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이 있던 자리 [송찬호]
오래 가물어, 사내는 여자에게 건너가지 못했다
마른 대지가 그런 사내를 불러 희생(犧牲)에 대하여 물었다
물길을 찾아 땅 아래로 파 내려가는 것같이
사내는 결박된 채 빈 우물 속에 거꾸로 던져져 처박혔다
그리고 우물은 메워졌다 삶은 아무도 모른다
누구는 사랑과 증오로 여자가 사내를 우물에 떠민 것으로 알고 있으니
대지는 경작되어야 하고 여자는 또 살아야 한다
어김없이 마른 태양이 떠올랐다
여자가 가랑이 사이에서 붉은 핏덩이를 들어 올렸다
- 분홍나막신, 문학과지성사, 2016
우물이 있던 자리 [심동석]
우물을 찾는 고모님께
말하지 못했다
강변길에 숨었다고
우물은 치렁머리 고모님이 샘물을 긷던 곳이라 했다 어느 날은 우물에 빠진 만삭의 달, 어느 날은 푸르른 별빛 꿈을 두레박에 가득 담아 올리던 곳이라 했다 고모님이 고개를 크게 젖히며 다시 웃었다 사철 짙푸르던 우물을 찾았다는 듯 두 손으로 두레박을 허공으로 자꾸 당겨 올렸다
병실을 나서면서, 끝내
말하지 못했다
우물 위로 버스가 지난다고…
- 시와소금, 2022 겨울호
우물이 있던 자리 [문태준]
이제서는 수령이 꽤나 되어서 깊은 그늘을 데리고 사는 감나무 터가 말하자면
아버지가 찾던 우물 자리였는데
나에게는 아버지가 10년 전쯤부터 입때껏 감나무 터 그자릴 펴고 계셨던 것이었다
처음엔 한 사흘 그러려니 했는데
무우 구덩이의 깊이를 지나 아버지는 아버지의 키를 세 번이나 세우면서 땅 아래로 들어갔다
달무리처럼 둥글게 땅이 트이면서 그 속을 아버지는 드나들었는데
음력 초아흐레에 시작된 우물파기는 스무날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그리고 그럴 줄은 알았지만 그 우물 자리는 깊은 정이 없었던지 이레만에 메꾸어졌다
오늘 내가 우물이 있던 자리에 가보니 땅을 움켜쥔 감나무 위로 큰 달무리가 져 있었다
- 맨발, 창비,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