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에게서 배우는 스쿼시를 배울 때 쫄지 않는 방법
<미완의 개혁가 마르틴 루터> 1~119p
20250208
나는 며칠 전부터 어제 아침 6시 20분까지 불안에 떨었다. 스쿼시를 배우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스쿼시를 좋아하는 건 내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것, 나는 공을 가지고 하는 운동에는 최악이라는 것, 수업이 눈이 내리는 2월 아침 6시라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에 쫄아 있었다. “선생님께 인사는 어떻게 해야 하지? 같이 운동하는 사람들이 이상하면 어떡하지? 어색하면 어떡하지? 애초에 스쿼시 배우는 건물이 어디더라?” 나는 이렇게 떨면서 수업을 들으러 갔다.
내가 20분을 늦은 것을 빼면 수업에서는 별일이 없었다. 떨며 갔던 길을 돌아오며 뿌듯해하는 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나는 새로운 사람에게 나를 소개하고 새롭게 관계를 맺어야 할 때면 쫄아 버린다. 수련회에서 가장 싫은 것이 레크레이션 시간이다. 서로의 재미있는 특징을 알아내 종이에 적으라는데 미쳐버리겠다. 내가 쪼는 이유는 무엇일까? 알 쫄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쪼는 이유는 새로운 사람을 진지하게 만나는 상황이 쫄릴만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내가 안 쫄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돈 주고 배우러 가는 수업에서도 쫀다. 그리고 쫄릴만한 상황에 쪼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거대한 파도 앞에서는 휩쓸려 갈 수밖에 없다.
스쿼시를 처음 배운 날 저녁, 나는 개혁가 마르틴 루터에 관한 책을 읽었다. 마르틴 루터는 상황이 주는 대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부패한 가톨릭에 대놓고 반발했다. 1500년 동안 유럽을 다스린, 신의 이름으로 나를 죽일 수 권력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은 그들에게 시비 걸지 않고 조용히 사는 것 혹은 적극적으로 한편이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았다. 그런데 루터는 “이건 아니야! 바꿔!”라고 한 것이다.
루터가 당시 시대를 거스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새로운 상황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을 연구해 가톨릭이 하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굴복해야 하고, 아부해야 하는 상황을 마땅히 비판해야 하는 상황으로 바꾼 것이다. 그는 상황에 따르지 않고 새로운 상황을 만들었다.
16세기 종교 개혁가 루터에 대해 읽으며 나는 희망을 얻었다. 역사를 통해 무언가를 배운 것은 처음이다. 나도 쫄만한 상황을 안 쫄만한 상황으로 바꾸면 된다. 사실 나는 처음 두 번의 수업을 6시에 못 일어나 빼먹었다. 적극적으로 내게 불리한 상황을 만들었다. 미리 스쿼시에 관한 영상을 보고, 첫 수업부터 일찍 나가 쫄지 않을 상황을 만들었어야 했다. 앞으로는 내가 당당할 수 있는 쫄지 않을 상황을 만들어야겠다.
그런데 사실 루터는 쫄만한 상황이었다. 그는 여전히 이단으로 죽을 수 있었다. 루터는 가톨릭에 대한 반발이 정당한 상황은 만들었지만, 쫄지 않을 상황은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죽을 것을 각오하고 활동했다. 안 죽을 상황을 만든 것이 아니다.
위에서의 깨달음을 뒤집는 말이지만, 대비는 할 수 있어도 완벽하게 쫄지 않을 상황을 만들 수는 없다. 글을 내가 쫄지 않으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당당하다고 생각했었던 나 자신이 쪼는 것을 보기 싫기 때문이다. 쫄만한 상황에서 쪼는 나 자신을 용납하는 것이 쫄지 않는 방법일 수도 있다.
다음 주 월요일에 다시 스쿼시를 하러 가야 한다. 나는 여전히 쫄린다. 하지만 5시 45분에 일어나 일찍 가고, 쫄아있는 나 자신을 이해한다면 아마 괜찮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