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월 16일 공사에 들어간 잠실구장 그라운드 흙 재정비 작업. 작고 세심한 배려가 한국프로야구 발전의 단초가 될 수 있다. |
“공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 럭비공을 말하는가 싶다.
“‘딱’ 맞는 순간 얼마나 빨리 오는지 모른다.” 아이스하키 퍽을 의미하는가 싶다.
“바운드를 맞추기 어렵다.” 농구공을 이야기하는가 싶다.
아니다. 주인공은 야구공이다. 배경은 잠실구장 그라운드 흙이다.
“잠실구장 그라운드 흙이 얼마나 딱딱한지 모른다. 또 타구는 얼마나 빠른지. 여기다 불규칙 바운드가 많아 공이 어디로 튈지 예상하기 어렵다.” 올 시즌 두산, LG 내야수들이 똑같이 털어놓은 불평이다.
양 팀뿐만이 아니다. 잠실구장은 나머지 구단 내야수들 사이에서도 “수비하기 어려운 구장”으로 악명이 높다. 어느 팀의 유격수는 평범한 타구도 잠실구장 내야에선 어디로 사라질지 모른다며 버뮤다 삼각지대에 빗대 이를 '잠실구장 삼각지대'로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과거만 해도 잠실구장 내야는 모든 내야수의 꿈이었다. 1980년대 명 유격수로 이름을 날렸던 서정환 MBC ESPN 해설위원은 “내야상태가 다른 구장에 비해 훨씬 좋았다”며 “불규칙 바운드가 적어 수비하기 수월했다”고 잠실구장을 회상했다.
그런 잠실구장이 내야수들의 원성을 사기 시작한 건 2007년부터다. 역설적이게도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끝난 다음이었다.
![]() 잠실구장 운영본부 측은 굴착기로 흙을 파낸 뒤 롤러로 잘 다질 계획이다. |
승부와 직결되는 그라운드 흙
2
007년 2월 잠실구장 운영본부는 총공사비 15억 원을 들여 잠실구장 전면개선공사에 착수했다. 지하 1.2m 깊이의 바닥을 파 스프링클러와 배수관을 새로 설계해 집어넣고 잔디도 최고급인 켄터키블루그레스 종으로 교체했다. 여기다 지표면의 흙을 레드샌드로 깔아 그라운드 이미지를 녹색과 빨강의 아름다운 두 색으로 만들었다.
특히나 안동 광산에서 나는 빨간 흙에 특수코팅을 한 레드샌드는 미관뿐만 아니라 배수도 좋아 야외구장엔 제격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예상대로 전면개선공사는 구단과 관중의 큰 호응을 얻었다. 예외라면 그라운드 흙이었다.
지면이 너무 무른 탓에 흙이 쉽게 파이고 이 때문에 불규칙 바운드가 자주 생긴다는 불만이 내야수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주자는 주자대로 “도루 시 흙이 너무 물러 쉽게 파이는 바람에 땅을 박차고 나갈 때 발이 밀린다”며 불만을 쏟아냈다.
하지만, 당시 잠실구장 운영본부 측은 낙관적이었다. 구단들도 마찬가지였다. “비가 내리면 땅이 다져질 것”이라며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09시즌. 시간이 지나면 단단해지리라 믿었던 잠실구장 그라운드 흙은 실제로 단단해졌다. 문제는 너무 단단해졌다는 데 있다. 지면이 물러 쉽게 흙이 파인 통에 불규칙 바운드가 났던 이전과 달리 올 시즌은 땅이 너무 딱딱한 게 수비수들의 발목을 잡았다.
“지면이 딱딱해졌는데 어째서 수비가 힘든가?”하고 묻는 이가 있을 것이다.
잠실, 문학, 사직구장을 제외한 대구, 광주, 대전, 목동구장은 인조잔디 구장이다. 인조잔디는 천연잔디보다 내야타구 속도가 빠른 게 특징이다. 그러나 근래 들어 대부분 구단이 카페트식 인조잔디에서 롱파일식 인조잔디로 교체하며 오히려 인조잔디 구장의 내야타구 속도가 천연잔디 구장보다 느려지는 현상이 벌어졌다.
