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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8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겸손한 자의 소원 》
시 10:17~18
〈 겸손한 자 vs 악한 자 〉
오늘 설교 제목이《 겸손한 자의 소원 》입니다.
이 제목은 오늘 본문 시편 10편 17절에서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17절)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여기서 ‘겸손한 자’는 기독교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시편은 구약성경에 속하지만 ‘겸손한 자’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시편 10편 17절의 겸손한 자,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그 소원을 들어주는 자입니다.
신약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고 아버지로 부르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요, 공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면서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오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이 진정 ‘겸손한 자’인 줄 믿습니다.
겸손은 참으로 어려운 단어입니다.
누군가 ‘나는 겸손하다’라고 말하면, 그 순간 그는 교만한 자가 됩니다.
오히려 ‘나는 교만한 자입니다.’라고 고백하면, 그 사람이 진짜 겸손한 자일 수 있습니다.
단어의 뉘앙스가 이렇게 깊고 오묘합니다.
시편 10장을 쓴 시인은 시에서 기독교인을 ‘겸손한 자’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겸손한 자의 소원, 그 내용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깊고 오묘한 시로 드러냅니다.
‘겸손한 자’는 기독교인을 지칭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예배하는, ‘기독교인의 소원이 뭐냐’는 겁니다.
이 소원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의 소원을 드러냅니다.
시편 10장에서 ‘겸손한 자’의 반대말은 ‘악한 자’ 곧 ‘악인’입니다.
(4절)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 교만한 자의 소원 〉
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예배하는 자를 ‘의인’ ‘겸손한 자’로 선포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를 ‘악인’으로 선포합니다.
‘악인’은 총칼을 든 사람이 아닙니다. 사기꾼도 아닙니다. 4절을 보십시오!
_ 악인은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_ 악인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입니다.
☞ 하나님을 인정하면 의인이고, 하나님을 부인하면 악인입니다.
시편 기자는 ‘겸손한 자의 소원’에 대비하여 악인 곧 ‘교만한 자의 소원’을 드러냅니다.
사람이 소원을 품으면 그 소원대로 사는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이 없다’ 하는 사람들의 소원이 있습니다. 시편 10장 5절, 6절에 나옵니다.
(5~6절) “그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그에게 미치지 못하오니 그는 그의 모든 대적들을 멸시하며 6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시인이 관찰한 ‘악인들의 사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탄탄대로를 걸어갑니다.
그들의 삶에는 흔들림이 없습니다.
환란을 당하는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삶에는 간섭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잘못에 하나님은 눈감아주시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자기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면서 성공하고 출세한 사람들의 소원이며 모습입니다.
☞ 이들의 모습은 종종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회의감을 품게 합니다.
‘예수 안 믿는 저 사람들은 저렇게 잘 나가는데, 내가 괜히 예수 믿었나?’
‘하나님이 살아계시기나 한 것인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악한 자들이 저렇게 형통할 리가 있나?’
예수 믿는 ‘겸손한 자’들은 그래서 자주 번민합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1절)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에 대한 질문입니다.
〈 하나님의 간섭하심 〉
예수 믿는 ‘겸손한 자’들은 늘 하나님을 의식합니다.
안 믿는 자들은 “위험한 장사가 이문이 많다!” 하면서 푹푹 내지르며 삽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윤리 도덕보다는 재물이 우선입니다.
그렇게 살면서 대박을 터뜨리고, 세상 돈을 다 쓸어담습니다.
황금만능, 배금주의,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세상을 만듭니다.
그렇게 돈과 명예를 거머쥐고 부귀영화를 누립니다.
고난도 없습니다. 돈으로 막아냅니다. 그러니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도 않습니다.’(6절)
☞ 이 모습에 시인이 화가 치밀어 한마디 합니다.
(15절)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
그런데, 하나님이 이 기도 들어주십니까, 안 들어주십니까?
시편을 쓴 시인이 보기에, 하나님은 이 기도? 안 들어주세요!
☞ 인류 역사 이래, ‘하나님이 없다’하는 자들이 모든 것을 다 누리며 삽니다.
☞ 한국의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6.25 직후 전 국토가 폐허였습니다. 열 막대기 휘둘러봐야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보릿고개를 넘기면서, 한국인들이 누구를 애타게 찾았습니까? ~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1953년에 휴전되고, 1990대 초까지 40여 년간 ‘십자가만 꽂으면’ 문전성시를 이뤘습니다.
새벽에 부르짖고, 수요일에 부르짖고, 주일 오전에 부르짖고, 주일 저녁에도 부르짖었습니다.
굶주려 허기진 배를 움켜주고, 주여, 주여, 주여, 삼창을 밥 먹듯했습니다.
마침 미국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고아원을 짓고, 양로원을 짓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이때의 한국 교회, 세계 기독교 역사에 유례가 없을 만큼 엄청나게 부흥했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기독교인이 3%였습니다.
60년이 지난 1979년에 기독교인이 30%로 성장했습니다.
(12절)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잊지 않으시는 줄 믿습니다.
15절 기도는 안 들어주시는 것 같은데, 12절 기도는 잘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가난한 한국의 기독교인, 먹고살만해졌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을 외면하기 시작합니다.
☞ 이제는 하나님이 없다 하는 악인으로 사는 이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오호 통제라~
〈 기독교와 역사와의 상관성 〉
신앙과 경제적 부흥은 정비례하지 않습니다. 반비례합니다.
폐허 위에서 부르짖어 경제부흥이 이루어지고, 신앙도 따라서 성장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 가난할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 먹고살 만 해지면 하나님을 등집니다.
