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미국과 베트남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280만 명의 군인, 8백만톤의 폭탄, 2,400억 달러의 전쟁 비용.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투입된 화력의 4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군사력을 베트남전에 쏟아 부었다.
이에 맞선 베트남 공산당 게릴라, 즉 베트공이 가진 것은 낡은 소총과 대나무 죽창이 전부였다. 미국은 6개월 안에 이 전쟁을 끝내겠다고 호언장담했고 언론들은 어쩌면 그보다 더 빨리 끝날지 모른다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베트남은 무려 15년이나 미국을 상대로 싸웠고, 1975년 전쟁은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다.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베트남 수도 호치민시의 북서쪽 외곽에 위치한 구찌시. 그곳의 깊은 정글은 이 전쟁의 가장 큰 비밀이 숨어 있는 곳이다. 유독 베트공이 많은 구찌 정글은 미군의 골칫거리였다. 밀림 속에 철저히 숨은 채 쏘아대는 베트공의 총알을 미군은 당해낼 수 없었고, 수많은 미군에게 이곳은 죽음의 정글이 되었다. 베트공들은 어디에 숨어있었을까.
땅에 덮인 나뭇잎과 흙을 치우면 터널의 입구가 나타나는데, 입구는 가로세로 30~40cm에 불과하다. 체격이 작은 베트남 사람들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정도의 크기로, 혹시 입구를 발견했다 하더라도 몸집이 큰 미군들은 절대 들어갈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이런 비밀스런 입구는 수백 개에 달하며, 안으로 들어가면 구불구불 이어진 통로는 70cm 높이에 50cm의 폭으로 온몸을 구부린 채 기다시피 해야만 겨우 이동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좁은 통로를 지나가다 보면 터널의 안쪽에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다. 그 안에는 작전 회의실과 내무반은 물론, 학교와 극장, 심지어 병원까지 있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이 지하터널에서 무려 17,000여 명의 베트공들이 13년간 생활하고, 아이들도 태어났다고 한다.
구찌 터널은 그야말로 완전한 지하 도시였던 것이다. 터널의 규모는 어느 정도 일까. 구찌 터널 관리협회의 회장인 짜올랜 대령에게 들어보자. “구찌 터널은 직선으로 뚫린 게 아닙니다. 가다보면 막힌 곳도 있고, 구부러진 곳도 있죠. 이렇게 연결된 구찌 터널을 전부 다 합치면 약 250km 정도가 됩니다. 한번에 들어갈 수 있는 최대 인원은 10만 명 정도입니다.”
캄보디아 국경 근처에서 시작해 호치민시 근교까지 거미줄처럼 연결된 이 지하땅굴을 죽 펴서 연결하면 250km 정도라는데, 이는 서울에서 경북 구미까지의 거리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길이다.
그렇다면 이 땅굴은 도대체 누가 만든 것일까.
베트공들은 호미로 흙을 파내서 대나무 바구니에 담아 퍼냈다. 이 터널은 전쟁이 끝나 3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는데, 이곳 구찌 지역의 땅 표면은 점성이 강한 흙으로 덮여 있어 간단한 도구로도 비교적 파내기 쉬웠다고 한다. 게다가 땅 속 깊숙이 발견되는 단단한 흙은 공기와 만나면 더욱 굳어지는 특성을 갖고 있어 폭격을 견뎌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당시 구찌 터널의 바로 위에는 미군 사령부가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지상에는 미군 사령부가, 지하에는 베트공 사령부가 함께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이 지하요새의 존재를 눈치 챈 미군은 수많은 군인들을 동원해 터널을 찾았다. 이를 위해 배치된 부대만 해도 무려 200여개나 되었다. 그러나 터널로 통하는 입구는 흙이나 나뭇잎으로 철저하게 위장된 데다 그 숫자도 많아 바로 위를 지나가도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군용견을 들여왔으나 베트공들이 미군의 군복이나 미군들이 쓰던 물건을 입구 근처에 두어 군용견이 냄새를 맡지 못하도록 했다. 더구나 진짜 입구 주변에는 군데군데 같은 모양으로 가짜 출입구까지 만들어두었는데, 그곳으로 들어갔다가는 깊은 구덩이에 미끄러져 쇠창살이 빽빽이 꽂힌 함정을 만날 수 밖에 없었다. 전우가 함정에 빠져죽는 것을 본 미군들은 감히 접근할 생각도 못하고 총만 쏘는 것이 고작이었다.
계속되는 실패에 고심하던 미군은 새로운 작전을 실시했다. 체구가 작은 병사들을 모아 특수부대를 만들었는데, 그들은 권총과 칼, 회중전등만을 가지고 어두컴컴한 지하터널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지뢰, 죽창, 가짜 통로, 함정들이었다.
게다가 베트공이 먼저 이들을 발견할 경우에는 좁은 곳에서 피하지도 못한 채 사격을 받아 죽었다. 그들은 독 안으로 들어간 쥐꼴이었다. 이 소탕작전 역시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미군 측은 융단폭격을 통한 초토화 작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전략 폭격기를 이용해 하루에 80톤 가량의 폭탄과 엄청난 양의 지독한 고엽제를 쏟아 붓는 무차별 폭격으로도 구찌 터널의 베트공들을 완전히 소탕할 수는 없었다.
터널은 지하 10m에 걸쳐 총 3층으로 이루어진 구조였다. 미군의 강력한 폭탄은 지하 3m에 자리 잡은 지하 1층과 6~7m 깊이의 지하 2층까지는 파괴할 수 있었지만 맨 아래쪽 10m 깊이의 지하 3층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결국 미군은 구찌 터널을 파괴하기는커녕, 그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1975년 전쟁은 결국 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이 끝나고 차츰 밝혀진 구찌 터널의 비밀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또한 전쟁 중 구찌 터널의 비밀을 밝히라는 위협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던 베트남 국민들의 단결력에 또 한번 놀란다.
전쟁이 끝난 지 30여년, 이제 구찌 터널은 베트남의 대표적인 관광지 중 하나로 탈바꿈하고 있다. 관광객들에게 자신을 자랑스러운 베트공이라고 소개하는 팜반 바는 이렇게 구찌 터널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무기로 따진다면 미국을 상대할 수 없었지만 마음의 힘으로 미군들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 마음의 힘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구찌 터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