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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경 제 4 인도품 21.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우리 속담에 말하고 다니는 것을 나팔 불고 다닌다고도 하나니, 사람사람이 다 나팔이 있어 그 나팔을 불되 어떤 곡조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어떤 곡조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며, 어떤 곡조는 슬프게 하고, 어떤 곡조는 즐겁게 하며, 어떤 곡조는 화합하게 하고, 어떤 곡조는 다투게 하여, 그에 따라 죄와 복의 길이 나누이게 되나니라. 그런즉, 그대들은 모든 경계를 당하여 나팔을 불 때에, 항상 좋은 곡조로 천만 사람이 다 화하게 하며, 자기 일이나 공중의 일이 흥하게는 할지언정 서로 다투게 하고 망하게는 하지 않도록 하라. 그러하면, 그 나팔이 한량없는 복을 장만하는 좋은 악기가 되려니와 그렇지 못하면 그 나팔이 한량없는 죄를 불러들이는 장본이 되리라.] |
인도품 21장은 말에 대한 법문입니다.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어떤 나팔을 불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말은 죄와 복을 불러들입니다. 이왕이면 복을 불러들이는 말, 듣는 이로 하여금 편안하고 즐겁고 화합하게 하는 그런 말씀을 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나도 복, 밖으로도 복이라는 그런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말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과 일을 하시겠습니까. 정말 성실하고, 일도 잘하고, 배려심도 있지만 꼭 말을 잘못해서 일 잘하고도 욕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일은 잘 하지 못하고 부지런하지도 못합니다. 그렇지만 말을 참 예쁘게 해서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과 일하시겠습니까? 누구랑 같이 있고 싶습니까? 그 때는 일 잘하는 사람이 좋고 어떻고 해도 나중에 보면 누가 더 좋은 사람인가 평가해보면 말 예쁘게 하는 사람이 남을 것입니다. 일 잘하는 것은 얼마나 차이가 있겠어요? 그러나 말을 잘못하고 보면 다 까먹습니다. 말의 힘이 무섭습니다.
같은 말이어도 조금만 다르게 하면 상대방 기분이 달라집니다. ‘얼굴이 예쁘다.’는 말은 다 좋아할 겁니다. 그런데 말을 좀 바꿔보겠습니다. ‘너는 얼굴만 예뻐.’ 그러면 기분이 어떤가요? ‘너는 얼굴 밖에 볼 게 없어.’, ‘너는 얼굴로 먹고 살겠네.’, ‘얼굴 값 하겠다.’, ‘너는 얼굴만 예쁘면 다야?’, ‘너는 얼굴 빼면 시체지.’, ‘너는 얼굴도 예뻐.’ 어떠세요? 다 기분이 좋습니까 아니면 다 기분이 나쁩니까? 묘한 게, 저는 얼굴이 예쁘다는 표현이 남자로 이야기하면 잘 생겼다는 이야기이고, 얼굴이 예쁘다는 표현이 중심이기 때문에 다 좋게 들립니다. 제가 초긍정이라 그런지 몰라도 정토에게 이 말들을 다 해주고 물어봤습니다. ‘너는 얼굴도 예뻐.’만 좋고 나머지는 다 비꼬는 것 같아서 싫다고 합니다. 여자들은 남자들처럼 단순히 듣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게 무슨 말이지 하면서 고누고 듣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반응도 다르게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냥 예쁘다는 말, 잘생겼다는 말이 얼굴이라도 건진 게 어딘가 싶은데 사람마다 다 다르게 듣는 것 같습니다. 개인마다 표현에 따라서 말을 조금만 바꿔도 다르게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기분 좋고 어떤 사람은 안 좋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 대상에 맞게, 상황에 맞게 해야 합니다. 목적에 맞게 해야 합니다. 이 말을 하는 목적이 뭔지에 따라 비로소 가치를 발할 수 있습니다.
