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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여러분!
어젠 잘 쉬셨는지요!
벌초시즌에 맞물려 고속도로에서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답사를 되돌아보며 사진을 올립니다.
먼저 보석사를 갔습니다.
가장 먼저 은행나무의 위용에 모두들 놀라셨지요~~
수령이 1100년이 넘었던 기억이 납니다.
역시 사람이 들어가야 그 위용이 드러납니다.
예전에 갔을 땐 기허당이 단청을 못한 상태였는데 어느덧 외관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올 10월 경에 낙성을 할 것이라 들었습니다.
대웅전 들보에 그려진 귀갑용龜甲龍이 우리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설명드린 이 상량문 현판의 오류에 대해서는 보석사 관계자에게 전해 드렸는데 그 분의 말씀으로는
자료집에 실은 사진처럼 상량문의 원문사진을 살려서 사진으로 현판을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제작업체가 임의로 이렇게 한문으로 인쇄하여 현판작업을 하다보니 생긴 오류인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사후에 보석사 쪽에서 원문순서가 뒤죽박죽이 된 채 인쇄된 사실을 알고서도
현판을 세웠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다만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다시 세우는 성의를 기다려 볼 뿐 입니다.
보석사를 나서서 칠백의총으로 갔었지요.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기에는 결코 의병이라는 조직은 발동하지도 조직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국난극복의 역사는 의병의 역사였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멀게는 삼국기의 항중과정과 고려기의 항몽투쟁과
조선의 양대 전란과 구한말과 일제치하의 의병들이 있었습니다.
이번 답사에 참여하지 못하시고
답사후기만을 읽어보시는 회원분들을 위해서 이 글을 씁니다.
저는 이번 답사를 통해 제봉 고경명 선생과 중봉 조헌 선생과 영규대사 세 분은 물론
그들과 함께 순절한, 우리가 현재 이름을 알 수 없는 의병들이
나라를 구하려다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쳤던 그 고결한 정신을 기리며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더불어 제봉의 통솔력이나 중봉의 통솔력이 결코 부하들을 사지에 몰아넣었다고
비난당할 만큼 분별없이 제 욕심에 사로잡혀 있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적들을 보고는
내 죽을 걱정이 앞서서, 공포에 사지를 부들부들 떨면서
저놈들이 이 나라의 군주를 죽이고 이 강토를 짓밟고 내 형제부모들을 쳐 죽일 듯 닥쳐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선 살고 봐야겠다고 군량과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던
수 많은 조선의 육군과 수군의 장군들과는 차원이 다른 '의병장'들이었습니다.
임란기를 겪고 쓴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 나온 조헌 부분을 길지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자료집에는 지면관계상 싣지 않았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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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이르러 조헌이 호남ㆍ영남 지방에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집하니, 그의 문생인 전승업(全承業)ㆍ김절(金節) 등과 선비 장덕익(張德益)ㆍ신난수(申蘭秀)ㆍ고경우(高擎宇)ㆍ노응탁(盧應晫) 및 전 참봉(參奉) 이광륜(李光輪) 등이 조헌의 의리를 사모하여 다투어 모여들었다. 전에 대둔산(大芚山)에서 약속한 넷 중에 두 사람이 왔는데, 한 사람은 이미 죽었고 한 사람은 다리에 병이 나서 오지를 못하였다. 이에 좋은 달 좋은 날을 택하여 공주에서 군사 행동을 일으키니 정예 군사가 1천 6백이었다. 그때 왜적은 청주를 점거하고 방어사 이옥(李沃)의 군사는 무너졌다. 조헌이 정예부대를 이끌고 청주로 전진하여 곧장 성의 서문 밖을 공격하는데 승장(僧將) 영규(靈圭)와 합진하여 나갔다. 그래서 직접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종일 독전하니 적병이 크게 패하였다. 아군이 개미처럼 붙어 기어 올라가려는데 홀연히 한 줄기의 소나기가 서북쪽에서 몰려와 천지가 캄캄해지니 전사들이 추위에 떨었다. 조헌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옛 사람의 말에, ‘성패는 하늘에 달렸다.’ 하더니, 참으로 그렇구나.”
