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83
9월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연중 제24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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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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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t1omLO9sK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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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 져야 한다.”
<지나가는 십자가>
견딜 수 없는 우리의 고통이 잠시나마 완화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의 더 큰 고통을 바라볼 때입니다. 아니면 동병상린이라고 나와 똑같은 방식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만날 때입니다.
고통을 겪고 있는 상대방에게는 정말이지 송구스런 일이나, 그의 고통을 바라보며 나만 이렇게 힘든 것이 아니로구나, 하는 마음에 고통을 견딜 힘이 조금은 생겨나더라구요.
그런데 이 세상에 가장 큰 고통을 체험한 사람, 고통의 가장 끝, 가장 극단에 서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위로방식, 구원방식이 참으로 특별합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을 한 번에 없애주지 않으십니다. 그저 우리와 똑같은 고통을 겪으십니다.
우리의 이 참혹한 현실, 단 한 번에 확 바꿔주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와 똑같은 처지에 서십니다. 우리와 나란히 걸어가십니다. 우리가 매일 지고 가는 이 무거운 십자가 간단하게 치워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지고 가는 십자가로 다가오셔서 우리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십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그저 적선하듯이 던져주는 구원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심을 통한 구원, 우리 사이에 현존하심을 통한 구원입니다.
하느님의 우리 인간을 향한 극진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 구원 방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십자가 정말 무겁습니다. 그리고 지긋지긋합니다. 도무지 왜 이런 십자가를 주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가장 먼저 취해야할 행동방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내가 지금 지고 가는 이 십자가는 나 홀로 지고 가는 십자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지고 가는 십자가임을 확고하게 인식하는 일입니다.
십가가와 관련해서 금상첨화인 태도는 이 십자가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파악하는 일입니다.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왜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무거운 십자가를 보내시는 것일까요? 우리를 못살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즐기기 위해서?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그릇을 더 키우기 위한 배려가 아닐까요? 우리 영혼을 더 맑게 정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 더 합당한 사람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때로 정말 견디기 힘든 혹독한 십자가지만 그 어떤 십자가라할지라도 다 지나갑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의 슬픔? 지나갑니다. 깊은 마음의 상처? 지나갑니다.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 지는듯한 실패? 지나갑니다. 모두가 다 흘러갑니다.
결국 우리 앞에 남는 것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입니다. 우리의 성장과 구원의 도구인 십자가가 남습니다. 때로 슬픔도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고통도 좋은 에너지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절망 역시 희망의 첫출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꼭 기억할 일, 나 혼자만 아프지 않습니다. 나 혼자만 슬프지 않습니다. 나 혼자만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습니다. 나와 비슷한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매일 나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다. 매일 내 병상 바로 옆자리에 누워계십니다. 나와 함께 고통을 겪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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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jzeZ8iS_8x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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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거울 효과>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상징적 비유가 오늘 독서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모세를 따르다가 불평합니다. 하느님은 그들을 뱀을 보내어 물어 죽이게 하셨습니다. 뱀이 곧 불평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뱀에 물려 살려달라고 청하자, 하느님은 모세에게 장대에 구리뱀을 매달도록 하시고 그것을 보는 이마다 치유가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뱀에 물린 이들을 위해 매단 짐승은 뱀이었습니다. 만약 다른 동물이 매달렸다면 어땠을까요? 전갈을 매달았으면 어떨까요? 양이나 소를 매달면 어떨까요? 그것이 분명 죗값임을 알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원인은 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죽이려 하지 않고 자기가 지은 죄만을 씻으려 할 것입니다. 죄의 원인이 씻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뱀이 죽지 않으면 죄를 지어도 죄인 줄도 모릅니다. 뱀이 모든 죄를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뱀이 눈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죄는 죄를 짓게 만드는 자기가 뱀임을 볼 때 비로소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누구도 뱀이 되기를 원치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어느 신문에서 전과자들의 간담회를 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절도 전과자들은 자신의 경험담들을 털어놓았습니다. 이때 멈칫하게 하거나 절도를 포기하고 나오게 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한 명의 전과자가 말했습니다.
“주인이 코를 골고 자면 도둑질하기에 아주 편합니다. 코 고는 소리에 맞추어 한 발짝씩 떼어 놓으면 행진곡에 맞추어 입장하듯이 들킬 염려가 없습니다. 그런데 집이 너무 고요하면 그냥 포기하고 나오고 싶습니다.”
그런데 다른 전과자가 말했습니다. “난 도둑질하러 들어갔을 때, 그 집 현관에 놓여있는 신발들이 가지런하면 긴장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흐트러져 있으면 내 집같이 마음 놓고 들어갑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거든요.”
어떤 전과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도둑질하다가 뛰쳐나온 적이 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불쑥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칼을 빼 들었죠. 근데 그 괴한도 칼을 들었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그 괴한이 저라는 것을. 그날은 도둑질할 수 없었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거울’입니다. 카지노에는 거울이 없다고 합니다. 자기가 죄에 빠져있을 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본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자아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 본 모습이 드러나게 만드는 거울입니다.
영화 ‘블랙스완’에서 순결했던 주인공은 ‘창녀’라고 써진 거울을 제대로 보지 못해 그 글자를 지웁니다. 하지만 무대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악해지기로 했을 때는 거울을 당당히 바라봅니다. 자기의 모습이 뱀이어도 상관없다고 할 때 죄는 멈추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거울을 비추어주심으로 자아의 참모습을 보여주시며 기회를 주십니다. 저희 어머니도 고아로 남의 집에서 일만 죽도록 하고 매도 죽도록 맞으며 자라서 다 죽이고 자신도 죽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 불평하는 게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때 바다로 걸어오시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촌으로 가시는 것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깨달으셨습니다. “나병 환자도 사는데 너는 왜 못 사냐?”