어떤 학자가 그렇게 했습니다. 한 사람이 평생 500만 마디의 말 정도를 한다고 합니다. 사람마다, 성향마다 다르겠지만 살아가면서 말을 많이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떤 말을 복을 불러들이기도 하고 어떤 말은 죄를 불러들이기도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복 짓는 말을 많이 했는가, 죄 짓는 말을 많이 했는가, 그리고 그 말들이 내 삶을 어떻게 만들어가고 있는가, 다른 이의 삶을 어떻게 바꾸고 영향을 주고 있는가 한번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언어의 온도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대종사님의 말씀과 통하는 부분이 많더라고요. 말에도 온도가 있다고 합니다. 따뜻한 말, 차가운 말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말 한마디에 위로를 받기도 하고, 마음의 화상을 입기도 하고, 때로는 떠나버리기도, 더 나아가서는 인생을 바꾸기도 한답니다.
제가 말 한마디에 인생을 바꾼 사람입니다. 19년 전에 3월 전농교당에서 보산 김제원 교무님이 공부방을 하고 있었는데 첫날 가서 딱 들었는데 저에게 딱 한마디를 하셨습니다. ‘네가 영원한 행복을 아냐?’ 이제까지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는데 그 말에 탁 막혔습니다. 영원한 행복이 도대체 뭐냐 해결이 안 되어서 교무님께 묻고 물어서 결국 원불교에 답이 있구나 하고 열심히 하게 되었고 출가까지 했습니다. 저는 원불교에서 그 답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대종사님이 개교의 동기에 그 말씀을 벌써 해주셨습니다. 영원한 행복이 여기에 있다고 자신하셨습니다. 그래서 믿고 하고 있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공부하러 오시기 바랍니다.
말은 때로 편을 가르기도 합니다. 국회의원 선거가 열흘밖에 안 남았죠? 그런데 제가 여기서 1번이 좋네, 2번이 좋네 하면서 특정 정당을 옹호하거나 비난을 한다면 기분이 좋은 분들도 있고 나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불화를 조장하니 그 말을 안 하고 기도를 합니다. 15일 저도 투표를 할 건데 많은 국민들이 투표를 해서 바른 지도자가 뽑히기를 간절히 기도를 합니다. 15일에 다 투표를 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기도가 이루어집니다.
프로포즈 해보셨습니까? 프로포즈를 잘 해서 그 한 마디에 여자 분들이 결혼을 허락하잖아요? 남자들은 ‘어떤 말을 준비해야 이 여자가 나에게 마음을 줄까? 어떻게 하면 결혼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죠. 저도 무지하게 고민을 했었는데, 더 잘 아실 겁니다. 그렇게 해서 여자들이 이 남자면 내 평생을 함께해도 좋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잖아요. 그 순간만 잘 남겼으면 되는데 그 순간을 못 넘겨서 사귀고 결혼을 하게 되죠. 그런데 그 상황에서의 그 한마디가 참 무섭습니다.
우리 속담에도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나 말에 힘이 있기에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하고 천 냥이 지금으로는 얼마나 될까요? 시대에 따라서 학자에 따라서 다양하게 분석을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저도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옛날에 구걸하면서 사람들이 ‘한 푼 줍쇼.’라고 이야기 하면서 구걸을 하지요. 지금은 외국에 나가보니 ‘Give me 1 dollar.’라고 하죠. 그런데 이게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면 한 푼이 대략 1천원인가요? 옛날에는 은 한 냥은 십 전이지요. 십 전은 백 푼입니다. 금으로 하면 은 열 냥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은으로 계산하면 1억이고 금으로 계산하면 10억입니다. 지금도 큰돈이지요. 말 한마디로 1억을 벌고 10억을 벌다니 엄청 크지요. 저는 아까도 이야기 했듯이 제 인생을 바꾼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 한 생뿐만 아니라 영생을 바꿀 거거든요. 그러니 그 말은 1억, 10억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은 긍정적인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빚을 갚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빚을 더 불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들으면 안타깝고 때로는 분노하기도 하는데 요즘에 제일 사회적으로 문제되는 것 중 하나가 가짜뉴스입니다. 하고 싶은 말을 여기저기 하니 그렇게 거짓말이 많고 예전에는 자기 혼자 말하고 말면 몇 명에서 끝나는데 매체가 발달하고 나니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지 오죽하면 뉴스에서 ‘그거 거짓말입니다, 아닙니다.’라고 팩트 체크를 해야 합니다.
