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포스트사회주의 국가와 자본가의 탄생
* 이 논문은 2009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 학술연구조성사업비)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 되었음(NRF-2009-362-B00011).
개혁기 중국 지방국가와 자본가의 탄생*
―산시성 메이라오반의 사례
박철현
1. 서론*
2014년 3월 한국에 개봉된 중국 지아장커(賈樟柯)의 영화 <천주정(天注定)>은 4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촌장(村長)과 결탁한 자본가가 마을 탄광을 착복하여 치부(致富)한 것에 분노한 주인공이 엽총으로 촌장, 자본가, 회계사 등 불법적 착복에 관련된 인물들을 살해하는 내용이다. 현재 중국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충격적인 일들을 실감나게 묘사한 이 영화는 국유자산(國有資産)의 불법적 약탈에 의한 사유화(私有化)를 통해 성장한 자본가와 이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토지, 지하자원, 하천, 삼림, 초원, 황무지, 어장 등에 대한 국유(國有)가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중국에서 이러한 불법적 사유화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국가는 이러한 불법적 사유화에 어떻게 대처했는가?
보다 중요하게는, 사회주의 중국에서 자본가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2014年3月在韩国上映的中国賈樟柯的电影《天注定》由4个故事组成。
第一个故事是,主人公对与村长勾结的资本家侵吞村庄煤矿致富感到愤怒,用猎枪杀害村长、资本家、会计师等与非法侵吞有关的人物。 该片生动地描写了目前在中国发生的令人震惊的事情,充分展现了通过国有资产非法掠夺的私有化成长的资本家和大众对此的愤怒。 但是,在《宪法》规定土地、地下资源、河流、森林、草原、荒地、渔场等国有土地的中国,这种非法私有化是如何实现的呢? 国家如何应对这种非法私有化?
更重要的是,在社会主义中国,资本家是如何诞生的呢?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 이 논문은 개혁기 중국에서 자본가 탄생의 메커니즘과 그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을 분석한다. 주지하다시피 중국은 1978년 이후 개혁기에 들어서면서 계급투쟁과 계획경제를 특징으로 하는 마오쩌둥 시대와 결별하고 기존 체제의 개혁에 나선다. 개혁은 지역적으로는 동남연해 지역에서 시작되어 이후 북쪽과 내륙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시기적으로 보면, 1980년대가 농민의 농업경영 자율성 제고와 농촌 공업기업인 향진기업(鄕鎭企業)의 발전을 그 내용으로 하는 농촌지역 개혁의 시기였다고 한다면, 1990년대는 중국 체제의 핵심을 이루는 국유기업(國有企業), 단위체제(單位體制), 노동관계, 복지제도 등이 집중되어 있는 도시지역 개혁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为了回答这些问题,本文分析了中国改革时期资本家诞生的机制以及国家在改革过程中所起的作用。 众所周知,中国在1978年以后进入改革期,告别了以阶级斗争和计划经济为特征的毛泽东时代,开始了现有体制的改革。 改革从区域上看始于东南沿海地区,随后向北和内陆方向进行。 从时间上看,如果说1980年代是以提高农民的农业经营自律性和农村工业企业乡镇企业发展为内容的农村地区改革时期,那么1990年代则是集中中国体制核心的国有企业、单位体制、劳动关系、福利制度等的城市地区改革时期。
이 과정에서 1980년대부터 ‘개체호(個體戶)’가 도시와 일부 농촌 지역에서 점차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식품과 일용잡화 등을 생산·판매하는 개인상공업자들인데, 국가는 이들 개체호의 개인상공업을 허용함으로써 당시 막 시작된 ‘시장경제’를 실험하고, 도시지역에 만연해 있던 심각한 실업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했다. 이들 개체호는 1988년 전국인민대표대회의 헌법수정을 통해 합법적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뒤이은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건’을 계기로 중국의 대외관계는 경색되고 시장경제도 위축되는 듯했으나, 1992년 덩샤오핑(鄧小平)의 남순강화(南巡講話)를 계기로 시장경제가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특히 1990년대 본격화된 도시지역 국유기업 개혁으로 대규모 실업자가 발생했고, 이들 중 상당수는 개체호로 전환되어 사영경제(私營經濟) 성장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또한 도시로 이동한 거대한 숫자의 농민공(農民工) 중 일부는 당시 국유기업 개혁으로 해고된 노동자의 일자리를 메웠지만, 상당수는 국유경제가 아닌 사영경제 부문에 유입되어 개체호가 되었다. 아울러 1990년대 본격화된 국유기업 개혁 과정에서 산업구조조정을 통해 수많은 국유기업들의 사유화도 진행되었다. 