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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 100년 11월 18일 수요일 박기호 신부님 초청강연 완성.hwp
원기 100년 11월 18일 수요마음공부방 초청강좌 _ 박기호 신부님
<노동과 기도, 우리시대를 치유하는 영성>
설 법 : 박기호 신부님
타이핑 : 김지원
[1부] - 공동체 정신과 도시의 문제
Ⅰ. 공동체정신과 수도회의 출현
반갑습니다.
저는 농촌 출신인데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왔었다가 10여전 전부터 소백산에서 공동체 마을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도력이 높으신 분들이 많다고 하는데 그 때문은 아니고, 땅값이 싸서 갔습니다. 좋은 땅은 다 돈 있는 사람이 차지해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못 가지요. 그래서 찾아간 곳이 지금 그곳입니다.
성경이 처음에 쓰였던 시기는 예수님께서 처형당해서 돌아가신 다음입니다. 부활하셨다는 목격증인들이 나타나면서 많은 추종자들이 나타나 함께 생활을 하게 됩니다. 성경 사도행전에는 ‘함께 모여 기도하고 성찬을 나누면서 가진 것을 내놓고, 서로 필요한 만큼 나누어 가졌다.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구절이 두 번에 걸쳐 나옵니다.
가톨릭에서는 이런 예수님 사후 ‘원체험의 집단’을 ‘사도 행정 공동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 공동체를 따라서 재현된 것이 ‘수도회’입니다. 가톨릭에서는 교구 중심의 교회 조직체계와 함께 수도회의 전통이 굉장히 크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수도회는 부정적인 사회현상이 있을 때 그것을 거슬러 사는 영성 모임으로 시작합니다. 313년에 종교의 자유가 생기게 되자, 동굴 속에서 살던 교회가 하루아침에 로마의 국교가 되고 권력이 되어 버렸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핍박받는 처지에 있다가 갑자기 그렇게 된 거죠. 다행히 여러 진실한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야 되겠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고 사막으로 가 은둔하며 수도를 하였습니다. 베네딕트 수도회와 같은 전통이 나타나게 된 계기입니다.
또 교회가 돈을 밝히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중세에 여러 가지 건축이라던가, 이런 것에 관심을 갖고 추종을 필요로 했을 때입니다. 아무래도 돈에 관심을 갖게 되면 예나 지금이나 동서고금 막론하고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 때 오히려 반대로, 청빈의 삶을 강조하는 프란치스코 운동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수도회는 영성의 주체로서의 굳건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Ⅱ. ‘산위의 마을’ 생활의 의의
저는 ‘그런 전통을 우리 시대에 실현시켜볼 수 없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진 것을 내놓고, 누가 적게 가지는 차별 없이, 함께 노동하고, 재산을 공유하고, 필요한 만큼 다 쓰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수도회로 갔기 때문에 결혼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12년 동안 19세대가 왔는데, 들어오고 나가고 하면서 지금은 다섯 세대가 있고 독신 세대가 있습니다. 24명입니다.
저희들의 생활을 보시는 분들은 ‘현실도피의 생활이 아닌가’ 하는 질문들을 합니다. ‘사회적인 삶의 낙오라던가, 실패한 사람들이라던가, 현실도피를 하는 삶이 아닌가’ 하는 것이죠. 비구니의 경우 연애에 실패해서 된 게 아닌가 하는 오해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게 아니거든요. 인간의 유한성에 부딪치면서, 인생관에 큰 변화가 왔기 때문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이 아닌 영원한 것은 없는가 하고 찾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불교로, 천주교로, 기독교와 같은 종교로 귀의하는 것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도피가 아닌가’ 라는 질문에 솔직하게 답합니다. ‘도피한 거다. 도피가 맞다.’
그런데 우리가 도피한 곳은 어떤 곳일까요?
