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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한국무교회 전국성서집회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배 은 선
(한국철도박물관 관장)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 16:2, 3)
1. 역사 속으로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제 경우 가장 큰 이상을 품고 있었던 때가 10대 말에서 20대 초반까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어떻게 보면 설익은 이상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요. 머리는 하늘을 향하되 발이 아직 땅에 닿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시선은 자연히 위가 아닌 앞을 향하게 되고, 몸은 점차 안주와 안정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이 아닌 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것은 미국의 목사이며 작가인 찰스 쉘던(Charles M. Sheldon, 1857~1946)이 1896년에 쓴 소설책의 이름입니다. 일찍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고 있다고 평가를 받았던,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된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인 기독교 고전입니다. 미국 한 도시의 목사가 주일설교를 통해 1년 동안 모든 일의 판단 기준을 “예수님은 어떻게 하실까?”에 두고 행동에 옮기자는 제안을 하고, 이 서약에 참여한 각계각층의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겪게 되는 기쁨과 슬픔, 고난과 핍박 등을 통해 기독교의 본질을 일깨워주는 내용입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쯤에 이 책을 처음 읽은 것 같습니다. 이 책뿐만 아니라 ‘크리스천 다이제스트’라고 하는 기독교 고전 시리즈를 몇 권 더 읽었는데, 다른 책들보다 기독교를 아주 쉽고 실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책이 아주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오늘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바로 이 책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 책이 처음 저술된 1896년 상황을 먼저 살펴보면, 당시 우리나라는 조선 말기였습니다. 그 2년 전인 1894년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 우리나라는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합니다. 이에 따라 청나라 군대가 우리 땅에 들어오고, 부르지도 않은 일본군이 덩달아 들어와 조선 땅을 밟습니다. 침략입니다. 결국 일본군은 궁궐을 침범해 고종을 포로로 삼고, 청나라와 전쟁을 벌입니다. 승기를 잡은 후 조선의 내정에 개입해 이른바 갑오경장을 실시합니다. 이듬해인 1895년에는 러시아와 손을 잡으려는 조선의 국모를 처참히 살해하지요. 갑오년에는 궁궐을 점령당하고 포로로 잡힌 상황에서 친일꼭두각시들에게 실권을 내주고, 을미년에는 자기 눈앞에서 사랑하는 아내가 살해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고종은 결국 러시아 공사관으로의 피신에 성공합니다. 이 해가 바로 1896년이었습니다.
2. 소설 속으로
이 소설은 실직한 인쇄공이 주일 설교준비를 하고 있는 맥스웰 목사의 목사관을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설교준비로 인해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상황에서도 나름 친절하게 응대를 했지만 근본적인 도움은 주지 못하고 실직자를 떠나보내는데, 이 실직자가 주일예배가 끝날 무렵 교회에 다시 찾아옵니다. 맥스웰 목사의 그 날 설교 주제는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르자>였습니다. 설교를 막 마쳤을 때, 갑자기 그 실직자가 벌떡 일어나 “수많은 실직자와 빈민들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모자라서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예수님을 본받고 따른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느냐?”라는 무거운 질문을 남기고 쓰러지고 맙니다.
“다만 내가 궁금한 것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알기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행하신 것처럼 여러분 스스로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여러분 자신을 부정하면서 길 잃은 자들과 고통 받는 자들을 구원함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p. 23.)
결국 이 실직자는 목사관에서 며칠 머물다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맥스웰 목사는 이것을 계기로 그 다음 주일 설교 때 1년이라는 기간을 두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지 생각해보고 행동하기를 서약하는 제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책의 저자인 쉘던 목사 역시 사회사업에 관심이 많아서 실직한 인쇄공으로 가장하여 여러 사람들을 만나보았는데, 이른바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이들의 무관심과 차별에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에 등장하는 실직한 인쇄공의 도발적 질문은 작가 자신이 겪었던 상황에서 나온 것이며, 작가가 자칭 기독교인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참고로 당시에는 인쇄업계에 실직자가 대량으로 발생했는데, 그 이유는 1886년 발명된 자동주조식자기(라이노타이프, Linotype)의 보급으로 인해 인쇄 식자 기술자들이 할 일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제안에 따라 많은 교인들이 서약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부터는 서약에 따른 행동으로 인해 파생된 많은 사건들에 대해 예배 후 따로 시간을 갖고 말씀을 나누는 모임이 생깁니다. 그 자리는 성령님의 함께하심에 대한 놀라운 간증의 시간이기도 했지만 위로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뜻대로 실행함에 따라 감수할 수밖에 없는 막대한 손해와 실직과 가족으로부터의 외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하신 말씀이 빈말이 아니라 진실이었던 것입니다. 신문 발행인은 독자들이 좋아하는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기사를 싣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실천함으로써 수많은 독자를 잃게 되고, 부와 명예를 함께 누리던 철도공장의 소장은 우연히 알게 된 회사의 비리를 숨기지 않고 폭로함으로써 직위도 잃고 가족으로부터도 외면을 받게 됩니다. 이렇듯 예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와 고난은 단순히 선언적이거나 상징적 의미가 아니라 뼛속까지 파고드는 사실이며 실제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운동은 레이먼드라고 하는 한 도시에서 시작돼 시카고를 비롯한 다른 미국내 도시에도 퍼져나가는 것으로 소설이 전개되는데,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제안자인 맥스웰 목사 자신 또한 서약에 참여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직자들은 원래 이런 서약을 따로 하지 않아도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맥스웰 목사 자신이 서약에 참여한 후 변화한 모습을 많이 보였으니까요. 맥스웰 목사의 가장 큰 변화는 이웃에 대한 책임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정치와 정책에 초연했던 과거로부터 벗어나서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관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 맥스웰 목사의 고민이 담긴 대목을 소개해 드립니다.
