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연배 시 모음 3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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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밤
구연배
배고픈 메뚜기
달 속에 뛰어들어
달을 갉아먹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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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산길에
구연배
우거진 풀숲일 때는
무어라 보이지도 않더니
서늘한 바람에 모습을 드러낸
하얀 구절초
우리도 그렇다
어디서 사는 누군지도 몰랐더니
생각지 못한 인연으로 다가와 친구 된
그대와 나
가을 산길
지천에 구절초 피고
내 마음엔 주단 깔리고
아무도 몰래 꽃 피어
온 산이 향기롭듯이
마음 나누어
한 뼘만이라도 따뜻할 수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다 늙어서
뒤따라오는 이 있다면
이래서 사랑은 아름답다고
지그시 힘주어 말 할 수 있는
추억 한 자락 환히 내보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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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선물
구연배
가을이 되면
혼자되는 연습을 하는 시간
열매들은 떨어져 제 갈 길로 굴러가고
꽃씨는 바람에 흩어진다
.
혼자서도 넉넉한 저녁
새들이 부리를 다듬던 나뭇가지에
별이 걸리고
산그늘 도타운 품안에서
마른 풍경으로 새롭게 깨어난다.
기울어 진 삶도
흔들리던 다짐도
맨 얼굴로 비탈에 선 나무들처럼
꿋꿋하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겨울로 가야 한다.
외롭다는 것은
아직도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
그리움이 저물지 않았다는 것
사라지는 것은 겉모습일 뿐
단단한 설렘으로
오래오래 기다려줘야 한다.
쓸쓸함을 견뎌야 한다.
혼자이면서 혼자이지 않은
빛나는 눈물로
그대에게 가는 길
그것이 나를 키우는 힘이고
따뜻한 희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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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숲에서
구연배
말없이 떠나간 꽃들아
새들아
이별연습으로 요란 했을 그대들의
마지막 날을 나는
귀 기울이지 못했다.
눈치 채지 못했다.
나무들도 쓸쓸함을 견디려
옷을 벗어버렸다.
가진 것이 많으면 더 외로워지는 세상
힘이 되어준
따뜻한 그늘을 추억하며
꽃자리 언덕에 서서
올려다보는 하늘 저 멀리
날아간 길이 보이고
그 곁에
흰 구름 흘러간다.
안개 깔리며
지우고 또 지우는 풍경 속으로
낙엽을 밟으며
씨앗을 묻는 흙바람 소리 들리고
아무도 빈 둥지 허물지 않는다.
돌아올 믿음을 간직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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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숲의 풍경
구연배
나무를 잡고 우는 바람 소리인지
바람을 잡고 우는 나무 소리인지
마음을 잡아당기는 낭자한 소리
생비늘 같던 낙엽과
풍경을 흔들어놓기 일쑤인 바람이
그늘을 내려놓고
적요를 빚고 있다
철새들 떠나고
풀벌레 사라진 골짜기에서
생 이끼를 얹고
찬 물에 발을 씻는 바위의 침묵을
한 모금 마신다
꽃 피는 아침과
꽃 지는 저녁을 함께한 씨앗들도
제 갈 길로 가버리고
마음의 뿌리만 남아
기다림을 믿고
시간과의 싸움을 끝내면
바람도 잎도 다시 오겠지
물관을 닫고 빈 몸이 된 나무에
귀를 대면
나이테를 감는 비밀한 시간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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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
구연배
나방이 붙자
출렁출렁 춤추는 거미
생사가 한 줄에 걸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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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구연배
광장에 가면
섬 하나 외로운 바다를 만난다.
출렁이는 쓸쓸함과 건널 수 없는 외로움이
한 가득 밀물 든 충만.
사람들이 모여들수록
자꾸만 비어가는 광장의 알 수 없는 품 안에서
눈물 나게 이기적인 설움을 꺼내 놓고 끝없이
끝없이 얘기하고 싶은 마음들.
