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김용옥과 노자
글 쓴 이 : 김홍만
요즘 EBS 를 보니 김용옥씨가 다시 출연하더군요.
저는 언젠가 조영남씨를 논하면서 이 양반이 고교시절에 콜린.윌슨의
"아웃 사이더"를 읽었다고 자랑하는 것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본
적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도 그 당시에 "아웃 사이더"에 도전했었는데...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더란 겁니다.
그런데 나는이해하지 못한 글을 그가 이해했다고 나선다면...하하..내
기분이 좋을리가 없는 것이죠.
내가 조영남씨를 보는 눈이 달갑지를 않은데....그의 절친한 아류이며
조영남씨 못지않게 튀는 인물인 김용옥씨를 좋아할리는 만무한 것입니다.
너는 어디가 싫고 또 너는 어디가 마땅치않다는 이 마이너스식 사고방식....결국 나의 이러한 속성이 나를 이 인간사의 인드라망에서 고립시키는 것은 아닐까........
여하튼....이 김용옥이란 인물은 참 재미난 사람입니다.
내가 이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은 그를 아끼는 마음과 그의 경박성을
혐오하는 마음으로 갈리워져 있는데....
그를 아낀다함은 그나마 그러한 학식과 확실한 자기주장을 갖고 있으며 그 주장을 거리낌없이 토해내는 사람도 이 시대에서 귀하기 때문이지요.
나는 이 사람의 강의를 그를 헐뜯으면서도 꼭 봅니다.
미국의 어느 칼럼니스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팬레터에 이런 글이
있었다죠?
"나는 네놈이 쓴 글은 절대로 안 읽어! 요번에 쓴 글은 특히나 엉터리더군!!..........이게 나의 심사이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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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내가 바라보는 인간 김용옥은 무엇일까?
그 전에 이러한 분류법을 전제로 하고 말하기로 하지요.
인간의 지식은 두뇌에 축적되고 지혜는 가슴에 고여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두뇌가 가슴보다 위에 있는 까닭은 두뇌에서 농익은 지혜가 가슴으로
흘러 내려가기 쉽도록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김용옥(존칭생략)의 경우 두뇌에는 지식이 가득한데 그 어떤
효모의 부족으로 인하여 발효되지 못하고 있거나...아니면 너무나 방대한 량으로 인하여 가슴으로 내려갈 지혜가 병목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하하..너무 심하지요?
사실 이러한 비방에 대한 논리적 근거는 빈약하기 그지 없습니다.
다만 궁여지책으로 그가 예전에 논한 노자의 도덕경 해석을 통하여
내가 보는 그의 수준을 평해보고자 합니다.
아래의 글은 바로 노자의 도덕경 제 11장입니다.
11장 무용(無用)
三十輻共一 ,當其無,有車之用.
삼십폭공일곡,당기무,유차지용.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한 바퀴통으로 이루어 있어도 그 없는 것(axle=빈
곳)이 있어야만, 수레로 쓰이는 것이고,
燃埴以爲器,當其無,有器之用.
연식이위기,당기무,유기지용.
찰흙을 이겨 빚어서 그릇을 만들지라도 빈 공간(當其無)이 있어야만
이 그릇으로의 쓰임이 있게된다,
鑿戶爽以爲室,當其無,有室之用.
착호유이위실,당기무,유실지용.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들지만, 그 없는 것(빈 공간)이 있기에 방으로
쓰여지는 것이다.
故有之以爲利,無之以爲用.
고유지이위리,무지이위용.
그러므로 있는 것이 이로움이 되는 것은, 없는 것이 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곳은 이익이 되게 하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곳은 쓰이게 하는 것이다).
무(無)의 용(用)에 대한 이 유명한 글은 대개 위와같은 해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김용옥의 해석은 위의 천편일률적인 해석에서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내가 문제삼는 대목은 첫째항,
三十輻共一 ,當其無,有車之用.