예수님은 당신이 안 해줘서가 아니라 자아가 불평 자체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다시 살 힘을 얻으셨습니다. 모든 죄의 원인이 나에게 있음을 보지 못하면 죄는 영원히 계속됩니다. 십자가를 보며 우리는 어떤 기도를 드립니까?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지은 죄들을 보속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속하는 것입니다. 내 죗값은 두 배나 네 배로 갚아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죗값이 아니라 ‘나’를 보속하셨습니다. 나가 곧 죄이고 나가 죽기 전까지는 죄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를 없애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며 내가 죽는다면 비로소 자동적으로 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가 뱀의 모습으로 우리 자아의 거울이 되어주셔야 했을까요? 다른 사람이면 안 됐을까요? 안 됩니다. 뱀만 죽이면 어떤 모습인지 알아야만 자아가 죽기 때문입니다.
박보영 목사가 초기에 사목할 때 길거리에서 방황하던 가출 청소년들을 데려다 키웠습니다. 그들은 불량배들이었고 전과자들이었습니다. 처음엔 박 목사를 칼로 찌르려고 했는데 “조금 있다 찌르고 내 말 좀 들어봐라!”라며 복음을 전해 거둬들인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너무 없어, 라면 하나를 끓여 7~8명이 나누어 먹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배고픔을 못 이겨 도둑질하였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이유는 그들이 도둑질하고 온 돈을 십일조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인에게 발각이 되었을 때는 목사님이 직접 가서 아이들이 감옥에 가지 않도록 싹싹 빌었습니다.
어떤 때는 술에 취한 주인에게 매 맞은 적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이용해 돈을 버는 목사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때뿐이었고 배고프면 또 도둑질하러 갔습니다.
그날도 주인에게 발길질을 당하고 나오는데 아이들은 심각하지 않은 듯 자기들끼리 웃고 농담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안 되겠다 싶어 박 목사는 교회에서 한 아이를 세워놓고 쇠파이프 막대기로 힘껏 때렸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막대기를 들려주며 “너희들이 나를 10대씩 때려라. 대신 9대 때렸다가 마지막 1대라도 살살 때리면 다시 때리게 할 테니 힘껏 때려라.”라고 말했습니다. 두 아이에게 20대를 맞았는데 박 목사는 너무 아파서 마음속으로 주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너무 아파요. 더 못 맞겠어요.”
박 목사는 세 번째 아이가 죄송하다며 때린 매에 허리 밑 꼬리뼈를 맞고 쓰러져 정신을 잃고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매를 맞았고 그렇게 80대를 맞았습니다. 박 목사는 그 일로 거의 한 달 동안을 누워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허리가 안 좋아 항상 뜨거운 팩을 붙이고 다녀야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변화되지 않던 아이들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더는 도둑질하지 않았습니다. 박 목사가 아이들에게 “왜 나를 때리고 나서 너희들이 변화되었느냐?”라고 물으니, “세상이 다 가짜인 줄 알았는데 매를 맞고 뒹구는 목사님 모습을 보고 깨닫게 되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자기들 때문에 허리가 부러진 한 목사를 본 것입니다. 자기가 맞아야 할 또 다른 자기 자신을 목사님에게서 본 것입니다. 박 목사를 통해 자기 자아만 본 것이 아니라 그 목사가 자신들과 하나가 되며 자신들도 그 목사만큼이나 대단한 존재였음을 본 것입니다.
만약 박 목사가 그들의 죄 때문에 그들이 사랑하는 강아지를 죽이라고 하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죄는 볼 수 있지만, 죄가 가리고 있는 그들의 본 모습은 볼 수 없습니다. 그냥 강아지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죽인다면 어떨까요? ‘내가 그리스도인데 지금 뱀과 뭐 하고 있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죄에서 해방해 주기 위해서는 그 거울 뒷면에 “넌 본래 그렇게 살 존재가 아니었어!”라는 말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거울을 보며 본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원리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내 죄를 대신해서 보속하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 봐야 또 죄를 짓습니다. 존엄한 존재였다가 처참하게 깨진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 뱀이 나의 하느님과 같은 존귀한 모습을 잃어버리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이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던 이유입니다. 나는 본래 하느님의 자녀였는데 내 안의 뱀이 나를 비참한 존재로 만들어버렸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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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며 경배하는 날이다. 이 축일의 기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노력으로 발견되었다. 황제는 이를 기념하여 335년 무렵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 옆에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다. 그 뒤로 십자가를 경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9월 14일에 지내는 것은 이날 십자가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복음: 요한 3,13-17: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 때문에 하느님과 모세에게 반항한다. 하느님은 불 뱀으로 그들을 벌하시고, 백성들이 회개하자 모세에게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고 그것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게 하신다. 이 구리 뱀의 모습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다. 민수 21,4-9의 구리 뱀은 사람들의 그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리게 하는 표지였다. 이것이 후에는 우상이 되어 히즈키야 때 다 없애 버렸다.
