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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族路線의 반성과 새 진로2
信天함석헌
5·16
그러면 5·16은 무엇이며 왜 일어났나?
작용에는 반드시 반작용이 있다. 반동을 끼지 않는 동(動)은 없다. 소크라테스가 있으려면 소피스트들이 있어야 했고, 예수가 되기 위하여는 유다가 없을 수 없었다. 어느 강물도 좌우 언덕을 번갈라 치면서야 행진을 할 수 있듯이, 역사가 진행이 되려면 혁명 반혁명의 대립이 되풀이되면서야 될 수 있다.
노자는 선인(善人)은 불선인(不善人)의 스승이요 불선인은 선인의 거슴(資)이라고 했다. 나폴레옹을 프랑스 대혁명의 과정에서 보면 얼핏 보기에 잘못 나온 미아(迷兒) 같지만 결코 미아가 아니다. 역시 없을 수 없는 혁명의 한 귀절이었다. 다만 동(動)에 대한 반동이었다. 그는 혁명을 한 때 망가친 듯 하다. 그러나 망가침에 의해서 그것을 발전시켰다. 직접적으로 보면 혁명을 방해 했지만 그는 그것으로 혁명이 협소(狹小)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을 막는 한편 그 자유의 물결의 진폭을 넓혀 전 유럽, 전 세계를 삼키게 했다. 5·16도 아마 그럴 것이다. 모처럼 세웠던 공화정치를 무너뜨리고 왕관을 제 손으로 잡아다려 쓰고 황제가 됐던 나폴레옹 모양으로 4·19혁명을 불과 일 년에 안색(顔色) 없이 쓸어버린 것 같지만 큰 안목으로 볼 때 그것은 혁명운동을 대성시키기 위해서 나온 필요악(必要惡)일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고 그렇게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믿음이 이긴다.
4.19의 약점은 그 지나친 흥분에 있었다. 이승만 정권의 극적인 몰락을 보고 아주 일이 다된 줄 알았다. 거기 잘못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알지도 못한 것이요, 혁명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 일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성격적으로 병이 든 민족임을 잊었었다. 그러므로 하루 아침에 아주 새 국민이 된 줄 알고 도취해서 악의 뿌리를 캐내야 할 것을 잊었다. 악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악은 불사체(不死體)다. 선이 불사체인 줄은 생각하기 쉬워도 악도 역시 불사체인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적다. 그러나 선이 불사체이기 때문에 그 선을 이루게 하기 위해 악도 불사체다. 사탄은 마지막 순간까지 남는다. 천국은 무풍지대가 아니다. 영원한 회오리바람에 의해 올라가는 그 중심에 하나님의 보좌를 가지는 곳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가 풋내기 열심을 가지고 악의 가라지를 당장에 뽑으려는 제자들을 말리고 못하게 한 것이다. 대번에 혁명을 완성한 줄 아는 생각이 비(非)혁명적인 생각이다. 참 혁명가에는 완성이 없다. 영원한 대결이 있을 뿐이다. 노자가 옳게 말했다. “작은 것을 봄이 밝음이요, 부드러움을 지킴이 굳셈이다.”
4·19에서 우리는 이제 시작인 것을 알았어야 할 것인데 그것이 끝인 줄 착각을 했고, 우리 자신을 죽여야 하는데 자유당을 죽이기만 하면 되는 줄 망상을 했다. 그랬기 때문에 낡은 악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5·16은 그 악이 전보다 더 심한 것을 보여주려고 저보다 더 흉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돌아온 것을 보여주고 있다. 5·16이후의 정치를 한 마디로 형용한다면 “지독”인데 그 수법도 그렇고, 그 계획성도 그렇고, 그 결심도 그러해서, 어떤 때는 보통 인간 심정으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이러한 까닭은 그들이 자기네도 모르게 역사의 엄명을 받고 우리 민족을 시험하는 자리에 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이조 초기에 세종의 성시(盛時)를 이어서 섰던 세조(世祖)의 자리와 같은 것이다.