사람은 왜 외로워져야 사람다워지는 걸까.
모일수록 혼자가 되어 떠도는 섬, 광장에서
적의의 시간들을 우적우적 되새김질하는 우리는
얼마나 더 쓸쓸해지는 연습을 해야 하나.
성찰할 줄 아는 한 마리 새가 되어
언젠가는 저 바다를
바다의 광막함을
날개 밑에 죄 품을 날이 오겠지.
뼈를 드러낸 그리움을 남기고 우리는
머물렀다 떠난다, 파도처럼
저 푸른 물길을 걸어
바다의 광장, 그 섬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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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구연배
비가 내린다고 전화를 했다.
나도 안다.
그런데 그녀의 전화를 받고 난 뒤의 빗소리는
곡조를 타고 내리는 노래로 들린다.
눈이 온다고 전화를 했다.
나도 안다.
그런데 그녀의 전화를 받고 난 뒤의 눈발은
하늘을 겁없이 날아다니는 춤이 된다.
멋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나
생각 또한 가멸다.
그런 나에게 전해주는 그녀의 한 마디 말은
구석진 마을의 꽃을 떠오르게 하고
강물에 잠긴 풍경 속으로 풍덩 빠져들게 한다.
무시로 나를 힘들게 하고
잠시도 나를 평화롭게 놔두지 않지만
가난한 마음의 뿌리를 톺아주고
버림받은 말들을 되살아나게 한다.
함께 있어도 쓸쓸하다.
떨어져 있어도 함께 한다.
그래서 더 절실히 그녀가 필요하다.
이것이 힘들어도 깊어만 가는 사랑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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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등에 기대어
구연배
봄 숲에 들어가
나무에 등을 기대보면
수관을 타고 오르는 물소리가 들린다.
젖살을 더듬는 아이처럼
바람의 온기와
흙 속의 물기를 발아들이는
넉넉한 뿌리의 힘
저 소리가 터져 꽃잎이 되느니
저 온기가 퍼져 그늘이 되느니
봄 나무 같은
그대 등에 기대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붉디붉은
그리움 소리를 듣고 싶다.
슬픔이 터져서
절정의 노래가 되는
그리움이 차 올라
꿈길 환히 열리는
비밀한 사랑을 우거지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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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구연배
꽃이 터진다
터지는 것은
주체할 수 없는 아픔
그러므로 꽃피는 정원에서는 누구나
생각에 어지럼병이 든다
꽃이 핀다
핀다는 것은
세상에 알려야 하는 상처
그러므로 꽃그늘에서는 누구나
추억의 피를 흘린다
그대 그리운
생각이 터지고
추억이 터지고
터져서 마침내 꽃이 되고야 마는
간절한 사랑이야기
상처가 꽃이 된다
아픔이 향기가 된다.
꽃피는 날에
꽃피니 알겠다
네게서 한 걸음도 벗어날 수 없었던
부드럽지만 단단한 그 겨울의 폭설과
정신을 몰아치던
그대의 찬 눈빛이 모두
아름다운 마음이었다는 걸
나 이제
가슴에 핀 꽃으로 향기로우니
봄꽃이라 불러다오
무섭고 쓸쓸한 삶의 벼랑에서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기다리느니
노을이 지면
찾지 않아도 반짝이는 별
떠오르는 것은 모두 그대임을
꽃피니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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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은 모두 다르게 산다
구연배
누구나, 살면서
꽃이거나
향기 나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때론 격렬히 때론 우아하게
마음을 살피고 몸을 드러내지만
꽃이 되고 향기가 되는 일이 어디 쉬운가.
그런즉 들로 나가 꽃을 만나 보라.
향기를 맡아 보라.
그대가 바라는 꽃들, 향기들
지천으로 피어나고
공간 구석구석 은은히 깃들여 있다.
그리고 자신에게 물어 보라.
