구인들은 일본인들을 매우 궁금해 했고 나름대로 연구하여 “국화와 칼” 등의 저서를 통해 접근하려 했지만 모두다 그들의 속성을 설명하는 데는 분명한 거리가 있었습니다. 이어령 씨는 일본인의 사고, 문화, 언어습관, 조직의 특징 등 모든 것을 "무엇이든 축소하여 간단 명료화"시키는 단 한 가지 명제를 가지고 그것들을 설명했습니다. 그 책을 읽은 서구인들은 경탄을 마지않았고 일본지식인들도 경탄을 금치 못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한 민족의 문화와 사고를 그토록 예리하게 판단한 것이 단 한 가지 명제였다는데 무척 놀랐고 그 당사자가 일본인이 아닌 외국인 이였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고 일부 일본 지식인은 "무섭다"라는 표현까지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그 책을 중학교 2학년 때 읽었으며 강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중국인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과거 서구인, 우리 한국인들이 일본인들 보고 했던 말과 같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제가 식인문화를 중국인을 파악하는데 사용한 "단일명제"로 이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식인풍습은 중국에서 5천 년간 합법적으로 존재했고 그 대상은 황제부터 일반 민초 백성까지 이었으며 노신이 그토록 박멸하고 싶어 혼신의 힘을 다해 책을 썼을 정도로 중국인들 사이에 아무런 저항감 없이 널리 퍼져 사람을 "즐겨"먹는 것이 중국인들에겐 아무런 흥밋거리조차 되지 못했다는 것을 상기 하면 이는 분명코 간단히 보아 넘길 수 없는 범상치 않는 중국만이 갖는 독특한 문화이며 이는 이어령 씨가 일본인들을 분석할 때 사용한 일본인만이 갖는 독특한 축소지향의 풍습과 같은 정도의 중요성과 가치를 갖는 중국민족 특유의 풍속이라 생각되어지고 따라서 축소지향의 풍습과 식인풍습은 같은 용도로 사용되어 질수도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여러 책을 읽으며 노신과 오유 그리고 황문웅 등이 말한바 "식인풍습은 중국 5천년 사를 관통하며 이를 모르고 중국인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다" "중국역사는 식인의 역사다." 라는 말은 저로 하여금 더 큰 확신을 갖게 하였습니다. 중국인들의 사고를 이해하는 데는 우리가 그동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간단명료한 방법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 지식이 짧고 경험이 없어 더욱더 학술적으로 논리적으로 전개할 수 없었던 점은 유감입니다. 하지만 중국을 나름대로 분석하기 시작한지 몇 년 안 되는 기간에 나름대로 이정도로 판단할 수 있는 사고를 갖았다는 데는 나름대로 자부하고 있습니다.
4. 영아밀매, 10만원에 사서 400만원에 팔아… ‘충격’
[고뉴스] 2005-11-24 19:23
(고뉴스=황문성 기자) 중국에서 아기 매매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아기 매매를 주도한 사람들이 사회복지시설 책임자와 직원인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더하고 있다. 24일 중국 상해청년보에 따르면 최근 후난성 치둥현 공안국이 27명의 밀매자를 검거했으며, 검거된 이들은 헝양현 복리원 소속 7명 등 대다수가 사회복지시설 책임자와 직원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전했다.
이들은 22일 밤 한 직원의 고발로 꼬리를 잡혔는데, 제보자는 19일 헝양현 복리원이 5명의 아이를 장샤모 복리원이란 곳에 6만 위안(약 800만원)에 팔았으며, 이미 수년 전부터 이런 일을 저지러왔다고 폭로했다. 공안의 조사 결과 이들은 대략 아기 1명당 800위안(약 10만원)에서 1200위안(약 15만원)을 주고 산 뒤 8000위안(약 100만원)에서 3만위안(약 400만원)을 받고 팔아 넘긴 것으로 드러났다. 또 이들 시설은 나라에서 양국보조금을 타내기까지 했으면서 이 같은 일을 저질러 온 것으로 드러났다.공안당국은 사회복지시설의 원장과 간부 직원 등 여러 시설에서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영아 매매에 가담한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후난성 내 전체 복지시설을 상대로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http://news.paran.com/snews/newsview.php?dirnews=2746116&year=2005&rtlog=SP
-식인문화와 관련해 보신탕에 대한 기사를 보면 참고로 다음과 같다.
