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포트는 1975년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신비한 베일 속의 인물로 이야기될 만큼 실체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폴 포트 자신이야말로 비밀 유지가 혁명의 기본 원칙이라고 강조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 중에도 그의 출생과 본명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폴 포트는 캄보디아가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1928년에 왕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살로트 사(Saloth Sar)였다. 여섯 살 때 왕립 수도원에 들어가 1년간 교육을 받았고, 이후에는 6년 동안 카톨릭 계열 학교에 다녔다. 그가 유년 시절을 보낸 프놈펜은 상인들과 베트남인 노동자들로 가득 찬 도시였다. 청년기에 들어서기 직전인 1945년에는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는 불교 승려들이 베트남 공산주의자들과 연합해서 캄보디아 민족주의자들을 지도하는 정치 운동을 목격하기도 했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폴 포트는 전기공학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스탈린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던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해, 훗날 크메르 루즈 지도부를 형성하게 될 이엥 사리, 손 센, 키우 삼판 같은 동지들과 깊이 교류하게 된다. 반면, 훗날 대중적인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으로서 권력투쟁 과정에서 크메르 루즈에 의해 희생되는 후 윤처럼 서구 지향적이고 개방적인 사고를 지닌 인물들과는 충돌했다.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생각의 차이는 필명에서부터 나타났다. 다른 동료들이 ‘자유 크메르’나 ‘크메르 노동자’같은 이름을 선호한 데 반해, 폴 포트는 ‘순수 캄보디아’같은 필명을 고집했다.
폴 포트가 세 차례나 낙제한 끝에 캄보디아로 돌아온 1953년, 프랑스군의 탄압에 맞서 캄보디아 독립 운동이 급진화되기 시작했다. 폴 포트는 형제인 차이(Chhay)를 따라 베트남인의 지도를 받는 캄보디아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다.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은 폴 포트에게 대중과 더불어 일하라고 가르쳤지만 폴 포트는 그들의 교시에 거부감을 가졌고, 공산주의 운동도 캄보디아인 스스로 해결해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웃 국가의 공산주의 활동 선례보다는 자국 캄보디아의 역사를 통해서 캄보디아 공산주의 활동에 필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보편적 사고가 아니라 민족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중세의 찬란했던 앙코르 왕국이라는 이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이웃 베트남과 태국에 빼앗긴 땅을 수복해야 한다는 염원이 가득 차 있었다. 그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족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했다. 민족의 순수성 회복에 장애가 되는 캄보디아 내의 소수 민족들은 우선적으로 척결되어야 했다. 그의 이런 구상에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해외 유학파 지식인들도 그에게는 제거해야 할 적이었다. 필요하면 전쟁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앙코르 왕국의 전성기 강역. 폴 포트의 이상은 옛 앙코르 왕국의 영역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었다.

앙코르 왕국의 유적지 앙코르 와트
프랑스와 베트남 군대가 캄보디아를 떠난 뒤에 폴 포트는 캄보디아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신망을 얻기 시작했다. 그는 ‘폴’이라는 암호명을 사용하면서 8년간의 게릴라 투쟁 기간(1967~1975) 동안 크메르 루즈 내에서 자신의 지배력을 공고히 했다. 1975년 4월 크메르 루즈가 프놈펜에 입성하자마자 시작된 도시 주민 강제 소개에 대해 후 윤이 반대하자, 폴 포트파는 그를 처형했다. ‘민주 캄푸치아’(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즈가 1975년 4월 프놈펜에 입성한 뒤에 이미 붕괴해버린 론 놀의 ‘크메르 공화국’ 정권을 대신해 수립한 캄보디아의 국가명이다. 1979년 1월 베트남의 침공으로 크메르 루즈가 도주한 뒤에는 헹 삼린이 이끄는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를 세운 뒤에도 폴 포트의 단호하고도 저돌적인 태도는 누그러질 줄을 몰랐다. 1975년의 승리 연설에서 그는 크메르 루즈가 어떤 외부 세력과도 연계되지 않은 깨끗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하며, 민주 캄푸치아는 앞으로 고립을 택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외국어와 소수 민족의 언어 사용이 금지되고, 외국과의 무역도 단절되었다. 다만 오래전부터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중국과는 예외적으로 부분적인 교역이 이루어졌다. 쌀과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들이 중국으로 반출되었고, 중국에서 다량의 무기가 들어왔다. 그 무기는 잃어버린 옛 땅을 회복하기 위해서 베트남과의 전쟁에 사용되었다.
역사적 기억 속에서나 존재하는 상상의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폴 포트는 그 누구라도 제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부하들에게 나쁜 배경 출신의 사람 한둘쯤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베트남 침공을 앞두고는 “적들을 마음대로 죽이되, 하잘것없는 베트남인들은 정글 속에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원숭이들처럼 비명을 지르며 죽게 하라”는 말로 크메르 루즈를 격려했다.

베트남과의 전쟁에 출전하는 크메르 루즈군
그러나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는 이상에 사로잡힌 그는, 남부 베트남 지역을 수복하겠다는 일념에서 베트남을 침공한 것이 화근이 되어 권력을 상실하게 된다. 1979년 베트남군이 폴 포트 정권에 맞서서 투쟁을 전개하던 캄보디아 반군을 앞세워 캄보디아를 침공했을 때, 크메르 루즈는 서방의 군사 전문가들과 외교관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고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폴 포트는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북부의 밀림 지대로 피신했다가, 서방의 압력이 가중되자 1997년에 동료인 키우 삼판에게 체포되어 형식적인 재판에 회부되었다. 1998년 1월에 폴 포트가 가택 연금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며, 4월에는 그가 사망해서 태국 관리가 입회한 가운데 화장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프놈펜을 공격하는 베트남군

사망한 폴 포트

폴 포트의 장례식
첫댓글 마지막 장례식 사진은 뭔가 허무하네요..
광신적인 공산주의자라기 보다는 극우파시스트 성향이네요 약소국에 태어난 히틀러라고 해야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