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2부 장강의 영웅들 (325)
제10권 오월춘추
제 41장 춘추(春秋), 덧없는 사라짐이여 (1)
- 해냈다!
마침내 오왕 부차(夫差)는 꿈에서조차 그리던 맹주가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월왕 구천(句踐)이 침공해와 오(吳)나라 영토를 유린하고 있지 않은가.
세자까지 죽었다고 했다.
하루 빨리 귀국하여 오성(吳城)을 구하고 월군을 박살내야 했다.
'이놈, 구천아. 어디 두고 보자!‘
회맹이 끝나자마자 오왕 부차(夫差)는 부리나케 황지 땅을 떠났다.
제수(濟水), 기수(沂水), 회수(淮水), 장강으로 이어지는 수로로 접어들어 밤낮 없이 배를 몰았다.
미처 배를 타지 못한 병사들은 강안(江岸)을 따라 열심히 달렸다.
이때쯤 해서는 오나라 군사들도 월군의 침공 사실을 알았다.
마음은 조급했고 사기도 떨어졌다.
더욱이 그들은 2천 리가 넘는 먼 길을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지칠 대로 지쳤다.
그런 상태에서 오군은 오성 교외에 당도했다.
부차(夫差)는 그때까지도 월군을 깔보고 있었음인가.
다짜고짜 공격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월군(越軍)은 철저히 준비하고 있었다.
수영에 능한 2천 수군이 물밑으로 헤엄쳐나가 오(吳)나라 전함의 바닥에 구멍을 내었다.
가뜩이나 사기가 떨어져 있던 오군(吳軍)은 가라앉는 배를 보고 완전히 싸울 의욕을 잃었다.
오성 교외에서 한 차례 큰 싸움을 벌였으나 결과는 오군의 대패였다.
비로소 사세가 여의치 않음을 알게 된 부차(夫差)는 화평을 맺어서라도 이 위기를 넘겨야겠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급히 백비(伯嚭)를 불러 호령했다.
"그대는 늘 월(越)나라가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해왔소.
그런데 이것이 무엇이오?
구천이란 놈 때문에 우리 오(吳)나라가 멸망 직전에까지 이르지 않았소?
오늘날 이 지경이 된 것이 다 그대 책임임을 그대는 아는가. 모르는가?“
"..............................."
백비(伯嚭)는 입이 열 개 있어도 말할 처지가 못 되었다.
그저 고개만 숙인 채 처분만 기다렸다.
부차(夫差)의 호령은 계속되었다.
"그대는 지금 당장 구천에게로 가 화평을 청하시오!
만일 화평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과인은 그대에게 촉루검을 내리겠소.“
촉루검을 내리겠다는 말은 곧 자결을 하라는 뜻이었다.
백비(伯嚭)는 질겁했다.
황급히 황금과 보물을 싸 가지고 월군 영채로 달려갔다.
10여 년 전 문종(文種)이 그러했듯 이번에는 백비가 구천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애걸했다.
"대왕께서 군사만 거두어주신다면 지난날 월(越)나라가 오나라에 복종했던 것과 같이
앞으론 우리 오(吳)나라가 월나라에 대해 복종하겠습니다.“
구천(句踐)은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린 백비를 내려다보며 냉소를 머금었다.
얼마나 기다려온 이날이던가.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통을 과연 어느 누가 알아줄까.
그는 화평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이대로 백비를 참수하고 부차의 진영으로 밀고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구천(句踐)이 두 눈을 부릅뜨며 백비에게 호통을 치려 할 때였다.
곁에 서 있던 범려(范蠡)가 재빨리 구천에게 속삭였다.
"아직은 우리 전력으로 부차(夫差)를 완전히 제압할 수 없습니다.
오나라 정병이 돌아온 이상 승패는 반반입니다.
모험하느니보다 차라리 화평을 맺어 백비에게 생색을 내게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당분간은 오(吳)나라가 힘을 쓰지 못할 터이니, 그동안 왕께서는 좀더 군세를 확장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간(諫)했다면 아마도 구천(句踐)은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그러나 범려라면 구천과 함께 오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하며 온갖 고난과 멸시를 감내해낸 사람이 아닌가.
누구보다도 오(吳)나라에 대해 원한이 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장의 보복을 만류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범려(范蠡)의 판단은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다.
구천(句踐)은 범려를 자신보다 더 신뢰하고 있었다.
믿자, 범려를 믿자.
구천은 타오르는 복수의 불길을 억누르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오나라의 화평을 받아들이겠소.“
마침내 오왕 부차(夫差)와 월왕 구천(句踐) 사이에는 강화가 맺어졌다.
이제 또 한 시대를 마감할 때가 왔다.
오, 월 화평조약이 맺어진 이듬해는 BC 481년(오왕 부차 15년, 월왕 구천 16년)이다.
그 해 노(魯)나라에는 춘추시대의 종말을 상징하는 하나의 작은 사건이 벌어졌다.
이 해는 노애공(魯哀公) 14년이기도 하다.
어느 봄날, 노애공(魯哀公)은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대야(大野)라는 곳으로 사냥을 나갔다.
대야는 거야(鉅野)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지금의 산동성 거야현 동쪽 땅이다.
그 날 숙손씨의 가신 중 수레를 관리하는 서상(鉏商)이라는 사람이 이상한 짐승 한 마리를 잡았다.
그 짐승은 몸통이 노루 같았고, 꼬리는 쇠꼬리 같았고, 머리에는 뿔이 나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짐승인지 몰라 불길하게 여기고 목을 찔러 죽였다.
사냥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짐승의 시체를 공자(孔子)에게 가져다 보이며 물었다.
"이것이 무슨 짐승입니까?“
공자가 자세히 들여다본 후 대답했다.
"이것은 기린(麒麟)이다."
사람들이 돌아간 후 공자(孔子)는 하늘을 쳐다보며 길게 탄식했다.
"아, 이제 나의 진리는 끝났도다!“
공자는 제자들을 시켜 죽은 기린을 땅에 묻어주었다.
오늘날도 거야 땅 옛 성터에서 동쪽으로 10리쯤 가면 둘레가 40여 보쯤되는 무덤처럼 생긴 토대(土臺)가 있다.
사람들은 이 흙무더기를 '획린퇴(獲麟堆)'라고 부르고 있다.
바로 공자가 기린을 묻은 곳이다.
공자(孔子)는 기린을 묻고 나서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를 지어 불렀다.
밝은 임금 태어나니
기린과 봉황이 와서 노니는구나.
그러나 오늘날은 그런 태평시절이 아니거늘
너는 무엇을 구하기 위해 세상에 나왔느냐.
기린이여, 기린이여!
내 마음 몹시 우울하구나.
이때부터 공자(孔子)는 서재에 틀어박혀 노(魯)나라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노은공(魯隱公) 원년(BC 722년)을 시작으로 242년간의 일을 기록했다.
이 책이 바로 그 유명한 <춘추(春秋)>다.
<춘추>는 역사책이긴 하지만, 공자(孔子)는 단순히 역사 이야기만을 전달하기 위해 저술에 임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사상과 정신을 이 책에 불어넣었다.
- 후일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이 글을 보면 몸을 떨리라!
이런 마음으로 붓을 들었다.
옳은 것은 옳다고 쓰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썼다.
일체의 타협도 하지 않았고, 추호(秋毫)의 거짓도 기록하지 않았다.
오늘날 바르고 곧은 글이라는 뜻으로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는 말이 쓰여지고 있는데, 이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