하고, 징을 울려, 조금 후퇴를 명하였다. 이날 밤에 한 여자가 적진에서 도망쳐 나와 말하기를,
“적병이 멀리 이쪽 군대의 위용을 바라보고서 모두 실색(失色)이 되어 ‘저 의병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달려들며 꺾일 기세는 조금도 없으니 저들과 싸울 수가 없다.’ 하고, 곧 불을 피우고 깃발을 세워 군사가 지키는 것처럼 해놓고 쌓인 시체를 다 불태우고 병영을 비우고 밤에 도망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조헌 등이 진격하여 머무르고 방어사 이옥(李沃)에게 청하여 미곡 수만 석을 곤궁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소와 말 수백 마리를 각 마을에 나누어 주어 농사를 짓게 하자고 하였으나, 이옥(李沃)이 듣지 아니하고 하는 말이,
“이미 순찰사와 의논하여 결정하였으니 이것을 남겨두었다가 적이 다시 점거할 때 쓰게 해서는 아니 된다.”
하고, 곡식을 다 태우고 가버리니, 군중에는 다만 현미 몇 곡(斛)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찌할 계책이 없어 드디어 군사들에게 각각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추위를 막을 차비를 차리도록 하고, 결심하고 근왕하러 서쪽으로 떠났다. 온양에 이르렀을 때 금산의 왜적이 다시 기승을 부린다는 소식이 들리고, 또 순찰사와 사환이 와서 조헌에게 말하기를,
“국토가 모두 적의 수중에 떨어졌는데 오직 호서와 호남만이 병화에 빠지지 않았으니, 생각하건대,
하늘이 은밀히 그대를 도와 중흥을 이룩하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하니, 조헌은 자못 그렇게 여기고 공주에 돌아가 순찰사와 만났으나 의논이 또 맞지 아니하여 마음이 매우 괴로웠다.
순찰사는 다시 각 고을에 공문을 보내어,
“관군(官軍)으로서 제 마음대로 의병의 진에 참가하는 자는 처벌할 것이니, 각기 원대에 복귀하라.”
하니, 조헌의 막하에 있던 관군들이 모두 흩어지고 오직 7백 의사(義士)만이 종군을 희망하였다.
조헌이 이에 군대를 이동하여 금산(錦山)으로 향하는데, 장사(將士) 한 사람이 강력히 주장하기를,
“적이 을묘년 호남의 패전에 징계되었기 때문에 지금 금산을 점거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정예한 군졸인데다가 그 숫자가 수만이 넘는데, 어찌 우리같은 오합지졸로 당해낼 수가 있겠습니까? 마땅히 군사를 멈추고 형세를 관찰하면서 조정의 명령을 기다림이 옳겠습니다.”
하니, 조헌이 울면서 말하기를,
“군부(君父)가 지금 어디 계시는데, 감히 군사의 날래고 무딘 것을 따지겠는가. 군주가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 것은 고금을 통해서 당연한 일이다. 나는 한번 죽는 것만 알뿐이다.”
하고, 드디어 의승(義僧) 영규(靈圭)와 연합하여 진격하였다. 또 전라 의병장 권율과 서로 날짜를 약속하고 적을 협공하기로 하였었는데, 권율이 편지를 보내어 기일을 변경하였으나 그 편지가 도착하기 전에 조헌은 이미 금산 성 밖 10리 떨어진 곳에 이르러 권율의 군사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적이 이 사실을 염탐해서 알고 몰래 군사를 출동시켜 아군이 진을 치기 전에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교대로 육박하여 왔다. 조헌은 군중에 영(令)을 내리기를,
“오늘은 오직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이니, 죽고 살고 나아가고 물러감에 있어 의(義)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라.”
