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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불의에 맞서야 영혼도 얻고 영광도 얻게 됩니다.(행16:35-40)
2025, 2/23. 설교문
오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행16:35-40절 말씀으로“불의에 맞서야 영혼도 얻고 영광도 얻게 됩니다.”이런 제목으로 말씀 전할 때 주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 이곳에 함께하길 원합니다.
오늘이 2월 마지막 주인데, 원래 막바지 추위가 좀 매섭습니다. 이제 다음 주가 개구리들이 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이라 큰 추위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봄이 되면 일교차가 좀 커서 낮에 더운 기준으로 옷을 입다보면 추위를 느끼고 감기 걸리기 딱 좋습니다. 건강관리 잘 하셔서 높은 삶의 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는지요? 우리 인사 나누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반갑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3가지로 은혜를 주셨습니다.
첫째로, 신앙인은 세상의 불의에 눈 감으면 안 됩니다.(37절)
둘째로, 하나님 뜻대로 고난 받으면 존귀와 영광을 얻게 됩니다.(39절)
셋째로, 신앙인의 우선적 관심은 영혼들이어야 합니다.(40절)
그러면 본문말씀을 따라가면서 신앙인들이 왜 불의에 눈 감으면 안 되고, 영혼들에게 관심을 가져야하는지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신앙인은 세상의 불의에 눈 감으면 안 됩니다.(37절)
본문 3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 아멘.
바울일행이 빌립보감옥에 갇혔지만 그곳에서 밤에 찬양과 기도를 하던 중 하나님께서 지진을 일으키고, 옥문이 열며, 바울과 실라의 손발의 착고를 풀어줘 탈옥을 해도 되는 상황이 만들어줍니다.
이런 상황에서 간수는 바울과 실라가 탈옥한 줄 알고 자결하려는 찰나에 바울이 그의 자결을 막습니다. 이로 인해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특별하게 생각해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 세례를 받고 온 가족이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날이 새고 바울일행을 고문했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 석방을 통보하지만 바울이 로마사람인 우리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혹독한 매질과 고문을 가하고 감옥에 집어넣더니 이제 사과 한마디 없이 내보려하느냐? 며 항의하자 그들이 놀라 바울에게 와서 정중하게 성을 떠나줄 것을 요청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당찬 모습을 보게 되는데, 석방소식을 듣고도 좋아하지도 당장 떠나지도 않고 관원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로마시민권자라는 것을 밝혔는데, 당시 로마시민권자들은 로마제국 어디든 여행할 수 있고, 심문 중에 매질이나 고문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그 관원들은 바울과 실라의 신분을 확인하고 매질이나 투옥을 하면 안 되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매질을 가한 것입니다.
또 늦게라도 이들이 로마인임을 알았다면 매질하고 투옥시킨 것을 사과하고 죄가 없음을 입증해서 석방해야 하는데도 슬그머니 석방시키려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런 저들의 행태를 지적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풀어준 것만으로 그냥 감사하며 그냥 따르는 게 맞을까요? 아니면 잘못된 것을 지적하며 그것의 시정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맞을까요? 네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신앙인으로 적합한 행동입니다. 왜냐면 우리의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 또한 의롭게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세가 불리하고 내게 불이익이 될 것 같으면 그것이 잘못이고 죄 인줄 알면서도 그냥 모른 척 눈 감아버리거나, 오히려 강자 편에서 약자를 더 궁지에 몰아넣는 짓거리들을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북한처럼 독재자들의 뜻을 거슬리는 말만 해도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 짐승처럼 살다 억지로 생을 마쳐야 하는 경우라면 어떻게 항거할 수 있겠습니까?
언젠가 탈북자를 중국에서 교육시켜 북으로 다시 보내 복음을 전하게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게 과연 옳은 일일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면 그곳에서 복음전하면 100% 잡히고, 잡히면 사형 당하는데 그걸 알면서 사지로 몰아넣는 것이 옳으냐였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일일지라도 타인의 생명을 죽음으로 내몰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들이 간절히 원하고 죽음을 각오해 설득이 안 되다면 어쩔 수 없겠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의 사정은 양심을 말하고 불의에 항거한다고 감옥은 갈지언정 목숨은 잃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양심을 버리고, 신앙인들이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여 불의에 침묵하고 동조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신앙의 소리, 양심의 소리에 입을 닫아버리면 정작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때는 그 누구도 나를 도와줄 사람들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입을 닫는 것은 대세를 거스려 옳은 이야기를 하면 그만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박근혜대통령이 탄핵될 때 온 언론이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가짜뉴스를 퍼뜨렸는데, 테블릿PC를 포함해 모든 것이 거짓으로 밝혀졌는데 이미 탄핵이 되었으니 구속을 시켜야겠는데 방법이 없자 최순실이 삼성에서 말 지원받은 것을 박근혜가 그 이익을 함께 누렸다고 경제공동체로 엮어 구속시킵니다. 부자간에도 경제공동체 인정이 안 되는데, 남남을 경제공동체로 엮었습니다.
