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월요시편지_1050호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유문호
나의 산수
가난과 돈독한 유대관계를 맺고 살던 아버지는 종종 동네 구멍가게에서 외상 계란빵을 사 오곤 했다. 식구 수에 맞춰 저녁 대신 사 온 계란빵을 나는 꼭 반을 갈라 두 개를 만들어 먹었다. 누나는 그게 그거라고 말했지만,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두 개는 한 개보다 많은 숫자였으므로 양이 많든 적든 더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던 시절의 나의 산수란, 상습적으로, 비대칭적으로, 아무튼 그랬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계란빵으로 양이 차질 않았던 누나가 서울 가는 열차에 몸을 싣고 야반도주한 건 내가 열다섯 살 때의 일이다. 저 지랄 같던 암흑시대, 나 또한 누나 뒤를 쫓으려 했으나 대합실에서 아버지에게 덜미 잡혀 나오던 등 뒤에선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들은 안전선 밖으로……”
나는 옷걸이처럼 매달려 과도하게 먼 안전선 밖으로 끌려 나왔다.
이 부근의 어느 지붕
야반도주 후 종무소식이었던 누나가 돈을 부쳐왔다. 달마다 꼬박꼬박 부쳐오는 누나의 돈을 어머니는 뻐꾸기시계처럼 우체국에서 찾아왔다. 누나의 돈과 함께 우리는 모두 기린이 되어갔다. 기다림과 생존의 진화를 따라 자꾸 목이 길어져 가는 기린.
겨울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돈이 끊긴 것도 그 무렵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봄은 오지 않았다. 생존이 걸린 일이었으므로 봄을 찾아 나섰다. 주소만 들고 찾아간 구로공단은 기린들의 세상이었다. 세상의 기린이란 기린들은 모두 모여 최대한 길게 목을 빼고 하늘을 향해 시꺼먼 연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이 부근 어느 지붕 아래 누나가 있을 거였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세월은 흘렀다.
강원도에서 태어난 누나는 초목을 떠나 지도 끝으로 시집을 갔고, 하늘을 향해 목을 빼던 기린들도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은 실업의 시대. 창밖으로 여전히 구름은 흘러가고 지구는 돌고,
다시 돌아와 앉은 텔레비전 앞, 천문학적인 산수算數들과 화중지병畵中之餠 같은 정보들, 멸종과 새롭게 태어난 돌연변이들의 이야기가 흥건하게 쏟아지던, 그 저녁 무사하지 않았지만, 세상과 결별한 채 기이하게 살아남은 기린의 무감한 눈빛을 나는 보았다. 사람들은 <세상에 이런 일이>라며 외계인 보듯 했고, 나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아무도 닿을 수 없는 높이의 눈빛을 가진 그를 부러워했다.
안전선 밖,
몰려온 사람들이 상습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잃어버린 탓일까, 나는 까닭 없이 초조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또 한 덩어리의 구름이 흘러갔다. 몰려온 사람들이 끈질기게 질문했다.
무얼 먹고 삽니까?
식수는 어떻게 해결합니까?
지금이 몇 년도인지 아십니까?
무슨 일인지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나는 텔레비전 속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이윽고 무념, 무감한 그의 눈빛이 말했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 『나와 사과나무 그리고 어쩌면 해피엔딩』(달아실, 2026)
*
오늘은 광복절 대체공휴일입니다. 광복절인 만큼 그에 맞춘 시를 고를까 하다가
유문호 형의 시집
『나와 사과나무 그리고 어쩌면 해피엔딩』
에서 한 편 띄웁니다. 조금(?) 깁니다.
대체공휴일이라 조금은 여유가 있을 테지요.
천천히 찬찬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실은 십여 년 전, 처음 이 시를 읽고 유문호 형에게 편지를 썼더럤습니다. 일부만 발췌합니다.
"이 시 참 좋습니다. 내 개인적 취향과도 딱 맞아떨어지기도 하고... 다만 이러한 ‘연대기적 서사형식’은 ‘유하’와 ‘권혁웅’에게서 먼저 보았던 그림자가 있긴 합니다. 이런 경우 때론 ‘누군가의 형식을 빌렸다는 애꿎은 모함’으로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향후 형의 시쓰기에 있어서 어떤 전형,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형이 시를 쓸 것이라면 이번 시에서 보여주고 있는 문체와 형식을 고집스럽게 형의 것으로 만들어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운문과 산문의 경계에서, 서사를 통해 이미지를 빚어내는, 아슬아슬하게 詩的인 긴장과 감동을 만들어내는 “절묘”함이랄까 뭐 그런...무엇보다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이번 형의 시,「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는 앞으로 형의 대표작이 될 거라는 묘한 예감마저 듭니다.(후략)"
그리고 마침내 지난 달,
내 손으로 형의 시집을 묶었는데,
이십 년 만에 형의 시집이 세상에 나왔는데
기대만큼 호응이 없어서
형에게 미안하고, 영 면목이 없습니다.
어디 유문호 형에게만 미안하겠습니까?
달아실에서 책을 낸 모든 시인 작가들에게 미안할 따름입니다.
그렇습니까?
네. 기린입니다.
2026. 8. 17.
달아실 문장수선소
문장수선공 박제영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