오늘 복음의 “들린다.”라는 말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뜻이며(요한 8,28; 12,32), 하늘의 영광으로 올려졌다는 뜻(사도 2,33; 5,31; 필립 2,9)으로 이중적인 영광의 의미이다. 우리에게도 이 십자가가 없으면 아무런 면류관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셨고, 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우리 모든 인간이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다. 십자가를 통한 세상의 구원업적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의 업적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업적은 인간이 그 아들을 믿고 따름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우리 자신이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고 예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음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으면서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그분만이 하느님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다. 이제 그분을 믿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을 우리의 생명, 영혼, 운명 전체를 맡기고 그 가르침을 따라 실천하게 되면 구원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분은 구원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면, 그분 안에 가지고 오신 구원의 은총까지도 거절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구원을 거절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고 그것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결과, 즉 멸망을 초래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매 순간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하였다가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회개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이제 우리도 언제나 나약한 의지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으나, 항상 높이 들리신, 즉 십자가와 영광으로 들려지신 주님께로 되돌아가는, 회개하는 삶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지고 가는 우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진정 부활을 체험하며 나 자신이 새로이 태어나는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셨듯이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이라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나 자신의 완성 즉 구원과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여야 한다. 그분을 닮는 것이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음”을 이루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삶을 우리도 늘 살면서 십자가의 신비를 더 깊이 체험하며 구원의 은총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용감히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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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필리 2,8) 예수님의 죽음은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며’, 그분을 드높임은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것’(요한 12,28 참조)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골고타 언덕은 믿는 이들에게 무지막지한 형벌의 장소가 아닌,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수고와 수난을 받아들이신 성자의 사랑을 드러내는 장소입니다. 이 사랑의 장소는 구약에서 하느님과 모세를 믿지 않음으로 죄를 지어 죽음에 다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리 뱀을 쳐다봄으로써 생명을 얻었듯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세상을 용서하시고 당신과 화해하게 해 주시는, 조건 없는 사랑과 생명을 주시는 곳입니다.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오신”(마르 10,45)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시며,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1코린 1,30). 이제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명백한 표시이며 증거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기도할 때 십자 성호를 긋습니다. 사제들은 십자 성호로 하느님의 축복을 전해 주고, 신자들은 십자 성호로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을 되돌려 드립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십자가의 삶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희생과 사랑을 통한 영광이며, 그리스도인에게 희망의 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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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십자가>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3-17)
1)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가실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에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차단되었는데(창세 3,24), 그것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이 차단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인류는 하느님 나라가 어디인지도 몰랐고, 그곳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공부를 한다고 그 나라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도를 닦는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을 알려 주시고, 앞장서서 그 길을 걸으시면서 우리를 그곳으로 데리고 가시는 분입니다. 한 가지 더, 누군가가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열어 주어야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그 문을 열어 주신 분입니다. <묵시록을 보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은 누구나 ‘생명나무 열매’를 마음껏 먹을 수 있습니다.(묵시 22,2) 예수님은 아담과 하와 때에 차단되었던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신 분입니다.>
2)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 뱀’을 들어 올린 것은 ‘불 뱀들’로부터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민수 21,4-9)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이고, ‘생명의 상징’이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상징’입니다. 여기서 “믿는 사람은 누구나”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냥 믿기만 하면 안 되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합니다.(마태 7,21)> 이 말의 반대말은 “안 믿는 사람은 아무도”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 받아서 못 받게 됩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받지만, 안 믿는 사람은 아무도 받지 못한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차별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 쪽에서 능동적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서 ‘사는 길’을 알려 주고 그 길로 데려가려고 해도, 그것을 거부하고 ‘죽는 길’로 가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3)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사람들을 ‘극진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특정 민족이나 특정 개인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말씀의 표현만 보면,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뒤로 물러나 계시고 아들 예수님만 보내신 것으로(예수님 혼자서만 일을 다 하시고, 예수님 혼자서만 온갖 고생을 다 하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안에서 아버지와 예수님은 완전히 일치되어 있고 하나이신 분이기 때문에, 사실상 하느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에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는 ‘멸망하지 않고’ 라는 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믿는 대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억울하게 탈락하는 일 없이, 누구나 백 퍼센트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하느님의 심판에는 사무 착오나 실수 같은 것은 절대로 없습니다.)
4)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심판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구원이 하느님의 뜻이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심판’이라는 말은 ‘멸망’을 뜻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같은 말 같지만 같은 말이 아닙니다.) “죄만 안 지으면 심판을 받지 않겠지.”라는 소극적인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것을 피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여서 지고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려고(살리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살기 위해서 십자가를 받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희생’이지만, 우리가 받아들이는 우리의 십자가는 ‘구원의 도구’입니다. 물론 십자가 자체는 누구에게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 ‘쓴 약’을 먹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괴롭히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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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루살렘 성전으로 성지순례를 가면 ‘십자가의 길’을 하곤 합니다. 예수님께서2000년 전에 걸으셨던 바로 그 십자가의 길입니다. 성당에서 하는 십자가의 길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성당에서의 십자가의 길은 조용하고, 엄숙한 면이 있습니다. 잘 준비된 전례가 있습니다. 복사들이 초와 십자가를 들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합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십자가의 길은 말 그대로 길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순례자와 관광객을 길 위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상인들이 물건을 파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2000년 된 오랜 길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온전히 집중하지 않으면 십자가의 길을 제대로 묵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십자가의 길은 늘 제게 깊은 울림과 감동을 주었습니다. 함께하는 교우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되어서,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렸던 베로니카가 되어서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였습니다.
오늘 교회는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냅니다. 십자가는 고통과 형벌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십자가는 구원과 부활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미사의 정점인 성찬의 전례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신앙의 신비여!” 교우들은 사제의 선포에 이렇게 응답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며 부활을 굳게 믿나이다.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영원히 경배 받으소서.” 십자가의 길 기도에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의 정점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구원은 씨 뿌리지 않고 열매 맺으려는 욕심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사막의 신기루일 뿐입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애벌레는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죽은 것과 같은 고치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애벌레를 위하는 마음에서 고치의 틈을 벌려 주었다고 합니다. 결국 애벌레는 나비가 되었지만 날개 한 쪽이 나오지 못했고, 날지 못하는 나비가 되었다고 합니다.’ 애벌레는 고치가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하고, 그 과정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 과정 안에 애벌레에게는 날개가 생기고, 하늘을 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놀라운 발전을 하였지만 그 그늘에 많은 사건과 사고도 있었습니다. 과정과 절차를 무시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결과만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역시 날 수 없는 나비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쉽고 빠른 길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들 안에 있는 허물들을 스스로 벗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그 길을 열어주셨고, 보여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자랑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 고통스럽게 보이는 십자가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줄 수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뜨거운 사막과 같은 인생길에서 참된 위로와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과 형벌의 도구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십자가의 수직면은 하느님과 사람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수평면은 사람과 사람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사람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십자가 현양축일을 지내면서 주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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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당신은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요즈음 젊은 의학도들이 몰리는 과(科)는 성형외과나 피부과 쪽이라고 합니다. 내과나 정형외과 같이 힘든 과목보다 몇 배나 인기가 높다는 것이지요. 피부과를 지망한 의사들에게 선택한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왜 하필 피부과를 택하셨습니까?" "첫째로 피부과 환자는 밤에 찾아오는 일이 없습니다. 귀찮지가 않지요. 둘째로 피부과 환자는 죽는 경우가 드뭅니다. 의료 사고가 있을 수가 없지요. 셋째로 피부과 환자는 완치되는 경우가 희박합니다. 안정된 수입을 보장받을 수가 있답니다." 이런 이유들로 피부과를 택했노라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누구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환경보다는 편하고 좋은 미래를 바라고 꿈꿉니다. 그래서 좀 편해 보이고 나아 보이는 곳을 택해서 인생의 방향을 잡습니다. 그런데 좀 편하고 나아 보인다고 해서 어려움이 없겠습니까? 편해 보인다고 선택하고 결정한 그곳에도 어려움은 도사리고 있게 마련이지요.
