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에 이끌려 주님을 증언케
-심흥보 신부-
가 끔 어린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예기치 않은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사슴이나 토끼나 새처럼 예쁘고 좋은 동물들이 잡아먹히도록 하셨나요?”라는 질문에서부터 “하느님께서는 왜 모세나 엘리야나 예수님이나 바오로에게는 직접 나타나시면서 우리에게는 직접 나타나 보이지 않으시나요?”라는 질문들이 제기될 땐 당혹스럽기도 합니다. 혼자서는 이러저러한 의구심과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도 잘 풀리지 않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합니다. 그런데 같은 문제라도 누군가 질문을 하면 답을 하는 과정에서 그 문제가 술술 풀려나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럴 땐 성령께서 임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신자들을 위해 글을 쓰노라면 컴퓨터의 자판이 느리다고 여겨질 만큼 끊임없이 이어지는 글이 마치 주님께서 제 뇌를 움직여 주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가끔 예전에 쓴 글을 다시 보면서 ‘어떻게 내 머리에서 이런 글이 나왔지!’ 싶어 주님께 감사드리며 감탄하기도 합니다.
주 님께서는 오늘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15,26)라고 말씀하십니다. 독서에서는 리디아가 세례를 받고 청합니다. “저를 주님의 신자로 여기시면 저의 집에 오셔서 지내십시오.”(사도 16,15) 리디아의 청을 우리의 청으로 바쳐봅시다. ‘저를 주님의 제자와 사도로 삼으신 주님, 성령을 보내시어 제가 주님의 진리를 확연히 깨닫게 해주시고, 주님과 함께 머무르며 제 말과 삶과 활동으로 주님을 드러내게 해주소서. 아멘.’
-조명연신부-
지 난주에 제 아버지께서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집에서 넘어지셨는데, 글쎄 요추 1번이 골절된 것입니다. 아마 연세가 많으셔서 한 번의 넘어짐으로도 크게 다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난 한 주일동안 꼼짝 못하시고 누워만 계셨습니다. 이렇게 누워만 계시던 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이렇게 누워 있으니까 앉아 있는 사람이 너무나 부럽다.”
우 리가 보통 피곤하고 힘들 때 “조금만 누워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계속 누워 있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계속 누워있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계속 앉아 있지도 못합니다. 또 계속 서 있지도 못합니다. 누워있기도 또 앉아있기도 또 서 있기도 해야 합니다.
우 리의 삶도 그렇지요. 힘들 때에는 누워서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며, 조용하게 앉아서 기도하고 묵상할 수 있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활동하는 서서 돌아다니는 시간도 필요하지요. 그래야 잘 사는 삶입니다. 즉, 즐겁고 행복한 시간도 필요하겠지만, 우리의 삶 안에서는 고통과 시련의 시간도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하 지만 사람들은 고통과 시련의 시간은 제발 찾아오지 않기를 바라며, 대신 즐겁고 행복한 시간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마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통과 시련이 찾아올 때에는 온갖 불평불만으로 더욱더 내 삶의 자리를 힘들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피하고 싶은 고통과 시련의 시간 역시 내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내 삶의 자리를 더욱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주 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말씀하시지만, 우리가 당신 곁을 떨어져 나가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당신의 곁에서 당신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기쁘고 행복하게 잘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삶 안에도 고통과 시련은 분명히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시간을 피하려고만 한다면, 이 안에 계시는 주님을 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동시에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도 나의 것으로 만들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내 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좋은 것만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피하고 싶은 순간 역시 주님의 자리를 만들어 드려야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참 기쁨과 행복이 있는 하느님 나라가 그리 멀리에 있는 나라가 아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모든 시간에 감사하면서, 그 안에 계신 주님을 생각할 수 있는 행복한 오늘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려면 한 사람과 여러 번 사랑에 빠져야 한다(믹논 맥로린).
말이 씨가 된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지요. 늘 말하던 것이 마침내 사실대로 되었을 때를 이르는 말입니다. 이 속담을 보면 정말로 그렇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실 제로 “피곤해 죽겠어.”, “아이고 죽겠네.”라고 말하는 사람의 인상이 좋은 것 봤습니까? 이러한 말을 하면서 밝은 표정을 짓는 사람은 절대로 없습니다. 또한 “나는 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사랑해요.”라는 말을 하면서 온갖 우거지상을 쓰고 있는 사람도 보기 힘듭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아주 환한 표정을 지면서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떻습 니까? 이렇게 사람들의 모습에서 정말로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요즘 길을 가다보면 아이들의 말에 보통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입에 욕을 달고 사는 것 같습니다. 습관이 되어서 자기 자신도 모르게 욕이 나오는 것 같더군요.