도피란 무엇인가. 살고 싶은 생각이 있는 사람만 도망갑니다.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는 사람은 도망가지 않습니다. 6.25 전쟁 때 보면 연로하신 분들은 젊은 사람들을 보냅니다. 그 분들은 ‘자신의 삶이 여기까지다’, 라고 보고 도망가도 자식들의 짐만 될 거라 본 것입니다.
‘살아야겠다,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되겠다.’ 이렇게 생각한 사람만이 도피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도, 저희 공동체도 모두 도피자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내 자식을 이렇게 병들어가는 교육시키고 싶지 않다. 내 사회적 성공을 포기하더라도 행복한 삶을 찾아야겠다. 정말 생명을 찬양하는 삶을 가져야겠다.‘
죽기 전에 한번이라도 그렇게 사는 것은 간단합니다. 소유욕 하나만 툭 던져버려도 많은 부분이 해결 됩니다. 생명을 찬양하는 삶을 가질 가능성이 훨씬 높아집니다. 우리는 그런 새로운 삶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내가 철들고 죽을 때가지 몇 년을 살지는 모르지만, 철들 때까지의 시간과, 늙어서 병들어 사람 기능을 제대로 못할 시기를 자르면 삶의 시간이 얼마나 될까요? 한 40년-50년 될까요. 그 중 10년만이라도, 5년만이라도, 아니 단 1년만이라도 성경의 말씀을 실천해 보고 다시 도시로 돌아온다고 해도 나쁘지 않지 않나,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Ⅲ. 공동체의 정의와 특징
공동체를 커뮤니티라고 부르는데요. 공동체라는 개념이 너무 다양해서 사실 뭐 프리즘처럼, 너무 다양하긴 합니다. 가정도 학급도 안암교당이나 유럽연합도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개념이 혼동스럽긴 한데,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공동체는 두 가지의 외형적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한 밥솥체’라는 개념이고, 또 하나는 ‘하나의 직업’입니다.
한 밥솥체는 공동생활을 의미합니다. 함께 노동하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는 따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의 직업이라는 것은 경제를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무소유의 삶입니다.
이 두 가지 개념은 함께 살고, 함께 공유하는 것에 기준을 둡니다.
이런 공동체를 보통 community, living community 라고도 하는데, 저는 shelter라는 표현을 쓰고 싶습니다. shelter는 본래 바다에서 배가 폭풍을 만났을 때 피신하는 그런 개념이죠.
도시의 입장에서 볼 때는 탈출자, 이민자, 피신자이지만 산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많은 상처를 입고 비틀거리는 사람들을 형제로 받아들이고 상처를 치유하고자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도시의 삶이, 살 수 없다고 생각할 할 만큼 그렇게 어려운가.’ 라는 질문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도시의 삶이 그렇게 피폐하다기 보다는 환란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환란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난리가 난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왜 그 환란을 느끼지 못하는가?
쓰나미처럼, 유황불처럼 하루아침에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개구리를 찬물에 넣고 점점 온도를 올리면, 개구리는 죽는 줄도 모르고 한가하게 죽습니다. 그와 같이 도시의 가마솥과 같은 위험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Ⅳ. 도시의 문제와 공동체의 생활
저는 문제를 9가지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①생명 없는 음식, ②가정 없는 가족, ③쓸모없는 교육, ④노동 없는 육신, ⑤인정 없는 심성, ⑥이웃 없는 마을, ⑦인격 없는 의료, ⑧영성 없는 종교, ⑨고별 없는 죽음
(※유인물 참조)
인간은 육신에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인데, 지금은 영혼과 육신이 다 망가지는 시대입니다. 본래 자연의 법대로, 부처님의 법대로 살았을 때 행복하고 서로에게 생명의 삶이 될 수 있는데, 우리의 삶은 완전히 역행하고 있습니다.
우선 한번 다 보고 가겠습니다. (유인물)
① ‘생명 없는 음식’이라는 것은,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가. 하는 물음에서 출발합니다.