한국의 기독교회, 6.25직후에는 밤낮으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응답하시고, 선교사를 보내시어 학교를 세워 국민 교육을 담당했습니다.
숱하게 세워진 기독교학교들, 지금은 학교내 채플이 금지되고, 성경도 못 읽게 합니다.
요즘은 학교 앞에서 전도하는 것조차 금지당했습니다.
☞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미국도 유럽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럽과 미국이 걸어간 길을, 한국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다시 못 사는 나라들을 향하여 손을 뻗칩니다.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등등, 헐벗고 굶주린 나라들로 복음이 들어갑니다.
유럽, 미국, 한국에서 그랬듯이 그들도 머잖아 경제부흥을 이루어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 역시 하나님을 부인하는 모순된 역사를 따라갈 것입니다.
☞ 기독교와 역사와의 상관성, 이게 맞는 것입니까?
☞ 이런 역사적 현상은 아마도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가난한 자들의 기도만 들어주는 한계를 돌파하지 못하는 종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이들에게 기독교는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요?
오늘 설교 제목, 《 겸손한 자의 소원 》이 바로 그 점을 짚어냅니다.
힘들고 어려운 중에 기독교인은 소원을 품습니다.
그런데 《 겸손한 자의 소원 》의 내용을 성급하게 설정합니다.
‘하나님, 우리도 어서 빨리 굶주림에서 벗어나 풍요롭게 해 주옵소서!’
‘설령 “하나님이 없다”하는 악인이 될지라도, 이 가난의 사슬을 끊어주옵소서!’
가난한 나라에 복음이 들어가, 복음이 그들에게 일어서도록 힘을 줍니다.
기독교 신앙으로 힘을 얻어, 여러 면에서 발전을 이룩합니다.
이 과정이 점차, ‘하나님은 없어’라고 말하는 ‘교만의 길’로 접어드는 길목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이 그랬고, 유럽과 미국이 그랬습니다. 향후 제3세계도 비슷한 길을 갈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에서 문제의 맥락을 짚어주는 시편이 바로 10장입니다.
☞《 겸손한 자의 소원 》내용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 겸손한 자의 소원은 어떠해야 하는가? 〉
이 땅에 주님이 다녀가시고,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은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의 부르짖음에 가장 먼저 응답하셨습니다.
이때 기독교인의 소원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불분명했기 때문에 역사는 빗나갔습니다.
《 겸손한 자의 소원 》알맹이가 중요합니다. 컨텐츠가 무엇이냐를 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을 쓴 시인의 진정한 《 겸손한 자의 소원 》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 설교 본문입니다.
(17~18절)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18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시편 기자, 《 겸손한 자의 소원 》컨텐츠는 무엇입니까? 출세와 성공입니까? 아닙니다.
①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여기서 ‘준비하시며’는 성경 아래 각주가 있습니다. 거기를 보니 ‘견고하게 하시며’입니다.
《 겸손한 자의 소원 》은, 하나님이 내 마음을 견고하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지금 힘들고 어려운 것은 괜찮습니다. 단지 내 마음을 단단하게 해 주옵소서!”
이것이 《 겸손한 자의 소원 》첫 번째입니다.
②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나의 마음, 생각, 탄원, 예배에 주님이 귀를 기울여 주시옵소서!”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내가 고난 중에 있든지, 기쁨 중에 있든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라 최고입니다.
③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18절)
하나님은 언제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탄원이 누락되는 일이 없도록 심판하십니다.
오늘날 세상의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④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여 권세를 잡은 자들은 고아와 나그네를 압제합니다.
하나님, 그럼에도 우리의 고난은 괜찮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니 견딜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자의 ‘위협’은 막아주옵소서!
이것이 《 겸손한 자의 소원 》내용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변질되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세상에 속한 자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소원을 빌었습니다.
‘이 가난, 이 질고, 이 고난, 지긋지긋합니다. 제발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 되게 하옵소서!’
아직도 수많은 기독교인이 이렇게 기도하고, 이렇게 소원을 빕니다.
〈 진정한 소원 〉
고난과 질고 중에서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그 어떤 고통과 고난에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니 힘들어도 웃을 수 있었습니다.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참 좋으신 하나님, 임마누엘, 주님이 함께 하시면 나의 고통과 질고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그러니 부디 나를 떠나지 마시고 나와 함께 하옵소서!
이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이것이 《 겸손한 자의 소원 》입니다.
이 소원은 내가 빈한할 때도 부유할 때도, 병들었을 때에도 건강할 때에도, 똑같아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고아와 힘없는 자를 핍박하고 착취하는 ‘세상에 속한 자’(18절)의 지위를 탐했습니다.
세상에 속한 자, 성공하고 출세하여 떵떵, 땅땅 거리고 사는 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빌 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바울 사도가 말하는 ‘일체의 비결’ 그것이 《 겸손한 자의 소원 》내용이어야 합니다.
아직 인류는 ‘배부르고 풍부한 가운데 하나님과의 교제나눔’이 매우 서투릅니다.
시편 10장을 쓴 기자는 이렇게 엇나가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시를 썼습니다.
《 겸손한 자의 소원 》은 하나님이 ① 내 마음의 근육을 단단하게 하시고,
② 내 기도에 귀 기울여주시고, ③ 공의로 심판하여 주시고,
④ 권세 가진 자의 위협을 멈추게 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곧 ‘임마누엘’입니다.
여기서 뭘 더 바라십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그것을 족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원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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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권력 가진자의 손에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