제가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사람의 말이 한 사람 또는 가정을 망친 일입니다. 젊은 분들은 모를지도 모르겠는데. 예전에 우정의 무대에서 엄청 유명했던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진행만 잘 한 것이 아니고 재단을 만들어서 심장병 어린이 돕기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누가 ‘이상용씨가 돈 모은 것을 횡령했다더라.’고 퍼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것이 사실인 것처럼 퍼져서 3개월 뒤에는 결국 허위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 3개월 동안 그 가족은 상처를 받았고 모든 일을 그만두게 되었고 미국으로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냥 재미로 ‘나도 들었어.’라고 하며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지만 그 말 한마디가 인생을 망치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인터넷에 어디의 카페 사장이 신천지 신도더라 하는 글이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래? 그래?’ 하면서 막 퍼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카페 사장이 점점 손님이 줄더니 아예 사람이 안 오더랍니다. 또는 확진자가 다녀갔다고 확인도 안된 사실을 퍼트려서 가게가 망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왠지 꺼림칙하게 느낍니다.
더 큰 일도 있었습니다. 뉴스에도 나왔었는데 경기도 이천에 한 종합병원이 있었는데 그 응급실에 확진자가 다녀갔고 입원해서 사망했다더라고 퍼졌다고 합니다. 그러니깐 사람들이 그 응급실에 안 가기 시작했습니다. 사실이 아니라고 이야기해도 경영난으로 응급실을 유지할 수가 없어서 폐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피해는 그 병원, 그리고 지역 주민들이 받는 것입니다. 대도시도 아니기 때문에 응급실도 많지 않은데 이제는 응급실을 가려면 멀리까지 다른 시로 넘어가야하는 상황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한 말이 얼마나 큰 죄가 되는지 알까, 인과를 알면 저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하며 처음에는 화가 났다가도 그 안타까움에 할 말을 잃게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말의 힘이 무섭습니다.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죄를 또는 복을 불러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말을 습관으로 삼아야 하느냐. 화합을 부르는 말, 분열을 부르는 말, 슬픔을 부르는 말, 즐거움을 부르는 말, 대종사님께서는 즐겁게 화합하는 말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화합을 부르는 말, 요새 뉴스를 많이 보는데 감동적인 이야기를 봤습니다. 대구가 많이 힘들었다가 최근에는 좋아지고 있지요. 그 때 힘들 때 많은 구급대원들이 대구로 가서 도와주고 안정이 많이 되어서 구급대원들이 떠난다고 합니다. 열심히 고생하고 난 뒤에 떠나면서 했던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떠나서 미안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응해서 남은 사람들은 ‘고맙습니다. 대구는 여러분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 진심이 너무 느껴져서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서로 간에 그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전하는 그 말은 화합을 부릅니다. 그래서 화합을 시키는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그렇게 화합을 잘 시키는 분이 없는가 하고 찾아봤더니 우리 교당에 계시더라고요. 누굴까요? 박세훈 교무님입니다. 제가 만나본 분들 중에 이 분이 제일 화합을 잘 시키는 것 같습니다. 늘 장점을 찾아내시고 격려의 말을 항상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늘 사람들을 살려주십니다. 비난하거나 평가하거나 그런 표현을 하시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말 하셨나 싶습니다. 때로는 지도하실 때에는 방편으로 쓰시기도 하시겠지만 저는 세훈 교무님 말씀을 들으면 정말 화합을 위해서 말씀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화합을 위해서는 부정이 아니고, 비난이 아니고 평가하는 말이 아니고 긍정의 말 ‘누구누구가 잘했다더라.’, ‘그것 참 좋습니다.’ 와 같은 말을 할 때 또는 사실이 아니면 전달하지 않을 때 화합을 부르는 것 같습니다. 결국 나도 그 사람도 사회도 함께 복을 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분열을 부르는 말도 합니다. 가는 데마다 분열을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분 만나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만나봤습니다. 둘이 잘 있다가도 조금 있다가 가보면 싸우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봤더니 그 사람이 다리를 놓았습니다. 전해선 안 될 말을 전했습니다. ‘그거 모르고 있었어? 나는 알고 있는 줄 알았지.’ 하고 말을 이미 전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단체에 있으면 쫓아내시겠습니까? 참아야 될까요? 교당에서는 쫓아낼 수는 없고, 대종사님 제자들이 ‘누가 잘못을 하니깐 쫒아냅시다’ 하니깐 대종사님께서는 ‘다 내 사람이다’ 면서 품어주셨습니다. 그런데 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꾸짖기도 하고 때로는 타이르기도 하면서 개과천선 할 수 있도록 지도하셨습니다. 대산종사님은 제자가 찾아와서 ‘누구누구가 이랬다고 합니다.’, ‘누구누구가 저랬다고 합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몰라서 그랬단다. 몰라서’ 라고 편을 들어주시고 또 지도를 해주셨다고 합니다. 분열하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가정에 있으면서도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할 말만 하는 사람. 회의 시간에 다른 사람 이야기를 안 듣고 자기만 하거나, 가족들끼리 막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다른 이야기를 한다던가, 아버지들이 많이 그래서 왕따를 당한다고 합니다. 신경도 안 쓰면서 듣고 있다가 갑자기 주식 이야기하고, 축구 이야기하고 갑자기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 하고 그런답니다.