그에 따라 사영경제가 전체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급격히 확대되어, 2001년 말 전체 GDP의 30%였던 것이, 2012년 말에는 전체 GDP의 60%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이들 사영경제 부문의 사영기업가(와 개체호)가 곧 개혁기 중국의 자본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개혁기 중국에 등장한 자본가는 1949년 10월 건국 이후 공사합영(公私合營) 등에 의한 상공업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완료된 이후 소멸되었던 자본가가 ‘사영기업가(私營企業家)’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한 것이며, 그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이 핵심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전국적 층위(nation-state scale)’에서 자본가의 재탄생과 국가의 역할에 대한 분석은 실제로 중국 현지에 존재하는 자본가의 현실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가 재탄생의 구조와 국가의 역할에 대한 전국적·추상적·보편적 차원의 분석이 중국의 광대하고 다양한 지역에 실재하는 자본가 현실의 역동성에 대한 설명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자본가 재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지방국가(local state)’와 지방의 사회 경제적 조건의 다양성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추가되어야 한다.
이 논문에서는 흔히 ‘메이라오반(煤老板)’이라고 불리는 산시성(山西省) 탄광기업 자본가의 출현에 대한 분석을 통해 개혁기 ‘중국 특색’의 자본가 재탄생과 그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을 분석하기로한다.
이 논문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서론에 이어서 2장에서는 다양한 지방국가와 지방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초래한 중국 사회주의의 특징을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과 비교해서 설명하고, 지방국가의 문제를 다룬다. 3장에서는 사회주의 시기 형성된 사회경제적 조건을 배경으로 개혁기 ‘메이라오반’이 라는 매우 독특한 ‘중국 특색’의 자본가가 탄생하는 메커니즘과 이들 메이라오반의 성격을 분석한다. 마지막 결론에서는 본문의 분석 내용을 정리 하고 메이라오반이 개혁기 중국 자본가의 다양한 전형들 중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짚어본다.
2. 중국 사회주의의 유산과 지방국가
1) 중국 사회주의의 특징
중국 지방국가와 지방의 사회경제적 조건의 다양성은 기본적으로 1978년 이전 중국 사회주의의 특징에서 기원한다. 1949년 건국 이후부터 개혁기가 시작되는 1978년까지 각 지방에서 축적된 역사적 경험이 지방국가와 지방의 사회경제적 조건의 성격을 규정한 것이다. 아래에서 중국 사회주의의 특징을 살펴보자.
건국 초기인 1953년 중국은 제1차 5년계획을 통해 중공업 위주의 발전 전략을 추구했다. 즉 가용한 모든 자원을 도시지역 중공업부문에 우선적으로 투자하는 방식의 발전전략을 추구하였고, 이러한 투자의 원천이 되는 ‘잉여’를 농촌 부문에서 농업세(農業稅)와 ‘강제수매 및 판매제도(統購統銷)’를 통해 추출하였으며, 호구제도(戶口制度)를 통해 농촌과 도시 사이의 인구이동을 차단했다.
중국이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과정을 소련 및 동유럽 국가들과의 비교사회주의 관점에서 연구한 배리 노턴(Barry Naughton)에 따르면, 이러한 발전 전략을 추구해온 중국 사회주의는 1970년대 말 다음과 같은 정치경제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당시 중국은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 및 동유럽 국가들과 비교해도 자원과 기술부존 상태에서 크게 뒤쳐졌고, 평균적인 소득 수준도 낮았다. 또한 농민이 전체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체 경제에서 농업이 공업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농민의 소득수준은 중국과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도시민보다 낮았으며, 심지어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농민보다도 낮았다. 또한 실업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은 이미 오랫동안 노동에 대한 수요가 공급을 초과한 상황이었던데 비해, 중국은 건국이후 줄곧 실업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었고, 노동자의 생산성도 이들 국가들에 비해서 낮았다.
