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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대포에 관하여.
일찍이 14세기 초반부터 유럽에서는 전장에서 대포가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1327년 초창기 대포를 묘사한 듯한 삽화가 영국에서 작성되었으며 스톡홀름 국립역사박물관에는 이 마일미트 사본(walter de milli-mete, de nobilitatibusㆍ sapoentiisㆍ et prudentiis)의 대포와 유사한 희귀한 대포를 볼 수 있다. 또한 1362년 피렌체 공문서에는 쇠로 된 단단한 포탄과 철로 만든 대포(pilias seu palloctas ferreas et cannones de mettallo)를 구입했다고 나와 있으므로 그 무렵 이미 금속제 포탄을 날리는 청동제 대포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1330년 이래 대포는 전장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1350년대 페트라르카(de remediis, lib. 1, dialog. 99)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불꽃을 내뿜으며 금속구를 날려 보내는 이 장치는 ... 몇 년 전만 해도 극히 드물어서 모두들 감탄과 경의의 눈길로 바라보았으나 이제는 다른 무기처럼 아주 흔하고 친숙해졌다....” 라고 서술했다.
14세기 후반 대포가 전장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자 유럽의 금속 기술자들은 대포의 개량을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 시기에 사석포 유형의 거대한 포가 개발되어 널리 사용되었다.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초창기 대포 개발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대포의 크기가 급격히 커진 것이다.(russell, introduction, xv~xvi) 이에 대한 대표적 예로는 1382년 오우데나르더 포위 공격에서 사용된 필립 판 아르테벨더philip van artevelde의 사석포(froissart, chronicle / rathgen, geuer und ferwaffen, 299~300)와 15세기의 영국에서 만들어진 20인치 구경의 무게가 6.6톤 이상인 몽 메그mons meg를 들 수 있다.
초창기 대포는 살상력은 크지 않았으나 요새나 성벽을 부수는 데에는 효과적이었다. 당시의 대포에 대한 인식은 다음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대포라는 무시무시한 무기가 있다... 어떤 성벽도 견뎌내지 못한다. 아무리 두텁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는 다음에 소개하는 많은 전투에서 입증된 사실이다.(chronica trevisana (muratori, rerum italicarum scriptores, vol. 19, col754) )>
청동 대포와 철제 대포의 원자재만 놓고 보면 철이 더 저렴했으나 제대로 된 주철 공정의 개발 이전까지 대안은 청동 대포와 연철 대포뿐이었다. 연철 대포 제조 공정은 노동력이 많이 들어가 비용이 더 들뿐 아니라 터지기도 쉬워 더 두껍게 만들었어야 했으므로 최종 가격 차이는 현저히 줄어들었다.(herald, documents, 243 )
청동 대포의 기본 원료인 구리는 헝가리, 티롤, 작센, 보헤미아 등 에서 주로 생산되었다. 구리와 함께 청동의 또 다른 원료인 주석은 주로 영국, 에스파냐, 독일에서 생산되었다.
중세 후기의 구리 생산 및 교역(schick, fugger),
1500년대 영국의 구리 수입(schulte, ravensburger handelsgesellscahft, vol.2, 196), 네덜란드의 일본산 구리 교역(glamann, trade, 175~176)
청동의 원료는 일부 지역에서만 생산되었지만 청동 대포는 종 주조와 대포 주조 양쪽에 능숙한 장인들에 의해 어디서나 생산되었다.
