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자나무 울타리 [송종규]
〈이 중에서 가장 붉고 아름다운 사과 하나를 가
지시지요〉과수원 주인이 정중하게 말했다 나는
단 하나, 가장 아름다운 사과를 가지기 위해 내
청춘의 한때를 흙과 태양에게 바치기로 했다 하루
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그해 가을이 지나갔다
빈 가지마다 수북수북 첫눈이 내리고 나는 과수원
가득 하얗게 사과꽃이 피기를 기다렸다 가장 붉고
빛나는 사과 하나의 희망 속으로 다시 가을이 걸
어 들어오고 희망 속에서 주렁주렁 사과가 열렸다
〈이 중에서 가장 붉고 아름다운 사과 하나를 가지
시지요〉주인의 목소리가 사과나무 꼭대기 위에서
울려 퍼졌다 완벽한, 단 하나의 사과를 가지기 위
해서 나는 다시 공중 저 높은 곳에 있는 그에게, 남
은 청춘의 전부를 바치기로 했다
나무처럼 심겨진 사람들이 제 몸의 상처를 들여
다보고 있는 못물의 번들거림 속
사과꽃이 피었다가 졌다 몇 번인가 첫눈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질퍽하게 녹았다
주인은 다시, 빛나는 미래를 약속했다
사과나 나무 울타리를 넘지 못했다
사과나무는 무성해져서
탱자나무 울타리를 훌쩍 넘고
희망은 절룩거리며 탱자나무 울타리를 넘지 못
했다
내게 닿아서 하얗게 늙어버린 시간을
우체통에 구겨 넣는다
오래전에 죽었던 사람들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 고요한 입술, 민음사,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