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4일 토요일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7-11
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7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8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10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허리를 굽히고 사는 일
사람의 동작 중에서 가장 어려운 동작이 ‘허리를 굽히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농사를 지을 때는 거의 허리를 굽히는 일입니다. 특히 벼농사를 짓거나 밭농사를 지으면 대부분 허리를 굽혀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농기계의 발명으로 허리 굽히는 일을 아주 줄여주었지만 내가 어려서 대부분의 농부들은 허리를 잘 펴고 살 수가 없었습니다. 논에서 일할 때 묘판을 손질하거나, 모내기를 하거나, 김매기를 하거나, 벼를 베거나 거의 허리를 구부리고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농부 중 대부분이 허리를 쓰지 못하고, 허리가 구부러져 아주 힘들어하고, 디스크나 척추협착증으로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병원을 찾지도 못하고 허리를 90도로 구부리고 살면서도 그 힘든 일을 해 냈습니다.
그런데 허리를 구부리고 그렇게 힘들게 사는 분들은 대부분 겸손하고 말없이 일하고, 불평 없이 사신 분들이었습니다. 영화 ‘집으로’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지팡이를 짚고 까만 고무신을 신고 말을 하지 못하면서 외손자를 사랑하는 할머니와 같은 모습입니다. “허리를 구부리고 힘들게 살면서도 애기들을 데리고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해서 이런 옛날 얘기로 그분들을 칭송하는 말 만들기 놀이가 있습니다.
“예날 옛적, 갓날 갓적,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꼬부랑 살고 있었단다. 하루는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지팡이를 짚고, 꼬부랑 고개를 꼬부랑 꼬부랑 넘는데, 꼬부랑 강아지가 꼬부랑 꼬리를 꼬부랑꼬부랑 흔들면서 따라 오길래, 꼬부랑길로 돌아가니까, 꼬부랑 바위에 꼬부랑 토끼들이 모여와서 꼬부랑꼬부랑 춤을 추는데 꼬부랑 다람쥐가 꼬부랑꼬부랑 재주를 넘고, 꼬부랑 황새가 날아와 꼬부랑 나무에 앉아서 꼬부랑 목을 꼬부랑 빼고서 꼬부랑꼬부랑 노래를 하더란다. (계속 모든 사물에 ‘꼬부랑’이라는 말을 붙여서 얘기합니다.) 그래서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떡을 주니까 모두들 꼬부랑 떡을 아주 맛있게 먹었단다. 얘야, 내가 ‘꼬부랑’이라는 말을 몇 번 했는지 아니?”
‘꼬부랑’이라는 말을 몇 번 했다고 말하면 정답이 아닙니다. 꼬부랑 할머니 얘기는 무슨 말이든지 같다 붙이면 되는 말입니다. 아이들이 꼬부랑 할머니와 같이 모두에게 친숙하고, 모두에게 겸손한 삶을 가르쳐 주시는 어른들의 말씀입니다. 겸손한 삶을 살도록 꼬부랑 할머니와 지팡이를 등장시켜 겸손하게 고개 숙이고, 모든 사람들과 모든 사물에게 친숙하게 지내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리고 일하면서 겸손하게 사는 사람들을 절대로 함부로 보지도 말고 대하지도 말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어려서는 ‘꼬부랑’이라는 말이 몇 번 나왔는지를 세느라고 이 얘기를 들을 때에는 항상 긴장하고 손가락을 구부려 세고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맨 마지막에 질문한 ‘꼬부랑’이라는 말을 세어야 할 것인지, 세지 말아야 할 것인지 혼동이 되어서 언제나 틀렸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리사이들의 교만한 행태를 빗대어 잔치자리에 가서 맨 꼴찌에 앉으려는 것만 신경 쓰고 겸손하게 사는 것을 잊고 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겸손하고 겸허한 삶입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의 멸시와 손가락질을 받을지라도 세상의 헛된 것에 욕심내지 않고 겸손하고 겸허하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겉으로 표현되는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진정으로 허리를 굽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성되고 겸허한 마음으로 실행하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경영학에서 ‘등산경영’(登山經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경영자는 모름지기 등산을 하는 사람처럼 경영을 해야 한답니다. 산을 오를 때에는 높은 정상을 향하되 언제나 허리를 구부리고,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묵묵히 아래만 바라보고 걸어야 한답니다.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 산 정상을 쳐다보며 높은 곳을 향하여 내달리면 절대로 정상에 오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경영자는 그렇게 처신하고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이상인 예수님을 향하여 마음으로는 새기되 언제나 겸손하고 겸허하게 자신을 낮추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유대인의 랍비인 벤 엘리젤에게 한 어린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은 진리라는 것은 어디나 있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자갈처럼 흔해빠진 것입니까?”
“그래, 그래서 누구라도 주울 수가 있단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줍지 않는 것입니까?” 제자가 되물었다.
“진리라는 돌멩이를 줍기 위해서는 몸을 구부려야 하는데, 사람들은 진리를 줍기 위해 허리를 구부리려 하지 않는단다. 바로 이것이 문제이지.”
(최형락 엮음, 종교교육 예화 2)
<유다인들이 배척을 받아 세상이 화해를 얻었다면 그들이 받아들여질 때에는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1,1ㄴ-2ㄱ.11-12.25-29
형제 여러분, 1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물리치신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 자신도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벤야민 지파 사람입니다.