무엇을 보고 느꼈는가를.
꽃들은 모두 다르게 산다
다르게 사는 것이 꽃이고 향기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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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무릇
구연배
올곧은 채로 살다가
외로워지는 날이 오면
꽃이 되는 마음도
타래처럼 얽힌 인연으로
가슴이 탄다
흔적은 있는데
찾을 수 없는
만날 수 없는
내 안의 그대
그대 안의 나를 위하여
부지런히 일궈놓은 꽃밭에
선명히 찍힌
새벽새 발자국
상사화!
누가 붙인 이름인가
불같고
얼음 같고
영영 이별인
먼 인연의 걸음으로
앉은자리에서
마음만 흔들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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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오는 날
구연배
엽서를 습니다.
폭설의 함박눈처럼
그리움을 꾹꾹 눌러씁니다.
싸드락 싸드락
쌓이는 눈 소리
엽서를 쓰는 글씨 소리.
제 발자국 소리를 듣는 마음은
그래서 하얀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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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되어 내리고 싶다
구연배
눈이 내린다.
꽃잎과 함께 사라져
우리를 스산케 했던 나비 떼들
분분히 날아와 스스로 꽃이 된다.
납작 엎드려 치러야 하는 죄
그래서 눈꽃엔 향기가 없다.
눈은 소리 없이 녹을 것이고
녹아서 누군가의 피톨로 흐를 것이다.
그때 나는 보리라.
우쭐우쭐 돋아나는 새싹과
맨발로 걸어도 좋을 향톳 길에
싱싱한 꽃대를 거침없이 밀어 올리는
들꽃의 씩씩한 이름들을.
과음 뒤의 속 쓰림 같은 절망의 힘도
없어서는 안될 하루 분의 양식
새벽길의 눈으로 내리고 싶다.
어지러운 발자국으로 얼룩진
불온한 길을 하얗게 표백시키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마음 속 그리운 풍경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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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매미
구연배
뒤늦게
애벌레를 벗고 우화한 늦매미 한 마리
처서 백로를 훌쩍 지난
가을 나무를 잡고 운다.
높다란 가지 끝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저 극진한 울음.
친구들은 가고
사랑도 찾을 수 없고
녹음을 훑어 내리는 찬바람만 불어와
단풍잎들 하염없이 뚝뚝 떨어지는데
하마 귀까지 어두워 졌는지
외로워 말라고 매앰 맴 맞소리를 내주니
포르릉 내 곁까지 날아와
때동나무를 잡고 다시 운다.
산 도랑물에 지는 하얀 때동나무 꽃잎처럼
극진한 울음을 남기고 매미는 진다.
그렇게 꽃잎 지는 봄과 생이별이더니
내내야 그 도랑물에 울음 떨어져
여름이 간다.
세월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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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 자두
구연배
그녀는 한 가지 옷만을 입습니다.
아니 한 가지 색깔만을 고집해
무얼 입어도 그 옷이 그 옷 같아 보일 뿐입니다.
머리도 미장원이 아니라 쓱쓱 손수 깎아버리니
오히려 가발을 멋으로 얹고 다니는 사람 같습니다.
화장은 하지도 않고 할 줄도 모릅니다.
그녀는 돈도 없습니다.
아니 많이는 버는데 누군가가 다 가져가는 모양입니다.
자선 사업가는 아닌데 먹여 살려야 할 식구가 많답니다.
당연히 통장도 없고 그 흔하디 흔한 카드 하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한 가지 색깔의 옷만 입는데 언제 봐도 맵시가 있고
선머슴 같은 더벅머린데 건강한 스타일러 같고
맨 얼굴에 맑은 실 정맥이 이목구비와 절묘하게 어우러져
마치 가을밤의 화한 박꽃 같습니다.
빈털터리가 분명한데 다녀온 곳이 여간 아닙니다.
