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태조 누르하치의 성은 무엇인가?
보통은 아무런 의심없이 애신각라(愛新覺羅, 아이신줴뤄)라고 하게 될 것이다. 사실 누르하치의 성에 대하여는 문헌, 야사에 잡설이 분분하다. 문헌의 기재에 따르면 모두 6가지의 기록이 있다:
통(佟), 동(童), 최(崔), 작(雀), 각라(覺羅), 애신각라.
만학(滿學) 전문가인 염숭년에 의하면, 누르하치의 성에 대하여 의론이 분분한 것은, 만주가 당시에 문자가 없었고, 원시적인 만주문헌의 기록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다가, 청나라때 <<명사>>를 편수하면서, 청나라 황실의 조상에 관련된 불리한 사실은 모두 삭제하거나 수정하였기 때문이다. <<청태조실록>>에서는 청나라 황실 조상의 옛 일은 전혀 기록하지 않고, 그저 그들이 만들어낸 기이한 신화만 적어놓아서, 역사의 진상을 숨겼기 때문이다.
<<청태조실록>>에 따르면, 청나라 황제들은 모두 자기의 성이 애신각라라고 생각했다. 여기에는 하나의 아름다운 전설이 있다. 삼선녀가 연못에서 목욕을 하는데, 한 마리의 신작(神鵲, 까치)이 과일을 하나 물어다 삼선녀의 옷에 떨어뜨린다. 삼선녀는 보고서 예뻐서 가지고 놀다가 입에 넣고 먹어버린다. 그리고는 임신이 되어 아들을 낳는데, 아들의 용모가 기이하였고, 태어나자마자 말을 할 줄 알았다. 선녀는 그에게 "애신각라"라는 성을 붙여주고, 이름은 "부쿠리용순(布庫里雍順)"이라고 지었다. 부쿠리용순이 바로 청나라 황제의 조상이다.
청나라때의 <<청태조실록>>이후, 관부에서 편찬한 <<회전>>, <<종보>>, <<통지>>등과 황제가 지은 시문과 청나라때의 관청의 서류에는 모두 누르하치와 그 후예들의 성을 애신각라라고 쓰고 있다.
명나라와 조선의 문헌기록에는 누르하치의 성을 "동(童)" 또는 "통(佟)"으로 쓰고 있다.
아직 만주에 만주문자가 없을 때 명나라와 조선의 문헌에 누르하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 곳에는 모두 동이나 통으로 쓰고 있다. 누르하치는 일찌기 명나라의 건주위의 관리를 지냈고, 8번에 걸쳐 말을 타고 북경으로 와서 만력황제에게 조공을 바쳤다. 이 때 명나라와 명청시기의 학자들은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모두 누르하치의 성을 "통"으로 쓰고 있다.
그리고, 누르하치는 조선과도 수십년간 교유하였는데, 조선문헌에도 많은 기록이 남아있다. 신충일의 <<건주기정도기>>에는 이런 기재가 있다. 누르하치가 조선국왕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거기에 여진국건주위관속이인지주 통(佟)누르하치 올림"이라고 되어 있다. 누르하치가 스스로 자기의 성을 "통"으로 하였다는 증빙이다. 신충일은 조선의 사신으로 당시 후금의 수도인 허투아라에 가서 직접 누르하치를 접견하고 돌아갔으며 그때의 기록이 <<건주기정도기>>이므로 상당히 신뢰성이 있는 기록이다. 그리고 위 서신은 바로 누르하치가 신충일에게 주어 조선국왕에게 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기록에는 누르하치의 성을 "통"보다는 "동(童)"으로 기재한 것이 더 많다. 통이나 동은 모두 만주어 발음을 한자로 기록한 것이므로 차이는 없다. 통과 동은 요동의 대성이고, 여진족의 일반적인 성씨였다(이성계를 도운 여진인 이지란의 원래 성씨도 통(佟)으로 통지란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부락의 부족장이 되면 자기의 성씨는 통이나 동으로 써서 보내곤 했던 것이다.
장병린(章炳麟)이 쓴 <<청건국별기>>에 따르면, 통은 원래 한족의 성씨인데, 나중에 이족들이 많이 써서 한족행세를 함으로써 자신의 몸값을 올리는데 썼다는 것이다. 청나라 황실의 조상들도 이름앞에 "통"씨성을 달았는데, 그것은 자신의 이족으로서의 신분을 감추기 위한 것이고, 한족의 성씨를 차용한 것이었다. 여진족의 추장은 누구나 "통"이나 "동"으로 자칭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공용성씨가 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누르하치의 성씨에 대하여 "통"과 "동"을 쓴 이외에, 조선의 기록에는 "최" 혹은 "작"으로 쓴 경우도 있다.
염숭년은 누르하치의 생모가 참새알을 먹고 그를 낳았다는 전설이 있는데, 거기서 온 것으로 본다. 그러나, 청나라 공식기록에는 이렇게 적지 않고, 그저 그녀의 어머니가 임신13개월만에 그를 낳은 것으로만 되어 있고, 알을 먹고 낳았다는 얘기는 적혀 있지 않다. 두번째 가능한 해석은 청나라 황실의 조상이 서녀가 신작이 남긴 과일을 먹고 조상을 낳았는데, 이로 인하여 누르하치의 성이 작(雀, 참새)으로 알려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주족들은 오작(烏鵲)을 토템으로 하고 있으므로, 이런 것들은 황실의 성씨를 작(鵲) 또는 작(雀)으로 생각하게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최(崔)에 대하여는 한국어의 발음이 "최"이어서 각라(覺羅)의 각(覺, 줴)의 발음과 비슷하여 조선에서는 그렇게 적은 것이 아닌가도 생각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누르하치의 진짜 성은 금(金)으로 보고 있다.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는 누르하치의 6세조인데, 사료의 기재에 의하면 그의 성씨는 금(金)이다. 금은 "애신(愛新)"의 음역이기도 하다. 그래서, 맹가첩목아 및 그 후예인 누르하치의 성씨도 금으로 보는 것이다. 즉, 애신이 된다.
또 다른 견해는 그 성이 각라(覺羅)라는 것이다. 팔기만주성씨통보에 보면 각라씨는 애신각라씨를 빼고 모두 8가지가 있다. 이이근각라, 서서각라, 서림각라, 통안각라, 아안각라, 호륜각라, 아합각라, 찰라각라. 실은 누르하치의 성이 각라라고 보기도 한다. 다만, 나중에 황족이 되면서 그 안에서 누르하치의 자손만을 데어서 애신각라, 황금각라라고 불렀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로 보면, 각라는 예전부터 있던 성씨이고, 애신은 나중에 붙여진 것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황실가의 존귀함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옛날 만주문건에는 애신각라는 거의 출현하지 않다가, 청태조가 후금을 세운 후부터 자주 나타나는 것도 이 점을 방증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왜 청태조에 이르러 '통'씨성을 버리고 다시 '각라'로 돌아갔을까?
이것은 아마도 '통'은 어쨌든 한족의 성씨이므로 이것을 빌려써서 한족인 것처럼 행세한 것이고, 명나라와 교류하기에 편하도록 한 것일 뿐이었고, 금(金)은 이미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때 나라의 이름으로 써 버려서 더 이상 쓸 수가 없고, 그래서 황족의 후예임을 드러내기도 하고, 여진족들에게 자부심을 갖게 하기 위해서 "애신각라"라는 성씨를 사용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