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의 파가니니로 통하는 프란츠 리스트는 피아니스트로서 초절적(超絶的) 기교로 불세출의 달인이었을 뿐 아니라 작곡 면에서도 名技主義의 묘상(妙想)을 십분 발휘한 음악가였습니다.
프란츠 리스트는 피아노 옆에만 서면 사람들은 그의 연주 솜씨보다도 먼저 그의 모습에 매료되었습니다. 그의 아름다운 눈을 바라볼 때면 누구라도 그 눈의 신비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귀족적인 금발의 고수머리, 반듯한 체격, 세련된 스타일, 뛰어난 감각의 옷차림, 어느 것 하나 그가 유럽의 변방 헝가리에서 온 농장 관리인의 아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품위가 넘쳐흘렀습니다.
그렇게 처음 리스트를 보고 놀란 사람들은 연주를 듣고 두 번째 충격을 받게 됩니다. 피아노 앞에 앉은 리스트의 길고 흰 손이 건반에 닿는 순간부터, 관객들은 평생 다시는 만나기 어려운 피아노 연주자 - 최소한 베토벤이나 쇼팽과 대등한 - 앞에 앉아 있음을 감사하게 여기게 됩니다.
리스트의 연주는 대부분 자작곡이나 쇼팽의 곡들로 채워졌습니다. 그 외에는 베토벤 등 지극히 고전주의적인 몇 곡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앵콜이나 받으면 베토벤의 교향곡이나 이탈리아 오페라를 자작 편곡한 곡으로 화려하게 들려줍니다. 그렇지 않아도 감동의 절정에 이른 청중들은 마지막 한 방으로 그냥 자지러집니다.
헝가리 출신의 이 피아니스트는 스물두 살에 파리에 와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마리 다구 백작부인과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부인은 예술가들이 드나드는 살롱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곳에는 상드, 뮈세, 쇼팽, 베를리오즈 증 당대의 많은 음악가, 미술가, 문필가들이 드나들었습니다.
* 다구 백작 부인
사랑이 점점 더 깊어지자 두 사람은 제네바로 도피를 하게 됩니다. 두 사람은 이 도시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며 세 명의 아이를 낳게 됩니다. 이 중 딸 코지마는 대작곡가 바그너와 결혼합니다.
보통 남자라면 과분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다구 백작부인과의 밀월은 새로운 강적의 출현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녀는 러시아의 대귀족인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다구 이상으로 리스트에게 헌신적이었습니다. 비트게슈타인 공작부인과 리스트는 바이마르로 이사한 후 13년 동안 동거생활을 하게 됩니다.
* 비트겐슈타인 공작 부인
다구 백작부인이 리스트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그의 활력을 유지시킨 좋은 동료였다면,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의 음악사적 공로는 더 큰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리스트가 ‘피아노의 파가니니’란 연주자의 틀에서 벗어나, 작곡가의 길을 가도록 도와준 충실한 후원자였습니다.
이후 그는 피아노 대가로서의 존재를 뛰어넘어 작곡가로서도 위대한 인물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그는 뛰어난 열두 개의 교향시와 두 개의 교향곡 그리고 교향곡 이상의 스케일을 자랑하는 두 곡의 피아노 협주곡을 썼습니다.
* 성직자의 길
리스트의 마지막 인생 여로는 참으로 숭고했습니다. 파리 사교계의 총아이자 유럽 최고의 스타로서 공작이나 제후보다도 더 많은 명예와 영광을 누렸던 그가 평생을 간직해온 진지한 갈망은 성직자의 길이었습니다.
리스트는 천성적으로 자유인이었으며 방랑자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의 장점은 리스트에게 부담이 되었습니다. 부인은 마치 어머니가 아들을 대하듯이 자상하게 리스트를 돌보았습니다.
* 만년의 리스트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정식 아내가 아니었음에도 아내의 소임을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사소한 일에도 리스트를 끊임없이 챙겨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리스트는 그녀에게 구속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리스트는 이제 그녀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리스트는 진실한 카톨릭 신자로서 평생을 사제와 같은 품성으로 살았습니다. 그의 몸은 화려한 옷을 입고 최고급 샴페인을 마시고 귀부인들 속에서 지냈어도, 마음은 항상 성당에 있었습니다.
* 성직자 차림의 리스트
비트겐슈타인 부인과의 결혼을 막아준 것은 리스트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던 호엔로에 추기경이었습니다. 추기경은 리스트에게 사제 서품을 줌으로써 결혼해야 하는 운명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리스트는 마지막 생애를 신부 리스트로 살게 됩니다.
그때부터 그는 하늘이 허락한 17년의 여생 동안 항상 로만 칼라를 두른 백발의 노신부로 세상의 속된 근성을 멀리하고 살았습니다. 그때부터 리스트는 인기나 돈벌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 ‘예술에 대한 헌신’의 정신으로 충만한 음악활동을 했습니다. 말년의 리스트는 온화하고 겸손하였으며 은자처럼 초연하였습니다.
* 헝가리 광시곡
리스트는 종종 스스로를 가리켜 "나의 절반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이며 나머지 절반은 헝가리 출신의 집시"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리스트는 영적으로는 신부였고, 육체적으로는 집시였던 겁니다.
그는 유럽의 각지를 두루 돌아다녔고, 또한 인간이 맛볼 수 있는 온갖 쾌락과 인기를 모두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에도 완전한 만족과 평화를 찾지 못했던 그는 영원한 방랑자였고 집시였습니다.
* 헝가리 리스트 박물관의 리스트 피아노
그는 집시들의 춤곡을 채집하고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마흔 살때부터 반평생동안 헝가리 풍의 열정적인 피아노곡들을 <항가리 광시곡>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씩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19개의 <항가리 광시곡>은 대부분 짧고 정열적입니다. 이 곡들은 대부분 '차르다시'라고 부르는 집시들의 춤곡 형태인데, 느리고 애조를 띤 '러수'와 빠르고 격렬한 '프리시'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헝가리 광시곡>은 원래 피아노 독주를 위해 만들어졌지만, 그 중 몇 곡은 나중에 관현악으로 편곡되어 더욱 유명해지기도 했습니다. 관현악곡 중에서는 특히 2번, 4번, 5번이 유명합니다. 그러나 피아노곡의 번호와 관현악곡의 번호가 일치하지 않아 혼동하기 쉬어 주의를 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