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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으로 하는 중보기도(딤후 2장20-26)
성경본문:디모데후서 2:20-26
20-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22-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23-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24-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25-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26-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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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보기도의 은사?
몇 주 전 목회학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저희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학교 측의 요청으로 제가 학생들을 위한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낯익은 한 얼굴이 있었습니다. 거의 25년 만에 만나는 고등학교 때 같은 반 동기동창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을 보면 긴장하게 되지요. 특히 저 같은 경우는 목사가 되어 성직자의 생활을 하는데, 이전의 삶을 살 때 알던 사람을 만나는 것은 늘 부담스럽습니다.
그 친구가 강의를 마치고 저에게 아주 날카로운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이 교회를 목회하기 위해 얼마나 기도하십니까?”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질문입니다. 과연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기도하고 살아가는가? 잠깐 사이에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고민을 했습니다. 그때 제 머릿속에는 기도하는 많은 성도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나의 목회는 나의 기도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성도의 중보로 이루어진다는 생각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를 위해 기도하는 많은 기도의 동역자가 있습니다.”
나의 부족함에도 기도로 돕는 사람들 그 사람들과 함께 목회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저는 2024년 중보기도 시리즈에 대해 설교를 하게 되었고, 중보기도 대원을 모집하게 되었습니다. 기도 24365라는 운동도 그때, 그리고 강단을 리모델링하면서 양쪽에 아론과 훌 방을 만들게 된 이유도 바로 거기서 기인합니다.
요즘 기독교 TV를 보면, 은퇴하신 조용기 목사님의 사역이 나옵니다. 특히 많은 신유의 역사를 일으키는 모습을 보면서, 아마 목사 중의 거의 모든 사람이 한 번쯤은 그런 생각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나에게도 저런 은사가 있었으면…”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왜 나에게는 그런 은사가 없을까요? 조용기 목사님은 영어와 일본어 설교를 유창하게 합니다. 미국에서 살다 온 내가 봐도 부러울 정도로 말입니다.
대답은 아주 간단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분만큼 은사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남에게 주어진 은사들을 바라보면서 부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것 아닙니까? 내가 보기에 저 사람이 더욱 귀중하게 보이는 것이지요. 나는 질그릇인데, 저 사람은 금 그릇으로 보이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과 비교하면서 자기 비하를 하기 시작하고, 실상은 자신 속에 숨어 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보화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동일한 물음이 있습니다. 오늘 중보기도 사역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나에게 중보기도의 은사가 있는가?”
혹시 여러분은 내가 다른 사람에 비하여 부족하다는 이유로, 당신 속에 있는 은사를 무시하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는 은사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소중한 은사를 개발하는 것이요, 우리 안에 숨겨진 보화를 캐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당신 안에 은사를 개발하라!
은사에 관하여 성경은 어떻게 말씀할까요? 고린도전서 12장은 은사에 대하여 아주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4-7절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본문에서는 그릇으로 표현했습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 나무 그릇과 질그릇이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다!”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같은 성령으로 불림을 받았으나 그 직분이 여러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사역은 여러 가지나 그것을 주관하시는 이는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한 곳에 쓰시기도 하시고 천한 곳에 쓰시기도 하시지만, 그 모든 그릇이 하나님의 손에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년 전 청년 대학생들의 연합집회에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 주제가 “숨은 다윗을 찾아라!”였습니다. 그때 그 말이 얼마나 감동적으로 들렸는지 모릅니다.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이새에게 보내셔서 아들 중 하나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지만, 그가 누구인지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이새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부터 얼마나 얼굴이 준수했는지 사무엘은 기름 부을 자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 유명한 말씀이 나오지요.
사무엘 상 16장 7절입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어쩌면 오늘 본문 말씀과 그렇게 잘 맞아떨어지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금 그릇이다, 은그릇이다, 나무 그릇이다, 질그릇인지를 판단할 때, 하나님께서는 깨끗한 그릇을 찾으신다는 것이지요. 그 마음속에 중심을 보시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얼마나 큰일을 할 수 있는가?
얼마나 많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가를 보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얼마나 중심이 바르게 되었는가를 주목해 보신다는 것이지요.