한국 사람들이 개고기 먹는 것은 인류 문명사를 살펴보면 당연하며 자랑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 기사는 동아일보 2002.12.4일자 기사이다. 개의 원산지는 바로 우리 동이 민족이 살던 동아시아이며 15000년 전 부터 가축화되기 시작했다는 기사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고대로 부터 개를 애완용으로 보질 않고 야생 동물로 보고 식육용 가운데 가장 단백질이 많은 동물로 보았기 때문에 다른 야생동물들과 같이 잡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문명의 역사가 길지 않은 서양 사람들은 개가 애완용이 된 이후부터 즉 가축에서 애완용이 된 이후부터 알고 있기 때문에 개고기 먹는 것을 혐오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식용 개를 狗(구)라 하고 인격화 된 고귀한 개를 犬(견)이라 하여 엄연히 구별하고 있으며 단군신화에서도 환웅과 같이 하늘에서 내려온 벼슬자리 5개 가운데 개가 포함돼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중국인들마저 개고기를 안 먹는 것을 보면 우리 문명보다 훨씬 뒤진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 아닐까? 서양인들이 개고기 먹는 것 운운하는 것은 이 번 연구 결과로 증명되었다. 미토콘드리아는 유전인자 속에서 생명의 기원을 밝히는 데 있어서 결정적 단서가 되고 있다. 최근 '아프리카 이브' 즉 세계 최초 여성은 아프리칸 이란 사실도 이를 통해 증명되었다. 서양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물론 한국인들의 개고기 먹는 것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연구 결과를 우리 문명 이해 수단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개고기를 함부로 먹자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서양이 문화 편견을 가지고 자기들 잣대로 다른 문화를 재려고 하는 제국주의적 망상은 버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동아일보 기사) 2002.12.4
나. “개의 원산지는 동아시아, 1만5000년전부터 가축화”
지구의 모든 개는 동아시아가 원산지이며, 1만5000년 전부터 인간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는 연구가 나왔다.
스웨덴 왕립기술연구소 피터 사볼라이넨 박사와 중국과학원 징 류 박사는 “654종의 개의 미토콘드리아 유전자를 조사한 결과 개의 조상은 1만5000년 전 동아시아에서 살았다”고 미국의 과학전문지 ‘사이언스’ 11월 22일자에 발표했다.
연구팀이 개의 미토콘드리아 유전자를 조사한 결과 동아시아의 개들이 유전적으로 가장 다양했으며 이곳의 개에서만 발견되는 DNA 조각도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동아시아에 개의 조상이 살았고, 이후 유럽, 아메리카로 이동했다는 것을 뜻한다고 연구팀은 설명했다. 또 미국과 스웨덴 연구팀의 유전자 조사 결과 약 1만2000∼1만4000년 전 인류가 러시아와 알래스카 사이의 베링 해협을 건너면서 개를 함께 데려간 것으로 나타났다.
개는 처음에 인간에게서 먹이를 얻어먹으며 친해지다가 동물 중 처음으로 인간과 함께 살게 됐다. 이후 집 지키기, 양 몰기, 사냥, 운반 등에 사용되면서 인간과 가장 친한 동물이 된 것으로 과학자들은 보고 있다. 그러나 이번 연구가 확실하지 않다고 보는 과학자들도 있어 앞으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한편 미국 하버드대 브라이언 헤어 박사는 개가 사람들과 쉽게 친해진 이유는 사람의 신호를 잘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사이언스’지에 함께 발표했다. 연구팀은 개, 강아지, 늑대, 침팬지를 대상으로 먹이가 든 상자와 빈 상자를 놓고 사람이 눈짓이나 손짓 등 갖가지 신호를 보낸 결과 개와 강아지가 먹이가 든 상자를 더 잘 구별했다고 밝혔다.
이상 <안원전 담론95>중에서Click here!
첫댓글 그림이 보이지 않음 ?....이상하네!?....
내 컴에는 잘 나오는데?... 위의 담론 95로 들어가 보세요
들어가 봤는데 안본것만 못해!!!!!!!!!!!!!!?????????????????? ..비위가 약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