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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하느님의 말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십자가 상 그리스도
오늘은 십자가의 요한(Juan de la Cruz, 1542-1591) 성인께서 직접 그리셨을 것으로 추정되는 십자가 상 그리스도 그림에 대한 묵상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독자분들께서 이 지면을 통해 보고 계실 그림은 한 가지 이색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십자가 상에 못 박혀 계신 주님을 묘사하는 그림은 대개 십자가를 정면에서 바라보거나 또는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 보고 있습니다. 이와 달리 요한 성인께서는 그림을 통해 십자가를 위에서 보는 관점을 제시합니다. 문득 성인께서 관상하신 십자가 상 주님 앞의 현실이 궁금해집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시선을 이해해보고자 올해 요한 성인의 축일(12월 14일)에 주어지는 전례력 말씀에 귀 기울여 봅니다.(집회 48,1-4.9-11; 마태 17,10-13) 이 말씀들은 공통적으로 엘리야를 가리킵니다. 그는 메시아 도래의 전령입니다. 강생하시는 하느님 말씀을 고대한다는 대림 시기의 의미에도 들어맞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가톨릭의 전례력이 엘리야와 십자가의 성 요한을 연결 짓는 이유가 있을까요?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상응점이 있을까요?
집회서의 말씀은 엘리야를 불(火)의 예언자로 소개합니다. 그에 대한 서사를 구체적으로 전하는 1열왕 17-19장에 따르면, 엘리야의 출현(가뭄-땅을 마르게 하는 불) 및 예언직 수행(바알의 예언자들과의 대결)에 불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말하자면, 불은 엘리야의 예언자적 신원에 근본적인 힘과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하느님께서 엘리야를 직접 대면해주십니다. 그 대면은 불을 통해서가 아니라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 (히브리어 원어를 다르게 해석하자면) ‘모든 것이 먼지와 재가 될 만큼 다 바스러지고 난 뒤에 들리는 소리’를 타고 이루어집니다.(1열왕 19,11-13 참조) 이로써 예언직을 수행하며 한껏 타오른 불의 예언자는 불이 사그라진 뒤에 남은 한 줌의 재가 되었습니다. 얼핏 보기에 허무이자 죽음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놀라운 역설이 있습니다. 예언자는 그렇게 바스러진 재가 되었기에 바람에 실려 하느님께로 승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2열왕 2,1 참조)
십자가의 성 요한께서는 엘리야의 도정을 뒤따르셨습니다. 성인의 영적 동반자였던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에 따르면, 그는 “한평생 줄곧 성령이신 사랑의 불로 불붙어 끊임없이 타오르는 통나무처럼 살았던 사람”입니다. 성인께서는 태양보다 밝으신 빛 자체이신 분을 바라보다가 소경이 되셨습니다. 성인의 표현대로, ‘어두운 밤’에 들어서시게 됩니다. 어두운 밤은 참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 심지어 자신마저도 볼 수 없게 지워버리는 밤입니다. 성인의 표현에 따르면, 어두운 밤의 심연 가운데 놓임은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하느님의 정화의 불에 놓임입니다. 참 하느님 외의 모든 것이 재가 됩니다. 이때 성인은 엘리야 예언자께서 경험하신 구원 역사의 역설에 참여하게 되십니다.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잿더미에서 성인의 영혼은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관상합니다.