사무엘 상 16장 13절을 주목해 보겠습니다.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다윗이 왕이 될 만큼 자격을 갖춘 사람이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아니라 그 중심을 보시고 기름을 붓고 나니까 여호와의 신에 감동이 되어 왕 될 자격이 된 것입니다. 아무도 주목해 보지 않았던 숨겨진 다윗을 찾아 기름을 붓자 그가 귀한 사람이 된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스스로 자격을 생각하면서 혹시 좌절하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외적인 조건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보기도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느냐를 보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릇의 생김이 아니라 어떤 것이든지 담을 수 있는 깨끗한 그릇이 되느냐입니다.
자! 우리가 한 가지 더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속에 있는 은사를 개발시키기 위해 다른 특별한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단지 어떤 것을 주시든지 담을 수 있는 깨끗한 그릇이 되라고 말씀하시지요.
“깨끗한 그릇이 되면…”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명확하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영어 성경 표현이 좀 더 명확합니다. “If you stay away from sin you will be like one of these dishes made of purest gold - the very best in the house…”
깨끗한 그릇이 되면 그 집에서 가장 귀하게 사용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각도로 한 가지를 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그릇이냐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그릇에 무엇을 담느냐가 또한, 그 그릇의 가치를 결정하지요. “깨끗한 그릇이 되라!”라는 말씀은 사실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 “the very best in the house”가 되지요.
우리는 겉의 모양을 신경 쓰지만, 하나님은 그 그릇에 무엇을 담을까를 생각하십니다.
우리가 중보기도의 은사를 개발한다는 차원에서 생각을 한다면 우리가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역의 동역자로 귀하게 쓰이는 그릇으로 준비되느냐 되지 않느냐의 문제이겠지요.
언젠가도 설교시간을 통해 인디아나 존스 3 “성배를 찾아서”라는 영화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의 핵심 줄거리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드셨던 그 잔을 찾아 그 안에 있는 포도주를 마시면 불로장생한다는 전설을 찾아 나선 사람들의 쟁탈전입니다. 마지막 모든 위기와 난제를 넘어 “성배”가 있는 곳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총을 들고 강한 권력을 가진 나치의 장교가 그 잔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곳에 수없이 많은 잔이 함께 있어서 구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불로장생하기 위한 그 사람의 선택, 금과 은과 각종 귀한 재료로 만든 잔들, 그 가운데는 투박하게 만들어진 나무잔도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배를 찾아 마시면 생명을 얻지만, 다른 잔에는 독주가 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고민을 하던 나치의 장교는 가장 아름다운 금잔을 찾아 마십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독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제 인디아나 존스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는 가장 투박하고 못생긴 나무잔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그 속에 있는 포도주를 먹였을 때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아주 드라마틱한 영화인데,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강하지요.
주님의 생명의 잔은 금 그릇에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금 그릇이 귀한 것이 아니라 투박한 나무 그릇이지만, 우리 주님이 사용하신 것이기에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당신 안에 있는 중보기도의 은사를 개발하기 위하여, 당신의 그릇을 깨끗하게 하려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1) 내적인 문제인 “죄”를 해결해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악의 세력을 탐지하고, 대적하고, 분쇄하려면 먼저 자신이 순결해야 합니다.
이사야 59장 1-2절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하나님은 순결한 자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죄”는 기도를 올라가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물입니다. 진실한 중보기도자는 “순결한 삶” “거룩한 삶” “구별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2) 관계의 문제인 “쓴 뿌리”를 제거해야 합니다.
많은 중보자가 마음의 상처 때문에 잘못 기도합니다.
내적인 쓴 뿌리가 제거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기도할 수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이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깨어진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십시오. 깨어진 창을 통해, 금이 간 유리를 통해 저편에 있는 사물을 보십시오. 그 모습이 일그러져 보입니다. 형상이 깨어져서 보입니다.
당신 안에 있는 상처의 쓴 뿌리는 올바른 기도자로 서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특히,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신앙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됩니다.
용서란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얼마 전 저는 어떤 분과 함께 자녀의 문제를 가지고 상담을 했습니다. 결혼한 자녀와 그 배우자에 대한 미움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 그분은 아주 지적이고 신앙적인 분이었습니다.
또한, 그분은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의 신앙과 인생문제를 자주 상담해 주는 위치에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이 고민하고 있는 그 문제를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상담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 그랬더니 “당연히 용서하라고 하지요. 그런데 목사님 제 문제에서는 그게 안 돼요.”