이는 결국 내야수들의 수비부담을 더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잠실구장은 반대로 지면이 딱딱해지면서 내야타구 속도가 카페트식 인조잔디를 능가하게 됐다. 여기다 지면이 원체 딱딱하다 보니 스파이크 자국이 조금만 생겨도 단단한 흙 부스러기가 올라오고, 거기에 공이 맞으면 바로 불규칙 바운드가 생기는 일이 잦아졌다.
지난해 LG 유격수 권용관과 지난 5월 13일 SK 3루수 최정이 불규칙 바운드에 얼굴을 맞아 다친 것도 잠실구장의 딱딱한 지면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허구연 MBC 해설위원은 이 문제를 가장 먼저 공론화한 이다. 그는 중계방송 도중 수차례나 잠실구장 그라운드 흙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개선을 촉구했다.
“실력이 아닌 그라운드의 악조건 같은 외부변수로 승부가 결정돼선 안 되기에 작심하고 지적했다”는 게 허 위원의 솔직한 속내다.
![]() 잠실구장 운영본부 김일상 팀장이 그라운드 재정비 작업을 설명하고 있다. 김 팀장을 비롯한 운영본부 측의 노력으로 한국프로야구의 산역사'인 잠실구장이 그나마 아직도 국내 최고의 구장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
시즌 종료 뒤 그라운드 흙 재정비는 필수
“허 위원의 지적을 듣고 고민을 많이 했다.” 잠실야구장 운영본부 김일상 마케팅 팀장의 말이다.
김 팀장을 비롯한 운영본부 측은 허 위원의 잇따른 문제제기에 내부토론을 거친 뒤 그라운드 흙을 재정비하기로 한다. 김 팀장의 말을 들어보자.
“2007년 전면공사 때 땅을 15cm 파고, 안을 레드샌드로 채웠다. 그러나 공사기간이 촉박해 땅을 제대로 다지지 못했다. 공사가 끝난 다음 여기저기서 ‘땅이 무르다’는 지적을 많이 했다. 그래 발 빠르게 레드샌드를 5cm 깎은 다음 굵은 모래를 깔았다.”
효과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날마다 경기가 열리는 잠실구장 그라운드는 쉴 날이 없었다. 지면이 빠르게 단단해졌다.
“올 시즌 그라운드 흙이 너무 딱딱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 때문에 경기에 지장을 준다는 지적도 받았다. 다른 건 몰라도 선수들의 경기력에 지장을 준다면 두말할 필요 없이 재정비를 하는 게 당연했다.” 김 팀장의 말처럼 경기력에 주는 흙이라면 당장에라도 갈아 엎어야 했다.
마침내 11월 16일 운영본부는 공사비 1천8백만 원을 들여 그라운드 흙 재정비 작업에 들어갔다. 지면을 12cm 정도 파낸 다음 체로 걸러진 레드샌드와 굵은 모래를 잘 섞어 다시 까는 게 목적이다.
“이전엔 레드샌드와 굵은 모래가 따로 깔렸었다. 하지만, 이번엔 두 흙을 잘 섞어 최대한 긍정적인 효과를 이끌어낼 계획이다.”
덧붙여 김 팀장은 이번에만 1천8백만 원의 비용이 발생하지 다음번부터는 비용이 많이 줄 것이라고 말했다.
“레드샌드 입자는 거의 같은 규격이란 특징이 있다. 내년부터는 지표면에서 5cm 정도만 파내고 거기에 새 레드샌드만 뿌려주면 재정비가 끝난다.”
미 메이저리그나 일본프로야구에선 해마다 시즌 뒤 그라운드 흙을 갈아엎는다. 시즌 중 굳은 흙의 성질을 부드럽게 풀어주기 위해서다. 잠실구장 운영본부는 앞으로 미·일처럼 해마다 그라운드 흙을 갈아엎어 선수들이 최상의 경기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도와줄 예정이다. 조만간 '잠실구장 삼각지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야구가 조금씩 존중받는 기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