(시시할까봐 얘긴데 프랑스 이태리 뭐 이런 곳들이랍니다)
산양 뿔처럼 당당하고 얌전한 발목에
웬 호기심이 그리도 많은지
뭐라고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자두를 먹습니다.
그것도 붉은 핏기가 뚝뚝 묻어날 것 같은 싱싱한 먹자두를.
아시겠지만 자두는
비를 맞으면 금방 빗물 맛이 배고
햇볕을 쬐면 금새 단맛이 드는 과일이지요.
그녀가 그렇습니다.
하늘이 주는 침묵과 말씀에 마음을 반응하는 여자.
그리하여 그 계절의 바람 맛이 나는 여자.
하늘이 잘 익힌 먹 자두 같은 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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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춘 시계에 대한 단상
구연배
멈춘 시계를 본다.
화석이 되어버린 시간을 본다.
가야할 길이 아직도 멀다는 듯
시침은 새벽을 가리키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새벽 앞으로 내달렸을 것인가.
생의 마지막 날을
가슴에 새겨 넣은 멈춘 시계여.
너를 들여다보면
그리운 내 유년을 만날 수 있을까.
시디신 허무를 끌어안고
새벽 가로등 불빛을 하염없이 쬐던
창백한 청년을 만날 수 있을까.
고장난 마음
불통의 시간을 교체할 요량으로
시계 방 유리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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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게구름
구연배
가을이면, 너희들을 부를 이름이
뭉게구름 말고는 없다.
올올이 잘 짜여진 푸른 비단 같은 녹음도
한순간에 사라지고
장한 기백으로 넘실대던 강물도
속절없이 들녘에 저물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저 혼자 깊어간다.
외롭지 않은 것이 무엇 있으랴
생각도 추억도 온통 뭉게구름
빈 하늘에 돋는 총총한 별도
그대 떠난 밤에야 뭉게뭉게 빛나고
홀로 걷는 발부리에 낙엽도
뒹굴며 시선 밖으로 사라진다.
가을은 왜 모든 게 뭉게구름 같을까
꽃 하나도 피워낼 수 없는
서늘한 쓸쓸함으로
세상의 모든 그늘이 자취를 감추고
길 위의 사람들은
젖은 고독을 빳빳이 다림질 해
마음 줄에 걸기 바쁘다.
사는 일이 뭉게구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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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가는 길
구연배
매주 봐도
매주 그리운 사람
끈적이지 않고
비린내 나지 않아 좋다
있는 대로 찍어내는
사진쟁이라서 그런가
(언필칭 작가님이시다)
숨기고 자시고가 없는
앞 뒤 투명한 사람
무거움도
그 앞에서는 끝없이 명랑해지는
그래서 가난한
지긋한 그 사람이 좋다
재미 진 얘기와
술맛도 아는
인간 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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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의 가르침
구연배
나뭇잎 위에서 마음껏
세상을 재고 살았던 자벌레들
농익은 몸을 툭, 툭
허공에 던진다
살아온 길을 되밟아가기엔
너무 먼 그곳
마음의 눈을 뜬 자에게 열리는
허공의 지름길로
목숨 걸고 투신한 자벌레만
땅 속에
제 알을 묻는구나
거듭 사는 비밀이 예 있느니
벌레에게서 배운
아침 정신이 달고 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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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안개
구연배
차라리 거대한 한 송이 꽃
가늠할 길 없는 깊이의 안개 속으로
사람들이 걸어가고
자전거 바퀴가 구르고
닫힌 창문들이 하나 둘 꽃잎처럼 열린다.
안개를 마시며 아련히 비치는 길을 걷는다.
조심하는 눈빛으로 허공을 날던 새들이
처마 밑에 웅크려 젖은 깃털을 말리고
마실 나온 실바람이
사람들의 삽짝 앞을 기웃거릴 뿐
누구도 선뜻 안개 속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포근한 안개 속에서
하루치의 햇볕이 꿈틀대며 번져간다.