이것은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천주교 신자가 되셨습니까?"하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또는 "복을 받기 위해서", "천국에 가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모두가 좋은 것만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요. 그런데 이것은 단지 우리의 바램일 뿐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와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단호하게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9,23)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꿈꾸는 마음의 평화, 또 복을 받고 천국에 가는 일 따위는 말씀하시지 않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만 말씀하고 계십니다. 십자가 없는 삶을 희망하며, 고통이 없는 삶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 왔는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마태10,38) 예수님께서도 그 길을 가셨으니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도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을 위하여 지고 가신 거룩한 십자가를 경배하는 날,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십자가가 고통을 상징한다는 것은 누구나가 잘 아는 사실이지요. 그런 십자가를 드러내 놓고 찬양을 드리는 날입니다.
고통을 피하고 싶어서 찾아든 우리에게 교회는 이렇게 십자가를 강조하고 있지요. 십자가를 져야만이 부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알고 믿음에도 불구하고 내 앞에 어려움이 가로놓이면 피하고만 싶은 것이 약한 우리의 마음이지요.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셨으며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온 인류를 당신께 모아들이셨고, 또 당신을 따라 십자가를 지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없는 축복과 평화, 구원을 바라지만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마음의 평화도 하느님의 축복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갈라6,14)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십자가 안에는 우리의 구원과 생명과 부활이 있으며 십자가를 짐으로써 우리는 구원과 자유를 얻게 됩니다.
사람마다 져야하는 십자가의 모습은 다 다릅니다. 가난이 십자가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급하고 모난 성격으로 늘 어려움에 처하는 사람이 있고, 사고를 저지르는 자식이 십자가인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이렇게 하소연을 합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십자가가 있습니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근시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바로 눈앞의 자기 일 밖에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지요.
누구에게나 십자가는 있습니다. 가끔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신부님이 참 부럽습니다. 벌어 먹일 처자식이 있습니까? 회사에 나가 골머리를 썩힐 일이 있습니까? 세상에 무슨 걱정이 있으십니까? 얼마나 편하고 좋으시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을 포함해서 영적인 아버지인 신부에게 딸린 신자(자녀)의 수는 평균 수천 명이 넘습니다. 바람잘 날이 없지요. 부자도 거지도 대통령도 성직자도 수도자도 십자가의 고통에서 예외인 사람은 없습니다. 거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을 거역하다가 불 뱀에 물려 죽게 되었습니다. 살려달라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하느님께서는 그냥 살려 주지 않으시지요.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민수21,8)
높이 달린 불 뱀을 쳐다보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만을 살려주십니다. 예수님 역시 광야에서 구리 뱀이 높이 들렸던 것처럼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습니다. 그렇게 높이 들리심으로써 이 세상을 구하시는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피할 수만 있었다면 어쩌면 예수님께서도 피해 가셨을지 모르지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지신 이 십자가를 어찌 우리가 피해갈 수 있겠습니까?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무겁고 커지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처절한 십자가의 길을 다 걸으시고 이제 더는 내려갈 길이 없는 밑바닥에서
온갖 치욕을 다 겪으신 후에 부활을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냥 시늉으로만 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기까지, 더 이상 치욕스러울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낮춤으로써 부활의 승리를 이루셨다는 것이지요.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절망의 끝까지 내려가야 부활은 시작됩니다. 죽음 같은 아픔이지요. 예수님의 부활은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바닥까지 내려감으로써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서 새로운 희망이 솟아나는 것,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이고 부활의 신비입니다.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삶의 십자가를 져야만이 우리가 원하는 마음의 평화와 축복, 또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지겠다고, 또 거기에서 구원이 있음을 믿는다는 고백으로 삶의 중심에, 집안의 중심에, 성당에, 각 공동체가 모이는 회합실에, 그리고 심지어는 우리 몸의 중요한 부분에 십자가를 걸고 달며 그 의미를 되새기지요. 뿌옇게 먼지 앉아 있는 장식품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 기꺼이 십자가를 지겠다는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부딪혀오는 십자가를 피하려고 하지말고 나를 정화시키고 성숙시키는 은총의 십자가로 받아들이십시오. 부활의 영광이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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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창세기에서 뱀은 아담과 하와를 불순종의 죄로 유인한 동물로 묘사됩니다. 민수기에서 뱀은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 죽게 하는 동물로 등장합니다. 하느님을 불신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 뱀은 죽음을 불러오지만, 모세가 만든 구리 뱀은 그들에게 생명을 찾아 줍니다.
그 구리 뱀은 기둥 위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에서 예표된 것처럼 십자가에 매달리시어 인류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 위에 매달려 돌아가셨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미합니다. 우리는 입당송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리라. 주님은 우리 구원이요 생명이며 부활이시니,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구원과 자유를 얻었네.”