둘째, 이처럼 1970년대 말 중국은 ‘저개발(underdevelopment) 국가’의 모든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당초 1950년대 건국 초기부터 중국은 교통 통신 인프라가 미발달했고, 기술은 아주 얕은 수준으로 보급되어 있었으며, 현대적 노동 관행은 널리 보급되어 있지 않았고, 생산물의 품질도 열악했다. 물론 소련도 1920년대에 이러한 문제점들의 일부를 경험했으나, 토지 및 다른 자원들이 중국보다 훨씬 풍부했다. 하지만 중국 사회주의 저개발 의 문제는 단지 이러한 건국 초기의 열악한 조건만이 그 원인이 아니고, 개혁기 직전까지 끊임없이 발생했던 각종 ‘정치운동’들이 기술과 경제에 대한 인적 행정적 통제능력을 점차 쇠퇴시켰던 점이 중대한 원인이 되었 다. 특히 1966년부터 10년에 걸쳐 진행된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은 그나마 축적해놓은 행정적 기술적 능력조차 크게 후퇴시켜버렸다.
셋째, 기후, 지형, 부존자원 등 지리적 조건이 중국 특유의 산업구조를 발생시킨 기초적인 배경이 된다. 중국은 비록 국토면적은 소련보다 작지만, 지리적 조건의 차별성은 훨씬 더 컸다. 이로 인해 중국의 산업구조는 소련보다 훨씬 이질적이었다. 소련의 경우 소수의 국영기업에 생산이 집중되어 그 숫자는 1979년 4만 개였고, 노동자 천 명 이상 규모의 공장이 전체 공업생산의 74%와 전체 노동자의 75%를 차지했다. 이에 비해 중국은 노동자 5백 명 이상 규모의 공장이 전체 공업생산의 40%였고, 1978년 국영 공장은 8만 3천 개였으며, 그 외 10만 개의 도시 집체기업(集體企業)과 70만 개의 농촌 집체기업이 존재했다. 소련 경제에서는 중앙정부가 장악한 대형 국영기업이 중요했던 반면, 중국 경제에는 이러한 대형 국영기업도 있었지만 소련에 비해 소규모였고, ‘집체기업’이라는 소련 경제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형태의 기업이 중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매우 중요했다. 즉 중국은 기업의 규모와 소유권 형태에서 소련보다 훨씬 다양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만연한 빈곤과 저개발, 거대한 국토면적과 지방격차, 이질적 산업구조 등으로 인해서 중국 사회주의는 계획경제라고는 하지만 중앙집권적 통제의 수준이 매우 낮았다. 예를 들어 중앙정부가 직접 통제하 는 상품의 숫자가 소련의 경우 1941년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는데, 특히 1965년 이후 중국은 그 숫자가 급격히 감소한다. 이는 중국 경제에서 ‘계획(plan)’이 상당히 조악한 수준으로 작동했으며, 중앙정부기구들이 계획하는 핵심 상품에 대한 권한이 실제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로 분리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석탄, 압연강, 시멘트 같은 핵심 상품들은 사실상 지방정부가 관할하는 공장에서 생산되고 그 배분도 지방정부가 결정했는데, 1970년 이후 이런 현상이 가속화되어 1970년대 중반이 되면 지방 정부가 시멘트의 50% 이상, 석탄의 40% 이상, 완성 철강제품의 25% 이상의 생산과 분배를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소련은 중앙정부가 자신이 계획하는 핵심상품에 대한 독점을 실질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지만,중국은 상당한 숫자의 핵심 상품의 생산과 분배가 중앙정부의 계획에 편입되지 못하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에 의해 ‘분점(分占)’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1970년대 말 진행된 ‘재정분권화(financial decentralization)’로 인해서 지방정부는 상당한 규모의 ‘예산외 자금(豫算外資金, extrabudgetray funds)’에 대한 통제권을 갖게 되었다. 