15세기 중반부터 대규모 상비군을 갖춘 중앙집권제 국가의 등장과 끊임없는 전쟁, 해양 팽창은 대포의 수요를 크게 증가시켰다. 이 시기의 군주들은 군사 장비에 개인적으로도 관심을 쏟아 포르투갈의 주앙 2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 황제 같은 이들은 단순히 포술을 지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실질적인 전문성을 갖추기도 했다. 이들은 포병과 대포 제작자를 후원하고 병기창 건설과 포차 개선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 시기의 구리 원광과 청동 대포 교역은 이익이 많은 사업이었다. 이것은 독일 야금술 중심지인 뉘른베르크, 프랑스 군수품 거리 중추인 리옹, 티롤과 이탈리아 북부를 연결하는 볼차노, 서아프리카와 향신료 제도에서 출발한 원산물이 독일과 플랑드르 야금 생산품과 만나는 안트베르펜-앤트워프 주변의 시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schick, fugger, 277~280 / van houtte, anvers, 254,256 / van der wee, antwerp, vol.2, 126,130 / coornaert, les francais, vol2, 117 / paumgartner, weltandelsbrauche, 72~73,90)
사실 유럽 전자본주의 발달은 상당 부분 이 군수품과 원자재 교역에 의해 촉진 되었으며 전자본주의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는 푸거가문은 구리를 취급하는 거상으로 빌바흐 인근 푸거라흐에 대포 주조소를 가지고 있었다.(schick, fuggers, 54,84,271)
그러나 이 시기까지의 대포 개발은 대개 크기를 키우는 데에만 집중해 상당수의 대포는 이동성이 떨어지고 정밀한 조준이 거의 불가능하며 재장전에 엄청난 시간을 소모하게 되었다. 리볼드ribauld나 리볼드퀸ribauldequin이라 불리는 야전 기관포도 제작되긴 했으나 만족스러운 성능을 보이지는 못한 듯하다.(oman, sixteenth century, vol.2, 222,227~228)
(Germany Cologne Stadt Museum Bombard 1377 99)
15세기 프랑스의 대포
15세기의 새로운 경향-더 작은 구경의 포-은 프랑스에서 선도되었다.(oman, sixteenth century, vol.2 226,404) 1494년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동원된 포(bonaparte and fave, etudes, bool1. vol.3, 206~208)는 귀차르디니에 의해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더 가볍고 하나같이 청동으로 주조된 대포들이... 군대의 행군 속도를 따라 갈 수 있었다... 매우 짧은 간격으로 발사하고... 성벽을 부술 때뿐 아니라 전장에서도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guicciardini, storia, vol.1, ch.2)>
17세기 중반까지도 유럽의 대포는 기동성이 떨어지고 발사 간격이 컸으나 16세기 말에는 이미 공성용 대포와 야전용 대포의 차이가 인식되어있었다.(1592년, collado, piatica, p.2v. / 17세기 초, ufano, artillerie, 33이하)
청동 대포의 비용적 문제.
16세기를 거치면서 심각해진 또 다른 문제점은 경제적인 것과 관련이 있다. 연철 대포는 지속적으로 제작되었지만 청동의 열등한 대체품으로 간주되었고 15세기에는 주철대포도 시도되었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구리와 주석은 매우 비쌌기 때문에 대포 수요가 증가하며 청동 대포 생산 비용은 점점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또한 낮은 기술 수준으로 인해 대포의 기대수명이 매우 짧았으므로(conturie, fonderie nationale, 93) 저렴한 대포 생산에 대한 또 다른 동기가 작용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초기 대포의 주요 생산 지역.
16세기 중반 이전 양적, 질적 모든 측면에서 볼 때 유럽 대포 생산에서 의미 있는 지역은 플랑드르 지역과 독일, 이탈리아 등지였다. 적어도 16세기가 시작될 무렵까지 이탈리아산 대포는 주로 현지의 대규모 수요를 충족시키는데 사용되었으며 플랑드르와 독일제 대포는 상당량이 수출되었던 듯하다. 15세기 후반과 16세기 전반에는 일부 플랑드르 대포가 영국으로 유입되었으나 플랑드르와 독일 대포 대부분은 이베리아 반도로 수출되었으며 포르투갈의 경우 포병과 대포 제작자들도 들여왔다.(cordeiro, apontamentos, 49 / teixeira bothelo, novos subsidios, vol.1, 12,289, vol2, 10,55,56 / pieris and fitzler, ceylon, part I, 290~296)
포르투갈의 대포 공급 위기.
마누엘 대왕 치세기(1495~1521) 포르투갈은 안트베르펜을 통해 5200t 이상의 구리와 각종 대포 및 탄약들을 수입하였다. 이 지역에 대량으로 유입된 구리는 일부가 조선 부문으로 흘러들어갔음을 감안해서라도 현지에 대포 주조업이 발흥했음을 시사(cordeiro, apontamentos, 59~60 / pieris and fitzler, ceyion, part 1, 291이하)하나 보잘 것 없는 생산량은 본국의 막대한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또한 무관세로 쉽게 수입할 수 있는 플랑드르와 독일의 대포 그리고 숙련 노동자 부족(teixeira bothelo, novos subsidios, vol2, 56) 탓에 본질적으로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런 포르투갈의 대포 공급 기반이 본질적으로 취약하다는 점은 네덜란드 독립전쟁(1568~1609) 이후 명백하게 드러났다. 1580년 포르투갈이 에스파냐에 병합된 것도 상황을 그다지 개선하지 못했다. 포르투갈은 17세기 내내 만성적 대포 공급 부족에 시달렸으며 이 같은 부족 현상은 왕국과 해외 제국의 안전이 위협을 받던 위기 국면에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 1620~1630년대 리스본 추밀원이 인도 부왕에게 보낸 서신에 본국이 식민지에 충분한 대포나 대포 제작자를 파견할 수 없음이 여러 차례 피력되어 있으며 현지 대포 주조소를 개발할 것을 권하고 있다. 실제 포르투갈의 해외 식민지가 입수 가능했던 대포는 대개 마카오에서 중국인 노동력을 이용해 주조된 것이었다.(boxer, experdicoes militares, 7~9) 1640년 에스파냐와의 연계가 끊어지자 포르투갈은 전통적 적국인 네덜란드에게서 대포를 수입해야 했으며(rau, embaixada, 95쪽 이하) 1656년 네덜란드와 전쟁이 발발하자 함부르크에서 탄약을 수입해야 했다.(baash, verkehr, 543)
에스파냐의 대포 공급 위기.