그는 악귀(惡鬼)같이 일어나서 세종 문치(文治)의 깊이가 한 병에 지나지 못하는 것을 드러냈다. 모두 다 반동에 의해서 피상적(皮相的)인 고침을 깨뜨려 혁명의 철저화를 이루려는 일이다. 악이 지독해지면 선도 지독해져야 하고 악이 과학적 조직적이 되면 선도 과학적 조직적이 되지 않으면 안되며, 악이 영구 지배를 목적하면 선도 영구항쟁을 각오해야 하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고 보면 5·16에 있어서 처음부터 혁명이냐 아니냐가 굉장히 토론됐던 것은 참 의미 깊은 일이다. 일으켰던 자신들은 아마 혁명으로 알고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반동이 됐다. 그러면 이 모순이 어디서 나왔나? 이것이 바로 4·19에 대한 역사의 심판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들이야 말로 잘못된 흥분을 받아가지고 일어나서 업신여겼던 대적 곧 낡은 악에 완전히 포로 동화가 돼버린 것이다. 아무 혁명 이론도 없이 새 역사에 대한 청사진 하나 없이, 단지 무기를 든 것을 믿고 일어선 것, 그러기 때문에 청소 작업을 마친 다음에는 깨끗이 물러나 본래의 직장으로 돌아간다, 공약을 했던 것은 솔직이람 참 솔직이지만, 그만큼 혁명의 자격 없음을 말하는 것이요, 그런 때문에 자기네가 잡으려던 대적에게 도리어 잡혀 버린 것이다.
정정법(淨政法)을 만들어 낡은 정치인을 다 잡아넣었는데 자기네 자신이 그것을 배워 그들보다 몇 갑절 더한 낡고 썩어진 정치인이 됐고, 부정부패 청산한다 했는데 청산은 그만두고 열곱 백곱 더 부정부패에 잡혀버렸다. 그래서 병 주고 약 주는 식으로 그 부정부패를 끝까지 청산하기 위해 영구 집권을 도모하는지 모르나 그러노라니 완전히 반혁명이 돼버렸다. 이런 의미에서는 그들은 민족의 죄를 대표한다.
그 결과 민족의 나가는 길은 아주 혼란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오리무중에 들었다 할까, 수렁에 빠졌다 할까. 민족주의라 하자니 너무 일본에다 싸게 팔렸지, 민주주의라 하자니 국민의 기본 권리조차 없어졌지, 반공을 국시로 한다 내걸었는데 그 공산주의와 공존을 해야 한다 하게 됐지, 근대화를 가장 큰 간판으로 내걸었는데 경제는 파산 상태에 빠졌지, 비상사태를 선포 해놨는데 평화통일을 위한 협상을 해야지, 중공은 서편에 세계 일류급의 군사국이 됐고, 일본은 동편에 세계 일류급의 경제국이 됐고, 미국은 여전히 남쪽에 버티고 소련은 변함없이 북쪽에 호통을 치고, 그러하는 십자 교차점에서 앉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하고 이북과는 적대라 어제까지는 그랬으나 그렇다고 오늘부터 친교라 할 수도 없고, 우왕좌왕을 할 수 있나, 전고후려(前顧後慮)를 할 수 있나, 참 막막하고 답답한 자리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자리에 있다.
새 진로
그러나 절대로 기(氣)가 죽어서는 아니된다. 기가 생명이다. 혁명 전야는 언제나 그런 법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낡은 것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버리고 새로운 창조에 대한 신념을 가지게 하기 위하여 있는 역사의 몰아치는 채찍이다. 필요한 것은 방법의 토론이 아니고 모래 알 같이 서로 흩어져 떨어진 마음을 하나로 살려 불러일으키는 영감이다. 어떤 민족도 그러한 영감 속에 한통 치고 들어감 없이 새 역사를 창조한 전례가 없다.
그러한 영감에 이르기 위해 생각해 볼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지금 인류를 지배하고 있는 이런 식의 국가주의는 이미 그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다는 사실이다. 데모크라시니 공산주의니, 양극의 대립이니 다원적 공존이니 하지만 그것이 다 국가지상주의인 점에서 마찬 가지다. 지금까지 모든 국가의 이상은 대국주의에 있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제1차세계대전이요 제2차세계대전이다. 그런데 있는 지혜와 기술과 용기를 다 동원하여 전쟁을 하고 난즉 구경에 도달한 점은 이 이상 더 싸울 수 없다는 것이다. 본래 전쟁은 이기고 나면 이익이 나기 때문에 하는 것인데 이 두 차례의 큰 전쟁은 하고 난 결과 승자 패자의 구별이 없이 다 같이 죽는 운명에 도달하게 됐다. 이것은 전에는 모르던 일이다. 이것은 인간의 정신연령이 낮을 때는 될 수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이미 성인(成人) 지경에 도달한 인간에게는 이해(利害)가 국경선을 넘어서 서로 일치하게 됐다. 그전에 나라라고 한 것은 참 의미의 전체가 아니고 어떤 권력 단체가 짜고 들어서 전체라는 이름을 도둑하여 가지고 민중을 지배하여온 것이었다. 거기서는 국가는 절대권을 가지고 개인을 지배했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자란 인간이 거기 언제까지 굴복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해서 국가주의 안에 들어 있는 모순이 드러나게 됐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대국가주의 아래서 자기희생을 당하면서도 국민들은 참아왔다. 그것을 이득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거짓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됐으므로 어느 국민도 무조건 국가를 지지하려 하지 않는다. 여기 현대국가의 고민이 있다. 한마디로 해서, 현대국가의 나가는 길은 앞이 막혔다. 우리는 후진국이라 하여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를 따라가는 길이 사는 길인 줄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선진국 자체는 고민하고 있다. 참 의미로 말해서 우리는 그 대국주의에 희생이 된 민족이다. 그러므로 이미 고도로 발달한 기술시대에 있어서 그들과 경쟁하여 그들을 이길 가능성이 도저히 없을 뿐 아니라, 그 길이 이미 선고받은 길임을 알 필요가 있다.