삼십폭공일곡,당기무,유차지용.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말은 수레바퀴에 대한 묘사인데 김용옥은 바로 이 수레바퀴에 갈려 헤메고 있는 것입니다.
김용옥은 노자의 말을 수레바퀴에 대한 말로 받아들이고 있는데..이는 단지 김용옥뿐 아니라 대부분의 해석자들이 모두 노자의 말하는
의미를 수레바퀴에서 찾고 있는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김용옥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아라, 수레바퀴의 가운데에는 축을 끼우는 구멍이 있고 그 구멍의
주변에 바큇살들이 모여있지 않느냐?
이 구멍이야말로 노자가 말하는 비움(無)이다.
이 구멍이 채워져 있다면 어찌 여기에 축을 끼울 것이며 마차가 존재할 것인가. 바퀴의 가운데가 비워짐으로 인하여 쓰임(用)이 생기는 것이다.
나는 김용옥의 이 주장을 들으며 탄식을 했습니다...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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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반론은 이렇습니다.
마차바퀴의 빈 구멍에서 무슨 쓰임(用)이 나오죠?
마차바퀴의 구멍에 도시락 넣어갖고 다니는 사람 보았습니까? 마차바퀴의 구멍은 마차가 마차로서 존재하기위한 "구성요소"의 하나일
뿐이며 그 용(用)은 단지 마차로서 존재하기위한 용(用)인 것입니다.
더구나 그 구멍은 항상 축이 끼워져 채워져 있습니다.
용(用)이란 하나의 존재가 다른 존재...즉 인간을 위하여 다용도로 쓰여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스스로 존재하기 위하여 구성되는
형태는 용(用)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김용옥을 힐난하는 이경숙의 경우에는 한 술 더 뜨더군요.
그는 노자의 구멍이 마차바퀴의 구멍이 아니라 바퀴살과 바퀴살 사이의 공간을 의미한다고 우기면서 김용옥을 공박하는데....내가 보기에는 둘 다 똑 같습니다. 노자의 바퀴에 깔려 그의 손가락만을 바라보고
달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나 잘난체하는 나의 주장은 무엇인가?
노자는 바퀴를 논한 것이 아니라 그 바퀴가 달린 수레를 말한 것입니다. 즉 빈 수레 말입니다.
빈 수레는 바로 그 비움으로 인하여 아주 다양한 용(用)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삿짐을 나르고 두엄을 나르고 아침에는 서당에 가는 자녀를 태워주고 저녁에는 마실에서 돌아오는 노인들을 태워오는 용(用)말입니다.
노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수레의 바퀴 참 멋있지?
그런데 말야, 저 수레라는 것은 바로 비워짐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유익한 용도로 쓰이는 것이라네.
찰흙으로 만드는 저 그릇도 역시 비워있음으로 인하여 여러가지로 사용되는 것이고 방 또한 그 비움의 공간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쓰임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 세가지의 사례를 말하면서 노자는 우선 대상의 구성요소를 논하고...바퀴, 진흙, 창문...다음에 그 완성된 대상...마차와 그릇과 방을
논하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릇과 방은 완성된 상태를 받아들이면서 유독 마차의 경우에만 "구성요소"를 "완성된 대상"으로 인식하려 하는 것은 오류가 되는 것이지요.
김용옥씨는 너무 바쁩니다.
오늘은 노자을 논하지만 내일은 논어를 해설해야하고 모레는 금강경을 논해야되니까요. 아마도 그 바쁨과 앎에 대한 과욕이 너무도 많은
지식을 끌어들여놓고 이를 지혜로서 발효시키는 못하는 난관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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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옥의 티로서 그 분에 대한 나의 험담을 이끌어가려니 힘들군요.
더구나 별것도 아닌 글이 너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작은 짬들을 이용하여 써보려는 의도였는데...하하..읽어 주시어 감사하고요 혹, 노자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견해가 있으시면 함께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