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 성지 주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오늘은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이제 코로나 19가 거의 종식되었지만, 우리에게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면서, 우리 내면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약한 인간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성찰하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의미를 깊이 바라보게 됩니다. 이 기회로 자신을 깊이 돌아보게 되면서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호하기 위해 나뭇가지를 흔들었던 사건을 기념하기 때문에 성지주일이라고 하는 한편, 성주간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의 긴 수난기를 듣기 때문에 수난주일이라고도 하는데, 이 두 가지 사건을 함께 묶어서 수난 성지 주일이라고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그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무엇 하러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습니까? 한마디로 죽으시러 들어오신 것입니다. 아이로닉하게 죽으심, 그것을 통해 우리 인류의 구세주, 보다 구체적으로는 나의 구원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죽으심으로서 빠스카,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 구약의 빠스카의 신비를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키시는 신약의 빠스카인 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면서 환성을 지릅니다. 나뭇가지를 손에 들거나 길에 뿌리면서 또는 겉옷을 벗어 길에 깔면서 외칩니다.
“호산나, 다윗의 후손,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 이스라엘의 임금님, 높은 데서 호산나.”
나뭇가지나 겉옷을 벗어 길에 까는 행위는 바로 왕에게 드리는 경의의 표시였습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호했습니까? 그들은 기적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 기적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기적을 보면서 이 사람이 자기들을 정치적으로 해방시켜 줄 메시아, 구세주가 아닐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기대에서 예수님을 환호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전성기를 이루었던 다윗 왕 시대처럼 이스라엘을 위대한 민족으로 정치적인 해방을 이루고 다시 한 번 만방에 위세를 떨치는 그런 강대국이 되게 하는 임금으로서의 구세주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예수님 그런 분이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겸손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십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기를 휘날리며 달려오는 백마가 아닌 어린 나귀를 타고 터벅터벅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십니다. 겸손하신 그 모습이야말로 참으로 진정한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저는 한편, 나귀의 모습을 상상해 보고, 나귀의 역할을 헤아려 봅니다. 저는 나귀의 이미지에서 사제의 모습, 사제의 역할을 함께 떠올리게 됩니다.
사제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등에 업고 사는 사람들이지요. 예수님을 등에 태우고 다니는, 예수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여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때로 환호합니다. 누구를 보고 환호합니까? 물론 예수님, 주님을 보고 주님께 환호를 드립니다. 그런데, 나귀인 사제가 착각을 합니다. 자기를 보고 환호하는 줄 알고 입이 벌어집니다. 히이잉하고 웃고 좋아서 헬렐레하기도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찬란한 착각입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는지 아시지요? 신자들이 사제에게 극진하게 대하고 존경을 드립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등에 태우고 있는 분, 주님 때문이지요. 주님을 환영하고 그분께 환호를 드리고 때로는 환성을 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제는 나귀인 자기에게 환호하는 줄로 알고, 아니, 자기가 잘나서 신자들이 자기를 대우해 주는 줄로 착각을 합니다.
때로는 자기는 한낱 나귀라는 것을 모르고 자기가 주님이 된 것처럼 잘못 알고 환호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착각을 합니다. 슬프도다. 찬란한 착각이여! 오호, 통재라!
신부들만 착각합니까? 아닙니다. 신자들도 착각을 합니다. 신부는 다만 주님을 등에 태워드리는 존재라는 것을 잊고 신부가 주님처럼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고 착각합니다. 그리고 신부가 모든 것을 다 해 주기를 바랍니다. 물론 우리가 사제에게 바라는 것이 있고 사제는 마땅히 신자들의 요구에 어느 정도 부응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은 주님이지 사제가 아닙니다. 사제는 다만 주님을 우리에게로 모셔다 드리는 존재, 즉 나귀에 불과합니다. 나귀인 사제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면 그것 또한 착각입니다. 많은 경우에 보면, 나귀인 사제에게 많은 것을 기대했다가 자기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어떻게 합니까?
발로 차지요. 나귀이니까 발로 차여도 할 말은 없지요. 사실 발로 차기만 하면 다행이지요. 그런데 바로 오늘 우리가 수난기에서 들은 것, 그대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칩니다. 그 외침에 사제는 죽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 불과 하루 전에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라고 환호하던 그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여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라고 놀랍니까? 그 모습이 가증스럽게 느껴집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우리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바라보면서 인정해야 합니다. 바로 그 군중의 모습이 우리 자신들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만약 어떤 사람에게 그가 나에게 잘해 준다고 생각하거나 나에게 이득이 된다고 생각할 때는 온갖 칭찬을 늘어놓고 좋은 소리를 합니다.
하지만 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거나 아니면 나에게 서운하게 대했다고 생각했거나 조금이라고 손실을 끼쳤다고 생각하여 미워하고 가차 없이 등을 돌리거나 심지어는 욕을 해댄 적이 있다면, 나도 바로 그 군중들의 하나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수난기의 클라이맥스는 어느 대목입니까? 그것이 바로 수난기의 정점을 이루는 부분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라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께 부르짖으시는 모습은 참으로 우리를 숙연하게 합니다. 백인대장이 외칩니다.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절규를 들으시고 예수님을 죽지 않게 하셨습니까? 그 잔을 거두어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방식, 우리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결코 우리의 꼭두각시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이십니다.
당신의 방법대로, 당신의 시간표대로, 당신의 더 깊고 오묘한 방법으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원의를 들어주십니다. 그분은 예수님을 죽음에 두지 않으시고 부활시키신 분이십니다. 죽음을 통해서만 부활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대해 드려야 하며 하느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그분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셨듯이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겪는 고통은 그분이 주시는 영광에 참여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입니다. 제 뇌졸증은 다만 참으로 하느님이 누구신지 배우는 과정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 십자가와 죽으심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삶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일 년 중 가장 거룩한 시기 성주간을 거룩하게 보내시기를 기도합니다.
첫댓글 2023년 4월 2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류해욱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