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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게 될 벌초
벌초할 무렵이 되면 왠지 부담이 느껴진다. 산소 가는 길이 험난해 도착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제종 이내의 집안 형제들이 공동으로 벌초를 해야 할 산소는 모두 여섯 기에 불과하다. 나와 형이 해야할 3기의 산소는 공동으로 할 벌초에 속하지는 않지만 맨몸으로 올라도 힘든 곳에 위치해 있다. 증고조부 내외의 산소는 도로에서 접근성이 좋아 그리 힘이 들지 않다. 집안 여러 형제가 공동으로 해야할 벌초를 나눠서 하고 있다. 아버지가 양자로 간 할아버지의 산소를 나와 형이 하다보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르기 힘든 3기의 묘역에는 할아버지 내외분과 큰 어머니가 모셔져있다. 할머니의 산소를 가장 늦게 썼는데 어느덧 사십 여년이 흘렀다. 할아버지는 장가드신지 삼일 후에 돌아가셨는데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였다. 산소를 쓴지는 백년도 훨씬 더 된다. 아버지께선 겨우 돌이 지나 십여 년 가량 수절해 오신 할머니에게 양자를 가셨다. 큰 어머니는 아버지께 시집오신지 오년도 채 못 되어 돌아가셨고 산소를 쓴지는 육십년이 훨씬 넘었다.
3기의 산소는 한 곳에 있어서 좋으나 승용차가 올라갈 수 있는 지점에서 사십분 가량 걸어야 도착할 수 있다. 할머니 묘소를 썼던 당시만 해도 그 산과 길엔 나무가 그리 우거지지 않아 야산이나 다름없었으나 지금은 주차지점에서 묘지로 난 길은 무성히 자란 풀들로 바닥 흙이 보이지 않는다. 길옆에 있는 나무들은 칡넝쿨로 뒤엉켜 있기도 하고 산딸기나무와 땅 찔레 등이 뒤엉켜 있는 곳도 있다. 이따금 낫으로 칡넝쿨이나 땅 찔레 등 일부를 베어내거나 길 안쪽을 향해 뻗은 나뭇가지를 쳐내어야 갈수 있을 정도다.
할머니의 묘소를 쓰고 난 후 몇 해 동안 나는 아버지와 함께 그곳으로 벌초를 많이 다녔다. 그때만 하더라도 예초기가 보급되기 전이라 벌초는 오로지 낫이나 톱을 이용했다. 묘 자리는 경사가 져 있으며 바닥엔 주먹만 한 돌이 많이 박혀 낫질을 하면 날을 다치기가 일쑤였다. 낫 두 자루와 톱 한 자루로 무려 사십여 년 동안 양부모의 묘소에 벌초를 하셨던 아버지셨다.
예초기가 보급되고서 몇 년 후 까지 아버지는 낫을 사용하시곤 했다. 작업이야 기계가 훨씬 수월하지만 온 산을 시끄럽게 하는 엔진소리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조상을 섬기는 일은 수월함보다 정성이 중요하다며 작업에 많은 시간을 들이셨다. 참으로 힘드셨지만 좀체 티를 내지 않으셨다. 내가 생각하는 아버지는 참으로 고지식한 분이셨다.
아버지께서 여든이 가까워지시자 낫질을 할 만큼 기력이 왕성하지 못하셨다. 그만 두시라는 형과 나의 만류로 작업을 그만두고 그냥 동행만 하셨다. 그때부턴 우리에게도 낫으로 더 이상 힘들게 하지 말고 기계를 사용토록 하셨다. 예초기를 사용 작업을 하다보면 돌들이 날에 부딪혀 불꽃이 일거나 멀리 튀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서 형은 내게 위험한 예초작업을 맡기지 않았다.
여든 중반을 넘기신 아버지는 기력이 쇠잔해지셔서 산소까지 동행할 수 없었다. 형과 나는 동생들까지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가능하면 둘이서만 벌초를 할 적이 많았다. 아버지께서 함께하시지 못하자 하는 수 없이 막내 동생을 몇 번 데리고 갔다. 같이 가면서 짐이나 기계를 들어주거나 낫이나 갈퀴 등으로 예초 작업을 일부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좋다면서 나와 동생에게 기계작업을 맡긴 적이 없었다. 서울 사는 바로 아래 동생은 참석을 못하지만 매번 일정액의 비용을 보내왔다.