전체 투자의 30%가 이러한 예산외 자금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렇게 1970년대 말 사회주의 중국에서는 중앙정부의 계획은 존재했지만 지방정부 층위에서 그 계획이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았고, 지방정부는 상당한 숫자의 핵심상품 생산과 분배 및 예산외 자금에 대한 장악을 통해 ‘사실상의 지방정부 재산권(the de facto local government property rights)’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재산권에 기초하여 자신의 지방이 운영하는 공장의 생산품에 대한 분배 권한 및 수익에 대한 우선적 권리를 보유하여, 지방의 경제발전에 깊은 이해관계를 가질 뿐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제들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후 개혁기에 들어서서 시장이 사회와 경제를 운용하는 핵심적인 기제로 확산되면서 지방국가들은 스스로 보유한 토지를 핵심으로 하는 국유자산(國有資産)과 행정적 제도적 자원을 동원하여 경제 발전에 나서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본가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2) 지방국가의 다양성
개혁기 중국은 1950년대 건국 초기 확립된 중공업 위주의 발전 전략이 아니라 중공업과 경공업 병행 발전 전략을 추구했다. 하지만 생산요소 중 노동을 제외한 자본과 기술이 모두 부족한 상황에서, 중국은 특히 농촌에 존재하는 거대한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하는 경공업 발전 전략을 모색하게 된다. 1980년대 초만 해도 여전히 과거 사회주의 시기의 유산이 사회와 제 곳곳에 강하게 남아 있는 상황에서, 시장경제를 전국적인 범위에서 동시에 도입 할 경우 발생 할 수 있는 실패와 저항의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에, 수도 베이징(北京)이나 경제 중심지 상하이(上海)과 같은 체제의 핵심 지역이 아닌 동남연해 광동성의 특구(特區)를 중심으로 저임금 노동력에 기반한 가공무역의 형태로 시장경제 실험이 시작되었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특구는 5개로 확대되고, 1992년 상하이 푸동(浦東) 지역이 ‘국가급신구(國家級新區)’로 지정되면서 시장경제를 핵심으로 하는 개혁개방은 내륙과 북쪽으로 점차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도시와 농촌 사이는 물론, 지방과 지방 사이에도 발전의 격차가 생기기 시작하여 동남연해 지역이 내륙에 비해 부유해졌다. 문제는 이러한 ‘부유-빈곤’ 및 ‘발전-낙후’라는 격차만이 아니라 지방 발전의 ‘다양성(diversity)’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각 지방이 처한 사회경제적 조건과 지방국가의 성격이 결합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미 1970년대 말 중국에서는 지방국가들이 상당 한 숫자의 핵심 상품의 장악과 재정분권화로 인해 생겨난 ‘사실상의 지방 정부 재산권’에 기초하여 자기 지역의 경제 발전에 깊은 이해관계를 가지는 ‘분권화된 사회주의(decentralized socialism)’가 출현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특 징이 개혁기 들어서 확산된 시장경제와 결합하면서 지방 층위에는 ‘발전의 격차’만이 아니라 ‘발전의 다양성’이 출현했다. 따라서 개혁기 중국에서 는 시장경제 확산을 배경으로 지방국가가 자기 지방의 사회경제적 조건에 대응하여 경제 발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본가가 탄생한 것이다. 또한 재정수입 분배 비율을 중앙정부가 더 많이 가져가도록 바꾼 1994년의 ‘분세제(分稅制)’로 재정수입이 감소된 지방정부가 재정수입 확보를 위해서 자신이 보유한 국유자산과 행정적 제도적 자원을 동원하여 경제 발전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것은 이러한 지방 발전의 다양성을 더욱 가속화시킨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발전의 다양성을 가져온 지방국가의 성격 문제는 학계에서 오랜 논쟁 대상이었다. 그 논쟁을 정리한 토니 사이치(Tony Saich)에 따르면, 개혁기 중국 지방국가의 성격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나뉜다.
첫째, 지방국가조합주의(local state corporatism)이다.