당시 박근혜 탄핵을 많은 사람들이 기각될 거라 예측했지만 결론은 8:0으로 인용인데 그 많던 의혹은 다 사라지고 헌법수호의지가 없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이렇게 8:0이 나온 것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헌재를 에워싸며, 탄핵이 안 되면 촛불에 타 죽을거라며 언론과 탄핵찬성파들의 기세 등등하자 이에 겁을 먹은 재판관들이 법과 양심이 아니라 자신들 이익에 따라 판결한 결과입니다. 법과 양심에 떳떳하게 탄핵했다면 얼마나 가문에 영광이겠습니까? 탄핵시킬 혐의가 없음에도 촛불에 타 죽을까봐 탄핵시키고 자기들도 떳떳하지 못하니 대통령을 탄핵시킨 헌법 재판관이었다고 명함도 못 내밀고 쥐 죽은 듯이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인이 세상의 불의를 용납하고 못 본체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을 빛과 소금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고 그름과 참과 거짓, 진리와 비 진리를 정확하게 구분하고, 옳은 것과 참과 진리를 위해서는 나에게 해가 되어도 분연히 말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함을 의미하는 뜻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관원들의 잘못을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담대하게 말합니다.
베드로도 공회에 잡혀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협박을 받았음에도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이렇게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그를 풀려나게 하십니다.
불의와 불법이 있으면 그걸 지적해 깨닫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서면 사람을 얻을 것이고, 돌아서지 않아도 우리는 파수꾼의 역할을 다했으니 괜찮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불의를 보고도 항의하고 책망하지 못하면 비겁한 것이요, 동시에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막음으로 그 영혼을 죽이는데 일조한 셈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불의와 맞설 수 있는 용기와 담대함을 가짐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 뜻대로 고난 받으면 존귀와 영광을 얻게 됩니다.(39절)
본문 3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그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아멘.
관원들이 바울과 실라에게 성을 떠나줄 것을 정중하게 요청했는데, 여기서‘청하다’의 뜻은‘애걸하다’의 의미이니 22-23절을 볼 때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그때는 바울과 실라를 죄인으로 취급하고 매질을 하고 옥에 가두었지만, 지금은 상관들이 바울과 실라에게 깊이 사과하고 두려워하며 아주 정중하게 대해준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바울과 실라가 고난을 통하여 비천한 죄수의 신분에서 욱일승천하여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영광과 존귀를 받는 위대한 존재로 바뀌었음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이렇게 우리가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으면 주님은 반드시 우리의 고난을 기억하사 우리를 존귀와 영광과 칭찬을 받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도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그 모진 고통과 아픔을 겪으시다 죽임을 당하셨는데, 그 후 어떻게 되셨습니까?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의 영광과 권세를 얻으시고 하나님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빌2:5-12)
주님도 고난을 통해 영광을 얻으셨는데, 이 원리는 우리 모두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이루기위해서 또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고난을 받으면 주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주의 일을 하다가 무슨 말을 들어도 파르르 떨지 말고 참고 견디십시오.
다윗이 사울왕의 추격을 피해 시글락으로 도망갔는데, 이 시글락은 원래 시므온 지파의 땅이었다가 블레셋에게 빼앗긴 곳입니다. 할례 받지 못한 원수의 나라에 몸을 의탁한 다윗으로서는 참으로 고통이요 수치였을 것입니다.