② ‘가정 없는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자식, 이렇게 가족은 있는데 가정의 기능 없는 현실을 말합니다. 뭔가 가족은 일선에서 활동하다가 돌아오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이어야 하는데 그것이 붕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③ ‘쓸모없는 교육’은 제가 공동체에서 농사를 지을 때 느낀 것입니다. 처음에 저도 그렇고 다 문외한들이었는데 그래도 한 3,4년 농사를 배우면 되지 않을까 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늘 초보자가 짓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1,2년 하다가 다시 도시로 돌아가거나 다른 곳으로 귀농 하거든요. 그런데 그래도 참 신기한 현상인 있습니다.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도 있고 중학교만 나온 사람도 있는데, 많이 더 배운 사람일수록 더 농사를 못 짓는다는 것입니다.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도 컴퓨터만 해봤지 근육을 써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 할머니가 계셨는데 한 분은 농촌출신이시고 공부를 못하셔서 파출부와 생선 장사를 하셨었습니다. 다른 할머니는 도시의 인텔리십니다. 그런데 첫 번째 분은 늘 생산적입니다. 뭐든 캐고 그 어떤 거라도 요리를 만들어 내십니다. 해보지 않았어도 미루어 짐작해 일을 하시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고추장과 간장도 만드십니다. 반면 도시의 엘리트 출신의 할머니는 아기 보는 것 외의 다른 일을 못하셨습니다. 그 때 교육이라는 것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육을 많이 강조하는데 무조건적으로 많이 배울수록 쓸모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필요한 지식을 많이 갖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지식을 조금 갖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전문가를 중요시 여기지만, 전문가의 특징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가 주어지지 않으면 장애자가 된다는 것 입니다. 그 일을 뺏기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대체적으로 그렇습니다. 못을 박는 것도, 싱크대를 뚫을 수 있는 것도 못합니다.
우리 아이는 그렇게 키우지 않고 싶었습니다. 노동을 통해 건강하고, 어른이 무거운 물건을 들고 있으면 쫓아가서 받을 줄 아는 예의를 가지게 하고 싶었습니다. 마을의 공동체에서는 그런 걸 가르칩니다.
‘학생은 공부하는 존재다’ 하는 것은 영국이 세운 근대교육의 개념입니다. 공부를 하고, 또 하고, 다 했는데 취업이 안 되서 또 합니다. 그렇게 얻은 공부를 졸업장과 라이센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상납합니다.
공동체에서는 아이들을 초등학교만 보냅니다.
우리 마을의 초등학교는 숫자가 적어서, 전학을 오게 되면 바로 등수가 올라갑니다. 바로 전교 1,2등을 하고 학생회장도 합니다. 한 학년에 1,2명 있으니 1등 아니면 2등이지요. (웃음) 중고등학교 때는 홈스쿨링을 합니다. 그렇게 공부해 대학에 간 친구도 한 명 있습니다.
아이들은 아침수업이 끝나면 우사에 가서 여물주고, 닭장에 가서 모이를 주어야 합니다. 문도 열어줘야 하고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니 오히려 아이들이 공부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다. 스스로 책을 읽고 싶어 합니다. 해라해라 해서 되는 게 아닌 게 공부입니다. 공부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④ ‘노동 없는 육신’은 후반부에 좀 더 자세히 이야기 하겠습니다.
⑤ ‘인정 없는 심성.’ 인간이 살아가는 데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밥이죠. 우리는 집이 없고 옷이 없어도 살 수 있는데 밥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먹는 것 다음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인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육체를 만드는 것이 먹거리라면, 인정은 관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인정이 없는 삶이 얼마나 불행한 삶인지 우리는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⑥ ‘이웃 없는 마을.’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 누군가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이 사람 사는 삶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⑦ ‘인격 없는 의료’에 대해서도 생각을 한번 해봅시다. 출산에서부터 호흡기를 떼고 고별을 할 때까지, 사람이 병원에서 상품으로밖에 대해지지 않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⑧ ‘영성 없는 종교’라는 것은, 이토록 영혼이 제외되는 참담한 시대가 없다는 인식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물론 모범적인 분들도 계시지만 우리 시대처럼 종교가 폄훼되는 시대가 없었습니다. 신부님들도 목사님도, 스님들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말하는 것을 스스로 따르지 않고 조롱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 삶은 근본을 부정하고 구원과 깨달음을 훼방합니다.