이렇게 부정적인 말, 사실이 아닌 것을 전하는 말, 비난하고 평가하고 이간질하는 말은 다 죄를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 계문에도 이런 말에 대해서 경계를 많이 해놓으셨습니다. 악한 말을 말며, 저주하거나 욕하거나 상처 주는 말을 하지 말라. ‘다른 사람의 과실을 말하지 말며’는 부정적인 말, 누가 실수한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이 아울러 말하지 말며’, 서로 말하려다가 분열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비단같이 꾸미는 말을 하지 말며’는 사실도 과하지 않게 말해야하는데 거짓이면 더더욱 꾸며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 입으로 두 말하지 말며’는 것은 거짓말하지 말라는 이야기지요. 보통 사람은 하루에 평균 세 번의 거짓말을 하고 산다고 합니다. 우리 교도님들은 안 하시겠지요. ‘망녕된 말을 하지 말며’는 때와 장소에 맞지 않는 말을 하지 말며, 밥 먹는 데 화장실 이야기하면 안 되겠지요. 이러한 말들은 죄를 부릅니다.
말을 할 때는 체로 쳐서 곱게 말해라는 말이 있습니다. 체는 작은 구멍들을 통해서 작은 것만 밑으로 거르는 것입니다. 말도 걸러서 해야 합니다. ‘이런 말을 해야 할지, 안해야할 지 모르겠는데..’ 라고 이야기하면서 이야기합니다. 그럴 때는 안 해야지요. 체가 막 구멍이 어마어마한지 막 다 나오네요. 안해야 할 말, 남의 약점이나 실수나 분열을 조장하는 그런 만들을 하면 안 되겠지요.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하시면 좋겠습니다. 말의 목적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한테 위로를 해야 하는데 혼을 내요. 저도 결혼 생활을 해보니깐 가끔 그런 일을 겪습니다. 정토가 힘들었다고 화났었다고 짜증났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랬냐고 하면 되는데 ‘그랬냐.’가 잘 안 나와서 잘 듣다가도 혼자서 시비판단하고 있습니다. ‘자기도 잘못했구먼.’ 이라고 말이 나오는 거죠. 남자들은 밥 얻어먹고 잘 살라면 ‘그랬구나.’라고 이야기할 줄 알아야합니다. 힘들었다고 하면 ‘아이고 얼마나 힘들었데요.’, 짜증이 난다고 하면, ‘짜증날 만 했네.’라고 이야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한 직장 여성들을 상대로 어떤 남자 유형이 좋은지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1번이 같이 욕 잘해주는 남자라고 합니다. 내가 넘어지면 남자 친구나, 남편이 어떤 반응을 잘해주기를 바랄까요? ‘아이고 조심 좀 하지’ 하면 그날은 밥이 없겠지요. ‘아이고 안 다쳤어? 바닥이 잘 못했네.’ 필요한 것은 뭐인가요? 공감입니다. 시비 판단, 해결책 제시가 아니라 그 말을 통해서 이 사람이 나를 걱정하고 있구나, 위로해주고 있구나, 내 편이구나라는 공감입니다. 위로를 하려고 하면 위로를 해야지, 평가하고 시비판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과하러 가서 화를 내고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과하러 가면 그 사람이 풀릴 때 까지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데 ‘그런데 너도 이건 잘못했잖아.’라고 꼭 한마디 붙여서 다시 싸웁니다. ‘내가 이거 이거는 잘못했어.’라고 이야기하면 상대방도 ‘나도 이건 잘못한 것 같아.’라고 반응이 나오는데, 뺏어 먹은 아기가 ‘내가 너무 배가 고파서 미안해.’라고 하면 뺏긴 아이가 ‘미안해 나눠먹었어야 하는데 양보를 못했어.’라고 할 텐데 ‘네가 좀 줬으면 됐잖아!’라고 하면 안 되겠지요. 설사 미안하다는 반응이 안 나오더라도 내 할 도리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사과하러 갔으면 사과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내 정당한 것을 이야기하고 상대방의 조금이라도 못난 것을 이야기하고 목적과는 다른 결과를 불러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을 하려면 이 말을 왜 하는지 그 목적을 분명히 하고 말을 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말을 법 있게 하자는 것입니다. 