“선거에서 바야흐로 유권자들의 표가 예수님과 맞서는 후보자 쪽으로 기울어지려는 판국에 레이먼드 시를 위해 조용히 기도만 드린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문제에 대해 십자가를 벗어던지고 조금이라도 고통이나 어려움을 받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그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중략)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단지 양심과 관습과 전통의 문제일까? 그리스도인이 기꺼이 감수해야 할 고통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서 변화산과 갈보리 언덕을 올라가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p. 127.)
레이먼드 시에는 렉탱글이라고 하는 빈민굴이 있었습니다. 술집과 도박장과 매음굴이 늘어서 있는 불법과 죄악의 소굴입니다. 레이먼드 제일교회의 담임목사 10년이 넘는 동안 한 번도 관심을 가졌던 적이 없는 렉탱글에 대해 맥스웰 목사는 변화 이후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목회자의 천막을 방문하고 그곳에 가서 설교를 할뿐만 아니라 술집 허가를 내주지 않도록 선거운동에도 개입합니다. 그 과정에서 희생자도 발생하고 선거에 지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복지관도 세우고 지역주민을 위한 생활개선 활동도 시작합니다. 물론 이 사업을 혼자 해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서약에 함께 참여한 일간지 발행인과 대학총장이 적극 나서며, 찬양사역자를 비롯한 젊은이들도 시간과 열정과 재산을 내놓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대학총장이라면 지식인으로서 선거나 행정문제에 뛰어드는 것보다 대학에서 윤리학과 철학을 강의하면서 조용히 학자다운 연구와 사색에 몰두하며 여생을 보내는 것이 누가 보더라도 보기 좋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나를 따르라”는 음성을 들었을 때 ‘이것이 나의 십자가이며,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지든지 아니면 주님을 부인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할 중요할 갈림길에 놓여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분열을 기피하고 일치를 추구하라고 권장합니다. 분쟁하지 말고 화해할 것을 권유합니다. 미워하지 말고 사랑할 것을 가르칩니다. 파헤치지 말고 덮어두라고 훈수를 둡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검을 주러 세상에 오셨다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과 사망의 길을 분명히 갈라놓고 계시는 분이다. 우리 인간은 끝까지 그분과 함께 동행하든지, 아니면 그분의 길을 무시하고 자신의 길을 가든지 신중하게 양자택일을 해야 할 것이다.”(p. 159.)
초대교회의 놀라운 은총과 성령강림이 19세기 말 미국에도 강력히 임하여 한 도시와 빈민굴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 바람이 주변의 다른 도시로 전파된다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됩니다. 소설의 줄거리만을 보았을 때, 우리는 맨 처음 설교를 통해 지역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맥스웰 목사를 주인공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혹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행동지침을 성실히 따랐던 신문 발행인, 철도공장 소장, 찬양 사역자, 대학총장, 기업인, 목회자, 여성 상속인 등을 복수의 주인공으로 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엄밀히 말해서 예수님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다양한 위치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는 각자의 삶에 친히 개입하셔서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것을 통해 그 주변을 뒤집어엎으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3. 현실 속으로
이제 우리는 21세기 대한민국에 살고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미국의 작가 쉘던이 살던 시대와는 많이 다른 세상입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1894년 6월 9일 동학농민혁명을 핑계로 한반도에 쳐들어온 일본군은 끝내 물러가지 않고 남아 있다가 결국은 1910년 대한제국을 집어삼켰고, 35년간 이 땅을 식민지로 삼습니다. 일본제국은 원자폭탄을 두 발이나 맞고서야 연합국에 항복을 하고, 미군에 의해 무장이 해제되어 한반도에서 철군합니다. 그 때가 1945년 9월, 일본군이 한반도 땅을 밟은 지 51년 만에 물러간 것입니다.