들녘을 가로지른 강둑 너머로
범람하는 개구리 울음소리
모든 이름 있는 것들이
아름다운 하루의 삶을 위하여
세상의 아침 식탁에
노래를 준비해 올린다.
풀잎마다 매달린 이슬방울들이
흔들리며 소리를 낸다.
선한 세상, 안개는 그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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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을 뜨다
구연배
이끼 낀 돌기둥 한가운데 박혀
묵묵히 의미를 지켜온 문자들
세월이 흘러도 세긴 뜻은 꼿꼿한데
행간을 읽는 나그네 눈빛 자못 숙연하다.
천금의 맹세도 지금에 와서는
한낱 조롱거리일 뿐인 세상 인심 앞에서
닳고 깎인 글자들이 울음을 운다.
목숨보다 중히 여긴 정조도
죽음으로 지켜낸 명분도
바람의 흔적만 남긴 채
돌문에 갇혀 풍화되어 가는 어처구니.
바위에 금을 긋는 무심한 세월을
먹지로 떠놓고
손 짚어가며 읽고 또 읽느니
비바람에 녹슬지 않는
마음의 획 하나 붙잡아 두고 싶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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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구연배
사랑은
그 사람의 눈빛에
흐려진 마음을 닦는 일입니다.
마주하면
보는 모든 것이 새롭고
생각하는 것마다 깨끗해지는
당신의 눈빛
사람들은
눈멀었다고 말을 하지만
나는
그대 안에서 행복합니다.
고백하거니와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꼿꼿해질 수 있는 것은
그대를 바라보며 매일매일
약시의 마음을 씻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그 사람의 눈빛에
흐린 마음을 닦는 것
그리하여 나는 말마다 환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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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들다
구연배
불어나는 것은 강물이 아니라 초록이었다.
반짝이는 것은 잎이 아니라 녹음이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골골의 이름 없는 마을을 감싸고 꿈틀대는 산맥
굽이쳐 살아있음을 알리고 때때로 울음 우는 것은
여울이 아니라 나무들이었다.
떼 지어 숲을 헤엄치는 새들과
물결치는 무수한 야생초들
쪽배를 타고 물이랑을 일구는 어부들처럼
산 살림은
누가 누구를 거느리지 않는 등 푸른 살림이다.
그렇다.
강이 흘러서 바다에 이른다면
산은 흘러서 하늘에 닿는다.
오늘도 나는
마음의 낚싯대를 끌고 산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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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피는 아침
구연배
물결을 딛고
수면 위로 올라선 수련.
젖꼭지를 문 아기처럼
강물을 움켜쥐고
볼이 미어지도록 해시시 웃는다
굽이굽이 잠긴
산맥의 발목을 씻으며
바다로 가는
강물의 노래는 깊어 가는데
수련 핀 아침
빈 하늘 가득
흰 구름 몰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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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제삿날
구연배
하늘 집에서는 필시 생일날일 터
누군가 준비해줬을 잘 차린 아침상 물리시고
타고 갔던 꽃상여 손수 몰고
일 년에 한 번 집에 다녀가시는 아버지를 만나러
오빠와 함께 시골가는 길
생전에 좋아하시던 고사리나물과
쇠고기 두어 근 끊어놓고
입 짧은 시부 저녁진지 준비하느라 애쓰는
두 올케가 고마워 티셔츠 한 벌씩 샀다
