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염하던 자태는 어디로 가고 -2
어제의 글에 이어서 올리겠습니다.
부처님은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여러 사람들에게 확인시키기 위해 물었습니다.
“세존이시여 !,
이 여자는 자바카의 동생 시리마임에 틀림없습니다.”
“자바카의 동생 시리마가 틀림 없소?”
“그렇습니다.”
이때 부처님은 많은 대중을 향해 설법을 시작 하셨습니다.
“비구들아 !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라.
여기에 누워서 썩어가고 있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동정을 받았던 시리마의 모습이다.
이 도시의 사람들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천금을 내고 하룻밤 동안 이 여인을 차지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제는 거저 준다고 해도
이 여인을 맡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처럼 아름답고 요염하던 자태도
한 번 죽자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다.
비구들아,
똑똑히 보고 깨달아야 하느니라.”
그 수행승은 이 말씀을 듣고서
곧 육신으로 보는 허망함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한 번쯤은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것이 인생 팔고의 하나에 속합니다.
前 주에서 부터 이어지는 죽음에 관여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이메일로 내게 하소연을 보내 왔기에
그 죽음과 죽음이 오기까지의
지금의 ‘나’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려 주고자 하여서입니다.
어떤 삶이 값지고 어떤 삶이 가난 한지를 모두 잘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고 허망한 곳으로 시선을 돌려 잊고 살아 간다.
내게 이메일을 보내면서 상담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어떤 사람은 육신이 절반이 마비되어
매일 죽을 생각만 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업이 망하여
가족이 흐트러지고 매일 죽을 생각만 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메일에 자신의 현재 입장을 구구절절 애절하게
부부의 관계가 원만치 않아서 매일 싸우다
이제는 아예 죽이고 싶도록 미워진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죽음이란 것이
그렇게 쉽게 자신과 흥정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탄생은 고귀한 육신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소승은 늘 낙태를 하지 못하게 타이릅니다.
부모가 준 선물 이전에 다시한번 사람으로 몸을 받아
전생에 못 다한 자비와 보시를
그리고, 금생에 복을 지어 보라는 한 찰라의 기회를 준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는 육신이 멀쩡하고 돈도 잘 벌고
가정생활도 오손 도손 재미지게 사는데
왜 ‘나’만 이 고통에서 사는가 하고
매일 그 시름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삶 자체가 곧 포기가 되는 것이며
그 포기하는 삶은 마침내 죽음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위에 글에서 읽었듯이 절세미인도 죽으면 썩는 일이오.
지금처럼 어렵고 힘들게 사는
육신이 부족한 사람도 죽으면 썩는 것입니다.
단지 그것들은 육신 이라는 물건위에
좀 더 이쁘게 보이는 화사한 보자기를 가지고
포장을 한 차이 뿐이라 했습니다.
몸 에는 오장육부가 다 똥과 오줌이오,
기생충이 드글 거립니다.
단지 포장지만 말끔할 뿐입니다.
우리는 늘 죽음과
삶이라는 과제 앞에서는 끝없이 대화가 오고 갑니다.
하지만 정녕 자신이 그 죽음 앞에서나
미인 미남 앞에서나 자신과 비교가 되고
그것을 모든 것으로 착각하고 그 늪에서 고민합니다.
나는 오른쪽 눈을 보질 못합니다.
십 칠 팔세 인가 하던 때에
봉술을 하다가 가로막던 봉술이 부러지면서
내 오른쪽 눈의 동공을 파고 들어가
각막 자체가 지금은 벗겨져 있습니다.
오른쪽 시력은 장님수준입니다.
눈에는 늘 건조하여 잠을 잘 때도 다 감기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잠이 부족한 날은 종일 눈이 쓰리고
시뻘겋게 충혈 되어 종일 눈물이 흘러내리곤 합니다.
고통이 심하게 일어나는 때가
바로 수면이 부족한 다음날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자신의 현실을 비관하는 사람과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갖고
제2의 출발을 하는 사람의 차이는 엄청난 차이를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비가 되어 있어도 볼 수 있고 말을 할 수 있으니
아직은 감사해야 하고 사업이 망했다 하여도
아직은 가족들이 건강하다면 그것에 우선 감사해야 하고
부부 간의 갈등이 심하다면 아직은 젊다거나
혹은 먹고는 살만 하다거나 혹은 자식들이 의지에 어긋나지 않고
잘 자라주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늘 남에게 있는 것을 보지 말고 자신에게 있을 것을 찾아
지금의 내가 그래도
아직은 행복하다는 생각을 깊이 갖아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툭하면
전생의 업보가 심해서 오늘 이런 꼴로 산다고들 합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정히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면
지금 부터라도 그 전생의 업에 대한 참회를
이번 생에서
확실하게 풀어 가야겠다는 다짐을 해 볼만도 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전신 장애자로 태어나
오체투지라는 책을 써 낼 정도로 자신을 키웠습니다.
어떤 사람은 손가락이 여러 개 없는데도
피아노를 훌륭하게 치면서 자신을 키우고 있습니다.
이제 지금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은
지금 부터의 자신의 생각에 달려 있는 것이니
지금 생각 해 보셨으면 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지낼 것인가를........
이것이 오늘의 따끈따끈한 글입니다.
2024년 06월 13일 오전 05:12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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