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여인
얼핏 바람이 스치더니 날카로운 유리 조각에 찔린 듯 눈이 따갑다. 오랫동안 눈을 껌벅인 끝에 겨우 먼지를 꺼냈다. 눈물에 섞인 작은 입자가 손가락 끝에서 반짝거린다. 너무 작아 오로지 반짝임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꽤나 사람을 아프게 한다. 통증의 원인이 사라져도 한동안 눈은 시리고 깔끄러울 것이다. 극장 안에 불이 켜지면 환상은 홀연히 사라지고 하얀 스크린만 남는다. 그 은막을 손끝으로 문지르면 내 눈을 괴롭혔던 것과 비슷하게 생긴 은빛 가루가 묻어날 것만 같다. 오랜 시간이 지나 제목마저 가물거려도 뜬금없이 떠오르는 장면들은 그런 분말이 내 눈에 남긴 상처이다. 머릿속에서 정돈된 기억이라기보다 빛에 찔린 눈이 기억하는 장면일 것이다. 그런 것들은 누구나 공감하는 명장면, 명대사일 수도 있지만 간혹 지극히 사적 체험이 겹쳐지거나, 혹은 기억의 장난으로 멋대로 변형된 나만의 환영이기도 하다. 그 환영을 끄집어내어 가급적 오독의 흔적을 털어내니 몇몇 장면이 남는다. 기억이 가물거리는 옛날 영화를 빼고 비교적 최근에 본 것 중에 추려보니 다음과 같은 장면이 떠오른다.
남녀가 백화점의 식품 코너에서 마주친다. 8년 전에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연인 사이였지만 이제는 각기 딴 사람의 남편과 부인이 된 처지이다. 게다가 익명의 대도시와 다르게 한적한 전원 마을에서 작은 길을 사이에 두고 기역 자로 배치된 이웃 사이이다. 마당이 훤하게 뚫려서 수시로 마주칠 수밖에 없는 터라 살다 보면 어색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스물여덟 살의 부인과 어린 아들을 둔 서른두 살의 남자는 짐짓 옛 여인을 무시하는 쪽을 택했고, 여자는 가급적 편안한 이웃, 선량한 친구로 지내자고 남자에게 제안한다. 두 사람은 각자의 현재 생활이 행복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헤어진 8년 전의 앙금을 걷어내고 이제 친구로 지내기로 다짐한다. 장바구니를 들고 주차장에 내려온 두 남녀는 마침내 합의에 이르고 남자는 여자의 짐을 뒤 트렁크에 실어주는 친절을 베푼다. 그리고 서로의 뺨을 맞대며 이웃 간 정도의 거리감을 지닌 ‘비주’를 한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려서 이제 별다른 이야기, 돌올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것 같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 빛나는 장면이 기다리고 있다. 차 문을 열고 떠나려는 순간, 여자는 남자에게 또 다른 부탁을 한다. 예전에 말다툼을 하면 남자는 종일토록 여자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한 여자는 이제 화해했으니 자신의 이름을 불러달라고 한다. 남자는 여자의 뺨에 손을 대고 이름을 부른다. “마틸드.” 그리고 남자는 우정의 표현인 비주가 아니라 입술에 키스를 하며 다시 이름을 부른다. “마틸드.” 그 순간 여인은 주인이 빠져나간 옷처럼 허물어지면서 정신을 잃는다. 주술처럼 읊조린 마틸드란 소리가 그간 꾹꾹 속에 누르고 있던 어떤 악마를 불현듯 일깨운 것이다. 다가설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만 품고 있다가 마침내 온몸에 불이 붙어 타 죽은 설화의 주인공 지귀(志鬼)처럼 마틸드는 졸도를 한 것이다.
이 장면 이전으로 조금 되돌아가 보면, 감독이 이 순간의 필연성을 예비한 작은 장치들이 숨겨져 있다.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이웃을 방문한 남자 주인공 베르나르는 계단에서 천천히 내려온 여자를 보고 얼굴이 돌처럼 굳는다. 스물다섯 살쯤에 불같이 사랑하다가 헤어졌던 여자였다. 서로 모른 척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온 후 상대방에게 동시에 전화를 거는 바람에 통화가 쉽지 않았다. 통화가 이뤄진 후 여자가 창가에 기대어 대화를 시도하지만 남자는 차갑게 거절한다. 그때 그 창가 옆에 걸린 그림 한 점이 눈에 뜨인다. 제목은 확인할 수 없어도 나는 그것이 발튀스의 작품이라고 거의 확신한다. 아직 무르익기 전의 소녀가 풍기는 불길한 에로티즘을 그린 발튀스의 그림은 트뤼포의 이전 작품에서 소품으로 등장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건너편 집을 내려다보며 창가에 서서 전화를 거는 여주인공의 상반신 곁에서 어른거리는 발튀스의 작품은 영화의 초반부에 이미 비극적 결말을 예고하는 듯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날카로운 짐승 소리가 들리자 베르나르의 부인은 고양이들이 싸움을 한다고 말한다. 베르나르는 그 소리를 두고 발정 난 고양이의 처절한 구애라면서 아내의 해석을 정정한다. 또한 이웃집 여자를 만난 그날 밤, 베르나르는 한밤중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캄캄한 부엌에 나와 냉장고를 조금 열어둔 채 그 푸르스름한 불빛 속에서 무엇인가 꾸역꾸역 먹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비극적 결말을 예고하고 있다.