곱게 지어 드린 단벌 수의를 입고
후여후여 집으로 걸어오실 아버지
걸음은 정정하신지
뽀얀 얼굴에 막새 삼베옷이 여전히 잘 어울리는지
마음이 먼저 달려가
아랫녘 산모롱이까지 눈마중을 나간다
한 번 절에
십 년 동안 못 찾아뵌 불효를 빌고
두 번 절에
툭! 문을 열어젖히며
앞 산 찔레꽃이 참 예쁘게 피었구나, 말씀하실 것 같아
지지리 복도 없으시다
목이 메어 울먹임인데
아랫목 어머니 제사상으로 목을 길게 빼시고는
아버지 좋아하시던 조기찜을 가리키며
연신 젓가락을 바꿔 올리라신다
생전에는 입에 대지도 못하던 술을
벌써 몇 잔 째 비우신다
형제들 둘러앉아 함께 음복하고 제삿밥을 비비는데
어머니, 아무도 몰래
한 그릇 곱게 퍼담아 고샅으로 나가신다
아버지 혼자 얼마나 쓸쓸하실까
내 얼른 따라가야지 하시는 어머니 말씀에
별 걱정 다 하신다며 막내가 화르르 성을 내는데
일 년에 한 번 만나
저만큼이라도 정 나눌 사람 하나 만들어놓은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하시냐
못난 딸이 속 꾸지람을 해본다
서둘러 길 떠나는 아버지
산소 뒷산에
소쩍새 피울음이 길게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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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겅퀴 꽃
구연배
한 몸으로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
긍휼함이니
엉겅퀴 꽃을 보라
한 뿌리에
한 대궁만을 뽑아 올린
붉은 빛 꽃숭어리
그리운 그 날
꽃잎 포개는 날
죽어도 아니 떨어질
가시돌쩌귀를 가슴에 박고 산다
뿌리도 하나 꽃도 하나
상처를 입었다면 용서하시라
오직 그 사랑을 위한 씨방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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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의 맛
구연배
길을 걷다 목이 말라
남의 밭 사과를 땄다.
덜 익은 푸른 사과
하얀 속살을 베어 물자
입 안 가득 신물이 차올라
목마름은 오간데 없이 사라졌는데
아스슴 눈꺼풀이 감기고
손끝이 짜르르 오그라든다.
어! 할 새도 없이 동시에
불끈 바지를 당기는 힘.
푸른 사과 속의, 신 맛 속의 무엇이
몸의 목마름은 삭히고
정신의 목마름을 주는지
향기로운 모순의 맛에
연신 어린 사과 속살을 깨문다.
아사삭 씹히며 눈뜨는 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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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도 사랑도
구연배
이거 아니면 죽을래! 하던 마음이
어느 날
다른 일감 다른 사람을 찾는 순간
나는 비겁하게 나이를 먹는
세월의 하이에나가 된다.
염치도 없이
나는 나를 용서하겠지만
너는 나를 용서하지 말아라.
그렇게 해서 얻은 지혜로
순결한 세상을 능멸하는 나이여
늙음이여.
살겠다고 눈감아버린 등뒤에서
버림받은 추억이 울고
잊혀진 사랑이 운다.
☆★☆★☆★☆★☆★☆★☆★☆★☆★☆★☆★☆★
장 맛
구연배
간장독에
고인 달
몸 바꿔가며
익고 있다
몇 보름
몇 그믐을 견뎌야
장으로 우러날까
간장 맛은 달 맛.
☆★☆★☆★☆★☆★☆★☆★☆★☆★☆★☆★☆★
지는 꽃
구연배
하르르 떨어진 꽃잎이
반기던 걸음에 짓밟히고
서운한 어떤 것은 진물을 흘리는
꽃나무 그늘에 가면
그 날 그 밤의 환하던 몸이
어금니 깨물고
어떻게 세월 속으로 녹아들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숨을 멈추고
제대로 한 번 뜨거운 목숨이 되게 하신
그 짧은 열정으로
비로소 긍휼한 삶이 열리느니
그런 까닭에
꽃 같은 사랑을 받는 일은 언제나
쓸쓸하고 황홀한 것!
발등에 떨어지는
꽃잎의 얘기를 자분자분 듣다보면
상처는
저절로 아무는 게 아니라
스스로 채우는 그리움이란 걸
알 수가 있습니다.