인간의 죄와 불순종으로 생긴 십자가의 예수님 상처가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드러내고,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는 근원이 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하느님의 지혜가 되고 있으며 그 고통은 하느님의 영광과 기쁨으로 변화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하는 상처와 아픔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치유됩니다.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림도 조각도 내 영혼의 갈망을 채워 주지 못합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팔을 벌리고 계신 하느님의 사랑만이 채워 줍니다.”
우리가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를 따라나설 때, 그분께서 아버지께 드린 한없는 신뢰가 우리의 것이 될 때,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며 우리 안에 십자가의 생명과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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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오늘은 ‘큰’ 십자성호를 긋자>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상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연 십자가와 십자고상이다. 그래서 오늘은 전 세계의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와 성공회가 세상과 인간을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시고 해방시키신 그리스도께서 매달려 돌아가신 십자가를 우러러 경축하는 날이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4세기경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335년 9월 13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예수님의 무덤 위에 성당을 지어 봉헌하고, 그 다음날인 14일에 그의 모친 헬레나 성녀가 발견한 것으로 전해지는 ‘성 십자가’를 무덤성당 안에 걸어 현양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경배하도록 한 데서 오늘 축일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무덤성당은 곧 부활성당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무덤 안에 계시지 않고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셨기 때문이다. 나중에 페르시아의 침입으로 성 십자가는 약탈당하게 되는데, 628년 동로마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이를 다시 찾아와 본래의 자리에 안치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추가되었다.
교황 세르지우스 1세(687-701)에 이르러 이 축일은 전체 교회가 기념하는 축일로 자리 잡게 된다.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걸맞게 전례복음은 요한사가의 ‘십자가 신학’을 잘 보여준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니코데모와의 대화(요한 3,1-21) 중에서 발췌된 내용이다. 니코데모의 호감에서 출발한 예수님과의 대화는 어느새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자기계시적(自己啓示的) 가르침으로 반전되었다. 이는 곧 요한복음사가의 편집의도이기도 하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 담겨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니코데모와 행한 대화의 연속으로 보기는 어렵다. 즉, 예수의 역사적 발설(發說)이라는보다는 요한복음 사가의 독자적 성찰의 결과로 후에 편집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으니(13절),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란 그 누구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지고(至高)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와 사람이 되셨고, 영광 중에 다시 높이 들려 올려진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그분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심으로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보여주신 까닭에 세상은 물과 영으로 다시금 태어나, 멸망을 피하고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받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느님께 불순종의 대가로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모세가 기둥에 달아놓은 구리뱀을 본 사람은 치유를 받았다.(민수 21장) 여기서 구리뱀은 신약의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에 비유된다.
그러나 불뱀에게 물린 사람들을 실제로 치유한 것은 뱀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이다. 바로 그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이제 십자가에 높이 달려 있는 것이다.
십자가 자체가 세상에 구원과 생명을 주기보다는 십자가에 높이 달려 못 박혀 돌아가신 사람의 아들, 즉 하느님 스스로가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16절) 이 말씀은 모든 복음서와 성서 말씀의 요약이며, 결론이다.
요한은 자신의 서간에서 이 점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1요한 4,9-16) 세상의 구원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게 되는 동기(動機)는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구원의 방법(方法)으로 하느님은 ‘외아들을 보내주시고’, 외아들을 세상에 보낸 목적(目的)은 곧,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자기 외아들까지 보내어 세상을 구원하려는 동기(動機: motivation)이다. 그 동기가 바로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심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성 십자가’ 위에서 성취된 것이다.
한때는 노예나 흉악범을 처단하던 형틀 십자가! 십자가는 이제 우리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오늘은 왼손을 가슴에 얹고 오른손으로 이마에서 가슴으로 왼쪽 어께에서 오른쪽 어께로 ‘큰’ 십자성호를 그으며 십자가에 묻혀있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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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을 들으면서,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어느 날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 한 천사를 불러, 산골에 살고 있는 어느 여인의 영혼을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그 천사는 혼자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어찌하여 너 혼자서 돌아왔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그 여인은 너무나 불쌍해서 도저히 데려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 여인의 남편은 어제 나무에 깔려 죽었고, 이제 막 쌍둥이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를 데려오면 그 갓난아이들은 누가 키우겠습니까? 그래서 차마 그 여인을 데려올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질책하며 다시 천사에게 명령했습니다. “너는 속히 가서 그 여인의 영혼을 데려오라. 그리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해답을 깨닫기 전에는 결코 하늘나라에 되돌아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천사는 할 수 없이 산골로 내려가 여인의 영혼을 빼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 천사의 날개가 떨어지고, 천사는 그만 땅으로 굴러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천사는 지상에서 구두 만드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6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어느 날 한 부인이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예쁜 여자아이 둘을 데리고 신발을 사러 구둣가게에 왔습니다. 천사는 두 아이를 한참 들여다 본 후에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이 아이들의 어머니입니까?” 그러자 부인은 “아니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6년 전의 일이었지요. 이 애들의 아버지가 숲 속에서 나무에 깔려 죽고, 어머니까지 느닷없이 죽고 말았지요. 그런데 그 당시에 젖먹이 아이를 기르고 있던 사람은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이 갓난아이들을 나에게 부탁했지요. 그런데 그 다음 해 그만 내가 낳은 아이가 죽게 되었고, 결국 그래서 이 아이들이 나의 아이들이 되어 버렸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천사의 입에서는 감탄사가 흘러나왔습니다. “오!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면 그 누구도 살아갈 수 없는 것이로구나! 그래, 맞아. 사람은 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는 거야” 바로 그 때 천사의 몸에서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곧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천사는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사랑’은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그야말로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요한 3,16).
