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漢詩 映畵로 읊다]〈나를 위로하는 맛〉
已喜高齋敞(이희고재창)
이미 툭 터진 높은 집 좋았는데,
還驚異味新(환경이미신)
다시 새로운 별미에 놀란다네.
紫漿霞色映(자장하색영)
자줏빛 국물엔 노을빛 어린 듯하고,
玉紛雪花勻(옥분설화균)
옥가루 면엔 눈송이가 고루 퍼져 있는 듯.
入箸香生齒(입저향생치)
젓가락 대니 이빨에 향기 감돌고,
添衣冷徹身(첨의냉철신)
옷 더 껴입는 것은 온몸이 차가워져서라네.
客愁從此破(객수종피파)
나그네 시름 이로부터 사라져서,
歸夢不湏頻(귀몽불회빈)
돌아갈 꿈 자주 꿀 필요 없으리.
―『계곡집(谿谷集)』 제27권 ‘자줏빛 국물 냉면(紫漿冷麪 자장냉면)’·장유(張維·1587∼1638)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The Handmaiden)’(2016년) 포스터/ 김준근(풍속화가) 「기산풍속도」 중 ‘국수를 누르는 모양’, 개항기, 독일 함부르크인류학박물관 소장.
CGV 용산아이파크몰 아트하우스 박찬욱관에 전시된 아트포스터.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The Handmaiden)’(2016년)에서 일본인처럼 행세하는 악독한 조선인 코우즈키는 식사 때만큼은 평양냉면을 즐긴다. 조선시대 장유(張維·1587∼1638)가 냉면을 먹고 쓴 시는 다음과 같다.
냉면을 읊은 한시로는 두보(杜甫, 712-770)의 ‘괴엽냉도(槐葉冷淘)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제19권’가 유명하다. 홰나무 잎의 녹색 즙을 면 반죽할 때 넣어 냉면을 만드는 내용이 나온다. "靑靑高槐葉(청청고괴엽), 푸르고 푸른 높다란 홰나무 잎을,/采掇付中廚(채철부중주). 따와서 부엌에 가져다주고./新麪來近市(신면래근시), 밀가루를 시장에서 사오니,/汁滓宛相俱(즙재완상구). 국물 맛이 아주 제법이구나." 두보가 먹으면 시름도 사라진다고 읊은 ‘냉도면(冷淘麵)’은 당나라 궁중음식에서 기원한 것인데 우리 냉면과 달리 비취색 면을 썼다. 고려시대 이색(李穡)의 시에도 이 중국식 냉면에 대한 언급이 있다(‘夏日卽事’). 위 시에선 이와 달리 우리 냉면을 읊고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그런데 시인이 먹은 음식은 오늘날 즐겨 먹는 평양냉면의 맑은 육수에 담긴 메밀면과는 다른 모습이다. 묘사대로라면 오미잣물에 꿀을 타고 녹두 녹말가루로 만든 하얀 면을 넣은 ‘세면(細麪)’의 모습과 가깝다. 중국에서 오는 사신을 접대한 음식 기록에도 시에서 읊은 것과 같은 냉면이 나온다(1643년 迎接都監儀軌). 시인은 입에 감도는 향기와 몸서리칠 정도의 차가움이 객지에서 느끼는 쓸쓸함마저 잊게 만든다고 말했다.
냉면은 아니지만 오키타 슈이치 감독의 ‘남극의 쉐프’(2009년)에서도 이역에서 먹는 국수가 향수를 달래 준다. 남극기지 월동대장인 카네다는 월동 기간에 먹어야 할 라멘이 떨어지자 조리 담당인 주인공 니시무라에게 자신은 라멘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하소연한다. 남극기지엔 면을 반죽할 때 넣을 간수가 없었지만, 니시무라는 결국 간수를 만들어 어렵사리 라멘을 완성한다. 카네다는 니시무라가 정성껏 준비한 라멘에 감격한 나머지 먹는 데 집중하느라 오로라 관측 임무마저 무시해 버린다.
송나라 소식(蘇軾)은 중국식 냉면을 먹으며 비록 진수성찬이 아니더라도 좋은 친구와 먹으면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다고 읊은 바 있다(‘二月十九日, 携白酒·鱸魚過詹使君, 食槐葉冷淘’). 일제강점기 백석은 평양냉면을 두고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이 회스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라고 썼다(‘국수’). 시인은 냉면의 색다른 맛이 돌아가고픈 조바심마저 안정시킨다고 했다. 그들이 예찬한 냉면은 각기 다르지만 근심을 위로하고 달래 주는 맛이란 점에서는 상통한다.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 〈이준식의 漢詩 한 首(이준식, 성균관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동아일보 2024년 09월 06일(금)〉, Daum∙Naver 지식백과/ 이영일 ∙ 고앵자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