에스파냐의 경우 좀 더 복잡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유사한 형태를 보였다. 에스파냐는 대포 생산량이 미미한 상태에서 해외 팽창과 유럽의 패권 다툼에 끼어들게 되었고 이로 인해 에스파냐는 부족한 생산과 막대한 수요라는 상황을 직면했다. 왕국 각지에서 장인들이 청동 대포와 연철 대포를 생산하기 시작했으나(carrasco, artillerai de bronce, 32이하) 이런 생산 방식은 중세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새로운 상황 속에서는 만족스럽지 못한 대안이었다. 이에 대응하여 왕실은 메디나 델 캄포와 말라가, 바르셀로나에 병기창과 대포 주조소를 설립했으나 숙련공의 부족으로 인해 쇠퇴했다.(carrasco, artilleria de bronce, 185 / vigon, artilleria. vol.1, 309) 1611년 세비야에 왕립 대포 주조소가 건립되어 이 지역이 17세기 내내 에스파냐 대포 생산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나 생산 잠재력은 다소 제한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의 원인은 해군 건설과 마찬가지로 당국의 단기적인 처방에 기인한다. 여기에는 당국의 안이한 접근 태도에도 원인이 있지만 당시 에스파냐가 놓인 위치에도 기인한다. 카를 5세의 제국-합스부르크 에스파냐-은 세계 각지에 뻗어 나간 광대한 영토 외에도 유럽에서 대포 생산 잠재력이 가장 큰 지역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에스파냐의 통치자들은 대포가 필요하면 플랑드르, 이탈리아, 독일의 유명 생산지로 주문 명령을 내리거나 현지의 대포 주조자들을 에스파냐로 불러올 수 있었다. 후자의 대안이 지속적으로 선호되었다면 에스파냐의 숙련공 문제는 해결되었겠지만 위기가 해결되고 나면 경제적 이유로 인해 외국 포병들을 고향으로 귀환시켰고 소수의 에스파냐 장인들은 일감을 얻을 수 없어 무일푼이 되었다.(carrasco, artilleria de bronce, 184이하) 단기적으로 볼 때 에스파냐 궁정의 태도를 비난하기는 어렵다. 국외에서 대포를 구매할 때 대개 상대적 비용을 면밀히 분석하여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carrasco, artilleria de bronce, 53,184그외)
그러나 16세기 후반 전쟁, 종교적 대립, 통치 실패 등으로 플랑드르 남부 지역의 경제가 망가짐에 따라 숙련공들이 대거 국외로 이주했다.(이는 스웨덴과 러시아의 철강 산업에 영향을 미쳤다.) 당대 기술 발전에 뒤쳐진 이탈리아가 플랑드르의 생산 공백을 메울 수 없음이 드러나자 에스파냐는 극심한 군비 위기를 맞았다. 위기는 1570년대 이미 표면화했고 이후 수십 년 동안 급속히 악화되었다. 1570년대 이래 에스파냐가 영국으로부터 대포를 수입하려 했다는 증거는 사방에서 찾아볼수 있다. (carrasco, artilleria de hierro, 66 / calendar state papers, domestic, elizabeth, 244 w 16, April 3, 1593 / cunningham, english industry, vol. 1, 57 etc.)
