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공연 끝났네요. 그저 아쉬울뿐 ㅠㅠ)
극단 고리의 공연을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여전히 천장이 낮은 입구를 지나 소극장으로 들어가니 여자 셋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순간 이번에 볼 연극의 제목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었다. ‘진짜 신파극’. 말 그대로 신파극다운 모습이었다. 전에 연극 ‘도피의 기술’을 볼 때는 제일 뒤에 앉아서 배우들을 자세히 못 봤던 게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어서, 이번엔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았다. 그리고 곧 노래가 끝나면서 공연 전 해설을 위해 사회자가 무대로 나왔다. ‘도피의 기술’을 볼 때 내 앞에 앉아계셨던 이상훈 선생님이다. 연극 시작 전에 간단하게 가계도를 설명하고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서인 듯했다. 간간이 관객들에게도 말을 걸었는데, 도현이랑 나를 보면서 ‘이 자식들 또 붙어있네.’라는 느낌의 눈빛으로 우리의 어깨를 두드리고 지나가던 그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연극은 무대가 아닌 객석 오른쪽에서 시작되었다. 나 같은 경우는 이미 ‘도피의 기술’에서 봤던 배우들이라 관객들 속에 섞여 객석에 올라갈 때 미리 발견하고는 처음부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폭의 두목인 아버지 김평한과 그런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김학동. 두 사람이 배를 타고 무인도로 알려진 ‘풍진도’로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풍진도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창씨개명을 하고 친일파로 살다가 해방 직후 사람들을 피해 숨어들어온 증조할아버지 ‘가야마 타로(김태균)’가 가족들과 살고 있다. 이들이 풍진도로 향하는 것은 가족들을 보기 위해서가 아닌 풍진도에 묻혀있다는 보물을 찾기 위해서다. 보물이 있는 곳을 아는 이는 증조할아버지 뿐. 이들 부자는 증조할아버지에게서 보물이 있는 곳을 알아낼 생각이다. 배에서 티격태격 싸우던 이들 부자가 풍진도로 내리는 모습은 퍽 웃기다. 관객석을 하나하나 밟고 내려가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멀뚱멀뚱 쳐다보는 관객에게 ‘야, 빨리 안 비켜?’라고 말하기도 한다. 관객들이 모두 웃고 있는 사이에, 그들 부자 앞에 김평한의 이복동생인 세이끼가 나타난다. 세이끼는 전쟁에 참전해 죽은 아버지을 대신해 삼촌인 타다시가 어머니인 아이꼬와 부부가 되어 낳은 아이다. 더욱 우스운 것은 세이끼가 자신의 여동생인 요시코와 다시 결혼을 해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다. 비정상적인 그들의 관계, 하지만 이곳 풍진도에서는 모두 허용된다. 그것은 일본의 천황을 신처럼 섬기는 가야마 타로의 뜻이다. 일본천황의 가족들은 대대로 그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친족혼이 가능했다는 것을 예로 들며 그들 남매를 결혼 시킨 것이다.
김평한은 보물을 찾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를 꼭 닮은 아들 김학동을 이용한다. 제 할아버지를 꼭 닮은 김학동은 그 특유의 성격와 가져온 선물들을 이용해 가족들과 금세 친해진다. 그리고 마치 일본의 군국주의 시대의 모습에서 그대로 멈춰버린 풍진도의 모습 속에서 서서히 가족들의 비밀을 알게 된다. 전장으로 할아버지를 내몬 증조할아버지와, 그 이후로 이어진 복잡한 가계도. 오로지 천황만을 외치는 그들의 모습에선 가족의 정을 발견할 수가 없다. 연극은 학동이 선물로 가져온 라디오에서 천왕의 병세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가야마 타로가 듣게 되면서 급박하게 흘러간다. 천왕에게 친서를 전해주라며 학동에게 군복을 입혀 보내는 가야마 타로. 김평한은 가야마 타로에게서 보물이 있는 곳을 알아내기 위해 학동을 이용해 천황을 만나고 온 것처럼 사기를 친다. 허나 학동은 가짜로 만든 천황의 답장에 만세를 외치는 증조할아버지를 보다 못해 자신과 아버지가 사기를 친 것을 말해버린다. 그리고 천황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리며 증조할아버지에게 역사 속에서 그만 깨어나 현실을 바라보라고 한다. 그러나 가야마 타로는 끝내 천황을 따라 할복자살을 하고, 김평한과 세이끼는 섬의 보물을 가지고 싸움을 한다. 타다시는 자신의 자식들이 낳은 아이를 죽이고, 요시코는 아이의 죽음에 통곡을 하며 쓰러진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위로 실수 때문에 떨어진 미사일이 섬 아래 묻혀있는 화약고와 함께 터지면서 풍진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죽는다. 혼자 살아남은 타다시만이 허무한 표정으로 제대로 된 것은 소나무 밖에 없다고 중얼거리며 연극은 막을 내린다.
‘도피의 기술’을 봤을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 본 ‘진짜 신파극’ 역시 간간이 나오는 개그 요소들 때문에 많이 웃었다. 역사와 전쟁, 그리고 그 속에 갇혀 살아온 한 가족의 이야기. 자칫하면 무거워질 수도 있는 이야기를 연극의 중간 중간 나오는 배우들의 코믹한 연기로 풀어주는 것 같다. 연극을 다 본 후에야 왜 이 연극의 제목이 ‘진짜 신파극’인지 알 것 같다. 우리가 지나온 역사. 수많은 전쟁과 다툼 속에서 만들어낸 우리의 역사야말로 말 그대로 신파극이었다. 연극 속에 나온 가야마 타로와 그 자손들의 모습은 마치 우리 민족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일제강점기가 지난 후에도 서로 땅을 가르고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우리 민족의 역사. 그리고 마치 연극 속의 배우들에게서 가족의 정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지금 우리 민족의 모습에선 ‘민족의 정’이란 느낄 수가 없다. 우린 지금도 지난 역사를 가지고 종종 다투곤 한다. 사실 그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우리 민족의 역사는 상처가 많고, 아직까지도 그 상처들은 아물지 못했다. 허나 지금도 그 역사의 미몽에 갇혀 헐뜯고 싸우고, 결국은 과거를 답습할 뿐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신파극이 아닐까. 그저 씁쓸한 웃음만이 나온다. 과거와 역사는 중요하지만, 결코 그것이 主가 되면 안 된다. 연극 ‘진짜 신파극’은 그것을 관객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신파극 같은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며, 난 결코 웃을 수만은 없다. 외면은 더더욱 가당치않다. 우리의 어리석고 뼈아픈 역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답습하지 않는 것. 그것이 남겨진 우리의 몫이 아닐까. 이런 좋은 연극을 보여주신 김경민 선생님께 감사한다.
숙제로 내주시긴 했지만. 여튼 연극 보고 나서 아무도 자유게시판에 감상문을 안 올리길래 올려봐요.
항상 좋은 연극 보여주시고, 저희 때문에 고생하시는 김경민 선생님께 그저 감사하다는 말 밖에 ㅠㅠ..
첫댓글 헤에- 그렇구먼.
성건우 감사 ... 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