이러한 성인의 시선이 오늘 우리가 접하고 있는 그림에 반영된 것 같습니다. 그림은 오직 십자가 상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동시에 주님의 십자가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은 아버지 하느님께로 올라가시는 주님의 마지막 숨, 성령께 속해 있는 성인의 영혼을 가늠하게 해줍니다. 마치 엘리야를 하늘로 들어 올린 바람이 부는 것 같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먼지와 재가 된 성인의 영혼과 일치를 이루어 주시고, 그 가운데 성인께서는 성자 예수님으로부터 성부 하느님께로 향하시는 성령 하느님의 시선을 공유 받으실 수 있었겠지요. 두 분 신앙 선조들의 삶에 범부(凡夫) 신자의 삶을 감히 비교함이 한없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보다 더 사랑하고자 하는 이들을 두 선조들께서 전구로써 지지하시고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 스스로 세워놓은 하느님에 대한 시선이 바스라지기를, 성령께서 이끄시는 현실에 속하는 먼지와 재가 우리이기를 희망합니다.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51) 교만으로 처참한 최후 맞이한 우찌야왕
오래전 한 방송국에서 <태조 왕건>이란 사극이 방영되었을 때 정작 고려를 건국한 왕건보다 이상한 주문을 외우던 한쪽 눈이 먼 궁예가 주목을 더 받았다. 나도 열심히 시청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삼국사기」 등에 따르면 궁예는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어릴 때 한쪽 눈을 다쳤고 늘 말썽을 피우다가 출가하여 세달사(世達寺)라는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신라 말기에 각지에서 반란이 들끓어 혼란해지자 궁예는 891년 절에서 나와 한창 득세하던 세력에 들어가 활동을 했다.
「삼국사기」에서 “부하들과 함께 고생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무사하였다”라고 한 점을 보면 그는 귀족들의 수탈에 질려 있던 백성들에게 환영받았다. 세력을 넓혀가던 궁예는 901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 정했다. 궁예에게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지방 호족의 협조가 절실했다.
궁예는 군사적이고 현실적인 이익만을 중시하였다. 궁예는 카리스마와 동시에 애민 정신이 매우 강한 지도자였지만, 정치가에게 꼭 필요한 덕목인 인내심, 친화력, 융통성을 갖지 못했다.
집권 후반기에는 스스로를 미륵불이라고 불렀으며, 관심법(觀心法)으로 인간의 생각을 꿰뚫어 본다고 주장하고, 법봉(法棒)으로 신하들을 때려죽이는 등 광기를 일으켰다.
궁예의 무리한 왕권 강화책은 너무나 큰 부작용을 가져왔다. 공평무사한 인물이었지만, 왕이 된 후 민생파탄과 공포 분위기로 결국 백성들도 등을 돌렸다. 궁예는 쿠데타 현장에서 황급히 도망쳤고 분노한 백성들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우찌야는 16살의 나이에 유다 왕국의 왕이 되어 52년간이나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선대 왕의 정신에 따라 나라의 국방을 강화하고 영토를 확장했다. 우찌야는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중요한 성읍을 점령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우찌야의 권력은 매우 막강해졌다. 우찌야는 백성들을 사랑하여 농업을 발달시켰다. 그가 그렇게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은총 덕분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천신만고 끝에 성공을 이루면 교만해지기 쉽다. 우찌야도 강하고 능력있는 지도자였지만 교만해져서 결국 몰락했다. 그는 모든 일에 성공을 거두고 주위 사람들의 찬양을 받자 교만한 마음이 들었다. 우찌야는 주변의 찬송에 취해 하느님의 율법마저도 자신이 마음대로 고쳐 실천하려고 했다.
이때 대사제들이 말렸지만 교만해진 우찌아는 하느님의 법을 거스렀다. 우찌야가 사제들에게 화를 내려 하자 한센병에 걸리고 말았다. 아들에게 왕위를 이양한 우찌야는 별궁에서 홀로 한센병을 앓으며 쓸쓸히 지내다 죽었다.
인간은 자신이 약하거나 실패하면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겸손하게 구하지만, 높이 올라가거나 성공하면 마음속엔 하느님이 사라지고 교만해지기 쉽다. 교만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마음이다. 교만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물거품이 되게 한다. 훌륭한 지도자는 초심을 잃지 않는 겸손한 지도자이다.