자신이 쓰는 말이 우리의 인생을 결정된다는 것을 생각하니, 지금 습관처럼 욕을 쓰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에 우리의 미래가 어둡게 느껴지는 것은 저만의 걱정일까요?
하느님의 사랑은 진짜입니다
-김대열신부-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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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우리의 마음보다,
우리를 당신 나라에 들어오게 하시려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더 큰지도 모르겠다.
가끔 묵상 중 떠오르는 것 중의 하나는 ‘안타까워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이다.
‘안타깝다’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손 이 반드시 닿아야만 하는데, 아무리 손을 뻗어보려 하지만 닿을 듯 말 듯 하다가 끝내 닿지 않을 때의 그 마음, 들으라고 고래고래 소리쳐보지만, 듣지 못하고 군중 속으로 사라져가는 이의 뒷모습을 쳐다보아야만 할 때의 그 마음, 바로 이와 비슷한 마음으로 하느님께서는 매일매일의 우리를 바라보시고 계시지 않을까?
언젠가 묵상 글에 우리가 하느님께 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빌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사랑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그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거부를 당하고 무시를 당하고 내동댕이쳐져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장 좋은 것을 주려고만 애를 쓰는 모습은 더욱 안타깝다.
하지만 사랑의 생김새가 그런 것이고, 그 사랑이 시작된 곳이 하느님이시니,
하느님께서는 그 길을 계속 가실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어떤 실존적 아픔들과 부딪혔을 때, 절대로 하느님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그분께서 우리보다 더욱 아파하며 안타까워하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나약함과 이기심 그리고 욕망을 먼저 바라보아야만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밀어내시는 것이 아니다.
밀어내는 것은 오히려 우리 쪽임을 기억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그분의 안타까워하심을 줄여드릴 수 있는 우리라면 얼마나 신나는 일일까?
아니 그분의 거룩한 마음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우리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 영성적 피터팬 증후군 >
-전삼용신부-
서 울 강남의 한 심리상담센터에 30대 초반의 부부가 찾아왔습니다. 부부 싸움이 부쩍 잦아진 탓이었습니다. 남편이나 아내 모두 얼핏 봐서는 남부러울 것 없는 배경과 이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국내 대학원을 거쳐 외국유학을 다녀와 금융업계에 취직을 했다고 합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직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몇 달을 못 견디고 사표를 쓰기 일쑤였습니다. “일이 너무 힘들다” “상사가 괴롭힌다” 등의 이유였습니다. 부인 역시 일류대를 나와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오래 못 다니고 관두기를 반복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부부는 자주 말다툼을 하게 됐습니다. 상담을 맡았던 A박사는 “남편과 아내 모두 결혼 뒤에도 양가 집안에서 생활비에 외제차까지 제공받으며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며 “그러다 보니 둘 다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도, 피곤한 직장생활을 계속 견뎌낼 인내심도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아이를 낳았지만 제대로 보살필 자신이 없어 부모에게 전적으로 맡겼다고 합니다. A박사는 “아이 때부터 부모가 모든 걸 다 알아서 챙겨준 탓에 스스로 책임지고 결정하는 능력이 없다”며 “부부간에 서로 헌신하고 희생하는 대신 일방적으로 받기만을 원하는 게 갈등을 부추긴 것 같다”고 분석했습니다. 남편과 아내 모두 이른바 ‘피터팬 증후군’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현재 이혼을 심각하게 고려중입니다.
어른들의 사회로 부터 “꿈과 환상의 나라 네버랜드” 라는 곳으로 떠나는 영원한 소년이 바로 피터팬입니다. 로빈 윌리암스가 주연으로 출연했던 피터팬 역시 원작에 가깝게 만들어진 영화로, 이미 다 커버린 어른이 ‘소년’ 피터팬이 되어 후크 선장을 물리치고 네버랜드의 친구들을 구한다는 내용인데, 어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의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어른아이’같은 남성에게 나타나는 심리적인 증후군을 바로, D. 카일리 박사가 명한 피터팬 증후군, 피터팬 신드롬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평생 아기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때가 되면 세상의 역경과 당당히 맞서야 합니다. 일을 하고 아기를 낳고 키우는 힘듦은 어른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특권’입니다. 진주조개는 자신의 가슴속에 모래알을 품는 고통을 감수하지 않으면 진주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고통이 고통으로 끝나면 고통이지만 진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진주조개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인 것입니다.