⑨ ‘고별 있는 죽음.’ 기품 있는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시대에 특별히 더 소중한 가치가 있지 않나 합니다. 신부생활을 하다가 만약 병자가 있어 돌아가실 것 같으면 한 밤중에라도 달려가 고별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것은 오래된 전통이라, 만약 어떤 신부가 이런 상황에서 가지 않으면 큰일이 나지요. 사제의 귀중한 덕목으로도 여겨집니다.
이 때 노인들은 별 의식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럼 귀에 대고 “박 신부 왔어요. 기도하고 천천히 걸어갑시다. 마음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거든 다 용서하시고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세요. 이렇게 묵주 꼭 붙잡고 천천히 걸어가세요. 하나님께서 성모님께서 마중 나와서 새로운 세상에서 기쁨 속에 살아가실 수 있도록 하실 겁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럼 이 때 거의 돌아가신 상태인데도 눈물을 주르륵 흘리십니다. 청각은 살아있는 것이죠. 손자와 같은 가족들이 함께 손 주물러 드리고 하면, 다 느끼십니다. 망자에게 있어 이렇게 가족들과 함께 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대우죠. 그런데도 현실은 얼굴도 모르는 간호사만 오가게 하고, 가족들도 면회시간 외엔 제한하며 고독한 죽음을 맞게 합니다.
[2부] - 섭생, 그리고 노동 없는 삶
Ⅴ. 섭생과 현대사회의 음식
인간의 육신에 가장 필요한 음식에 대해 이야기를 꼭 하고 싶습니다. 가톨릭에서는 결혼을 할 때 일종의 계약서를 씁니다. 결혼은 물론 당사자들이 하지만, 신부가 복덕방 할아버지처럼 하나의 서명을 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 때까지도 서로 결혼할 사람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인면담을 하면서 서로에 대해 알고 왜 헤어지면 안 되는가를 이야기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 저는 섭생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외식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요즘 불임이 많습니다. 통계적으로 3.5쌍 중에 1쌍이 그렇습니다. 또 아기가 생겨도 그 중 일부는 기형입니다. 이때 기형은 태생적 신체적 결함은 말할 것도 없고 ADHD, 자폐증, 아토피 같은 것 등을 모두 포함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섭생에서 옵니다. 자식은 죄가 없음에도 부모가 별 생각이 없어 불행한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결혼 전에 외식을 자제하고 녹두를 많이 먹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때로는 그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협박을 하기도 합니다.(웃음)
주례를 선 부부의 아이를 본 적이 있는데 아이가 몇 개월 안 되었는데도 아토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물었는데 어찌된 것인지 물으니 매일같이 저녁에 치킨 한 마리와 맥주를 먹었답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결정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오늘 날 슈퍼에는 수천가지 식품이 있습니다. 그 원료들을 보면 닭고기, 소고기, 돼지고기 등이 많습니다. 그럼 이 가축들은 어떤 음식을 먹고 자랐을까요? 과자들도 추적해 봅니다.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통조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종국에는 세 가지 곡물로 압축이 되는데, 밀, 옥수수, 콩입니다. 전 세계를 일원화 시킨 세계 3대 작물이죠.
이 작물들이 모두 유전자 변형체 곡물입니다. 왜 그렇게 만들어졌느냐를 보면 대량생산을 하려 해서 그렇습니다. 비행기로 제초제를 뿌려서 키우는데, 콩이나 옥수수 같은 작물도 같이 죽으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특정 작물만 죽이지 않는 제초제는 없으니까, 키우려는 작물이 제초제에 면역을 가지도록 유전자를 조작하여 심습니다. 고엽제를 맞아도 죽지 않는 콩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전 세계의 곡물들이 그렇습니다. 1981년대에만 해도 미국에서 생산되는 곡물 전체의 2%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거의 일반화 되었습니다.