형은 나와 함께 몇 해 동안 예초 작업을 해왔다. 사 년 전부터 몸 상태가 예전 같지 않아 예초기 사용이 버겁다고 했다. 그렇다고 나와 동생에게도 맡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의논 끝에 농협에서 알선해주는 대행업체에 의뢰하기로 했다. 소요되는 비용은 접근성이 좋은 곳에 위치한 산소의 두배를 지불하기로 했다. 올해로 삼 년째 되는데 대행업체가 출발하면 나는 형과 곧 뒤 따른다. 그들이 벌초를 다 마치면 준비해간 음식을 차려놓고 성묘를 하고 내려온다. 비록 후손들이 손수하지는 못하지만 그렇게라도 벌초를 마쳐야 마음이 놓인다.
아버지께서는 생전에 벌초를 하러 가실 적 가끔 가족들에게 “조상에게 성의가 없는 후손은 결코 복을 받지 못한다”라고 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조상숭배의식이 강하게 몸에 배여 있기 때문이다. 농경사회에서 유가(儒家)의 풍습을 따랐던 가문이라면 어느 가문이든 제사를 비롯한 벌초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농경시대의 그런 풍습과는 달리 산업사회를 지나 고도정보화 사회로 갈수록 생활은 더 바빠지고 복잡해지고 있다. 한가한 시대에 조상을 섬겨왔던 그런 의식이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 매장이 어려워 화장 후 납골당에 모시거나 수목장을 하는 등 장례문화의 변혁이 이뤄진지가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더구나 파묘하여 화장을 한 후 없애거나 산소를 알아도 벌초를 않는 묘지나 무연고(묵묘) 등의 추세에 비춘다면 연고가 있는 산소라도 언제까지 벌초가 행해질까?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 집안에도 웬만큼 생활 기반을 잡고 있으며 가까이 살아도 벌초에 무관심한 형제가 있다. 집안 여러 형제들 중 두 종제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버리고 몇몇 종제및 제종형제와 삼종형제는 국내에 살아도 아직 함께 참여한 적이 없다. 국내에 있지만 거리상, 경제적 형편상 참여못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는 전화로나마 미안함을 표한다면 참여한 것으로 봐 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벌초가 행해질 질 수 있는 미래의 어느 시점까지 벌초는 결국 산소 가까이 사는 후손들로 조상에 대한 성의를 얼마만큼이라도 지닌 자들의 몫일 것이다.
지금 우리세대나 다음세대는 둘 아니면 한 자녀를 두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오십대 이상의 우리 세대는 그럭저럭 윗대의 벌초를 하겠지만 화장율이 높아져가는 장례 추세로 봐 다음 세대에도 벌초가 잘 이어질까. 다다음세대에서는 '벌초'의 풍습이 확실하게 사라지지 않을런지. 설사 화장 후 묘소를 쓴다해도 자녀들의 숫자가 줄어 드는데다 멀리 떨어져 산다면 벌초는 어떻게 되겠는가.
2015. 9. 29
첫댓글 많은 부분 공감합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서서히 바뀌어 갈 것입니다. 죽은자와 산자가 가까이 있어야 그를 기억하거나 회상할 수 있고, 그래서 묘소도 서양이나 일본처럼 마을 가까이 두는 것을 생각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 잘 읽었습니다.
묘소를 서양처럼 가까이 써야되지만 아직 우리의 정서가 그리 미치지 못하여 안타깝습니다.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과 같고 보면 죽은 이가 묻힌 묘소를 두려워하고 혐오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데도 말입니다.
장례문화를 바꿔 후손들어게 부담을 안 남기게 해야 할 것 같은데. 법으로 강하게 규정하거나 상위사회로 부터 솔선을 하지않는 한 기대할 수 없고 그냥 희망사항일 뿐이라 생각을 합니다. 공감을 하면서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나다. 최상순드림
모든 분의 댓글과 공감입니다.친정 부모산소 벌초를 매년 제가 해결하고 있으니까요.조상을 잊고 사는 사람들의 삶이 평화롭고 자손번창할런지, 앞으로 벌초가 사라질런지 생각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