결국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괴로워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5절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3) 인격의 문제인 “사랑”에 기초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동기는 전적으로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보기도 하는 사람이 다른 이들을 쉽게 정죄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다른 이들에게 나무나 많은 상처를 주는 것을 경험합니다. 때로는 영적인 교만으로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자신에게는 확신이 있으나, 상대방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없어서 “자기중심적인 기도의 사역”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난 주간에 저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어떤 집사님의 이야기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분은 누군가를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는 분입니다. 정말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중보기도를 하는데, 그 사람이 변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생기면 싸들고 가고, 전화가 오면 식구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모든 말을 받아주고.
그러면서 이 집사님의 마음속에는 늘 기대감이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전화를 해서, “예, 집사님 이제는 깨닫게 되었어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아닌 감사하는 마음이 들어요!”라는 말을 듣는….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가도, 아무리 기도를 해도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그분에 대한 실망감, 기도해도 변하지 않는 것 때문에 기도를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 것이 있습니다. 중보기도 하는 자신의 마음속에 자기중심적인 교만이 있음을 말입니다. 무엇보다 큰 교만은 “내가 이만큼 기도했으니까 변해야지.” 하는 생각입니다.
기도가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지기를 간구하기보다는 자신의 의를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입니다.
또한, 중보 기도하는 자신의 마음속에 그분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없음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사명이라고 생각하나 부분이 다분히 의무에 의한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무로 기도를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았답니다.
하지만, 그 의무 때문에 억지로 새벽예배에 나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신의 새로운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고, “이제는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요, 이제 예수님의 마음을 알 것 같아요!”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답니다.
빌립보서 2장 2-4절의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그렇습니다. 이 마음을 품을 때 깨끗한 중보기도자의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중보 기도의 은사를 활용하십시오!
이렇게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준비된다면, 우리에게 주시는 유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를 드는데, 하나는, “주인의 쓰임에 합당하며”입니다.
영어성경의 표현에 보면, “Christ himself can use you for his highest purpose”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최고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십니다.
자, 다시 한 번 강조하고 넘어갑니다. 이제 깨끗한 그릇이 되면 하나님은 당신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최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제가 군에서 군목 활동을 할 때, 부대를 다니면서 위문을 하고 인격지도 교육을 했습니다. 당시에 어떻게 하면 흥미를 끌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휴가증을 병사들에게 상품으로 걸고 인격지도 교육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병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이렇게 제안을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가진 돈 중의 가장 작은 단위를 가진 사람에게 휴가증을 줍니다.”
그랬더니, 같은 액수면 빨리 가지고 나오는 사람이 유리하고 생각을 했는지, 여기저기에서 10원짜리를 들고 나오는 병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여유 있게, 그리고 느긋하게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5원짜리를 가지고 나오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정도면 되리라고 생각을 했겠지요.
그런데 그 순간 갓 전출 온 이등병이 1원짜리 동전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론의 여지가 없이 그 형제가 휴가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주일이 되어 예배를 드리고 나와 인사를 하는데, 한 형제가 제 손에 종이쪽지를 쥐여 주고 갔습니다.
그 내용에는 그날 그 1원짜리가 이등병의 것이 아니라 고참이 그 친구의 가정 사정이 딱함을 보고 돈을 가지고 나가도록 했다는 것이지요.
그 사연을 알게 된 저는 지휘관에게 찾아가 미담사례로 이야기를 하고는 양보한 사람도 함께 휴가를 가도록 조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자!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은사”란? “하나님의 목적”이란? 이런 것입니다.
어떤 쓰임에 합당하느냐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당신이 깨끗한 그릇이 되면 하나님이 합당하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즉,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깨끗한 중보기도와 누군가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중보 기도자가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제 중보기도의 은사자인 당신에게 성경은 이렇게 은사를 활용하라고 권면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고” (23절)
중보기도의 은사를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무식한 변론을 버려야 합니다. 무식한 변론이 무엇일까요? 다툼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upset people” 그리고 “make them angry”라고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중보기도를 한답시고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때로 기도자들이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고 분노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영적 교만에 빠져서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24절)이라고 말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은 자기중심적인 말입니다. 자신의 지식에 근거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중보기도의 생명력은 이 원리가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생각해 보세요.
추운 날씨에 거리를 헤매던 고양이가 어떤 문이 열려 있는 집을 보았습니다. 그 집 안에는 장작불이 타고 있었기에, 고양이는 그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보니 고양이가 얼어 죽어 있었습니다.
그 벽난로는 백열전구를 붉은색 셀로판지로 싸서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행위가 없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생명력 없는 중보기도자의 모습?
