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 映畵로 읊다] 태풍이 불어닥쳐도 生의 의지만 있다면, 마음은 꺾이지 않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에서 료타(위)는 태풍이 불어오는 밤 놀이터에서 아들과 대화를 나눈다. 티캐스트 제공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 裕和) 감독은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After the Storm)’(2016년)에서 주인공 료타의 대사를 통해 태풍에 날아가지 않도록 지붕을 밧줄로 동여맸던 아버지의 기억을 떠올린다(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폭풍우로 지붕이 날아간 일을 읊은 한시로 두보의 다음 작품이 유명하다.
✺ [漢詩 映畵로 읊다] 폭풍우가 지나가고(After the Storm)
八月秋高風怒號(팔월추고풍노호), 팔월 드높은 하늘에 바람이 성난 듯 울부짖으니,
春城屋上三重茅(춘성옥상삼중모). 봄날 지붕 위에 세 겹 띠 풀 덮이어 있다.
茅飛渡江灑江郊(모비도강쇄강교), 띠 풀은 날아가 강을 건너 강둑에 쌓이는데,
高者掛罥長林梢(고자괘견장림초), 위로 날아간 것은 나뭇가지 끝에 걸리고,
下者飄轉沉塘坳(하자표전침당요). 아래로 날아간 것은 굴려가 웅덩이를 메운다.
南村群童欺我老無力(남촌군동기아노무력), 남촌의 아이들 나를 늙어 힘없는 노인이라 업신여겨,
忍能對面爲盜賊(인능대면위도적). 이제는 눈앞에서 도둑질하네.
公然抱茅入竹去(공연포모입죽거), 보란 듯이 띠 풀 안고 대숲으로 가버리니,
脣焦口燥呼不得 (순초구조호부득), 입술은 타고 입은 말라 소리도 못치고,
歸來倚仗自歎息(귀래의장자탄식). 돌아와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한숨만 짓는다네.
俄頃風定雲墨色(아경풍정운묵색), 이내 바람 멎고 먹구름 일어나,
秋天漠漠向昏黑(추천막막향혼흑). 가을하늘 아득한데 저물어 어둠이 깔린다.
布衾多年冷似鐵(포금다년냉사철), 베 이불 여러 해 지나니 차갑기 쇠와 같고,
嬌兒惡臥踏裏裂(교아악와답리렬). 개구쟁이 아이들 잠버릇 나빠 이불 속을 다 찢었구나.
牀頭屋漏無乾處(상두옥루무건처), 지붕 새어 참상에 마른 곳 하나 없고,
雨脚如痲未斷絶(우각여마미단절). 빗발은 삼나무 같아 아직 끊어지지 않는다.
自經喪亂少睡眠(자경상란소수면), 몸소 난리를 겪어 잠마저 줄어,
長夜沾濕何由徹(장야첨습하유철). 긴 밤을 흠뻑 젖어 어떻게 밤을 지낼까.
安得廣廈千萬間(안득광하천만간), 어찌하면 넓은 집 천만 간을 마련하여,
大庇天下寒士俱歡顔(대비천하한사구환안). 세상을 크게 감싸는 집 지어 추운 사람 모두가 기쁜 얼굴 갖게 할까.
風雨不動安如山(풍우부동안여산), 비바람에 끄떡없는 집 지어 산처럼 평안히 살게 할까.
嗚呼何時眼前突兀見此屋(오호하시안전돌올견차옥). 아, 어느 때나 눈앞에 우뚝한 이런 집을 볼까나.
吾廬獨破受凍死亦足(오려독파수동사역족). 내 집이야 부서지고 내가 얼어 죽어도 나는 족하도다.
―茅屋爲秋風所破歌(모옥위추풍소파가) 가을바람에 띠지붕 날아가)·杜甫(두보, 712-770)
이 시는 건원 2년(759) 두보가 성도(成都)의 浣花溪(완화계)가에 浣花草堂(완화초당)을 짓고 살았을 때의 경험을 노래한 시이다.
*灑江郊(쇄강교) : 강가 들판에 뿌려지다.
*挂罥(괘견) : 걸리다.
*飄轉(표전) : 바람에 날리며 빙빙 도는 것.
*塘坳(당요) : 웅덩이와 움푹한 곳.
*忍(인) : 차마, 뻔뻔스럽게.
*脣焦(순초) : 입술이 타다.
*俄頃(아경) : 조금 있다가. 얼마 안 되어.
*向昏黑(향혼흑) : 저녁이 가까워지며 어두워지다.
*布衾(포금) : 면이나 마포로 만든 이불.
*雨脚如痲(우각여마) : 빗발이 삼대 같다.
*喪亂(상란) : 난리.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가리킴(안사의 난 安史之亂).
사천(四川)으로 피란(避亂) 가는 당 현종(唐 玄宗)
시인은 안사의 난(安史之亂)으로 떠돌다 성도(成都)에 겨우 안착했지만 뜻밖의 시련을 겪었다. 8월 어느 날 큰바람에 초가지붕이 날아간 것이다. 시인은 날아간 지붕의 띠풀마저 훔쳐가는 남쪽 마을 아이들에게 분노하지만 입이 말라 소리도 못 지르고(“脣焦口燥呼不得”), 빗물이 새지 않는 곳이 없는 상황에 근심스러워 잠도 못 이룬다. 불가항력의 재해로 고통받는 시인의 모습이 애처롭다.
영화 속 료타는 과거 문학상을 받은 적이 있지만 지금은 흥신소에서 남의 뒷조사나 하면서 이혼한 아내에게 아들의 양육비조차 못 주는 무능력한 소설가다. 시인도 과거 임금에게 간언하는 좌습유(左拾遺) 자리에 올랐지만 숙종의 노여움을 사 쫓겨난 뒤 이젠 가족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다.
시에서 후대 문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내용은 마지막 “어찌하면 넓은 집 천만 칸 얻어, 천하의 가난한 선비들을 크게 덮어줘 모두 기쁜 얼굴로, 비바람에도 움직이지 않고 산처럼 편안케 할 수 있으랴(安得廣厦千萬間, 大庇天下寒士俱歡顔, 風雨不動安如山)”란 구절이었다. 영화 속 태풍이 선친과의 불화나 이혼 등 료타 개인의 문제를 자성하는 계기가 된다면, 시에선 폭풍우로 겪은 자신의 고난이 세상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민으로 전화(轉化)된다.
하지만 폭풍우가 지나갔다고 해서 삶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필요한 것은 힘겨운 삶을 어떻게든 헤쳐 나가려는 의지일 것이다. 료타는 되고 싶은 사람이 됐냐는 아들의 질문에 비록 되지는 못했지만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세상 곤궁한 이들을 덮어줄 거대한 집을 얻겠다는 시인의 바람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런 애민의식을 가졌다는 점에 많은 이들이 공명(共鳴)했던 것처럼. 시와 영화가 주는 서로 다른 울림과 감동이 만나는 지점이다.
[출처 및 참고문헌: <동아일보 2024년 089월 22일(목)|문화 [漢詩를 映畵로 읊다]〈88〉폭풍우가 지나가고(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Daum, Naver 지식백과/ 글: 이영일∙고앵자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