에스파냐는 1611년 세비야에 왕립 주조소를 설립하고 1620년대 비스케이에 주철 공장 설립하는 등 실질적이고 장기적인 대응을 내놓았지만 당국의 광대한 수요에 비해서 공급은 제한되어 있었다. 이에 대한 전형적인 예시로 세비야가 일반적 구경의 대포를 연간 36문 이상 생산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들 수 있다.(carrasco, artilleria de bronce, 53~54) 당시 영국과 스웨덴의 대포 공장들은 모든 구경의 포를 연간 100~200문 가량을 생산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621년 존 브라운은 브렌츨리 용광로에서 200일만에 200문의 철제 대포를 주조했고(caledar state papers, domestic, addemda, 1580~1625, vol. 42 , no. 66) 율리타에서는 1633~1635년 동안 연간 140, 143, 219문의 대포가 주조되었으며(lund univ. library, de la gardieska, samlingen, topographica, julita, “rachnung oppa dhe jarnstycken...) 네베르바른, 브렌에쉬뷔, 파다에서는 1637~1646년 동안 5893문, 4700톤에 달하는 대포가 주조되었는데 이는 각 공장이 연간 196문, 155톤 가량을 생산했음을 의미한다.(svenskt biogragiskt lexicon, ad vocem H., ”de besche“) 이런 상황은 화약 생산도 동일해서 1592년 콜라도는 칠레 초석이 풍부한데도 현지 산업이 육성되지 않아 국외에 화약을 요청해야 한다고 불평했다.(platica, p.76 v.)
영국에서의 주철 대포의 혁신.
영국은 분명히 14, 15세기까지만 해도 대륙의 군수 산업에 비해 대체로 뒤쳐져 있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영국이 삼림 지대 가까이에서 철광석 공급원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영국인들로 하여금 철 야금에 더 주력하게 하였고 구리 합금 공정보다 철 제련 공정이 기술적으로 후진적인 이상 계속하여 불리한 위치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15세기 후반, 헨리 7세에 의해 서식스 주 윌드의 애시다운 포레스트에서 대포 기술 개발이 시도되었고 분명 성과가 있었다.(schubert, iron industry, 162~170) 한편 애시다운에서 일한 대포 제작자 상당수가 프랑스 출신이었다는 사실(schubert, cannon, 99. 132p.-135p.)은 영국이 제철 분야에서 대륙의 기술자와 노하우를 수입해야 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1490년~1510년 사이 포탄 주조와 더불어 철제 대포 주조가 시도되었고, 1509~1513년 사이에 주철 대포가 제작되었다.(schubert, iron industry, 167) 그러나 뒤이은 헨리 8세가 플랑드르의 장인 한스 포펜라위터르에게 20년간 대포를 적어도 140문 이상 구입(ffoulkes, gun-fouders, 4,29,41~42,106~107)한 것으로 보아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곧 국고가 바닥났고(1523년에 포펜라워터르는 국왕에게 돈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ffoukles, gun-fouders 29,109) ) 1543년에 프랑스와 전쟁이 임박했을 때 헨리 8세는 사실상 파산상태였으므로 자국의 산업과 원자재에 군비를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1541년 헨리 8세는 벅스티드 교구 사제였던 윌리엄 레빗william levett을 뉴브리지 왕립 제철소의 전차인으로 임명했다. 그는 곧 인근의 프랑스 대포 제작자들을 확보하고 영국인 청동 대포 주조자 피터 보드와 숙련된 제철 장인 랄프 호지를 섭외하여 대포를 개발하기 시작했고 곧 좋은 품질의 주철 대포가 제작되기 시작했다.(schubert, iron industry, 171~172) 이것은 서식스의 제철 산업의 번창과 대포 생산의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영국에서 1543년에 첫 주철 대포가 생산되었다고 인정되는데 이 대포들은 앞서 언급된 1509~1513년의 대포와 큰 차이가 있다. 초창기 생산품은 포신이 짧고 구경이 컸으나 1543년 이후의 주철 대포는 포신이 더 길고 무거우며 구경이 작았다. 또한 1543년의 대포는 약실과 포강이 일체형으로 주조되었다는 점에서 약실이 분리 가능한 이전의 대포와 차이를 보인다.(schubert, first cannon / schubert, iron industry, 249~250,255)
새 대포들이 성능이 좋았기 때문에 1545년 레빗은 120문의 대포를 주조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거의 2년에 걸쳐 임무를 완수했다. 이후 영국에는 용광로가 추가로 건설되어 1573년에 서식스에는 용광로가 8개 있었고 켄트에도 연간 500~600톤을 주조하는 용광로가 있었다.
