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과 북의 갈림길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거리마다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며 해방된 조국의 밝은 미래와 새로운 희망을 꿈꿨습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자본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국가로 떠오른 미국과 공산주의 진영을 이끌던 소련(현재 러시아)의 갈등과 대립은 한반도를 또 다른 역사적 비극으로 내몰았습니다.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나눠 통치하게 된 것입니다. 3년간의 통치기간이 끝난 1948년, 한반도는 남한의 자본주의 진영과 북한의 공산주의 진영으로 갈라져 각각의 정부를 수립하는 분단의 비극을 맞게 됩니다. 남한은 1948년 국가 통치체제의 근본이 되는 제헌헌법을 만들면서 제1공화국을 출범시켰고 이후 농지개혁 등을 추진하면서 해외 원조에 기초한 경제 발전을 모색하게 됩니다.
1)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주춧돌을 놓다 - 제헌헌법
국가를 세우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법을 만드는 것입니다. 수많은 법 중에서 가장 상위에 있으며, 국가통치체제와 국민의 기본권 보장의 기초가 되는 법을 ‘헌법’이라고 합니다.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을 뽑기 위한 선거가 실시되어 198명의 의원이 선출됐고, 이들이 모여 헌법을 만들었습니다.
1948년 7월 17일 제헌헌법이 공포됐고(대한민국은 이날을 ‘제헌절’로 기념합니다.), 헌법에 따라 그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이때부터 대한민국은 대통령중심제를 바탕으로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등 3권 분립의 국가 통치체제가 마련됐습니다.
제헌헌법은 국가의 기본적인 틀을 담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제1조)이라는 점입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제2조)고 명시했습니다.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와 창의가 보장됐습니다.
성별이나 신분을 이유로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가 주어졌고, 신앙과 언론, 거주 이전 등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경제 활동의 자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사유재산제, 즉 개인의 재산권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제헌헌법은 재산권 보장(제15조) 규정을 둬서 누구든 자유롭게 돈을 벌고, 번 돈을 저축을 하거나 투자를 할 수 있게 했습니다.
내가 만든 물건을 시장에 내다 팔 수도 있고, 회사에 취직해 임금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소유한 건물에 세를 줘서 임대료를 받을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은행에 예금을 해 이자를 받을 수도 있으며, 주식시장에서 주식을 사고팔아 수익을 낼 수도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강도나 사기, 절도와 같은 법률에 위반되는 범죄가 아닌 이상 돈을 벌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보장돼 있습니다.
직업 선택의 자유가 보장돼 있고, 이렇게 일해서 번 돈에 대한 세금 을 납부하면 전부 본인의 재산이 될 수 있습니다. 사유재산의 인정은 북한과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었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남들이 가지지 못한 더 좋은 기술을 갖고 있으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고, 이렇게 번 돈은 개인의 재산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좋은 기술을 얻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집도 사고 땅도 사고 회사의 주식도 사면서 재산을 늘려갈 수 있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쟁이 심해져 소수의 낙오자가 생기기도 하지만, 국가 경제 전체로 보면 경쟁력이 높아지고 부유한 사회가 될 수 있어 국민들 생활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질 수 있었습니다.
반면 북한과 같은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아 더 열심히 일할 동기가 부족했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경쟁에서 뒤 처졌고 1990년대 초반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중국과 베트남 같은 공산주의 국가들은 사유재산 인정 범위를 넓히면서 경제의 활력을 높이는 쪽으로 개혁을 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2) 식민지 봉건체제의 종식 - 농지개혁
헌법에 경제 활동의 자유와 재산권이 보장됐지만, 실질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과거 식민지 경제 구조를 개혁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땅 주인인 ‘지주’와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 체제가 이어져 오고 있었습니다. 소작농들은 농사를 지으면 수확량의 40~60% 정도를 지주에게 일종의 토지 이용료인 ‘소작료’로 내야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소작농들의 상황이 더욱 악화됐습니다. 일제는 한반도를 지배하면서 농사가 잘 되는 땅들을 절반 이상 차지했고, 더 많은 소작료를 요구해 소작료가 수확물의 70%까지 치솟기도 했습니다. 과도한 소작료에 항의하는 소작농들을 마음대로 내쫓는 등 횡포도 심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소작료를 내지 못해 땅을 빼앗기고 사람들은 산에 들어가 화전농이 되거나 도시의 빈민으로 전락했습니다.