이 모델은 주로 장쑤(江蘇) 남부와 산둥(山東) 지역에서 1980~1990년대 폭발적인 성장을 보인 농촌 향진기업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이 지방들은 사회주의 시기부터 내려오는 집체기업(=사대기업)의 유산을 가지고 있었고, 그 유산이 개혁기 향진기업 성장의 기반이 되었다. 여기에 1980년대 ‘호별영농(戶別營農)’으로 인한 조세수입 감소와 예산제약의 강화를 배경으로, 간부들의 승진 및 보수를 경제 발전의 성과와 연계시키는 인센티브 구조가 지방국가의 간부들로 하여금 경제 발전과 관련하여 기업가적 태도를 취하게 만들었다. 간부들은 해당 지방 내부의 향진기업과 노동자 같은 ‘이익집단’을 중재하여 이익집단 사이의 협력이 지방 전체의 발전으로 이어지도록 유도했다. 따라서 이 모델에서 지방국가 간부들은 마치 기업의 ‘이사회(a board of directors)’처럼 행동한다.
둘째, 발전주의 국가(developmental state)이다.
이 모델은 기존 지방국가조합주의에 대한 반론으로 제기되었다. 이 모델에서는 지방국가가 해당 지방의 경제발전에 직접 개입하거나 스스로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에게 우호적인 물리적 환경과 자본에 대한 원활한 접근을 제공하고 외부 시장이나 조직들과의 연계를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지방 경제를 촉진하는 발전주의적 태도를 취한다고 주장한다. 즉 지방국가는 직접적인 경제적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가주의적 성격보다는 해당 지방 기업들의 성장에 유리한 사회경제적 환경조성과 행정적지원 제공을 통해‘발전주의적 지평’을 확대하는 역할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셋째, 약탈국가(predatory state)이다.
이 모델은 지방이 직면한 다양한 사회경제적 조건은 개혁기에 등장한 기업가주의나 발전주의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경제 발전을 하려 해도 경제 발전을 위한 사회경제적·정치적 ‘자원’이 부족한 지방국가의 간부들은 어떻게든 산업기반을 만들어내든가, 아니면 부패, 전횡, 횡령 등의 방식을 통한 ‘약탈’을 하든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자원이 부족한 곳에서 산업 기반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고 설사 만들어낸다 해도 재난적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자원이 부족한 지방국가는 ‘약탈국가’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약탈국가의 발생 원인 은 지방국가 간부들이 중앙정부나 지역공동체보다 개인적 이해관계를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모델에서는 기존 ‘지방국가조합주의’가 상정하고 있는 기업, 노동자, 정부가 참여하는 공동의 의사결정구조와 그것이 전제하는 ‘지역공동체 이익’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지방국가조합주의, 기업가주의, 발전주의, 약탈국가 등 개혁기 중국의 지방국가 성격을 규명하는 모델은 그 다양성만큼이나 현실에 존재하는 지방국가의 다양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모델은 ‘상호배제적(mutually exclusive)’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즉 현실에 존재하는 지 방국가는 이상의 모델 중 하나에만 해당된다기보다는, 여러 모델들이 혼재하는측면이더강하다.또한 상호 인접한 지역들에 서로 다른 모델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아울러 지방국가는 특정 모델에 고정되는 것이아니라,개혁기시간의 경과에 따른 국내외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하나의 모델에서 다른 모델로 ‘진화’하는 경우가 다수라는 점도 중요하다. 개혁기 중국 자본가의 탄생에서 전국적 추상적 차원에서는 국가가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상의 모델들이 보여주듯 현실에 존재하는 자본가 들은 지방국가의 다양한 성격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다 음 3장에서는 개혁기 자본가의 하나의 전형을 보여주는 메이라오반의 사 례를 통해 지방국가와 지방의 사회경제적 조건이 창출한 중국 자본가의 탄생과 진화를 분석하기로 하자.