하니, 사졸들이 모두 명령에 복종할 뿐 아무도 감히 어기지를 못하였다. 오래도록 힘껏 싸웠는데, 적은 세 번이나 패하였다가 다시 합치고 아군의 화살이 다하자 적은 장막 안으로 몰려 들어왔다. 막하의 사졸 한 사람이 조헌을 붙들고 피하기를 청하니, 조헌이 웃으며 말하기를,
“장부가 죽을지언정 난리를 당하여 구차히 피할 수 없다.”
하고, 북채를 끌어잡고 더욱 급히 독전하니, 병사들은 모두 앞으로 달려가 맨주먹으로 서로 치면서도 오히려 열(列)을 떠나지 않고 마침내 조헌과 함께 전사하였다. 조헌의 아우 조범(趙範)이 죽음을 무릅쓰고 적중에 들어가 조헌의 시체를 찾아서 업고 옥천(沃川)으로 들어가서 나흘만에 염하였는데, 안색이 산 사람과 같고 노한 기운이 발발하여 눈을 부릅뜨고 수염이 꼿꼿이 섰으므로 그가 죽은 지 오래된 것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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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이 글을 읽다보면 그들이 맞이했던 급박했던 순간들을
현재의 지평에선 우리는 알 지도, 경험할 수도 없으면서
경솔하고 무모하게도 칠백여명의 부하들을
사지에 내몰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충청방어사와 순찰사는 나라가 엎어지려는 판인데도
의병이 공을 세우게 되면 관군의 입지가 없어지게 될 것을 걱정하고는
관군으로 의병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가담자의 처자들을 잡아가두게 했고
군사 백명을 중봉의 휘하로 보낸 청양현감을 옥에 잡아 가두는 등의 방해를 했습니다.
이렇게 되니 도망치고 흩어져버린 병력을 제외하고 남은 희망자가 칠백여명의 의병들이었습니다.
먼저 이 글을 더 쓰기 전에 의병義兵의 용어정의와 성격을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의병義兵이라는 단어에 쓰이는 義자는 옳을 의라는 뜻이 대표적인 뜻입니다.
중국판 한어대사전을 찾아보니 2번 항목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以恢㚆被推翻的王朝爲宗旨而組織起來的軍隊。
전복[推翻]당한 왕조의 회복을 종지(큰 뜻)로 삼아서 조직적으로 일어난 군대。
즉 의분義憤에 떨쳐 일어난 군대라는 뜻입니다.
어떤 왕조가 외부의 침입을 받아서 무너졌다면 정규군도 거의 궤멸되었다고 봐야겠지요.
그랬을 때 즉, 어떤 기능이 외부적인 작용이 가해져서 본래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것을 대신하여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경우에 이 義자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로움에 떨쳐 일어난 군대라는 뜻과
정규군의 역할을 대신하는 자원민병대라는 뜻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할 것입니다.
나아가서 신체기능 중 일부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의수와 의족과 의안과 의치가 그 기능을 대신하는 것이고
혈연관계에 적용될 때에는 의형제와 의부가 되는 것입니다.
정규군이 왜적에 밀려 부산포와 동래성이 이틀만에 함락되었고
천하가 믿었던 신립장군은,
형세를 살펴봤다면 적은 숫자로도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적의 기세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었던
문경의 천연요새를, 자신의 장기인 기병전술을 발휘할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탄금대에다 배수진을 침으로서 결과적으로 최소 8천명의 목숨을 사지에 몰아 넣어서
방어에 실패함으로써 한양도성이 겨우 20여일 만에 점령되는 등 정규군의 역할이 유명무실해지자
전국에서 각 지역의 명망있는 선비나 관료들이나 일반민간인들이 떨쳐 일어나
궤멸된 관군을 대신하여 도망친 선조를 근왕謹王하고 왜적을 쳐죽이고자 일어선 자발적인 민보군이었습니다.
