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최영효
1999년 《현대시조》 추천
2000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
김만중 문학상 수상
천강문학상 수상
형평문학(지역)상 수상
중앙시조대상 수상
한국시조대상 수상
시집 『무시로 저문 날에는 슬픔에도 기대어 서라』,
『노다지라예』, 『죽고못사는』,
『컵밥 3000 오디세이아』,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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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
사람이 하늘이므로
사람엔 귀천이 없고
나라엔 빈부가 없는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어
백성이
주인인 나라
만백성이 국본인 나라
불멸
고부군수 조병갑 늑탈 동진강에 썩어, 범람이다
동학군 쓰러진 넋들 우금치에 살아, 폭발이다
날마다 꿈 슬고 죽는 하루살이의 생, 불명이다
녹두꽃은 지고 피어
천치같이 백치같이 머저리 등신같이
녹두라는 이름 뒤엔 한 사내가 숨어 산다
태평한 세상이라면 악다구니를 왜 하랴만
양반 상민 따로 있고 노비 백정 또 있으니
억새밭을 갈고 싶어 쑥대밭을 뒤엎고 싶어
저 너머 다른 세계가 보일 듯 가물거리는데
이웃사람 가슴속에 새길 이름은 못되어도
사람마다 찾아 부를 이름은 아니라도
사내로 태어났으니 난세쯤은 달래고 싶어
작다고 비웃지 마라 맵고 짜고 독한 것이
콩보다 작은 것이 팥보다 더 작은 것이
콩밭에 섞여 살아도 콩깍지는 따로 있다
피리 아니면 죽창이 되어
동네마다 집 뒤에는 대숲이 무성한데
아무도 심지 않고 기른 적도 없지만
해마다 죽순이 나서 창천을 찌르고 있다
날이면 바람 불어 푸른 숲을 흔들지만
굴욕 앞에 엎드려 무릎 꿇지 않거니
스스로 생명을 다해 꽃 피우기 전까지는
천둥될까 벼락될까 참아 넘긴 갑오년도
양민들 앙가슴을 노래 되어 적시더니
젓대에 원성이 녹아 바람 타고 흘려보낸다
날마다 피리 되어 달 불러 노닐던 대숲
을미사변 들고부터 노래도 그치더니
을사년 그날 이후는 죽창되어 일어섰다
방중술
말이 참판이지 할애비 이래 민머리 신세
그 참판 개판된 건 순간인지 일 년인지
불 밑에 망건을 쓰고 등걸게 들인 그날부터다
머슴 하나 생김새 좋아 상머슴으로 앉힌 뒤
그 머슴 쫓아내고 계집만 차지하고는
다른 첩 소용없다며 오줌받이 요강으로 앉혀
밤마다 요분질에 생니 앓는 감창소리에
밑씻개 일 년짜리에 참판 목숨 위태롭다는
첩년들 서캐 끓는 악담 오뉴월에 서릿발 선다
늙은 참판 기운 달려 끝내는 요절난 허리
젊은 년 숨긴 방중술 감투거리로 조아리는데
내가 니 노리개더냐 니가 내 화초첩이냐
매품팔이
관아 옆 주막집 뒤에 진풍달이 살고 있다
맨몸에 먹고 살자면 매품만한 소득이 없고
맷집에 정붙여 살면 봉놋방 술잔이 달다
밑두리 해장술 풋술에 되술 마시며
귀동냥 천자문 떼듯 관아 소문 훔쳐내어
사흘 뒤 엄부자 대신 볼기를 팔기로 했다
하나에 천지현황 열에는 우주홍황
생살이 부풀어서 흩바지에 피가 묻지만
매 앞에 장사 없어야 맷값에 웃수가 든다
한 대에 한 냥이지만 죄질 따라 값도 달라
형세마다 곡절 따라 거간꾼이 가름해도
매품값 한차례마다 머슴살이 일년 몫이다
자식 많아 기르자니 오만 품을 들었으나
배고픈 죄 너무 깊어 품갚음을 앓았는지
진풍달 그가 떠났다, 뼛속까지 장독이 맺혀
사람이 하늘임을 선언한 이들의
위대한 저항과 사랑의 서사
유 성 호 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최영효 시인의 신작 시조집 『우금치』를 읽는다. 단번에 다 못 읽고, 읽다가 하늘 한 번 보고, 다시 단정하게 읽어가는 순간이 잦아진다. 서정 양식의 가장 오랜 역사를 이어온 '시조時調'가 이렇게 과거와 현재, 서사와 서정, 기록과 해석을 동시에 결속하면서 뻗어갈 수 있구나, 하는 찬탄과 감동이 밀려온다. 물론 그동안 이른바 서사적 내용을 갖춘 시조 작품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영효의 『우금치』는 그 내용으로 보나 형식으로 보나 그동안 우리가 볼 수 없었던 가장 정통적인 대大서사를 구성하고 있다. 정결하고 치열하고 비극적이었던 동학농민혁명의 자취를 따라가면서 한국 근대사의 융융한 흐름과 좌절과 그 비극성을 낱낱 순간의 충실한 복원과 해석을 통해 수행해간 거작巨作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작품은 우리 시조시단이 거두어낸 미증유의 미학적 성취이자 정형시의 확장 가능성을 선명하게 보여준 문학사적 범례範例로 남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동학 세력과 농민 세력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일종의 전쟁이요 혁명 사건이다. 수운 최제우가 창건한 '동학東學 '은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을 가차없이 내세웠고, 혹심한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분노와 결합하여 혁명의 이념으로 이어져갔다. 혁명의 기운이 급속하게 번져가자 고종은 청나라에 진압을 요청했고 농민군은 조정과 화약을 맺어 사태를 매듭지으려 했지만 결국 톈진 조약을 근거로 일본이 진압에 가담하게 된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전후로 청일전쟁, 청의 몰락, 대한제국 수립, 일본의 아시아 패권 장악 등 거대한 동아시아 역사 변화가 잇따르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2023년 5월 18일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처럼 동학농민혁명은 사상적으로는 동학에 감싸여있고 역사적으로는 반反외세 전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그야말로 한국 근대사 전체에서 우뚝한 민중 항쟁이요 강렬한 인간애의 실천 사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최영효 시인은 이러한 지나간 흔적의 씨줄과 날줄 어느 것도 경시하거나 버리지 않고 동학농민혁명의 총체적 성격을 특유의 사실성과 균형감으로 재구再構해간다. 시인은 이러한 굵직한 서사 위에 자신만의 서정적 노래를 일일이 장착하면서 이 작품으로 하여금 단연 '서사적 서정'이라는 특유의 목표를 달성하게끔 배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