이런 GMO 식품의 유해성에는 연구가 잘 되지 않습니다. GMO 식품을 만드는데 돈을 쓴 만큼 검증해야 하는데 그런 걸 연구하지 않지요. 열심히 개발했는데 그런 걸 하겠습니까? 그럼 국민, 국가가 그 역할을 해야 하는데 FDA(미국 식품의약국)의 관료이 식품회사 간부 출신들이라 이게 잘 안되죠. 결국 이것은 그 식품자체를 잘 알 수 없게 합니다.
우리는 그 실체를 잘 모르는 것을, 불확실한 것으로 규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안전하다는 전제 하에서만 진행되고 있고, 유해하다는 것을 따로 입증해야만 합니다.
질소라는 화학비료를 많이 쓰죠. 이 질소는 식물의 뿌리를 키우고 덩치를 키우는, 성장을 유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비료를 매년 땅에 뿌리게 되면, 땅에 집적되게 됩니다. 그래서 땅이 너무 단단해지죠. 경운기로 갈아도 겨우 20cm 정도밖에 안됩니다. 이 질소는 결국에는 식물을 통해 결사람 몸에도 흡수되게 됩니다.
요즘 소를 보면 예전의 덩치가 아닙니다. 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작은데, 아기는 클까요? 이상한 현상입니다. 우리가 잘 의심을 하진 않지만, 이것은 자신이 먹은 음식이 몸을 키웠기 때문입니다. 과질소화 시대라고도 부릅니다.
저는 낚시를 좋아해서 잘 다닌 적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한 자, 30.3cm가 넘으면 월척이라고 했죠. 낚시에서 월척을 하면 같이 간 신부들이 돈을 모아서 금반지를 사줍니다. 그래도 1년에 1,2명 정도밖에 반지를 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40cm 붕어는 흔합니다. 50cm 정도를 잡아야 옛날의 월척입니다. 모든 논밭에 뿌린 화학비료가 강에 흘러들어서 강의 상태계를 바꾼 것입니다. 덩치가 다 커졌습니다.
과질소화 문제는 우리 건강에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60kg인 사람이 있고, 120kg인 사람이 있습니다. 무게가 2배인데 세포 수는 또 그대로입니다. 왜 세포 수는 같은데 덩치가 커질까요? 그만큼 밀도가 약해진 것입니다. 그 약한 밀도는 수분 등으로 채워집니다. 다른 곡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밀도가 낮은 것은 면역성을 약하게 합니다. 들어오는 병균에 대한 저항력을 약하게 하는 것입니다. 현대인이 많은 질병에 걸리는 원인입니다.
요즘에는 자연재배라 해서 화학비료를 일체 쓰지 않기도 합니다. 저희는 화학비료를 전혀 쓰지 않고, 퇴비는 좀 씁니다. 한 책에 보니, 자연재배로 나오는 가지, 고추, 호박 이런 것은 땅에 떨어져도 썩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책을 탁 덮고 우리 밭에 가니 우리 것도 썩지 않아 있습니다. 그만큼 밀도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땅도 활씬 덜 단단해졌습니다. 예전에는 고추 대를 세우려면 망치로 두드려야 했는데 지금은 삽으로도 푹푹 잘 들어갑니다. 땅도 살아난 것이죠. 우리가 먹는 모든 것에 질소화의 문제가 있다 하겠습니다.
또 하나는 식품첨가물입니다. 식품첨가물은 향료, 색료를 넣어 과일을 더 먹음직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게 오기까지 모든 과정에서 들어간 것을 포함합니다. 대표적으로는 소금, 설탕 기름이 있고 방부제도 있습니다. 방부제는 식약청에서 음식에서 이 정도까지는 넣어도 괜찮다, 라고 허가를 해주지요. ‘한 컵에 어느 정도까지 들어간 것이 괜찮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만 먹겠습니까? 요즘 방부제가 안 들어간 음식을 찾기 어렵습니다. 먹는 모든 것에 방부제가 들어있는데 사람 시체가 썩겠어요? 미라가 되겠죠.(웃음) 이런 것이 식품첨가제의 문제입니다.