[성경 속 기도 이야기] (22) 성모님의 찬양 마니피캇
하느님 자비 기억하며 마리아의 겸손 본받길
즈카르야의 노래(루카 1,68~79)와 성모의 노래(루카 1,46~55)와 시므온의 노래(루카 2,29~32)는 성무일도의 아침기도·저녁기도와 끝기도에서 불리는 복음서의 찬가로, 구약의 오랜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된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레지오 단원들이 매일 바치는 까떼나(사슬 기도)의 주요 부분인 성모의 노래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마주치는 곳에 자리합니다. 천사와 만난 마리아는 두려운 마음으로 믿을만한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 나섭니다. 마리아의 인사말만 들은 엘리사벳이지만, 태 안에서 아기가 뛰노는 것을 느끼며 성령으로 가득 차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마리아가 수태 사실을 입에 올리기도 전에 그것이 알려지는 놀라운 순간에 마리아에게서 하느님 찬양이 터져 나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1사무 2,1~10)가 큰 영향을 끼치고, 시편 및 구약의 여러 대목을 인용하는 이 노래는 마리아의 찬양 시편입니다. 그 전반부는 메시아의 어머니인 마리아 개인의 감사를, 후반부는 높이고 낮추는 세 개의 반대되는 움직임 속에 당신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을 노래합니다.
<1절>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1사무 2,1; 시편 34,3~4)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시편 35,9; 이사 61,10; 하바 3,1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창세 29,32; 1사무 1,11)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창세 30,13; 시편 72,17; 루카 1,45 참조)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신명 10,21)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시편 72,19; 111,9)
<2절>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시편 89,2; 100,5; 103,11.13.17)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시편 89,11; 118,15-16)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시편 147,6; 집회 10,14).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시편 107,9)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시편 98,3)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이사 41,8-10)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2사무 22,51; 미카 7,20)
마리아는 자신의 힘을 믿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기대하는 가난한 여인입니다. 기도하는 이는 마리아와 같이 겸손함과 경외심을 가지고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리라 기대하며 그분께 자신의 빈손을 내밀며, 실제로 하느님이 당신의 이들을 구하시기 위해 ‘능하신 팔’을 뻗치신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분은 당신의 계약에 충실하시고 약속을 지키십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은 불가능한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달리 보인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분이십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을 ‘나의 구원자’로 칭하는데, 이는 아들인 예수의 이름과 같고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의 핵심 주제와(루카 1,69.71.77; 2,11.30; 사도 5,31; 13,23 등) 동일합니다. 이름 ‘예수’는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는 뜻을 지닙니다.(하바 3,18; 마태 1,21; 루카 1,31 참조)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은 없는 이를 구원하는 분으로 드러나십니다. 하느님은 도움을 주시고 구하시는 분입니다.
이 노래는 끊임없이 백성을 향하는 하느님의 충실한 모습을 강조합니다. 그분은 나에게 충실하신 분이고 나를 알고 계시며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항구함에 걸맞은 응답은 결코 끊이지 않는 우리의 감사와 찬양일 것입니다.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마음과 심장
오늘 복음에는 주님께서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루카 3,17)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타작마당은 낟가리의 알곡과 쭉정이를 분리하던 곳으로 수확 때 특히 분주해지던 장소입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성경에서는 평생 쌓은 선과 악을 헤아려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심판장의 표상으로 자주 쓰였습니다(미카 4,12; 마태 3,12 등). 한편, 제2독서에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줄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옛 이집트의 심판 신학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입니다. 옛 이집트인들은 미라를 만들 때, 뇌는 필요 없는 부분이라 여긴 반면, 심장은 소중하게 보관하였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감정, 지혜가 자리잡은 곳이 심장이라 믿었기 때문인데요, 필리 4,7의 “마음”도 직역하면 ‘심장’입니다. 사실 성경에 등장하는 “마음”의 대부분이 심장을 의역한 말입니다(창세 8,21 등). 고대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높은 의학 수준에도 뇌와 심장의 역할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집트 신관에서 심장이 맡은 역할을 이해하려면 「사자의 서」(Book of Going Forth by Day)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을 알아야 합니다. 「사자의 서」는 망자가 가게 될 사후 여행의 안내서로서, 그가 저 세상에 잘 도착하도록 도와줄 주문을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주문은 망자의 심장을 ‘마아트’의 깃털과 함께 달아 무게를 재는 의식과 관련된 것입니다. 망자가 내세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지 이 의식으로 판단된다고 믿었으므로, 이집트인들은 망자를 묻을 때 「사자의 서」를 같이 매장하곤 하였습니다.