하여 '살기를 각오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오 죽기를 각오하면 반드시 살 것'이라는 병서의 문구를
단 한번도 본적이 없는 자들도 내 하나의 목숨을 바쳐 눈앞의 왜적을
단 한명이라도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전투에 나섰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병이라해도 전투력이 좋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무리들을 정규군사들처럼 전투력을 배가시키기 위해서는
이들을 이끄는 의병장의 권위가 남달라야 했습니다.
그래서 의병을 일으킬 때는 자기의 출신지이거나 과거 관직을 역임했던 곳에서
기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중봉은 중앙정치무대에서 임란 전부터 시국의 폐단을 극렬상소하여 귀양을 갔었고
옥천으로 귀향해서도, 임란 직전에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말하는 일본사신을 목 베고 명나라에 알려야한다고
도끼를 메고 궐문에 나아가 상소하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극력 말해왔기 때문에
그런 그의 의병기병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고
의병 기병을 한 마당에 그는 죽음도 기히 각오하고 있었을 것이며
그의 격문을 보거나 들은 사람들은 중봉에 대한 의병장으로서의 권위를 너나없이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중봉의 휘하에는 천여명의 군사가 운집하게 되었습니다.
기병을 하기 전인 임란이 일어난 해 2월에 옥천에서 당한 부인의 상을 김포의 선영으로 옮겨 장사지내자는 자식의 말에
"곧 변란이 일어날 텐데 시체를 길바닥에 버려두느니 차라리 여기에 장사지내자"고 해서
4월에 옥천에 수습한 뒤에 노모의 피난처를 수소문하고나서
향병鄕兵을 모아 나서려했지만 따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6월에야 영호남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했던 것입니다.
자!
의병은 정규군도 아니고, 병력의 숫자도 왜적에 비할 바가 아니어서
잘 훈련된 일본군과 마주친다면 대적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적은 숫자로 정예의 대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극히 제한적인 방법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방심한 틈을 파고 드는 기습과 게릴라전이 주요전투방식이었을 것입니다.
말직인 육군 중위 출신인 저도 아는 사실인데
중봉도 그런 정도는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옛 선비들은 병서도 항상 읽고 있었고,
아무리 의병으로 죽기를 각오했다해도 자기를 믿고 따르는 칠백여명의 군사들의 안위가
나에게 달려 있음을 어찌 의식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적이 있는 곳을 알면서도 길목만을 지키며 적들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관군들의 전투방식에 대한 염증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여 중봉부대도 밤을 틈타 금산성의 왜적진지에 근접해 갔었고
또 지원군도 올 것이라 생각하고 금산성밖 10리까지 접근하여 기회를 노리려 했던 것인데
왜적의 정탐부대에 노출되어 후속부대가 없다는 것을 안 왜적이 공격해 오는 것을 막아내다가
화살이 모두 소진되자, 몸을 피하여 훗날을 기약하자는 부하들의 청을 물리치고
"이 곳이 내가 순절할 땅이다. 장부는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 구차하게 살기를 꾀할 수는 없다."
하며 더욱 북을 치며 독전하다 육박전 끝에 전원 순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묻힌 곳이 바로 아래의 무덤입니다.
아래의 지도를 보시면 금산지역의 군사적중요성을 알게 됩니다.
당시 충남과 충북을 접하고 있던 전북 금산은 호남의 전주를 함락하려는 일본군에게는
반드시 지나쳐야 할 지역적인 요충이었습니다.
금산에서 전주로 들어가려면 진안에서 전주 사이에 놓여 있는 가파른 웅치를 넘어야 하고
또 다른 길로 금산에서 전주로 들어가려면 진산의 이치를 넘어야 합니다
그래서 왜군은 금산성을 거점삼아 대둔산을 넘어 완주를 지나 전주로 향하려다가
8월 중순 경에 이치(배티)전투에서 권율과 황진의 부대에게 크게 패하여 좌절되었고
거의 비슷한 8월 18일에 금산성을 근접한 조헌과 영규부대와의 전투도 치렀으며
그 전인 7월 10일에는 고경명부대와의 일전도 치렀습니다.