2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당신의 백성을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11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그들은 걸려 비틀거리다가 끝내 쓰러지고 말았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잘못으로 다른 민족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이 다른 민족들을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12 그런데 그들의 잘못으로 세상이 풍요로워졌다면, 그들의 실패로 다른 민족들이 풍요로워졌다면,
그들이 모두 믿게 될 때에는 얼마나 더 풍요롭겠습니까?
25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를 알아 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기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 신비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일부가 마음이 완고해진 상태는 다른 민족들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어지고
26 그다음에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시온에서 구원자가 오시어 야곱에게서 불경함을 치우시리라.
27 이것이 내가 그들의 죄를 없앨 때 그들과 맺어 줄 나의 계약이다.”
28 그들은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이 잘되라고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조상들 덕분에 여전히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이들입니다.
29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축일11월 4일 성 가롤로 보로메오 (Charles Borromeo)
신분 : 추기경
활동 지역 : 밀라노(Milano)
활동 연도 : 1538-1584년
같은 이름 : 가롤루스, 까롤로, 까롤루스, 샤를, 샤를르, 찰스, 카롤로, 카롤루스, 칼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Carolus Borromeo, 또는 가롤로)는 1538년 10월 2일 이탈리아 북부 마죠레 호수 근처의 아로나 성(城)에서 지베르토(Giberto Borromeo) 백작과 교황 비오 4세(Pius IV)의 여동생인 마르게리타(Margherita de Medici)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봉사하고자 하는 열망이 커서 12살 때 산 그라시니아노(San Gratiniano) 수도원에서 삭발례를 받았다. 그 후 밀라노로 가서 알치아티(Alciati)에게서 교육을 받았으며, 1552년 파비아(Pavia) 대학교에 진학하여 1559년에 민법과 교회법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559년 12월 25일 그의 외삼촌인 지안 안젤로 추기경이 비오 4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직을 계승하게 되었는데, 새 교황은 조카인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를 로마(Roma)로 불러들였다. 1560년 추기경으로 서임된 그가 가장 투철한 사명감으로 일했던 분야는 교황청 국무성 장관으로서의 직무였다. 특히 그는 트렌토(Trento) 공의회 제3회기 동안 그의 외삼촌인 교황에게 가장 열성적이고 믿음직한 협력자이자 지원자였다.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는 공의회 운영의 훌륭한 지도자로서 임무를 수행했고, 마지막 회기에서 칙서들을 성문화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1562년 그의 형 페데리고(Federigo)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보로메오 가(家)의 수장 직책을 거절하고 1563년 7월 17일 사제 서품을 받고 성직자로서의 신분에 맞는 생활을 하려고 더욱 분발하였다. 그는 트렌토 공의회가 요청한 교리교육과 미사 전례 그리고 성무일도 작업 등을 두루 감독했으며,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도 높은 개혁을 단행하여 그가 대주교로서 교구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밀라노 교구를 모범적인 주교좌로 만드는 놀라운 성과를 얻었다.
또한 그는 개혁 운동의 하나로 성직자와 평신도의 윤리와 생활 태도 개선을 위해 유익한 기준을 마련했으며, 성직자 교육을 위한 신학교 설립, 어린이들의 종교 교육을 위한 그리스도인 교리회 설립뿐만 아니라 자신의 교구 내에 거주하는 예수회를 격려하였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지원을 제도적으로 보완했고, 프랑스 두에(Douai)의 영국계 대학을 지원하는 데도 호의적이었으며, 자신의 재임 기간에 11차례의 교구 시노드(Synod)와 6번의 관구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사제직을 지망하는 후보자들을 위한 단체의 성격을 지닌 ‘성 암브로시우스의 헌신회’(지금은 성 카롤루스의 헌신회)를 설립했는데, 그들은 주로 설교 활동에 종사하면서 프로테스탄트의 침입을 저지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타락한 신자들을 다시 교회로 불러들이는 데 큰 노력을 쏟아부었다.
1567년 그는 주교의 관할권에 대한 밀라노 의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사건의 발단은 그가 나쁜 생활에 물든 평신도 여러 명을 투옥한 것으로, 주교좌가 시 당국에 의해 심한 공격을 받게 되자 그는 그들을 모두 단죄하였다. 재차 그의 주교직이 산타 마리아 델라스카라의 시의원들로부터 도전을 받자, 교황은 그를 후원하고 시의회는 그들의 뜻을 고수함으로써 큰 파문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그는 어느 자객의 공격으로 상처까지 입었다. 1576년 페스트와 기근으로 온 주민들이 큰 난리에 빠졌을 때, 그는 한 달 동안 매일 3천여 명의 주민들에게 음식물을 제공하며 어려운 난국을 극복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시의회와 교회 관할권 사이의 분쟁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나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는 그때마다 현명하게 대처하였다.
그는 영국 선교 길에 오르는 수많은 젊은 사제들을 접견하고 지원했으며, 1583년에는 스위스 교황사절이 되어 그 지역의 프로테스탄트를 상대로 설교하여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1584년 11월 3일 밤에 밀라노에서 사망하여 주교좌성당 중앙 제대 아래 묻혔다. 그는 가톨릭 개혁 운동의 기수들 가운데 한 사람이자 학문과 예술의 수호자였다. 비록 그는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항상 겸손하게 처신하고 성덕을 높임으로써 개혁의 반대자들로부터도 칭송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성직자나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들에게 권력을 남용한 적이 없다는 평을 들었다.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는 1602년 5월 12일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610년 11월 1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오늘 축일을 맞은 가롤로 보로메오 (Charles Borromeo)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