이 때문에 해방 이후 남한이나 북한이나 농지개혁이 최우선 과제로 등장했습니다. 농지개혁을 먼저 시작한 것은 북한이었습니다. 당시 북한 인민위원회가 지주들의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해 주는 ‘농지개혁’을 단행하자 미군정 여론조사에서 70%가 넘는 남한 사람들이 “사회주의를 지지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대다수의 농민들이 “한 뙈기라도 내 땅을 가졌으면”이라는 소원을 품고 있었기에 지주에게서 땅을 빼앗아 공짜로 나눠 주는 북한 체제에 매력을 느꼈던 것입니다. 특히 남한의 경우 국민의 70%가 농민일 정도로 농업이 국민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열악한 소작농의 처우를 개선하는 문제는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였습니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소작료를 내리는 등 소작인 보호조치(군정법령 제9호)를 취하는 한편 농지개혁을 서두르게 됩니다. 그러나 땅을 내놓기를 거부하는 지주계급의 반대에 부딪혀 전면적인 농지개혁을 단행하지 못한 채 우선 일본인들에게서 몰수한 땅을 싼 가격에 소작인들에게 분배하는 데 그쳤습니다. 이것이 제1차 농지개혁입니다.
미군정이 끝나고 1948년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는 제헌헌법에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한다.”(제86조)고 명시하고 “농사를 짓는 자가 땅을 가져야 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에 따라 제2차 농지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추진했습니다. 남북한이 모두 농지개혁을 시도했지만 가장 큰 차이는 북한의 경우 ‘무상몰수-무상분배’ 방식을 취한 반면 남한은 ‘유상몰수-유상분배’ 방식을 택했다는 점입니다.
개인의 ‘토지 재산권’을 인정하는 남한 정부는 일정 규모 이상의 농지를 가진 대지주들에게 돈을 주고 땅을 사서 소작농들에게 싸게 팔았습니다. 땅값은 농민들이 부담 가능한 수준에서 결정됐습니다. 농민들은 매년 수확량의 30% 정도를 10년 동안 쌀과 같은 현물로 갚으면 자기 땅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농지개혁 시행 초기에는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농지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데다 과거에는 지주가 대주었던 비료와 농기구 등을 땅을 갖게 된 농민들이 스스로 해결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1950년대 초반에는 농산물 생산량이 줄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경작하는 땅에서 쫓겨날 걱정이 없어지고 수확이 좋으면 모두 자신의 수입이 되었기에 자영농들은 열심히 땅을 개간했고 전쟁이 끝나면서부터는 농산물 생산량이 꾸준히 늘어났습니다.
그렇다면 북한의 농지개혁은 어떻게 됐을까요? 북한은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농지를 나누어 주었지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경작권을 줬을 뿐 땅을 팔거나(매매), 땅을 담보로 돈을 빌리거나(저당), 땅을 남에게 다시 빌려주고 소작료(소작)를 받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농지에 대한 재산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한국전쟁이 끝난 뒤인 1954년에는 농업협동조합을 만들어 모든 농가를 조합으로 묶었습니다. 사실상 농민들에게 땅을 다시 빼앗아 국영농장 체제로 만든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개인재산이 축적되지 않기 때문에 북한의 농업 생산성은 이후 크게 하락했습니다.