답사때도 말씀드렸지만 이치전투는 임란 육전 3대첩의 하나로 불리는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위의 두 번의 전투에서 왜군이 이기기는 했지만 그들의 희생도 커서
9월에는 호남점령계획을 접고 경북 성주방면으로 퇴각했던 것입니다.
또 금산을 지나 전북 완주군의 웅치(곰티)전투에서도 김제군수 정담鄭湛이 웅치를 막는 임무를 맡았으며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이 선발대에 배치되었고 황박黃璞 등 의병도 다수 가담했습니다만 패했습니다.
이 웅치전투에서 조선군이 어찌나 격렬히 저항했던지
왜군이 웅치에서 전사한 조선군의 시체를 모아 큰 무덤을 만들어주고
조 조선국 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조선국의 충의로운 사람들에게 조의를 표함-)
이라고 비석을 세워서 그들의 충절을 기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수 많은 군사들과 의병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이후 호남지역만이
유일하게 왜적의 수중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금산시내 한 아파트의 담벼락에는 금산에서 치뤄진 수 많은 전투와 저항의 역사를
군민들이 자연스레 접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어서 보기 좋기도 했고 아주 드문 경우이기도 했습니다.
점심을 마치고 천내리용호석에 갔었지요.
아직 흑미벼를 보지 못한분들을 위해!
길재를 모신 청풍서원입니다.
이날 적벽강에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비뛰기를 할 돌을 찾느라 분주합니다.
누가누가 더 예쁠까요.~~
멀리 통영에서 참가하신 회원님들입니다.
마지막에 들렀던 태조대왕태실입니다.
금산과 대전의 경계지점인 만인산 자락에 있었습니다.
막바지 더위를 조금만 지내시면 가을이 다가설 듯 합니다.
건강히 지내시고 9월에는 21일에 충북 영동과 무주를 찾아 떠나려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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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흑미가 아주 찰지게 열렸어요 ~~ 흑미가 이렇게 열린것은 첨보았습니다 흑(흥)미진진하게 ^^ 어디선가 들러오는 한마디가 생각이 나는군요
강선생님의 기발한 재치였지요. 매번 기가 막혀해 하면서도 웃지요~~
선생님의 힘 있고 재치 있고 해박한 강의에 버스 안에서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거웠어요.
행주대첩, 진주대첩, 수군전투등에 가리워진 금산일대의 전투의 중요성을 세삼 깨달았어요.
많이 순화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언제 시간이 허락되면 막걸리라도 한 잔 놓고 제봉선생의 전투도 포함시켜서 중봉선생의 전투에 관해 격앙된 마음을 내려놓고
격의없는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
그 얘기하면 다시 격앙될 것 같아서 사양하겠습니다^^
막걸리만 마시는 걸로 하시죠~~
@차민 ㅎㅎ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
태조 태실이 제 자리가 아닌 것을 안 순간 배신감 비슷한 감정이 드네요. 태조 태실이 원래 자리를 찾아 옮기는 운동이라도 벌여야 할까요?
그러게요~~ 그날도 말씀드렸지만 옮겨 복원한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알아 볼 일이네요!~~
어찌됐건 그분들은 그 위급한 상황에서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최선을 다 하셨다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라면 감히..엄두도 못낼...
꽁지빠지게 피난을 갔었을거라는...
그래서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것이구요.
또한 왜란이나 일제시대하에서도 그분들의 주검이나 행적을 뒷산에 묻거나 찾아내어 조각조각 맞춰 세워놓은 그 분들의 정성도 가슴이 뭉클해졌었다는 거.
쉽지않았던 행보였겠지요.
그러셨을겁니다.
그냥 보기만 해도 시시때때로 뭉클.
인삼과 보석사 은행나무밖에 금산을 기억하지 못했던 제게 새로운 금산을 느끼게 해준 답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