이때 망자의 심장 무게를 가늠해줄 깃털의 주인 마아트는 이집트인들에게 법과 정의, 진리와 지혜의 여신이었습니다. 망자의 심장 무게가 마아트의 깃털과 같거나 가벼워야 저승의 신 ‘오시리스’에게 무사히 갈 수 있습니다. 만약 깃털보다 무거우면 ‘아미트’라 불리는 괴물에게 잡아 먹히게 됩니다. 그래서 옛 이집트에서는 심장이 무거우면 죄 많은 사람이고 심장이 가벼우면 죄 없는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제 탈출 10,1을 봅니다. 여기에는 ‘주님께서 파라오와 그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셨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히브리어 본문을 직역하면, 이집트 관점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의미가 드러납니다. “완강하게”는 “무겁게”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주님께서 파라오와 그 신하들의 심장을 무겁게 하셨다.’ ‘죄를 짓게 하셨다.’라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집트인들을 겨냥한 경고에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도 우리 역시 ‘마음이 무겁다.’ ‘가볍다.’라는 표현을 쓰니 얼마나 흥미로운지요? 하느님께서 이집트 종살이에서 탈출한 옛 백성을 지켜 주셨듯이, 오늘도 주님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이 가볍도록’ 지켜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마르코와 함께 떠나는 복음 여행]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안식일이 지나고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간 여인들은 그분의 시신 대신 천사로 보이는 한 젊은이만 만나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더 이상 죽음의 그늘 아래 있지 않고 되살아나셨다고 전합니다. 또한 베드로 사도와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지내실 때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들보다 먼저 갈릴래아에 가 계실 것이고 바로 그곳에서 “그분을 뵙게 될 것”(마르 16,7)임을 전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놀란 여인들은 무덤을 뛰쳐나와 도망쳤고,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 그 소식을 아무에게도 전하지 못했습니다.
얼마 뒤,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직접 일곱 마귀를 쫓아내셨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 당신께서 부활하셨음을 알리십니다. 분명 그녀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많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앞선 여인들과는 다르게 예수님의 죽음으로 슬퍼하며 울고 있는 이들을 찾아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선포합니다. 그녀의 과거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인간의 이성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일까요?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실 것임을 예고하셨는데도 그들은 그 말씀을 까맣게 잊고 그녀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다는 또 다른 이의 말도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부활을 목격한 이들이 전한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는 제자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마르 16,14)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는 말씀을 남기고 승천하십니다.
마르코가 남긴 부활 사화를 처음 접했을 때, 왜 제자들이 아닌 다른 이에게 먼저 나타나셨는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물론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이들에 대해 조금 다르게 증언하지만(1코린 15,5 참조) 마르코는 부활의 첫 목격자, 그리고 그 사실을 용감하게 전한 이는 주님을 가까이 모시던 제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한 여인, 그것도 큰 죄를 용서받고 회개한 여인 마리아 막달레나였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받은 권위를 깎아내리거나 부정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은 모든 그리스도인, 특히 그분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이들에게 주어진 것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들의 증언이 전혀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아니 그들이 전한 예수님의 부활부터 완고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주님께 호되게 꾸짖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함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밝혀주신 복음을 인간뿐만 아닌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전하라는 사명만 남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또 전해야 할까요?