이 큰일을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셨습니다. 사실 ‘십자가의 형벌’은 손과 발이 못박인 채 철저히 무력해진 참으로 무력하기 짝이 없는 비참함의 끝이요, 노예 죄수에게나 행해지는 참으로 냉혹하기 짝이 없는 철저하게 버림받음이요, 그야말로 완전한 패배요,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받을 자다’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은 자가 되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갈라 3,13)
그래서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치욕이요, 그리스인들에게는 스캔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승리요, 구원이 되었습니다. 곧 십자가는 죽음이지만, 동시에 죽음을 죽이셨습니다. 하여 죽음으로써 진정 사셨습니다. 십자가는 무력함이지만, 동시에 구원을 이루는 전능함이셨습니다. 하여 낮아짐으로써 진정 높아지셨습니다. 십자가는 패배이지만, 동시에 사랑의 승리셨습니다. 하여, 지면서도 쳐부수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는 승리의 깃발이 되고, 영광의 월계관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역사의 역전이요 혁명이며, 우리 삶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표상이요, 완전한 승리의 표상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요, 현양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십자가가 우리의 자랑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베푸신 하느님 사랑이 바로 우리의 자랑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갈라 6,14)
오늘, 십자가를 드높여 이 고귀한 그리스도의 구원과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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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양손을 못에 내어주고 가슴을 열어 창을 받아들이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고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질 줄을 알게 하소서.
약해져 꺾일 줄 알고, 낮아져 밟힐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죄 없으면서도 뒤집어쓸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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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3,14)
<십자가의 의미!>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나무에 못 박혀 들어 올려지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하느님과 모세에게 이렇게 불평합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민수21,5)
그러자 주님께서 그들에게 불 뱀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물어 죽게 합니다. 그들이 모세에게 와서,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하고 모세에게 간청기도를 부탁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게 하여,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나게 합니다.
이 구리뱀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십자가를 통해서 다시 살아납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 십자가는 실패와 죽음과 증오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는 십자가가 승리의 상징이요, 생명의 상징이며, 사랑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십자가 사랑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어제 어느 한 자매님께서 "신부님, 마음이 힘들어요." 라는 문자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억할께요. 힘내세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매달리신 고통과 죽음을 생각하면서." 라는 답신을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끔씩 아니 종종 나를 찾아오는 고통의 십자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짊어지셔야만 했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 고통으로 우리는 예수님 수난에 동참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고통 앞에서 불평을 드러내지 말고, 인내로써 이겨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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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십자가는 스스로 오르는 것이다>
요한 3,13-17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 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십자가는 스스로 오르는 것이다>
십자가는
스스로
오르는 것이다.
품는 믿음과
나누는 바람과
살리는 사랑으로
말릴수록 떳떳하게
아플수록 무덤덤하게
흐릿할수록 흐트러짐 없이
오를 수 없는 그곳으로
오르리라 오르겠노라
되뇌고 되뇌면서
십자가는
스스로
오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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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우리의 필수품이 된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마스크’입니다. 저의 경우 이 마스크 쓰는 것을 아주 싫어했었습니다. 그래서 코로나 이전에 황사가 심해서 사람들이 마스크를 쓸 때도 전혀 착용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답답해서입니다.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이 터진 이후에는 무조건 써야 했습니다. 미사 때에도, 강의할 때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말을 많이 하는 저로서는 너무 힘든 시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스크 쓰는 것에 이렇게 단점만 있을까요? 코로나를 예방한다는 가장 큰 장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외에도 새로운 경험을 이 마스크를 통해서 하고 있습니다. 바로 ‘젊어 보인다’라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솔직히 어렸을 때부터 늙어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입 주위에 있는 팔자주름이 나이 들어 보이는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마스크로 입 주위의 늙어 보이는 주름을 가려주니 젊어 보인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듣는지 모릅니다. 답답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기쁨도 가져다줍니다.
삶의 불편함과 힘듦을 제공하지만, 우리에게 주는 이득이 훨씬 많아서 사람들은 마스크를 착용합니다. 불편하고 힘들다고 마스크 착용하는 것을 거부하면,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이 감염될 확률이 높아지고 또 이로 인해 남에게 감염시킬 확률도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이 마스크가 어쩌면 십자가와 비슷하다고 생각해 봅니다. 마스크 착용이 불편하고 힘들어도 꼭 필요한 것처럼, 십자가 역시 고통과 시련을 가져다줘도 우리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맞이해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들어 올려지신 주님을 봐야 한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들어 올린 뱀을 본 사람만 살아남았던 것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보고 믿고 함께 한 사람만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하십니다.
십자가의 삶을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고통과 시련이 담겨 있는 십자가이고, 때로는 절망과 좌절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코로나에 감염되지 않기 위해서 백신이 필요한 것처럼,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에서 겪게 되는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십자가의 영광은 십자가의 고통 없이는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믿음으로 극복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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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광부리기.>
저는 6남매 중 막내입니다. 그러다 보니 막내 대접을 받으며 커왔습니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신학교에 들어갔고, 신자들은 제게 ‘학사님’이란 호칭과 함께 존댓말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어렸을 때나 어리광을 부렸지, 신학교에 입학한 후부터 지금 신부로 살면서까지 어른 행세만 한 것 같습니다.
이 점이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입니다. 다른 막내는 커서도 어리광을 부리며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린다는데 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특히 이제 어리광을 부릴 대상이 없어졌기에 더 큰 후회로 남게 됩니다.
어린이와 같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이 이해됩니다.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순수한 마음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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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의 십자가>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민수 21,8-9)
쳐다본 사람과 쳐다봐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지 않은 사람과의 운명은 분명히 다릅니다. 믿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말씀대로 실천함으로써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사는 방법을 알려 주었으면 단순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4)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8).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주어질 구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 6,14) 하고 고백했습니다.