온유함과 사랑이 없이 중보 한다고 할 때, 정죄하게 되고, 이것이 사람들을 분노하게 하며 다툼을 만들어 냅니다. “중보 한다!”라는 말은 중보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복음의 역사가 중보자를 통하여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일본의 성자라고 일컬어지는 가가와 도요히꼬의 아버지는 정치인이요 시장이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기생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본처의 자식들로부터 너무나 많은 학대와 무시, 배척과 조롱을 받으면서 ‘나를 왜 낳아서 이런 고통을 겪게 하는가!’라는 분노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자기의 저주스러운 인생을 비관하면서 동네 어귀에 앉아서 한없이 시름에 잠겨 있는데 구세군 전도단이 지나가면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사랑하십니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니 내 아버지도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내 형제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누구관대 누구든지 사랑한단 말인가’ 그 말이 너무 놀랍고 생소해서 다가가서 물어보았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은 누구든지 사랑하십니까?”
그러자 전도 대원들이 “그렇다”고 기쁘게 말하고는 가가와 도요히꼬를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가와 도요히꼬의 마음에 가득했던 응어리와 상처가 치료되면서 참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또 한 번의 위기를 경험합니다.
예수를 믿고 신학교까지 갔는데 그만 폐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떠나갔습니다. 같은 크리스천 공동체고 그를 떠나갔습니다.
그는 좌절 속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있던 나가노 목사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갑니다. 일본은 예나 지금이나 복음을 전하기에 어려운 땅인데, 나가노 목사님은 교회개척을 하고, 많은 시간이 흘렀으나 교인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찾아온 교인이 폐병으로 죽어가는 가가와 도요히꼬였습니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예배를 마치고 점심을 차려 주었는데, 그만 그 앞에서 가가와 도요히꼬는 피를 토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나가노 목사님의 마음속에 울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네가 그를 품어 주어라”
그래서 다시 상을 차리고 그의 손으로 피를 씻었습니다.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는 그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회복하고 돌아왔으며 하나님은 그의 질병을 치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본의 성자로 불리는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중보의 삶을 사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온유한 마음으로 세워주고 품어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그 마음을 표현합니다.
25-26절입니다.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그 사람에 대한 애정과 가능성을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임하기를 기대하는 심정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 중보기도의 은사를 중보기도의 삶으로 살아갈 때,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사람을 살리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사역이 이어집니다.
인류의 역사에 정말 많은 공헌을 한 헬렌 켈러라는 사람이 어떻게 탄생하였는지 아십니까?
보스턴의 한 병원 지하 병동에 한 소녀가 격리되어 수용되었습니다. 이 소녀의 정신질환이 너무 심해 사람들이 다가오면 괴성을 질렀습니다. 너무나 공격적인 이 소녀를 도저히 치료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독방에 감금했습니다. 이 소녀의 부모도 의사도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 소녀를 불쌍히 여긴 은퇴한 간호사가 그 소녀에게 애정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녀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먹을 것을 주면 집어 던지고 말을 건네면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면서 그 간호사의 사랑에 감동한 소녀는 차츰 마음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와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그 소녀의 질병이 치료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소녀가 앤 설리반입니다. 그녀는 자신처럼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던 헬렌 켈러를 사랑과 인내로 교육함으로 세계적인 인물로 키워냈습니다.
5중고에 시달리는 한 아이에 대한 애정과 기대를 버리지 않으므로 말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그 중보기도는 바로 이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당신의 판단과 이기심이 아닌, 무식한 변론으로 말미암은 상처가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하나님과 동일한 관심으로, 기대로 하는 기도와 삶으로 말입니다.
영혼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중보기도 은사의 최고봉입니다.
중보기도를 하는 당신의 마음속에 “온유함”이 있습니까?
당신의 중보기도와 중보기도 후에 당신이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유익이 되고 있습니까? 누군가를 위한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아 답답하고, 포기하고 싶을 때, 주님의 마음을 품고 계십니까? 혹시 여러분은 기도하며 자신의 마음대로 결정하며,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음을 정죄하지 않았습니까?
로마서 8장 33-34절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당신이 기도하는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택하신 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당신이 눈물 흘려 기도하는 그 사람을 누구도 정죄할 수 없음을 아십니까?
당신이 기도하는 그 사람을 위하여 우리 하나님께서 간구하심을 아십니까?
여러분이 중보기도의 은사자가 되면, 중보기도의 기적을 체험합니다.
여러분의 은사가 개발되는 분량만큼 하나님을 여러분을 사용하시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