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 이승우 / 위즈덤하우스
작가의 말에 이 소설의 또 다른 제목이 나온다. "내 안에 또 누가 있나"
·····내 육체에는 또 다른 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과 싸워서 나를 아직도 내 안에 있는 죄의 종으로 만들고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사람인가요?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구해내겠습니까·····? 295
이 소설의 제목 "독"과 다른 제목 "내 안에 또 누가 있나"로 미루어 볼 때, 위 문장이 이 소설의 기본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된다. 내 안에서 자라는 악 또는 계속 퍼져가는 독을 제어하지 못한 인간의 종말. 나의 행동이나 생각을 직접 설명하지 못하는 현대인, 아니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인간의 행동이나 사회 현상을 설명할 수 없을 때, 인간계가 아닌 신계의 장난으로 치부했던 것과 다름이 없다. 너무 평범하다.
다른 축이 있다. 84쪽에 작가는 지나가듯 이런 글을 넣어둔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84
인간의 삶은 누구나 비슷비슷하며 기성복을 입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라 한다. 모두 같은 옷을 입어도 입은 사람에 따라서 맵씨도 다르고 어떤 조합으로 입었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연출되기도 한다. 작가는 그런 논조로 계속 주장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밖에서 주어진 환경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변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태어나서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여정의 목적지는 같다. 그러나 그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 가는 오로지 내면의 가르침, 내면의 나침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외부의 힘이 좌우할 때가 상당하다. 그것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좌우를 살펴야 할 이유이며 만나는 사람을 선택하거나 피해야 하며, 좀 더 나은 동네에 집을 구하고, 직장 또한 같은 이유로 선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84쪽의 말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식사 전에 전통에 따라 손을 씻지 않았다고 당시의 지식인들이 따지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이 이야기와 겹치는 부분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세상의 일이라는 것이 내가 어떻게 습득하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받아들인 그 어떤 것이라도 내가 어떻게 소화하고 어떻게 표현하느냐, 또는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생각은 행동에 의해서 완성된다. 237
뱀이 맹독을 품고 있지만 물지 않으면 상관없다. 똥을 싸더라도 변소에 싸면 상관없다.
나에게는 그 메세지가 더 크게 울렸다.
* * * * *
죽음은 확실하지만 가정이고, 삶은 불확실하지만 현실이다. 166
죽음은 내 안에서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그엇이 조금만 더 자라면 나를 헤칠 것이다. ····· 내가 죽는 것은 내 안에 이미 들어와 살고 있는 죽음 때문에 죽는 것이다. 죽음이 힘이 세지고 몸이 불어나서 나를 무너뜨릴 수 있게 되면 죽은 것이다. 하지만 만고불변의 진리가 있나니, 사명이 있는 자는 죽지 않는다. 그 사명이 그를 죽지 못하게 한다. 나는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 나는 바닥까지 내려갔고, 바닥을 통해 정상에 닿았다. 그러므로 나는 죽을 때까지는 죽지 않을 것이다. 죽지 않고 살아 있을 것이다. 254
똑 같으면 비난할 수 없어요. 우리는 자기와 다른 사람에 대해서만 비난해요. 265
* 서큐버스란 중세 유럽에서 믿었던 여성 악마의 한 종류로, 여자 모습을 하고 남자(특히 수도자)의 꿈에 나타나 성관계를 맺어 기력을 갈취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악귀이다. 꿈에 나타난다 하여 몽마(夢魔)라고도 하고, 성관계를 하는 꿈으로 성욕을 일으킨다 하여 음란마귀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