3. 메이라오반: ‘중국 특색’ 자본가의 탄생
1) 산시성 탄광기업 재산권 구조의 변화
산시성(山西省)은 중국의 대표적 석탄 생산지로, 1949년 건국 이후 누적 석탄 생산량이 중국 전체의 1/4을 차지할 정도였다. 개혁기에 접어들면서 산시성에는 기존 국유 탄광회사가 사유화되거나 사영 탄광회사의 설립을 통해 ‘메이라오반’이라 불리는 탄광회사 사장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합법 적/불법적 수단을 동원하여 치부를 하고 아파트 투기를 통해 거액의 시세 차익을 남기고, 사치스런 생활을 하는 등 중국 사회에서 흔히 ‘벼락부자’ 의 대명사로 묘사된다.
물론 메이라오반이 개혁기 중국 자본가 탄생의 메커니즘을 유일하게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개혁기 초기 중국의 포스트사회주의로의 이행 과정에서 국유자산이 사유화되는데, 이 사유화 과정이 시장에서 객관적 평가에 근거한 공개적인 매각방식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기업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공장장, 간부, 노동자들이 공모하여 국유 산시성(山西省)자산을 사유화시키는 이른바 ‘내부자 사유화(insider privatization)’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소련 및 동유럽 국가들과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중국은 이들 국가들과 달리, 내부자 사유화의 과정을 국가가 ‘일정하게’ 관리 통제하여 국가와 사유화된 기업의 자본가 사이에 ‘후견인- 피후견인 관계(patron-client relationship)’가 형성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또 한 사유화 이후에도 자본가는 국가와의 지속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함으로 써 이후 기업경영에 필요한 행정적 제도적 기술적 경제적 지원과 정치적 비호를 얻어내려 했으며, 국가는 이러한 지원을 대가로 이들 ‘사영기업’에 영향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 공산당 조직을 설치하여 해당 지역의 사회와 경제에 대한 관리와 통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과 중대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메이라오반은 이러한 ‘중국 특색’의 사유화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개혁기 중국지방국가에 의한 자본가 탄생의 전형성을 가지고 있고, 분석대상으로서 의의를 가진다. 여기서는 우선 메이라오반 출현의 배경이 되는 중국 탄광기업 재산권의 역사적 변동을 살펴본 후, 탄광기업의 개혁 과정을 분석해보자.
현재 중국 헌법과 관련 법률에 따르면 지하자원은 국가소유이며 국무원이 이러한 국가소유권을 행사하는 주체이다. 현재 탄광의 소유권은 국 가에 속하지만, 그 점유권, 사용권, 수익권, 양도권은 국유기업, 집체기업, 사영기업이 획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권리들의 귀속 문제는 1949년 건국 이후 몇 단계에 걸쳐서 변화를 겪었다.
첫 번째는 1949~78년 시기로 건국 이후 산시성의 모든 탄광은 국가소유가 되었지만, 중앙정부 소속의 대형 국영탄광기업, 산시성 소속의 중소형 국영탄광기업, 사영기업이 병존하는 상황이었다. 사회주의적 개조가 시작되는 제1차 5년계획(1953~57년) 시기 산시성 정부는 중앙정부 소속의 대형 국영기업을 제외한 지방 국영기업과 사영기업에 대한 공사합영, 흡수 합병 등의 개조를 실시했다. 사영기업은 소멸되고, 지방 국영기업과 집체 기업 체제로 재편되었다. 이로써 산시성 탄광기업은 중앙정부 소속의 대형 국영기업, 지방정부 소속의 지방 국영기업, 집체기업 체제를 갖추고 개혁기 직전까지 유지되었다.
두 번째는 개혁기에 들어선 1980~1990년대이다. 사회주의 시기 중국의 탄광개발은 자원에 대한 무상(無償)배당 방식을 유지했으나, 개혁기 들 어서 점차 유상(有償)사용 제도를 수립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 초 산시성 을 ‘에너지 중화학 공업기지’로 만들려는 중앙정부의 전략에 의해 산시성의 탄광업은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중앙정부, 성(省)정부, 현(縣)정부만이 아니라 향(鄕)정부와 진(鎭)정부는 물론 기층의 촌(村) 층위까지 탄광기업을 설립하여 채광에 나서기 시작했다. 산시성 정부 는 이러한 기층의 탄광기업 설립과 채광(採鑛)을 적극 고무했을 뿐 아니라 이들 기업에게 국유은행의 저리장기대출을 통한 자금 지원까지 제공했다. 그 결과 산시성은 중앙과 지방의 국유기업, 집체기업, 사영기업으로 탄광 기업의 형태가 다변화되었다.