식용유도 위험합니다. GMO 식품의 결정체가 식용유입니다. 식용유를 쓰지 않아야 아토피가 치료됩니다. 공동체에서는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 용도에 따라 올리브유나 미각유(쌀 겨 기름)를 씁니다. 들깨 기름 이런 것도 활용하지요.
전자렌지를 쓰지 않는 것도 실천하고 있습니다. 전자렌지는 음식을 전자파를 쏴서 데우기 때문에 음식의 분자구조가 몸부림치면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임산부도 가까이 가지 말라는 경고문구가 있고, 독일에서는 학교 급식에 쓰지 못하게 합니다.
피정을 오신 신부님들을 보니 전자렌지를 거의 쓰고 계시더랍니다. 혼자 사시기 때문에 전자렌지로 떡을 녹여 신문을 보는 식입니다. GMO로 변형된 식품을, 질소화를 거쳐 마지막 확인사살로 한 번 더 변형해서 먹는 것과 같습니다. 이 유해성을 일반인들이 입증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의심스러운 것은 일단 삼가고 유의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몸을 해독시키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는 녹두죽이 있습니다. 항암주사를 받으시는 분들도 많이 드십니다. 몸을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Ⅵ. 노동과 영성
다음으로 노동과 영성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노동은 인간 건강의 필수 조건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조건인 것입니다. 그 조건을 스스로를 사용해야 건강할 수 있습니다. 건강하다는 것은 병원에 가지 않는 것이 아니고, 그 몸이 쓰일 때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 건강입니다. 내가 무엇을 보고, 제자리에 있지 않은 무언가를 치울 수 있는 것이 건강입니다. 누군가를 거들 수 있고 생산에 두려움 없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육신을 사용할 데에 사용하지 않고 머리를 많이 쓰는 현대인들은 건강에 대해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육체노동은 영적 삶을 살아가는 기초가 욉니다. 지금은 모성성이 사라져가는 시대입니다. 어머니는 단순한 주부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도, 팔 걷어부치고 나설 수 있는 것이 어머니입니다. 자식의 교육, 가족의 대소사 등을 다 챙기는 것이 어머니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노동에서 나온 것입니다. 인간적인 능력이라는 것은 곧 노동을 쓰는 것입니다. 노동하는 몸이 중요합니다. 종합적인 사고는 노동 없이는 불가합니다. 저같이 말로 살아가는 하는 사람들은 공부를 하면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종합적인 일은 잘 하지 못합니다. 내게 어떤 일이 주어졌을 때 어머니처럼 서슴없이 할 수 있는가? 잘 안되더랍니다. 정신적인 노동의 한계입니다.
노동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다른 사람이 생산한 것을 가지고 가는 것인데, 그것이 약탈입니다. 나는 1시간 일하고 다른 사람이이 10시간 일한 것을 바꾸려고 하는 것. 그것이 약탈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노동 없이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으려는 것이 침략입니다. 전쟁도 그렇게 해서 일어납니다. 개인적인 차원 국가적인 차원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노동하지 않는 몸은 자신을 소외시키게 됩니다. 자신을 소외시키게 되변 우울증, 자살 이런 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노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살하지 않고 우울증이 없습니다. 요즘은 노동 없이 살다보니 우울증이 생겨서 상담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죠. 하지만 저는 노동 없는 몸에서 나타난 우울증을 상담으로 치료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갖습니다.
웃음전도사를 아시나요? 직접 보진 못했지만 오래전에 TV에도 나왔다고 합니다. 저도 우스갯소리 잘하고 싶어서 관심이 갔습니다. 그런데 그 치료자가 자살했답니다. 본인이 본인을 치유할 수 없어서 부부가 자살했습니다.