영국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주철 대포의 생산을 갑작스럽게 성공한 구체적인 요인은 분명하지 않다. 젠킨스는 서식스의 철이 주조하기 좋은 철이란 점과 서식스 사람들이 더 좋은 주물 방식과 대포에 적절한 크기를 찾아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jenkins, sussex, 22~23) 슈버트 박사는 1543년 대포가 포신이 더 길고 구경이 작았다고 덧붙이며 이것이 더 큰 추진력을 내게 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schubert, iron industry, 255) 그리고 워타임은 새 대포들이 적게 터지지 않게 된 요인으로 서식스 원광의 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wertime, steel, 168,175) 서식스 장인들이 오늘날 제철 공정에도 적용되는 기본 규칙들 상당수를 제한적으로나마 이해하고 적용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기술적 성공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이것은 경제적 성공으로 이어졌다. 사실 주철 대포는 여러 면에서 여전히 청동 대포에 비해 열등한 수준이었다. 청동 대포는 녹이 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술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철제 대포는 더 쉽게 부숴 졌을 뿐만 아니라 금속 자체의 낮은 내구력 때문에 철제 대포는 청동 대포보다 두텁게 만들어야 했으므로 주철대포가 더 무거웠다. 그러나 주철 대포는 청동대포에 비해 비용이 압도적으로 적게 들었다. 청동 대포는 보통 주철 대포에 비해 3~4배의 가격이 들으므로 떨어지는 품질을 가격에서 보상하고도 남았다. 각국의 전문가들과 포병들의 반대에도 영국산 대포의 경제적 이점이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에 각국은 영국산 대포를 무시할 수 없었다.
또한 영국의 사략선과 해상무역이 활기를 띄자 민간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여 공공 수요보다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외국의 수요도 계속해서 늘어 1573년 호지는 영국산 대포의 대부분이 국내에서 거래되지 않는다고 보고했다.(tawney-power, document, vol.i 262~263) 심지어 에스파냐까지도 합법, 불법적을 가리지 않고 영국산 대포를 수입했다.
에스파냐의 좌절.
1574년 플랑드르는 에스파냐-가톨릭 세력과 프로테스탄트 세력 간의 만성적 전쟁 상태에 있었다. 신임 총독 돈 루이스 데 레케센스는 청동 대포 38문의 주조를 위해 말랭에 헝가리산 구리 16톤과 영국산 주석 1톤을 보냈다. 그러나 더 많은 새 대포가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정은 파산 직전이었고 구리와 주석은 너무나 비쌌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영국산 대포를 주문한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대포의 금수 조치, 특히 가톨릭 세력을 향한 금수 조치를 내린 시기였으므로 수출 허가는 내려지지 않았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레케센스는 리에주의 장인인 무슈 고드프랭에게 주철 대포 생산을 의뢰했으나 시험 발사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같은 해 비스케이에서의 신기술 도입 시도는 종교재판을 두려워한 장인들이 에스파냐로 가는 것을 거부해서 실패했다.
네덜란드의 대포 자립 노력 및 기술 확산.
네덜란드에서는 에스파냐와의 끝없는 전쟁과 해외 진출 사업, 그리고 거대한 해군(네덜란드 함대에 대한 현실적인 수치는 다음을 참조할 수 있다. vogel, handelsflotten, 268 / blok, geschidenis, vol.ii, 370 / boxer, the dutch, 204~205)에 의해 막대한 대포 수요가 발생했다. 그러나 에스파냐와의 분쟁은 대표적 대포 산지인 플랑드르 남부의 대포 생산지와의 단절을 유발시켰다.
한동안은 영국산 주철 대포가 해법이 되는 듯 했다. 1560~1600년 사이 네덜란드는 다량의 영국산 주철 대포를 수입했다.(elias, zeewezen, vol.i 56 / baash, wirtchaftsgeschichte, 270주)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이 1574년부터 무기거래를 통제하기 시작하자 더 용이한 수입 허가와 쉬운 밀수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의 대포 수요는 완전이 충족되지 못하였다.
특히 17세기 초 영국의 산업이 병목현상에 직면하게 되자 네덜란드는 심각한 대포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자 네덜란드는 자국 대포 산업을 일을 착수했다. 네덜란드 각지에 관영, 민영 대포 주조소가 설립되었는데(elias, zeewezen, vol.1, 56 / van dillen, amsterdam, doc. 839 and 947, unger, middelburg, doc. 1060 etc.) 초창기에는 청동 대포만 제작되었지만 곧 철제 대포 주조도 이루어졌다. 1601년과 1619년에는 네덜란드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영국식 대포 주조를 허락하는 특허장이 발부되었고(doorman, patents, 101,118) 1620년대에는 베스트팔렌의 마르스베르크에서 네덜란드인의 손으로 주철 대포가 제작되었다.(van dillen, amsterdam, doc.537, doc. 539 / doorman, patents, 118) 이 시기에 이르자 신기술은 대개의 유럽 전역에 전파되었다.