3) 한국경제의 여명기 - 전쟁원조의 시대
해방 후 땅 문제와 함께 해결해야 할 또 다른 경제적 과제는 일본인들이 두고 간 공장과 상점, 건물 등을 처분하는 문제였습니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공장과 같은 기업을 적산(敵産)기업,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집은 적산가옥이라고 합니다. 이 같은 적산기업이나 적산가옥을 처분하는 데 있어서도 남과 북은 달랐습니다.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체제인 북한에서는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적산기업과 적산가옥을 모두 몰수해 국가가 소유했습니다. 반면 남한 정부는 일부 중요 사회기반 시설만 국영기업화를 했을 뿐 대부분의 공장이나 상업 시설을 민간에 팔았습니다. 해방 직후 남북한의 경제상황을 비교해 보면 북한이 공업화에 훨씬 앞서 있었고, 남한은 북한에 비해 경제적 측면에서 여러모로 불리했습니다.
일제가 한반도를 전쟁을 위한 물자 공급 기지로 삼으면서 광물 자원이 풍부한 북한 지역에 비료, 시멘트, 화학 공장들을 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주요 화력발전소와 수력발전소가 북한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해방 후 한국은 북한에서 전기를 끊어 버리자 캄캄한 밤이 계속되었고 공장이 멈춰 섰습니다. 반면 농지가 많은 남한에서는 일본이 주로 쌀 수탈에 열을 올렸기 때문에 발전소나 제철소와 같은 산업시설이 거의 없었습니다.
일부 방직 공장이나 식품 공장, 도정 공장 등이 고작이었습니다. 많지 않던 남한의 공장은 한국전쟁 중에 대부분 파괴되어 전쟁 후 한국경제는 피폐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전쟁 직후 한국 정부의 최대 과제는 끊긴 도로와 다리, 철도를 다시 잇는 것이었습니다. 무너진 건물을 다시 짓고 끊어진 도로와 다리를 다시 이으려면 시멘트가 필요했지만, 당시 남한은 시멘트를 대부분 외국에서 수입해서 쓰는 형편이었습니다.
또 굶주림을 면하고 쌀 생산을 늘리려면 비료가 필요했는데 해방 전까지 가장 큰 비료 공장은 북한의 흥남에 있었기 때문에 분단이 되자 남한에서는 비료 역시 전량 수입해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국가들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남한에 적지 않은 경제 원조를 했습니다. 당시 한국 정부는 “경제 원조로 비료나 시멘트 공장을 지어 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했습니다.
배가 고픈 아이에게 물고기를 잡아 주면 당장은 배를 불릴 수 있겠지만, 나중에 다시 굶주리게 되고, 배가 고픈 아이에게 낚싯대를 주고 낚시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면 그 아이는 계속 물고기를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 미국은 절대 빈곤에 시달리던 한국 국민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입을 옷과 먹을 음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미국의 농산물이 남아돌아 대부분의 미국 원조물자는 면화와, 밀, 원당(설탕의 원료)과 같은 농업 생산물로 제공되었습니다. 정부는 원조물자를 받아 국민들에게 바로 배급하는 대신, 이를 가공할 공장에 싼값에 넘겨 제품을 생산해 팔도록 했습니다.
면화를 받은 공장은 옷감을 만들어(방직) 팔았고, 밀을 받은 공장은 밀가루를 만들어(제분) 팔았으며, 원당을 받은 공장은 설탕을 만들어(제당) 팔았습니다. 이 세 가지 원료가 모두 흰색이어서 ‘석 삼(三)’ 자에 ‘흰 백(白)’을 써 ‘삼백산업’이라 불렀습니다.
삼백산업 관련 기업들의 생산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민간자본이 축적되었습니다. 그러나 원조물자를 특정 산업 또는 기업에 제공한 것을 두고 특혜라는 비판이 일기도 했습니다. 또한 1950년대 중후반 우리나라의 산업이 이 세 가지 산업에 의해 주도되면서 경제의 불균형이 극심해졌습니다. 이러한 불균형한 경제시스템은 이후 1950년대 후반 미국이 무상원조를 줄이기 시작하면서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경제 성장률은 땅바닥으로 추락했습니다.
[출처 : KDI, 한국개발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