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주어사(走魚寺)는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이며 종교화합의 성지이다.
주어사의 한자를 풀이하면 달아날 주(走)에 물고기 어(魚)를 써서 "물고기가 달아난 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옛날 어느 고승이 현재의 주어사 터에 절을 세우려고 자리를 잡았을 때의 일이다. 당시 근처 냇가에서 한 노승이 물고기를 잡으려 하자, 그 물고기들이 신기하게도 물 밖으로 나와 산으로 달아나 버렸다.
물고기가 산 위로 올라가 숨어버린 그 자리에 절을 세웠다고 하여 '주어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에서 물고기는 잠을 잘 때도 눈을 감지 않아 깨어있는 수행자의 정진을 상징한다.
주어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18세기 후반, 이곳은 권철신, 정약용 등 남인 학자들이 모여 서학(천주교) 교리를 공부했던 '천주교 강학회'가 열린 장소이다.
당시 불교는 조선 사회에서 억압받는 처지였으나, 스님들이 천주교 학자들에게 장소를 제공하며 유교·불교·천주교가 만나는 독특한 종교적 화합이 일어났던 곳이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주어사는 박해를 받게 되었고, 사찰은 결국 폐사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여주시 산북면 하품리 앵자봉 기슭에 그 절터가 남아 있다.
주어사(走魚寺)는 한국 종교 역사에서 매우 보기 드문 종교 간 화합이 일어났던 상징적인 장소이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천주교(서학)를 공부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유교 사회에서 이단으로 몰리던 학자들이 갈 곳이 없을 때, 같은 소외 계층이었던 불교의 스님들이 기꺼이 사찰의 방을 내어주었다.
새벽에는 스님들의 예불과 독경 소리가 울려 퍼지고, 낮에는 선비들이 성경과 서학서를 토론하는 아름다운 공존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이곳에서의 강학은 단순한 종교 전파를 넘어 학문적 탐구의 장이었다.
권철신, 정약용 등 남인 학자들의 유교적 기반
장소와 편의를 제공하며 자비의 가르침을 실천한 불교
새로운 평등 사상과 세계관을 제시한 서학 이 세 가지 사상이 앵자봉이라는 깊은 산속 작은 절에서 부딪치지 않고 함께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화합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신유박해 등을 거치며 강학에 참여했던 학자들은 처형되거나 유배되었고, 장소를 제공했던 주어사의 스님들 역시 처벌을 받고 사찰은 폐사되었다.
자신들이 믿는 종교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찾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절 전체가 사라지는 위험을 감수한 스님들의 희생은 오늘날에도 종교 화합의 진정한 귀감이 되고 있다.
현재 주어사 터에는 천주교에서 세운 강학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불교계와 천주교계가 함께 이 터의 가치를 보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서로 다른 신념이 서로를 비난하는 대신 진리'와 '인간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던 우리 역사의 귀한 흔적이라 할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이 주어사에서 함께한 시간을 여유당전서에 기록하였다.
그 시절 다산은 18세의 청년이었고, 그곳에서의 기억은 평생 그에게 '지적 각성'의 순간으로 남았다.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는 1779년 겨울의 강학회 장면이다.
당시 권철신과 정약용 일행이 주어사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이벽(李檗)이 소식을 듣고 서울에서부터 눈길을 헤치고 밤늦게 도착했다.
촛불 하나를 켜두고 깊은 산사의 방 안에서 이벽과 정약용 형제들은 서학(천주교) 교리와 유교의 경전을 비교하며 밤새 토론했다.
다산은 훗날 이 순간을 마치 어두운 방에 빛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이 과정에서 주어사의 스님들은 땔감을 계속 넣어 방을 데워주고, 이들에게 식사를 공양하며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도왔다.
다산은 자신들을 돌봐준 스님들의 친절을 기록에 남겨, 훗날 이들이 처벌받았을 때 깊은 슬픔을 느끼기도 했다.
다산은 주어사를 추억하며 시를 남겼는데, 그중 강학의 분위기를 짐작게 하는 구절이 포함된 시가 있다.
비 온 뒤 산길은 험하고도 가파른데 푸른 이끼 낀 돌길 위에 말 발자국 남네
주어사 깊은 곳에 등불 하나 밝혀두고 밤 깊도록 글 읽는 소리 숲속에 울려 퍼지네
이 시는 당시 고요한 산사에서 유교 경전과 서학서를 넘기며 진리를 탐구하던 선비들의 낭만과 진지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당시 강학회에 참석했던 이들은 유학자들이었지만, 사찰에 머무는 동안에는 육식을 금하고 사찰의 규칙을 따랐다.
다산은 훗날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박해가 시작되자, 주어사에서의 기록들을 정리하며 안타까워했다.
다산이 쓴권철신 묘지명에는 "경자년(1780) 겨울에 주어사에서 강학을 하였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이 짧은 기록 한 줄이 오늘날 주어사 터가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임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사료가 되었다.
다산에게 주어사는 세상의 새로운 질서를 꿈꾸던 청년 시절의 아지트'였다.
비록 그 꿈으로 인해 훗날 긴 유배 생활을 겪어야 했지만, 주어사의 눈 덮인 밤 풍경과 스님들이 내어준 따뜻한 방은 다산의 사상적 뿌리를 형성한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사진은 주어사지 법당터에서 한국 비구니회 회원들이 연등을 밝히고 축원하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