스웨덴의 대포 생산.
스웨덴은 좋은 구리와 주석, 철광석 등이 풍부했으며 광대한 삼림 자원과 동력원과 운송에 사용될 수 있는 강도 여러 군데 있었다. 스웨덴은 구스타프 바사(1523~1560)시대 이래 왕실의 주도 아래 대포 제조 능력 향상에 주력했다.(jakobsson, bevapning, 25~48 / heijkenskjold, styckegjutning, 57~85)그러나 초기 스웨덴의 대포 생산은 숙련 노동력의 부족과 국외 마케팅을 지원하는 재정적, 상업적 부재로 인해 저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새 대포 산지를 물색하던 네덜란드 상인의 도래는 스웨덴 대포 산업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7세기 전반기에 숙련공들이 플랑드르에서 스웨덴으로 대규모로 이주하였으며(wiberg, de geer et la colonisation) 네덜란드의 상업 조직은 스칸디나비아 제작자들에게 네덜란드와 영국의 해외 팽창, 네덜란드-에스파냐 전쟁, 30년 전쟁등으로 발생한 엄청난 대포 수요의 자극을 중개하는 등 네덜란드인의 도래는 스웨덴 현지의 천연 자원을 온전히 가용할 인적 자원과 자본을 공급해 주었다. 17세기 첫 30년간 스웨덴 산업은 혁명적 변화를 겪었으며 곧 유럽 군수 산업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스웨덴 제철업 전반에 대해서는 hildebrand, historia, 3~84 / 해운업에 대해서는 bang, tabeller)
(hahr, akers, 6)↑
스웨덴 첫 주철 대포 수출에 대한 언급은 네덜란드 총독이 스웨덴산 주철 대포 400문을 요청했다는 구스타프 아돌프의 편지에서 나타난다.(heijkenskjold, styckegjutning, 72~73) 1620년부터 암스테르담에서 스웨덴산 대포는 쉽게 판로를 찾을 수 있었다.(heijkenskjold, styckegjutning, 75주1) 이후 스웨덴산 주철 대포 수출은 빠르게 증가해 1637~1640년 사이에는 연간 780톤 가량, 1641~1644년 사이에는 연간 940톤 가량, 1645~1647년 사이에는 연간 1100톤 가량 수출되었고 1661,1662년에는 1459톤과 2556톤을 수출하며 정점을 찍었다.
야포의 발전.
대포 생산에 관하여 17세기 중반의 유럽의 상황은 2세기 전의 상황과 상이한 형태를 띄었다. 산업의 지리적 분포는 급격히 변화하였고 동시에 유럽의 생산 잠재력이 괄목할 만한 증가를 보인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효과적인 주철 대포의 등장이다. 이것은 낮은 비용으로 유럽의 대포 보관창을 확장시킬 수 있게 되었으며 기술 향상과 사업 조직의 발전 덕에 가용 자원을 더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어떤 식으로 추산을 하더라도 유럽의 대포 생산량을 측정하려는 시도는 큰 오차를 감안해야 하지만 근사적인 추정치는 내볼 수 있을 것이다. 1650년 경 스웨덴은 연간 1500~2000톤의 주철 대포를 생산할 수 있었다. 영국은 1000톤에 버금 가는 수량을 생산해 낼 수 있었다. 이 지역들이 유럽의 주요 생산지였다. 다른 주요 생산지로 에스파냐의 비스케이, 서부 독일, 러시아의 툴라, 프랑스의 페리고르를 꼽을 수 있다. 특히 툴라는 연간 250~300톤을 생산할 수 있었다는 정보가 남아 있다.(strumilin, istoriia, 104이하) 여타 지역의 생산량이 스웨덴과 영국의 생산량을 능가할 수 없었을 것이라 가정하면 유럽의 잠재적 주철 대포 생산량은 연간 5000톤이다. 1650년대 이후 주철 대포가 지배적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유럽의 청동 대포 수량이 5000톤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군비의 질적인 향상에 대해서는 좀더 확실한 답을 내놓을 수 있다. 16세기 초에 들어서자 해상에서 사용되는 청동 대포는 “최상의 수준에 도달하여 이후 한세기 반 동안 실질적으로 변모하지 않았다.”(clowes, sailing ships, pt. 1 , 63) 1650년까지 해상에서 주철대포는 청동 대포만큼은 아니었지만 만족할만한 효율을 보여주었다. 야포는 여전히 유럽 군수 물자에서 가장 취약한 지점이었지만 17세기를 거치며 가장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17세기 초 이른바 가죽 대포(hime, leather guns / meyersson, laderkanonen)가 등장했지만 짧은 수명과 떨어지는 발사력으로 단명했다. 그러나 1629년 개발된 레예멘츠스튀케(jakobsson, bevapning, 182,214,223)를 비롯한 스웨덴 기술자들의 성공은 즉시 유럽의 여러 전쟁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게 된다.