성녀 줄리 빌리아르는 “여러분이 십자가를 사랑한다면 십자가는 여러분을 사랑할 것이며 천상 하느님께로 여러분을 이끌어 줄 것입니다.”하면서 십자가를 가까이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사실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는 것보다 차라리 짊어지는 것이 가볍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니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이 살았듯이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곳곳에서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또 몸에도 지니고 다닙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담긴 주님의 사랑을 일깨우고 십자가를 지겠다는 고백을 못 한다면, 그 십자가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십자가가 점점 더 화려해지고 상품화되는 현실에서 나를 정화하고 성숙시키는 은총의 십자가를 바로 세워야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승리를 이루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에 앞서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는 내 눈과 가슴에만 있을 뿐 아니라 내 안에서 생생하게 생활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만일 생활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된다면 그분은 분명히 나를 부활시켜줄 것입니다”(성녀 벨라뎃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미리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많은 경우에‘왜 나만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 고 하소연합니다. 왜 나는 이런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고 투덜댑니다. 그러나 그 투덜거림 속에서 십자가는 더 무거워집니다. “십자가의 길에서는 언제나 첫발이 중요합니다. 십자가를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더 큰 십자가가 됩니다. 첫발을 예수님께 맡기십시오.”(성 요한 비안네)
사람마다 져야 하는 십자가는 다르지만, 모두가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가난이 십자가일 수도 있고 오히려 큰 부가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녀가, 남편이, 아내가, 동료가, 공동체의 일원이, 장상이 장애물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격이, 언어의 습관이, 주변의 환경이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나를 다듬고, 겸손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마침내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게 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얻게 해주십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피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질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함으로써 십자가를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가 어디서 오는지 아예 생각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할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십자가는 우리 모두의 교과서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구원의 도구임이 틀림없습니다. 십자가 현양축일에 사랑의 십자가를 제대로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희망을 안겨줍니다.
특별히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에는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 싶어 하는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구리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았듯이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 수 있게 해주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에 감사합니다.
심판보다는 구원을 앞세우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나의 삶에 있어 십자가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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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의 중심인 예수님의 십자가>
-성 십자가 예찬-
“주여, 우리는 당신의 십자가를 경배하며,
당신의 거룩한 부활을 찬미하고 현양하나이다.
나무로 말미암아 온 세상에 기쁨이 왔나이다." (즈카리아 노래 후렴)
"하느님의 업적을 잊지 마라."
오늘 화답송 후렴은 바로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잊지 마라는 것입니다. 아침성무일도 독서시 십자가의 사도 바오로의 고백도 새삼스런 감동이었습니다.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빅히심으로써 세상은 나에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갈라6,14). 새삼 우리가 자랑할 분은, 사랑할 분은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9월14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고, 내일 9월15일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두분의 축일이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합니다.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전 세계의 가톨릭 교회는 물론 동방정교회, 성공회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시려고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여 우러러 경축하는 날입니다.
오늘 축일은 4세기 경부터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무려 1700년 역사를 지닌 참 자랑스런 축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전승에 의하면 335년 9월13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예수님의 무덤 위에 기념 성당을 지어 봉헌하였고, 그 다음 날인 14일 바로 오늘 그의 모친 헬레나 성녀가 발견한 것으로 전해지는 ‘성 십자가’를 무덤 성당 안에 걸어 놓고 신자들에게 경배하도록 한데서 오늘 축일이 유래되었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 안에 계시지 않고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셨기에 무덤 성당은 부활 성당이 됩니다. 후에 페르시아의 침입으로 성 십자가는 약탈당하게 되며, 628년 동로마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이를 다시 찾아와 본래의 자리에 안치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추가됩니다. 그후 교황 세르지우스 1세(687-701)에 이르러 이 축일은 교회 전체가 기념하는 축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모든 종교가 그 종교를 대표하는 상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마 가톨릭 교회의 십자가보다 더 좋은 상징은 없을 것입니다. 특히 십자성호를 그으며 삼위일체 하느님을 고백하는 성호경 보다 더 짧고 본질적인 기도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십자성호를 그으며 전존재에 주님을 각인하며 삶의 목표와 방향, 삶의 중심과 의미를 새롭게 확인하는 우리들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미사시 맨먼저 삼위일체 하느님을 고백하며 바치는 성호경은 가톨릭 기도서 맨처음에 나옵니다. 지난 주일에 인용했던 이미 타계한 유명한 사회운동가 무위당 장일순 요한 선생이 실제 고백했던 일화도 생각납니다. 그가 6.25 사변시 국군에 사로잡혀 인민군으로 오인되어 총살 직전에 조용히 눈감고 마지막으로 성호경을 긋자 즉시 총살이 중지되고 구사일생 살아났다는 일화입니다. 바로 사형집행을 명령했던 국군장교는 천주교 신자였고, 십자 성호를 그으며 기도하는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순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성호경의 십자가 기도가 그를 살린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삶의 중심이자 영원한 회개의 표지, 희망의 표지, 구원의 표지가 됩니다. 그래서 성당이나 방마다 벽 중앙에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달려 있는 십자가입니다. 이렇게 눈으로 바라볼 삶의 중심인 십자가가 없다면 삶은 얼마나 공허하고 허전할까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닌 그 무엇을 삶의 중심 자리에 놓을 수 있을런지요. 새삼 믿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십자가는 삶의 무지와 허무, 무의미에 대한 궁극의 답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 민수기는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족을 무찌르며 계속 진군중에 있었던 일화를 소개합니다. 계속되는 고단하고 힘든 광야여정중 이스라엘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져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며 격렬히 항의합니다. 그대로 곤경중에 처한 인간들의 보편적 반응을 상징합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 것 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광야여정중인 우리 믿는 이들을 상징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 부족을 반영합니다. 믿음이 사라진 곳에 어김없이 스며드는 유혹이 원망, 절망, 실망에 따른 불평입니다. 사부 베네딕도 성인이 가장 혐오하는 것도 매사 투덜거리는 불평입니다. 불평도 하다보면 부정적 습관이 됩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와 찬미일 것입니다. 이들 이스라엘 백성은 현재의 고난에 하느님의 구원 체험을, 무엇보다 늘 바라봐야 할 궁극의 하느님을 망각함으로 배은망덕背恩忘德의 죄를 지었습니다.