☆★☆★☆★☆★☆★☆★☆★☆★☆★☆★☆★☆★
철새
구연배
황도의 기울기를 어떻게 알았을까
여름 숲의 새들
무리지어 날며 떠날 채비를 한다.
봄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광막한 언덕에 노래를 더하고
잊혀진 나무와 꽃들을 기쁘게 하더니
풀잎 끝에 차가운 이슬 맺히고
그늘마다 서늘한 깊이를 더하는 처서 아침,
훌훌 털고 숲을 빠져나간다.
다 있어도 노래가 없으면 삭막한 세상 잔치에
짧게 때로는 길게
따뜻한 풍경이 되게 했던 새떼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는 듯
집 한 채 갖지 않은 두견이
울음 한 번 울어 주지 않고 휙!
허공을 긋고 멀리 사라진다.
떠나는 것은 새들인데
나만 슬피 회한을 갖는다.
저만치서 가을이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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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음
구연배
지렁이 울음소리 듣느라
밤잠을 놓친
새벽 이브자리
앞산이 밝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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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장
구연배
어떻게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라지느냐를 생각한다.
바람을 읽고
바람과 싸우다
바람에 눕는 가벼움이라니,
마지막 숨을 찍는
낙엽의 투신이 긍휼하다.
나무처럼
내가나를 풍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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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오라기
구연배
중심을 꿰뚫어
생각나무 한 그루 심어놓을 듯
바위에 앉아
혼신의 힘을 쏟아 붓는 해오라기
강물이 잠시 굽이칠 때
미동도 않던 눈꺼풀이 깜빡
닫혔다 열린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
물고기 한 마리
그림자 질 틈도 없이
쏜살처럼 달아나고
날개를 폈다 접는 해오라기
깊고 쓸쓸한 숨소리가
강물 위에 멎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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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계
구연배
가볍게 드나들 것.
소박하지만 난 늘 실패다.
집으로 돌아올 땐 주머니 가득
구겨진 지폐와
온기 없이 나눈 차가운 악수
그리고 한 없이 얇은 희망 부스러기들뿐
깔끔하게 오늘 하루와 결별하는 데 실패했다.
주머니가 깨끗한 사람이 되고 싶다.
종잇장처럼 가볍게 나를 내려놓고 싶다.
더 크고 넓고 높은 것을 쫒아
정신 없이 세상을 구겨 넣는 자신과
몇 번이나 마주했던가.
이젠 염치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른다.
겨우 한다는 짓이
구석진 방에 퍼질러앉아
구겨진 지폐를 다려 통장에 담고
서늘해진 손등을 비벼 온기를 충전하고
은총에 눈감아 버리고 희희낙락!
목숨치고는 실로 가소롭고 가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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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러다 늙어서
뒤따라오는 이 있다면
이래서 사랑은 아름답다고
지그시 힘주어 말 할 수 있는
추억 한 자락 환히 내보이고 싶다
사랑은
중독성이 강해요
이별하면
또 다른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들 거의 사랑중독이라
할 수 있지요
주머니가 깨끗한 사람이 되고 싶다
종잇장처럼 가볍게 나를 내려놓고 싶다
이 세상에
부자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간절히 비워두는
오염된 마음 깨끗히
씻기고 싶다는 그 표현이
가슴 저리게 합니다
가을 산길에
구연배
우거진 풀숲일 때는
무어라 보이지도 않더니
서늘한 바람에 모습을 드러낸
하얀 구절초
우리도 그렇다
어디서 사는 누군지도 몰랐더니
생각지 못한 인연으로 다가와 친구 된
그대와 나
가을 산길
지천에 구절초 피고
내 마음엔 주단 깔리고
아무도 몰래 꽃 피어
온 산이 향기롭듯이
마음 나누어
한 뼘만이라도 따뜻할 수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행복할까
좋은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