유럽의 팽창을 묘사할 때 흔히 군비에서의 유럽의 우월함은 정적인 것으로 묘사되지만 15세기 이래 유럽의 군비 생산 능력은 질적, 양적인 면 모두에서 극적으로 팽창했다. 대포 제작에서 유럽의 진보는 전함 건조와 해전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전략과 기술의 주목할 만한 발전을 동반했기 때문에 비유럽권에서는 이런 유럽의 군비 팽창에 적절히 대응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수능 끝났다고 좋다고 만들어봤는데 장난 아니네요. 범선편도 계획해 놨는데 너무 힘들어요.;;
이런 자료 올리시는 분들이 얼마나 고생고생하시면서 만드시는지 새삼스레 알게 되네요.
전부 손으로 친것인 데다가 영어가 아닌 문자는 움라우트 같은거 무시하고 썼기 때문에 사방에 오탈자가 난무할 수도 있습니다. 원래 이게 초고를 한번 밖에 수정 않한거라 문맥적으로 이상하거나 팩트가 않맞는게 있을 수 있는데 멘탈리티 문제로 포기하겠습니다.ㄷㄷㄷ;; 뭔가 문제 있으면 댓글달아주세요.
첫댓글 그림이 하나도 안보이네요. ㅠ.ㅠ 그리고 글이 기니깐 선리플 후감상! 읽는동안 질문하나 할게요. 철대포가 청동대포보다 더 좋은점이 있나요? 초기에는 낮은온도로 만들 수 있는 다 청동으로 만들던데.
가공이 쉽고 균질하게 만들기가 편리합니다. 두께가 균질하지 않으면 내부 충격이 특정 부위에 집중되어 깨질 수 있거든요.
@bookmark 초기 청동 대포가 우세했던 이유가 가공이 어렵고 균질하게 만들기 어렵다고 서술했었는데요;; 시간이 지나며 철 제련 기술이 향상된 이후의 일이고 중세기 동안은 가공 기술이 더 쉬운 쪽은 종 제조 때문에 기술이 숙련된 청동입니다.
헐... 한글로 작업한다음에 복붙했는데 그럼 않되나 보네요. 나중에 수정할게요.
기본적으로 제가 작업한 시기 동안의 철제 대포는 대개 청동 대포보다 열등한 대체품으로 인식되었다고 합니다. 말씀하신데로 낮은 온도에서 주조가 가능하고 이미 기술이 숙련되었기 때문에 청동이 더 좋은 재료로 꼽혔지요.
기술적 진보로 철제 대포의 여러 장점이 부각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철제 대포의 장점은 가격입니다. 서술했던것 같은데 일반적으로 청동 대포의 가격이 철제 대포의 3~4배정도 였다고 하더군요.
대포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원재료와 완성품의 가격이 계속해서 치솟았다는 걸 감안하면 이정도 가격차이는 다소간의 성능 차이는 무시할 정도라고 볼수 있지 않을까요? 실제로 영국에서 제대로 된 주철 대포가 제조되기 시작한 15세기 중반 이후로는 적국 에스파냐에서도 영국의 대포를 수입하려 했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품질을 만족하는 주철 대포는 국가의 대포 재고량을 낮은 비용으로 크게 증진시키고 군비 확장에 대한 부담을 크게 낮춰주었기 때문에 수백년 동안의 기술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철제 대포의 개발 유인이 되어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라고 서술했었는데 더 있을 수도 있겠네요.
@Ir.Focus 철과 청동을 거꾸로 보다니 실수했군요.
@bookmark 어느 면에서 거꾸로 봤다고 하시는 겁니까? 뭔가 잘못된게 있나요? 자세히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bookmark 말씀이 없으셔서 일단 가격과 성능 면에서 제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 올립니다.
Soon, English iron workers using blast furnaces developed the technique of producing cast iron cannons, which, while heavier than the prevailing bronze cannons, were much cheaper and enabled England to arm her navy better. ( en.wiki, cast iron, 3)
중근세 금속 물가는 ( http://www2.scc.rutgers.edu/memdb/database_list.html ) 참고.