남의 힘으로 얻은 해방은 온전히 우리 것이 되지 못해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북이 분단 점령되었고, 이것이 불씨가 되어 해방 5년도 되지 않아 한반도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맙니다. 남북 간의 전쟁은 유엔군과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제전이 되고, 이것을 기회로 전범국 일본은 재기에 성공합니다. 3년간의 전쟁은 휴전으로 얼버무려지고 남과 북은 둘로 나뉘어 각자도생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오랜 혼돈과 무질서, 학살과 군사독재의 시대를 거쳐 남쪽이나마 마침내 민주화를 쟁취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여전히 한반도는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으며,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인 미국과 중국이 힘겨루기를 하는 상황에서 지난날의 전범국인 일본은 미국의 최대 우방국이 되어 과거사는 잊고 공동의 적에 맞서자고 우리를 어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오늘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본 대한민국은 과연 어떠합니까?
과거에 우리는 종교를 믿는 사람을 ‘교인(敎人)’이라고 많이 불렀습니다. 그것은 불교와 기독교를 구분하지 않고, 아무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과 종교를 믿는 사람을 구분하는 말입니다. 또 다른 말로 ‘도인(道人)’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천도교에서 많이 쓴다고는 하지만 다른 종교에서도 썼던 말입니다. 교인이든 도인이든, 이 단어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했습니다. 아무리 과학자들이 인류가 포유류의 일종이라고 주장해도 사람과 짐승을 구별하듯이, 종교를 믿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가지고 보통사람과 교인(혹은 도인)을 구별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기독교는 흔히 ‘개독’으로 불립니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말에서 접두사 ‘개’는 볼품없고 하찮고 흔해빠진 것에 붙는 것입니다. 그 반대말은 ‘참’일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이름 앞에 참담하게도 ‘개’가 붙은 것은 변명의 여지없이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우리들의 책임입니다. 이에 대한 심각성을 못 느끼고, 책임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이 나라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기독교가 개독으로 불리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 원인이 구별되지 않음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거룩하게 살라”는 말씀을 따르지 않은 결과라는 것입니다. 세상과 구별되어 그들과 달리 생각하고 달리 살라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며,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면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과 어울려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생활하니 결국 기독교가 개독교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벗어나는 방법도 아주 간단할 것입니다. 일찍이 미국의 작가 쉘던이 제안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 뜻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시각이나 관습이 아니라 성서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관점으로 사는 것입니다.
137년 전인 1896년, 조선은 순진하게도 미국을 절대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이 나라 정부가 취하고 있는 태도와 유사합니다. 러시아는 청일전쟁으로 물러간 청나라를 대신하여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하는 대신 이권 획득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러시아 또한 그 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국력이 그 때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중국의 경우는 그 당시와 지금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종이호랑이가 되어 청일전쟁에 패하고 대만을 일본에 잃었는데, 종전 80년이 가까워지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대만은 중국과 분리돼 있습니다. 그렇지만 중국은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서 미국과 맞서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웃나라 일본은 어떤가요? 미국과 영국의 도움으로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역시 두 나라의 양해 아래 대한제국을 집어삼켰습니다. 그 후엔 중국 본토를 침략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지요. 그런데 하늘의 심판을 받았다고 믿었던 일본은 패전 후 미소 냉전을 기회로 다시 일어섰습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역사의 교훈, 잘못된 과거에 대한 반성을 배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대일본제국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일본, 그런 일본은 이웃나라에 경계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4. 깨어라, 일어나라!
2천여 년 전 예수님은 유대의 한 마을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제자 삼고 더불어 가르쳤던 이들은 당시의 보통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니, 보통 이하의 사람들을 더 가까이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들도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복음이었습니다. 너무도 쉽고 단순해서, 그 복음을 이해시키기 위해 어려운 신학과 논리를 동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자녀로, 용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그것을 알기는 무척 쉽습니다. 따를 의지만 갖고 있으면 일러주십니다. 어려운 것은 늘 실천입니다. 그 실천은 내 가족, 내 이웃, 내 직장 동료와의 반목과 싸움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로 그 십자가를 지지 않음으로 인해 이 나라는 여전히 이 모양이며, 그리스도의 이름은 개독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더 이상 패잔병처럼, 혹은 이미 죽은 자처럼 늘어져 있을 때가 아닙니다.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나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때가 왔습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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