[묵시사회를 살아가는 신앙인] 재앙의 정체(묵시 9,1-12)
하늘에서 시작된 재앙의 다섯 번째는 ‘떨어진 별’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흔히 타락한 천사로 해석되거나 사탄이나 악마로 여겨지는 게 ‘떨어진 별’이다. 그 별에게 구렁의 열쇠가 ‘주어졌다.’ 별이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 열쇠를 별에게 주었다. 학자들은 이런 수동태 형식을 ‘신적 수동태’라 부른다. 요한 묵시록은 악의 세력이 휘두르는 힘을 묘사하기 위해 대부분 신적 수동태의 형식을 빌려온다. 요한 묵시록의 악은 힘이 있어도 얼마 안가서 사라져 버리거나 무너져 버린다. 악은 그렇게 무능력하다. 달리 말하자면, 참된 권능과 능력을 소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이셔서 악은 하느님과 동등하거나 하느님을 대적할 힘 따위는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모든 권능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신념이 ‘신적 수동태’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만약 이렇다면, 하느님은 기쁨, 행복, 성공, 그리고 정의, 진리, 평화 등등의 단어들 틈에서만 사유되어서는 안된다. 재앙, 고통, 불행, 나아가 사탄과 악마의 틈바구니 안에서도 그분의 섭리에 대해 우리는 묻고 답해야 한다. 요한 묵시록의 재앙은 그러므로, 사탄이나 악마의 폭력이나 그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다시 되새기는 메타포가 된다.
별이 구렁을 연다. 거기서 큰 용광로의 연기같은 것이 올라온다. 이 연기는 모든 것을 어둡게 만든다. 연기는 모든 것을 집어 삼켜 혼돈으로 만든다.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시기 전, 그러니까 아직 질서가 잡히지 않은 혼돈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는 장면 서술이다.(창세 1,2 참조) 하느님의 손길이 빚어내는 모든 ‘있음’ 이전에 어둠이 있었다. ‘어둠’은 ‘없음’과 같다. 떨어진 별로 시작하는 재앙의 서사는 있는 것 같으나 실은 없는 것들의 이야기다. 없는 것들을 아무리 자세히, 기묘하게 묘사한들, 그것은 사탄과 악마를 그려내는 ‘수동태’의 힘처럼 하느님 앞에선 부질없는 것들일 뿐이다.
부질없는 것들은 메뚜기, 땅의 전갈과 같은 것들로 분화하여 서술된다. 이것들의 폭력은 땅의 풀과 푸성귀, 나무로 대변되는 ‘자연’도 아니고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믿는 이들도 아닌, '하느님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사람’들을 향한다. 단번에, 그리고 습관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해석해 버릴 것이다. 요한 묵시록의 재앙은 하느님과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나쁜 이들을 향한 경고라고. 그러나 이런 선악 구도의 결과론적 징벌이 요한 묵시록의 재앙이라면 굳이 하느님과 어린양까지 언급하며 심판을 논할 필요가 있을까. 나쁜 일에 공분을, 선한 일에 기쁨을 지니는 건 인간 일반의 현상이므로.
우리의 이야기는 5절부터 재앙에 대한 자신의 논리를 차근차근 펼쳐 나간다. 다섯 달, 한계가 명확한 그 다섯 달 동안 하느님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이들은 재앙의 희생자가 된다. 그사람들은 죽는 게 아니다. 메뚜기로부터 괴롭힘을 당할 뿐이다. 그러나 그 고통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사람들은 죽기를 바란다. 한낱 메뚜기가 사는 시간이 다섯 달이고, 신약 성경은 ‘다섯’을 ‘몇 안되는 것들’을 가리킬 때 사용하기도 했다.(1코린 14,19; 루카 12,6; 마태 25,2 참조) 그렇게 허무한 다섯 달인데, 그 짧은 시간을 버틸 재간이 사람들에겐 없다. 도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이토록 힘들게 만드는 것일까. 메뚜기, 그것이 그렇게 두렵고 무서운 존재인가.