민수기의 모세는 바로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하느님과 백성간의 중재자인 모세는 불평의 죄를 뉘우치는 백성들을 대신해 하느님께 기도드렸고,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백성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 것이다.”
모세는 구리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았고 뱀이 물린 사람은 구리뱀을 쳐다보면 살아납니다. 기둥위에 달린 구리뱀이 상징하는 바, 바로 예수님의 십자나무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민수기의 구리뱀의 신비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환히 드러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파스카의 십자가는 그대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표지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의 절정을 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압축된 하느님의 사랑임을 다음 복음이 입증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들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믿는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구원의 하늘길이자 하늘문이신 십자가의 예수님, 파스카의 예수님, 영원한 생명의 예수님이십니다. 참으로 우리가 영원히 바라봐야 할 회개의 표지, 희망의 표지, 구원의 표지는 예수님의 십자나무뿐입니다. 아침 성무일도시 찬미가도 예수님 십자나무의 희망과 기쁨, 구원을 노래합니다.
“세상의 영광이며 우리의 희망, 참다운 기쁨주는 십자나무여.
위험중 보호하는 구원의 표식, 생명을 모든이에 가져오셨네.”
오늘 축일미사중,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승리’를 고백하는 아름답고 장엄한 감사송도 찬미가와 일치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나무에서 인류구원을 이룩하시어, 죽음이 시작된 거기에서 생명이 솟아나고, 나무에서 패배한 인간을 나무에서 승리하게 하셨나이다.”
하느님의 구원 섭리가 참 오묘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우리가 새롭게 실현된 새 에덴동산 성전 미사를 통해 생명나무의 열매인 주님의 성체를 모시기 때문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선악과善惡果가 아닌 영원한 생명의 십자나무, 생명나무의 열매인 성체聖體를 모심으로 광야여정중에도 날마다 지상천국地上天國의 하늘나라를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배하는 마음으로 지내시길 바랍니다.
“오, 십자가의 승리와 십자가의 기묘한 표시여, 우리를 하늘 나라로 개선케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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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초대하십니다.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민수 21,4)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이 광야를 헤맬 때의 일입니다. 척박하고 불편하며 위험하기까지 한 광야를 이동하다 지친 백성이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했지요. 공동체의 죄는 조급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조급함은 미세한 감정적 동요로 끝날 것 같지만, 잘 다루지 않으면 주위에 불안감을 조성합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비관과 공격성으로 이어져 공동체를 분열시킬 수도 있지요. 공동체는 본래의 목적과 지향을 잊고 불평 불만으로 본질을 왜곡해 하느님과 대적하게 됩니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민수 21,9)
진노하신 하느님께서 불 뱀을 보내 백성을 벌하셨지만, 뉘우친 백성이 모세를 통해 간청하자 내려주신 해결책이 바로 구리 뱀입니다. 뱀에게 물린 이들 중에 기둥 위에 높이 달아놓은 구리 뱀을 쳐다본 이는 목숨을 건지게 되었지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을 모세의 구리 뱀에 비유해 설명하십니다. 불 뱀에게 물려 죽게 된 이들이 구리로 만들어 높이 달아 놓은 뱀의 형상을 바라보면 목숨을 건졌듯이, 첫째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류에 들어온 죄악의 상처를 새로운 아담이신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치유하신다는 뜻이지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구리 뱀이나 십자가를 바라봄은 그저 시선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뱀에 물려 고통으로 자지러질 때 의식을 수습해 구리 뱀을 바라보는 행위나, 녹록하지만은 않은 삶의 여정을 지나면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행위에는 반드시 생명에 대한 간절한 희구와 굳은 믿음이 깔려 있어야 합니다. 믿음만이 십자가를 장식품이 아닌 사랑의 징표로 인식하게 해줍니다.
오늘은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당신과 더욱 친밀해지도록 각자에게 맞춤형 십자가를 허락하셨지요.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은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라야 주님과의 더 깊은 사랑의 일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말처럼 쉽지만은 않지만, 십자가 없이는 사랑도 구원도 요원할 뿐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때론 버겁고 무겁고 힘겨운 십자가를 지고 사랑의 길을 꼭꼭 다져가며 걷고 있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잔인한 사형 도구인 십자가가 예수님 덕분에 사랑의 징표가 되었듯이, 우리가 저마다 지고 가는 십자가도 주님과 우리를 이어주는 사랑의 지렛대가 될 겁니다. 비록 나약한 우리지만 주님을 믿고 힘을 다해 십자가를 사랑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와 함께,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반드시 생명을 얻고 사랑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 승리하네. 우리 구원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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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AAU9pHT2b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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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 14)
십자가의
색채는
하늘을
닮아 있다.
십자가를
삶에서
자를 수 없다.
십자가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 삶이다.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올려드린
우리 사랑만
남는다.
십자가를
모르면
삶을 모르는
것이다.
우리를
성장시키는
삶이 바로
십자가이다.
사랑이
시작된 곳에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 현양은
사람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시는
변함없으신
사랑이시다.
삶과
삶 사이에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가
삶이다.
십자가는
고통을
이겨내는
힘이다.
삶을 완성하는
은총의 이름은
바로 십자가이다.
주님의
십자가가
들어 높여진다.
십자가가
또 다른
십자가를 위해
기도한다.
십자가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십자가에
구원의 길이
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를
사람의 아들이
가르쳐주고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십자가에
죽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부활하신다.
하느님의
사랑만
남는다.
우리의 삶이란
십자가역(驛)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사랑의 여정이다.
십자가에서는
모두가
주연(主演)이다.
우리를
들어 높이는
것은
십자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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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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