마틸드는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 베르나르를 “갖기는 쉬워도 간직하기는 어려운” 사람이라고 했는가 하면, 남자는 마틸드를 “14시에 정오를 찾는” 여자라고 정의했다. 결국 우울증으로 정신병원에 머물다가 퇴원한 날 밤에 마틸드는 이사를 떠난 빈집을 찾는다. 인기척을 느끼고 찾아온 베르나르와 어둠 속에서 정사를 나누다가 마틸드는 핸드백에서 권총을 꺼내 남자의 관자놀이를 쏘고 자신도 자살한다. 이 영화는 새벽녘에 구급차와 경찰차가 마을에 진입하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똑같은 장면으로 마무리되며 그 시작과 끝에 쥬브 부인이 등장해서 사건을 해설한다. 두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의 배경에 쥬브 부인이 겪은 또 다른 사랑 이야기가 감춰져 있다. 러시아 인형처럼 큰 이야기 속에 비슷하지만 작은 이야기를 끼워 넣는 소위 미장아빔이란 기법이다. 쥬브 부인은 20년 전 사랑하는 남자가 먼 섬나라로 떠나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8층에서 뛰어내리며 자살을 시도한다. 그녀는 목숨은 구했지만 영원히 한쪽 발을 저는 불구가 되고 만다. 사람들이 튀는 테니스공을 따라 펄펄 뛰어다니는 것을 구경만 해야 하는 테니스장 관리인으로 일하는 그녀는 베르나르와 마틸드의 열정을 안타깝게 지켜본다. 그녀의 불행을 모르고 살던 옛 남자가 20년 만에 초로의 노인이 되어 그녀를 찾아온다. 그가 온다는 전보를 받자 그녀는 황급히 자리를 떠서 만남을 피한다. 필경 평생 한 여자를 불구로 살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을 옛 사랑에게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긴 젊음의 열정으로 죽음을 무릅썼던 것은 마틸드도 마찬가지였다. 베르나르와의 재회 후 첫 정사에서 베르나르는 그녀의 손목에서 주저흔을 발견한다. 베르나르와 헤어진 후 마틸드 역시 칼로 손목을 그었던 것이다. 쥬브 부인은 두 사람이 재발된 열병을 앓고 있는 과정을 안타깝게 지켜본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죽음으로 끝난 사랑에 대해 쥬브 부인은 이렇게 말한다. “두 사람이 같은 무덤에 묻힐 수 없다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아무도 내게 부탁하지 않았지만 나라면 묘비명에 이렇게 쓸 것이다. ‘너와 함께도, 너 없이도’라고 (Ni avec toi, ni sans toi).” 이것은 이 영화를 요약하는 대단히 간명한 문장인데 우리말로 옮기는 것이 어렵다. “당신과 함께 사는 것도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해서 당신 없이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길게 풀면 묘비명의 간명한 느낌이 살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때 사람은 대체로 불행에 빠진다. 로베르트 무질은 “살다 보면 계속 이대로 갈 것이냐 아니면 방향을 바꿀 것이냐 망설여질 때처럼 눈에 띄게 주춤할 때가 있는 법이다. 이 시기에 사람은 불행에 빠지기 쉽다.”는 잠언 같은 문장으로 그의 단편소설을 시작한 적이 있다. 베르나르와 마틸드는 재회 이후에 내내 이런 자문에 빠져 있었다. 이대로 갈 것인가, 아니면 그만둘 것인가. 그 망설임은 6개월간 지속되다가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트뤼포 감독은 「마지막 지하철」을 완성한 직후 곧바로 제라르 드파르듀를 기용해서 몇 개월 만에 이 영화를 만들어냈다. 1981년 9월 30일에 개봉된「이웃집 여자」는 80년대식 사랑의 전범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에 빠진 여인의 절절한 고백체 소설인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에서 화자는 자신이「이웃집 여자」의 여주인공이 된 것처럼 느끼고 영화의 주제곡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를 되뇐다. 트뤼포 감독은 속옷보다 연인을 자주 갈아치운 것으로 유명하고 잦은 만남과 이별의 아픔은 그의 영화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그는「이웃집 여자」의 여주인공 입을 빌려 “사랑 이야기도 이야기이기 때문에 시작, 중간, 그리고 끝이 있다.”고 『시학』의 한 구절을 살짝 비틀어 자신의 사랑관을 내비친다. 사랑의 시작은 비록 짧은 순간이나마 설렘과 기대로 관객을 행복하게 해주지만 「이웃집 여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시작도 중간도 없고 오로지 종말만 지속되는 독특한 서사 구조이다. 어쩌면 사랑은 단지 우리가 시작과 중간이라고 착각할 뿐 애초부터 지루한 종말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뇌종양에 걸린 트뤼포는 1984년 10월 21일 일요일 오후 2시 30분에 숨을 거둔다.「이웃집 여자」의 여주인공이자 그의 마지막 연인 파니 아르당이 그의 침대 곁을 지켰다.
* <이웃집 여인>(원제 : La Femme D'A Cote)은 1981년, 프랑스에서 처음 개봉되었다. '프랑소와 트리포'가 감독, 제라르 드파르듀가 주연을 맡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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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슬프게 사는 현대의 지식인 중 한사람을 보는 듯하네요,,^*^
한번 보고싶은 영화군요. 자세한 해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