법 있게라고 하는 것은 때와 장소에 맞게, 대상에 맞게 하자는 것입니다. 정말 좋은 말인데도 상황에 따라서 죄가 되기도 하고, 복이 되기도 합니다. 인과를 알려준다는 것이 좋은 건가요? 안 좋은 건가요? 물론 좋은 것이지요. 대종사님께서 인과를 알려주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아무 때나 하면 안 되지요. 사고를 당한 사람에게, 병에 걸린 사람에게 그거 인과야 라고 해도 말이 먹히지 않을뿐더러 그 사람과의 분열을 불러오죠.원인 파악을 하려는 그런 지혜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인과를 알려주면 크나큰 복이 되겠지요. 좋은 상황일 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안 좋은 상황에서 인과라고 이야기합니다.
특히 이 말을 법 있게 해야 하는 사람들은 사람마다 나팔이 다 다르잖아요. 어떤 사람은 출력이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에 더 힘이 있기도 하고 말의 힘이 약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내가 말의 힘이 더 큰 사람이라고 하면 더 조심해야 합니다. 요즘 그렇지 않은 경우를 참 많이 봅니다. 언론이나 종교나, 교육이나 정치나 연예인이나 공인이라는 사람들, 공신력을 가진 기관들이 말을 잘못해가지고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뉴스를 보면서 안타깝기도 하고, 많이 욱합니다. 입으로 소리를 낸다고 다 말인가요? 자기 이익을 위해서, 감정으로, 습관으로, 나 시원하자고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내 성격이 그래서 그래’하면서 성격 탓을 합니다. 인과는 호리도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말한 대로 다 돌아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화합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이왕이면 편안하게 하고, 유익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말은 마음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말을 어떻게 습관을 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더 근본적으로는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서 말이 다르게 나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평소에 마음을 바르고, 착하고, 평탄하게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말로 그대로 나옵니다. 악한 마음을 가지면 악한 말이 나옵니다. 마음에 체를 하나씩 마련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정이나 습관이나 욕심을 거르고 목적을 가지고 통과시킬 수 있는, 그래서 편안하고 즐겁고 화합하게 하고 유익되게 하는 그런 결과를 내는 말들을 때와 장소에 맞게 대상에 맞게 법 있게 해서 큰 결과가 나오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도, 너도, 우리 모두가 복의 길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인도품 21장의 말씀이 다 나팔이 있지만 어떤 나팔을 불고 살 것인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마음을 잘 마련하고 또 말을 할 때에는 말의 체를 마련해서, 화합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유익되게 하고 편안하게 하는 그런 말들로 우리의 나팔 소리를 채워 가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가 바라는 복을 얻는 제 인생을 바꿨던 말 영원한 행복이 뭔지 아냐에 대한 답을 말을 통해서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인도품 21장 나팔을 부는데 어떤 나팔을 불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