이제 메뚜기를 적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을 해치는 메뚜기는 그야말로 전투에 임하는 장수와 같다. 종말의 위기를 다루는 요엘서의 서술과 흡사하여(요엘 2,4 이하 참조) 메뚜기를 종말론적 형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메뚜기의 서술은 허망하다. 메뚜기에 관한 모든 서술은 실재하지 않는, ‘~같은 것’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금관 같은 것’, ‘머리털 같은 것’, ‘사자 이빨 같은 것’, ‘마차들의 소리 같은 것’, ‘전갈 같은 것’. 이런저런 같은 것들’은 실은 무엇 하나라도 제대로 인식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9장이 시작될 때 구렁에서 나온 연기와 같다. 모든 것을 어둠 속에 집어삼켜 무엇 하나라도 제 본연의 모습을 뚜렷이 드러나지 못하게 만드는 연기 말이다. 금관이든, 사자 이빨이든, 떠들썩한 마차 소리든, 모든 것은 메뚜기를 향하지만 메뚜기를 비켜가서 메뚜기가 도대체 무엇인지 모호하게 만든다. 그러니 메뚜기는 히브리 말로 ‘아바똔’, 그리스말로 ‘아폴리온’이라 부르는 ‘지하의 천사’(우리말 번역은 ‘지하의 사자’로 되어 있다.)를 임금으로 모실 수밖에. ‘아바똔’은 ‘파멸의 공간’이란 뚯이고, ‘아폴리온’은 파괴자란 뜻이다. 두 단어 모두 생명에 반하는 ‘죽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메뚜기를 소재로 서술된 재앙과 고통의 끝이 죽음이라니. 전투사의 모습으로 꾸며진 메뚜기가 전투 한번 해 보지 않은 채, 죽음의 메타포 ‘지하의 천사’를 제 임금으로 섬겨 버렸으니, 잔뜩 긴장한 채, 이를 깨물며 재앙과 고통의 끝을 탐험하고 그 정체를 묻는 우리의 읽기는 허무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건질 것은 명확하다. 죽음은 대결과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다섯 달로 한계 지워진 시간, 사람들이 그토록 죽고 싶어 하는 그 시간의 주인공 메뚜기는 사람들을 해치고 죽일만큼 대단한 힘이 없다는 것. 모든 재앙의 끝은 죽음을 향하고 있어 재앙은 그렇게 허무하다는 것.
재앙과 고통의 끝에서야, 그 허무함의 민낯이 드러난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하나의 희망을 발견할지 모른다. 하느님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그 사람들에게조차 죽음 같은 재앙은 징벌이 아니라는 희망 말이다. 견디기 힘든 순간을 맞닥뜨릴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못남을 탓하며 죄책감에 빠질 때가 많다. ‘내가 부족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어’, ‘나는 늘 왜 이럴까’ 하는 좌절과 패배의 소용돌이, 그 안에서 우리는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겪겠지만 우린 다시 한번 그 고통의 정체에 대해 최대한 섬세하게 물어야 한다. 그 고통의 끝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허무한 두려움이 아닐까.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은 우리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고통에 주눅들어 미리 단정짓고 후회하는 우리의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요한 묵시록이 정겨운 건, 유다의 묵시문학들처럼 달콤하고 화려하며 그래서 언제든 달려들어 경배하고자 하는 것들로 독자들을 현혹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삶은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어서 살아가는 데 안녕과 평화만 존재할 수 없는, 그리하여 삶은 죽도록 고생하고 죽고 싶을만큼 힘든 일을 끝내 허락하기 마련이다. 그때 비로소, 요한 묵시록의 재앙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삶이 아름답고 고귀한 건, 기쁘고 행복한 것들을 찾아내어서가 아니라 허무한 것에 저항하며 끝끝내 살아 내려는 생명에 대한 의지와 열정과 노력 때문이라는 것. 우린 그런 삶을 하느님과 함께 살아 내고 있다. 그러므로 고통에 대한 공부는 우리 삶의 여정 안에 여전히 남아 있다. “첫째 불행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두 가지 불행이 더 닥칠 것입니다.”(묵시 9,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