그 다음은 이 앞의 인간사회는 점점 더 유기적인 사회가 되어갈 것이라는 점이다. 문명이 이렇게 발달하지 않았을 때 인간은 서로서로 그리 밀착된 사회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개인이 그 본위였다. 그러나 기술이 발달함을 따라 인간관계는 이미 기계적인 관계를 벗어나서 유기적인 하나의 전체가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어느 개체도 전체에서 떨어져 살수 없이 됐다. 우리 개체가 많은 세포로 모여서 유기적 하나를 이룸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이제 인류 전체가 그런 단계에 들었다. 외양으로 같은 인간인 듯하나 그 성질로는 전과 아주 달라졌다. 전체에서 떨어지면 떨어진 그 개체도, 그 개체를 잃은 전체도 다 살지 못한다. 한 가정 을 그 좋은 실례로 들 수 있다. 이제 전 인류가 그런 단계에 들었다. 그것을 깊이 인식함이 없이 현대인류를 구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참 의미에서 원수나 대적이 없다. 몇 천 년전 위대한 종교가들이 계시를 통해 보았던 것을 이제 우리는 과학적인 사실로 당하고 있다. 지금까지 떨어졌다는 우리로서 앞날의 새 역사를 생각할 때 이 점은 밝히 알 필요가 있다. 사실 이것은 우리게는 고무적인 복음이다. 예수가 하늘나라를 선포했을 때 가장 환영한 사람들은 기성체제에서 소외를 당했던 사람들이었다. 오늘 우리는 20세기의 소외된 부류들이다. 우리야말로 이 새 체제에 앞장 설 필요가 있다.
다음은 앞으로 폭력주의를 지양하지 않고는 인류는 살 수 없다는 점이다. 무기의 발달로 인하여 폭력을 사용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폭력을 사용하는 날 인류만 아니라 지상의 온 생명의 씨가 멸망될 위험이 있다. 그뿐 아니다. 폭력은 정신연령이 자라기 전에는 효과가 있었으나 정신의 정도가 올라갈수록 효과가 없다. 이제는 사상의 절대화는 있을 수 없다. 탈(脫)이데올로기 소리는 이래서 나온다. 어느 천재적인 사람의 생각을 강요하여 그리 맞추어 나가려 하던 것은 지난날이요 이제는 자진하는 데야말로 정신의 진보가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간 속에 있는 선한 가능성을 해방시키는 것이 문제인데 그것은 폭력으로 강제 하여서가 아니라 자기희생적인 사랑에 의하여서만 되는 것을 우리는 이제 잘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말할 것은, 그런 모든 혁명적인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어서 빨리 핵심단체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주체는 물론 민중이지만 핵심 없는 민중은 아무것도 아니다. 전체는 마치 하나의 렌즈와 마찬가지다. 초점이 없어서는 렌즈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날에 있었던 같은 집단주의여서는 아니된다. 전체는 그 수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성격에 있다. 한 둘이 모여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거기 하나님 나라가 있다. 지난날같이 지배하거나 지도하자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전체의 초점이 되기 위해서다. 내 몸이 있어도 거울이 없으면 내 얼굴을 알 수 없듯이 민중도 어느 어진 핵심체 앞에 서야만 자기 자신을 알게 된다. 위대한 사람이란 지배하는 사람이 아니라 민중으로 하여금 자기 속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르던 자기를 발견하게 하는 사람이다. 예수 앞에 서면 갈보계집들도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알았고 석가 앞에 서면 범부(凡夫)도 스스로 불성(佛性)을 가진 것을 알았다. 그런 일을 위해서 새 이상을 가지는 핵심체의 구성이 시급히 필요하다.
단말마적으로 심해가는 압박 구속은 사실은 유리들 갈아서 초점을 잡자는 저 큰 우주 렌즈공이 시켜서 되는 일일 것이다.
앞에 새 길이 희미하게 내다보인다!
씨알의소리 1972년 8월 13호
저작집30; 5- 71
전집20; 17-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