영성에서도 세례를 받고 바로 평화와 기쁨이 온다고 생각하면 아직도 아기영성입니다. 홍해를 건너면 본격적으로 고통이 시작되는 광야생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광야생활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에 합당하도록 자신을 변화시키는 특권입니다. 예수님도 자기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고, 오늘 복음에서는 ‘박해’를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절대 당신을 따르는 길이 편하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긴다고 믿음을 포기한다면 영적인 피터팬 증후군에 걸린 신자인 것입니다.
안나 로버트슨은 농장에 고용되어 일하는 젊은 여자였습니다. 이 안나는 자기처럼 농장에서 일하던 착실한 총각을 만나서 결혼했습니다. 그 신랑의 이름은 탐 모세스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열심히 일해 마침내 자기들의 농장을 마련하게 되었고, 슬하에는 10남매를 두었습니다.
안나는 농가의 부인으로 또 여러 자녀들의 어머니로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냈습니다. 또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뜨개질이나 수를 놓았습니다. 그러던 중, 80세에 접어들면서 안나의 손은 관절염으로 점점 고통스럽고 둔해졌습니다. 그래서 안나는 뜨개질 대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손이 덜 고통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안나의 그림은 대부분이 농장과 시골 풍경이었습니다.
하 루는 뉴욕의 어떤 미술작품 수집가가 안나가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을 지나다가 한 상점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벽에 걸려있는 몇 점의 그림이 그 사람을 감동시켰습니다. 물론 안나의 그림이었습니다. 이 후로 안나는 갑자기 유명한 화가로 데뷔하게 되었고, 모세스 할머니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역사적인 화가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안나가 80세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도 무려 1,500점의 그림을 남겨 놓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80세의 노인이 이렇게 아름다운 성공을 할 수 있었을까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손에 관절염으로 인한 고통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쓸모없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중 가장 쓸모 있는 것이 고통입니다. 우리도 어머니의 고통가운데 태어났고, 그리스도께서도 이 고통으로 인류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고통을 많이 받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 고통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일 두려워할 것
-김찬선신부-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성령께서 당신을 증언하고
제자들도 당신을 증언하게 될 거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증언이 곧 성령의 증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때 주님을 증언하는 제자들을 사람들이 회당에서 내쫓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할 터인데
이때 그들은 나쁜 짓을 하는 거라 생각지 않고
하느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짓을 할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복음에서 얘기하는 이 사람들이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
곧 나쁘다고만 얘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사이비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자기 교주를 재림 예수라고 하면
지금의 우리도 그들을 미쳤다고 하거나 단죄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도 하느님을 사칭하는 예수를 단죄하고,
그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제자들을 단죄한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 하느님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이고,
그러므로 그들의 진정성을 의심치 말아야 합니다.
주님 말씀대로 그들은 다만 몰라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오늘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제자들은 진리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알아 증거 하는 것이고
사람들은 진리의 성령을 아직 받지 않아 모르는 것의 차이입니다.
그러하기에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하는 나의 진리가 어떤 진리인지,
진리이기는 한 것인지,
성령의 진리인지 주관적 진리인지 두려운 마음으로 돌아보게 됩니다.
성령의 진리가 아니라면 오늘 주님의 염려처럼 걸려 넘어질 겁니다.
오늘 주님께서 염려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제자들을 죽이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성령을 모시지 않았기에 당연한데,
제자들이 그런 사람들에 의해 걸려 넘어지는 것이 문제이고,
걸려 넘어지는 것이 성령에 의탁하지 않아 그런 것이기에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제일 두려워할 것은 사람들의 박해가 아닙니다.
성령에 의탁치 않아 박해로 인해 우리가 걸려 넘어 지는 겁니다.
언젠가도 얘기했듯이
박해는 우리가 순교자가 되게 하기도 배교자가 되게 하기도 합니다.
성령을 모시면 박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순교까지 하지만
모시지 않을 때 우리는 배교를 아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지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