세 번째는 2000년대이다. 1980년대부터 점진적으로 추진되어온 탄광의 유상사용 제도를 확립하고, 주식제 형태의 국유기업과 사영기업 체제로 탄광기업을 재편한 시기이다. 산시성은 중국 최대의 석탄 생산 지역으 로서 탄광기업의 숫자는 많지만 그 규모가 영세하여 시장경쟁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개혁기 급속한 경제 발전에 따라 급증한 에너지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중앙정부 차원에서 중소형 규모의 탄광기업 설립과 채광을 고무한 결과, 채광과 관련된 난개발, 자연훼손, 안전사고 등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었다. 이에 산시성 정부는 5천 개 에 달하는 탄광을 합병하여 1천 개로 감축하고, 탄광기업도 기존 2천 개를 1백 개로 감축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합병하는 방식과 주식을 매입 하는 두 가지 방식을 통해 산업구조조정이 진행된 후, 산시성 탄광기업은 주식제 대형 국유기업과 대형 사영기업이 병존하는 체제로 재편되었다.
2) 메이라오반의 출현과 국유자산에 대한 약탈
메이라오반은 앞 절에서 살펴본 1980년대, 1990년대에 출현하는데, 여기서는 국가의 역할, 메이라오반의 출현, 사유화의 결과 등에 대해 분석해 보자.
첫째, 사영 탄광기업의 출현은 국가의 허가가 가장 큰 원인이다. 앞서 보았듯이 1980년대 개혁기 초기 급증하는 에너지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서 국가는 기존 중앙과 지방의 국유기업과 집체기업만이 아니라 사영기업의 채광도 허가했다. 주의할 것은 표면적으로 집체기업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실질적 소유는 개인인 사영기업도 존재했다는 점이다. 집체기업을 가장한 이들 사영기업은 세금, 대출, 임대, 에너지, 관리감독, 행정업무 등에 서 집체기업으로서 혜택을 제공받을 뿐 아니라, 집체기업의 형식을 통해 사회주의 유산이 아직 강고하게 남아있던 개혁기 초기에 발생 할 수 있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리스크’에 대응할 수 있었다.
둘째, 기존 탄광기업의 사유화는 관료와 사영기업가의 결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다수다. 시장이 사회와 경제를 운용하는 핵심적인 기제가 되어버린 1980년대, 1990년대 경쟁력을 상실하고 심각한 자산 손실을 입은 국유 및 집체 탄광기업은 엄밀한 자산평가도 거치지 않고 관료와 사영기업가 사이의 밀실 협의, 주먹구구식 협의를 통해 사유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관료는 ‘지대추구(rent seeking)’를 통해 자신이 해당 기업에 가지고 있던 이해관계를 극대화했고, 사영기업가는 관료의 이해관계를 보장해주는 대가로 적은 비용으로 국유기업, 집체기업을 사유화시킬 수 있었다. 또한 사유화가 완료된 이후에도 해당 관료로부터 정치적 비호와 경제적 행정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산시성의 중소형 탄광기업 상당수는 국유기업, 집체기업을 가리지 않고 이런 방식을 통해 사유화되었다. 또한 이들 기업은 내용적으로 사유화되었지만 집체기업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적은 채광비(採鑛費)만 납부하고 국유자산인 석탄을 채광하여 거액을 치부할 수 있었다. 아울러, 탄광기업의 채광권에 대한 실질적인 심사권은 시(市)정부와 현(縣)정부가 보유하고 있고, 성(省)정부는 최종 수리를 담당하는 구조 속에서, 사영기업가는 채광권을 획득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 리지 않고 국토(國土), 공상(工商), 안전(安全), 운영(運營) 등 현급(縣級) 지방정부 의 관련 부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