다윗이 이런 수치와 고통을 당한 것은 그가 국가와 사울왕에게 범죄나 잘못을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과 사울 왕을 위해 충성을 다하다 그런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에게 돌아온 것은 영광과 상급이 아니라 시기와 질투 핍박이었습니다. 그 결과 광야로 이방 땅으로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고 말았는데, 이런 다윗의 고난은 전형적인 의인의 고난, 하나님나라를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다윗에게는 힘든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이때부터 그에게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을 만들기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하나님이 고난당하는 의인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 동시에 그들을 영광스럽게 해주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시기로 노예로 팔려갔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을 합니다. 또한 사도바울도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죄인이 되어 로마로 끌려갔지만 하나님은 이걸 통해 오히려 세계 복음화의 길로 이끄시고, 바울을 가장 위대한 사도로 세우십니다.(행21장 이하)
노아도 당시 죄악이 창궐하여 고통당했지만 결국 믿음을 지켜 최후 승자가 됩니다. 또 복음을 전하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스러진 믿음의 선배들이 지금 주님 곁에서 누리고 있을 영광을 생각할 때 저들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의 의로운 백성들이 고난당할 때 피할 길을 열어주실 뿐 아니라(고전10:13) 나아가 크고 영광스러운 길로 인도하셨음을 기억해야합니다. 때문에 의를 행하고도 고난당할 때 파르르 떨거나 퍼붓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주를 위해 고난당하고 희생하는 것이 크면 틀수록 하늘의 영광과 존귀의 상급도 크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신앙으로 삶의 현장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기뻐하고 감사하십시오. 벧전4:13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함이라."이렇게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진리와 의와 사랑을 이루기위해서는 희생과 고난은 필수적입니다. 이 희생과 고난 없이는 주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드리지 못합니다.
이걸 아시고 주를 위하여 고난 받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신앙인의 우선적 관심은 영혼들이어야 합니다.(40절)
본문 4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아멘
빌립보 상관들이 바울과 실라에게 빌립보성을 떠나줄 것을 요청하자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나와 먼저 복음을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된 루디아의 집으로 가서 이들을 만나보며 그들을 위로하고 빌립보를 떠납니다.
이 루디아는 바울일행이 기도처를 찾기 위해 강가로 나갔다가 만나 전도를 통해 빌립보에서 가장 먼저 예수 믿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 여인이 바울일행에게 자기 집으로 함께 갈 것을 강권하였는데, 이것이 빌립보교회의 시작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이 자기 집을 교회로 내준 것입니다.
이 빌립보교회의 구성원은 루디아와 가족들, 간수와 그 가족들, 또 귀신에게 붙들려 점치던 여종이었을 것인데,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옥에서 나오자마자 매 맞고 고통당한 자신들의 육체는 돌보지 않고 우선 자신들이 전도하여 세운 교회와 그 형제들을 돌보고자 루디아의 집으로 갔던 것입니다.
이걸 통해 우리는 사도바울이 옥에 갇혔어도 그의 마음은 항상 교회와 성도들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영혼들과 자신이 전도한 사람에게 늘 관심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복음전파는 성도의 의무입니다. 그 의무를 행하는 과정에서 결실을 얻게 될 뗀데 나로 인해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를 찾은 사람에게 전도자는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갖는 것은 당연합니다.
전도하여 교회에 데리고 왔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교회로 인도한 후부터는 그 영혼이 구원에 이르도록 돌보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도 죽임을 당하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다음 가장 먼저 하셨던 일이 바로 11명의 제자들을 찾아가서 오늘 사도바울처럼 그들을 위로하신 일입니다.
교회에 잘 적응은 하고 있는지, 가정이나 직장에는 문제는 없는지, 기도해줄 것은 없는지 항상 관심을 갖고 그가 홀로 설 때까지 지켜보며 신경 줘야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전도를 하면 그 다음은 교회나 다른 사람이 알아서 해줘야한다고 생각하고 관심을 안 두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옳지 않은 일입니다.
새 신자를 가장 잘 알고 돌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전도자입니다. 다른 분이 돌본다면 새신자도 마음이 놓이질 않을 것이고, 전도자도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나를 인도한 사람이 같이 앉아 함께 예배도 드리고, 식사도 하며, 교회생활을 어떻게 하고 하나하나 가르쳐준다면 얼마나 정착이 쉽겠습니까?
물론 교회에서도 함께 해야 하겠지만, 우선은 전도자가 관심을 두지 않으며 그 영혼은 결국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고 말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전도를 떠나면 항상 자신이 개척한 교회들을 돌아보며 지도하며 다음 전도할 곳으로 나갔습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전해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신 적이 있으신지요? 또 전도해온 영혼을 올바른 신앙인으로 세워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불신자를 교회로 인도하여 구원받게 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지만, 그렇게 인도한 영혼을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돌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여 영혼도 살리고, 그 영혼이 건강하게 자라가는 것을 보는 기쁨을 누려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여러분 되시기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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