작년에 모 국립대 교수 한 분이 딸과 함께 왔습니다. “제가 도저히 강의를 할 수 없고 프로젝트를 지도할 수 있는 힘이 없어서 안식년을 냈습니다. 산 위의 마을에서 6개월~1년 살고 싶습니다.” 라고 하시길래 그러시라고 했습니다. 같이 땅 매고, 콩밭에서 고생 많이 하셨죠. 딱 한 학기 하고 복귀하셨습니다. 노동을 통해 치유가 되신 겁니다.
인간은 흙에서 나왔기 때문에 노동에서 멀어지면 결국 자신을 소외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지 모르고, 여러 현대 질환이 나타나게 됩니다.
노동 없는 몸에 영성은 없습니다. 성 베네딕트께서도 ‘기도하고 노동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네딕트 수도회에서는 밭일을 합니다. (주방일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침묵 속에서 끊임없는 기도를 하며 노동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베네딕트회의 중심영성입니다.
우리가 교육한다는 것, 학교를 간다는 것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해봅시다. 적게 일하고 많은 돈을 받고 싶다. 쉬운 일을 하고 큰돈을 받고 싶다. 자격증도 이런 것 아닙니까? 결국은 노동과 자기 자신을 소외시키는 것입니다.
저희가 농사도 짓고 이야기도 나누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서울대 학생이 온 적이 있습니다. 오늘 문자가 왔는데 행정고시 2차까지 합격하고 3차 면접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축하한다고 말을 했죠. 그러면서 그 친구에게 “고시한다는 목적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주었습니다. 힘들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 고시의 목적일까요?
톨스토이는 내 이웃이 배우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도록 돕는 것이 내가 공부하는 목적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은 이 말을 들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돈 많이 버는 삶을 살 것인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직업을 살 것인가?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는 일을 할 것인가? 이 모든 것들이 다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공부하는 것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는 공동체를 통해서, 여러 영리적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해왔습니다. 전통적인 공동체의 삶을 통해 스스로 자발적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할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경험하고, 함께 노력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특별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오늘 이 사람을 만난 인연으로 그런 함께 하는 삶을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부처님의 크나큰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질의응답]
Q. 자연주의의 섭생과 생활이 현대사회의 복잡한 일을 함에 있어서 시대에 역행하는 것은 아닐는지요? 물론 그런 삶이 좋지만 일을 하려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는지요? 약이 몸을 망친다는 이론도 있지만, 당장 몸이 나아야 일을 할 수 있으니 먹는 것이고, 바쁜 시간 속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전자렌지를 쓰고 가공식품을 먹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A. 대단히 현실적이고 솔직한 말씀입니다. 저도 현대문명이 당장 필요 없다, 이렇게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저희 공동체의 화장실은 물을 적게 쓰는 방식으로 있고, 선풍기도 마을 전체에 2대 있다가 12년 만에 2개를 더 샀습니다. 아이를 마을에서 낳긴 하지만, 거꾸로 서면 밖에 가서 낳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을 타협하는 것은 소위 불편한 진실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결국 몸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아파서 병원비 하려고 직장 다니는 것은 아니잖아요? 건강하게 살려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든 다 돈으로 교환하려고 합니다. 싱크대가 고장 나면 돈으로 고치려고 합니다. 나는 돈을 벌고, 내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자라게 합니다. 이런 것이 가정의 해체를 불러일으킵니다.
직업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수입에 맞춰 사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런 한 방법이 귀농, 귀촌입니다. 지방에서 살면 참 여유롭고 좋습니다. 저는 농협 직원들을 보면 참 사랑스러운데, 온 주민의 비밀번호를 다 알고 있습니다. 이웃들과의 일체를 이루게 되니 보이스 피싱이 불가능해지는 거죠. (웃음) 그만큼 자신과 주변세계가 일치하니 가능한 것입니다.
첫댓글 타이핑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