'대포, 범선, 제국'은 좋은 책이지만 그것만 가지고 쓰는 거라면 아래 레판토 해전의 일처럼 다른 자료와의 충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이것 저것 끌어 모은 거지만 쓸 때 붙잡고 쓴 원문은 그겁니다. 솔직히 여러 자료중에서 대포 범선 제국을 직접 소장하고 있는 데다가 가장 많이 읽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제 입장에 대해서도 따로 서술해 드릴까요? 기본적인 입장은 대포 범선 제국에서 따온 거였지만 일단 오스만의 확장은 레판토 해전과 관계없이 이루어졌다는게 여전히 제 기본 입장이라. 위 책에서 서술된 레판토 해전의 비 혁신성은 레판토 해전의 제가 생각하는 무의미함의 일축에 불과해서 말이죠.
@Ir.Focus 그 입장하고 실제하고는 다르다는 건 이미 아래에서 충분히 이야기를 들으셨을텐데 말이죠. 무의미함의 일축이란 레판토가 무의미하다는 식의 주장에 대한 일축이 맞는 말이겠죠. 이미 충분하고도 충분히 이야기가 끝났으며 그걸 홀로 부정하고 계시는 건 여기서는 Ir.Focus님 뿐입니다.
@bookmark 이야기가 끝났다는건 누가 이기고 자시고라는 뜻이 아니라는 건데요;; 뭔가 감정 상하셨나요? 제가 님들 의견을 무시한것도 아니고 그런 관점라면 옳다고 말씀드렸는데도 계속 뭐라 하시면, 뭐 저야 더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는데요;;
님 의견을 부정한게 아니라 인정했을 뿐더러 걍 좀 다른 관점에서 봤을때 그렇게 보인다는 건데 그렇게 끝까지 쫒아 와서 까시면 뭐라 드릴 말씀이 궁합니다. 하하;;
@Ir.Focus 비판을 하고 반대에 대한 근거를 제시해도 끊임없이 '그래도 내 말이 맞아'를 외치셨잖습니까;;
@Ir.Focus 아무리 대가라 하더라도 학문에 있어서는 한 학자의 주장만을 맹신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 없습니다.
@mr.snow 왜 전혀 관련없는 글에서 소모적인 논쟁을 이어나가야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님이 만족하실만한 근거는 아니더라도 나름 근거를 제시했다고 생각합니다만. 분명히 관점의 차이라고 말을 해도 거기에 대해서 싹 쌩까놓으시고는 여기까지 쫓아오셔서 대못을 박으십니까?
거기다 맹신도 아니고 나름 여러 모로 기존 주장 외적인 면에서의 근거도 찾아본 이후입니다. 또한 역사학의 갈래도 여러가지이고 역사의 해석도 여러가지인데 마치 님의 주장만이 진리이고 다른 방식의 해석은 비역사학적인 태도로 모시는 게 오히려 맹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고생하셨습니다. 뭔가 쓰는 건 참 어렵죠. 대포야말로 저 당시 군사기술의 첨단이었을테니 기술 개발한 사람이나 기술자는 떼돈을 벌었겠네요. 마카오의 중국 기술자들이 만들던 대포는 그럼 불랑기 - > 홍이포 로 봐야될까요? 기술 자체는 많이 뒤떨어졌을 텐데요.
음... 그나마 대개 남이 쓴 자료 정리한 수준에서 이리 힘든걸 보니 굇수분들의 노고는 더 장난 아니었겠죠?
그런데 개발자나 제조자들이 돈을 많이 번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나봅니다. 대포가 원체 비싸다 보니 대금 지불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도 많고 기술적 어려움으로 만족할만한 대포를 만들지 못해 봉변을 당한 사례도 많더라고요. 그래서 주철 대포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이겠지만 말이죠.
마카오 기술은 유럽 대포 혁신지와 거리가 먼 포르투갈이 원천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후진적인 수준이었을 겁니다. 실제로도 그랬고요. 그게 홍이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외에도 유럽 대포기술이 중국에 유입된 사례는
많습니다. 특히 선교사나 상인들을 통해 많이 유입되었죠. 그런데 마카오 대포의 경우 포르투갈의 대포 제조 능력과 수요를 비교해 볼때 대개는 포르투갈의 자체 수요를 충족시키는데 쓰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게 일부 중국 내부로 유입되어 홍이포라 불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홍이포=마카오 대포는 아닐것이라 생각됩니다.
범선편도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