셋째, 문제는 이러한 관료와 사영기업가의 결탁 원인이 관료 자신의 개인적인 금전적 이해관계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관료와 사영 기업가의 결탁은 단지 개인적 부패, 전횡, 착복이 원인이 아니라, 개혁기 지방국가 재정수입 구조가 원인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2장에서 언급 했듯이 1994년 분세제로 인해 재정수입 감소에 직면한 지방정부는 자신이 보유한 토지를 비롯한 국유자산과 각종 행정자원을 동원하여 경제 발전에 정부 업무의 중점을 두기 시작하고, 토지와 관련된 각종 개발수익이 지방 정부 재정수입 항목에 ‘토지재정(土地財政)’이란 이름으로 고정되었다. 이렇게 개혁기 지방정부는 토지재정을 제도화 공식화하여 중요한 재정수입 항목으로 설정함으로써 토지와 그에 부속된 국유자산을 활용한 경제 발전을 중시하게 되었다. 따라서 국유기업, 집체기업의 사유화를 통해 관료의 개인적 이해관계만이 아니라 지방정부의 재정수입이라는 ‘구조적 이해관계’ 를 충족시킬 수 있다면, 지방정부는 적극적으로 사유화를 추진하고 그 과정에서 메이라오반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넷째, 탄광기업이 채광권을 획득하고자 하는 탄광은 지방국가가 소유 한 것인데, 개혁기 들어서 이러한 탄광의 점유권, 사용권, 수익권, 양도권 등을 매각하는 방식이 시장경제의 경매와 공개적 방식이 아니라 주로 행정배당(行政劃撥)이나 가격협의(協議定價)와 같은 비공개적 방식을 통해서 이 루어졌기 때문에, 메이라오반은 그 과정에서 연줄을 대야만 채광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따라서 메이라오반은 시장을 상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 고, 정부를 상대로 행동하는 데 많은 시간과 자원을 투자하게 되는 것이 필연적이다. 메이라오반 입장에서는 지방국가 관료들의 ‘정치적 접촉’과 관계 유지에 시간과 자원을 투자해야만 자신의 탄광기업이 맞닥뜨릴 수 있는 장래의 정치적 행정적 경제적 기술적 리스크들을 돌파하여, 장기적 안정적 수익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기층 촌민위원회(村民委員會) 주임(主任), 촌 공산당지부(共産黨支部) 서기(書記)가 탄광기업 개혁 과정에 적극 개입하여 이들 기업을 자신의 소유로 사유화한다. 중국 지방의 기층사회에서는 이들 주임과 서기 같은 정치 지도자가 정치권력을 통해 각종 형태의 행정자원, 정보, 인허가권, 국유은행 등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집체기업 개혁과정에서 적은 비용으로 기존 기업을 사유화시킬 수 있었다. 또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자신이 기층 정치 지도자 지위를 계속 유지하는 임기동안, 표면적으로 촌민 전체의 소유인 ‘집체 탄광기업’에 대해 각종 세금, 대출, 임대, 에너지, 관리 감독, 행정업무 등에서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거대한 수익을 확보할 수 있 게 된다.
여섯째, 문제는 이러한 사유화의 결과, 지방국가가 창출한 메이라오반은 집체기업의 형식으로 거액을 벌어들이고 이것은 모두 개인소유가 되는 데 반해, 해당 지역 주민들은 아무런 수익도 얻지 못하여 소득과 복지 수준은 점차 낮아진다는 점이다. 또한 집체기업이었던 과거에는 직공(職工) 들도 대부분 촌민이었지만, 사영기업이 된 이후 메이라오반은 촌민보다는 저임금과 낮은 복지비용만 제공하면 되는 ‘외지 농민공(農民工)’의 고용을 선호하게 되었고, 이윤 극대화가 지상목표가 됨에 따라 노동조건도 더욱 열악해졌다.
다시 말해서, 집체소유 탄광기업이었던 과거에는 기업의 경영진과 노동자 모두 해당 촌민들이 다수였기 때문에, 비록 시장경제가 사회와 경제를 운영하는 핵심적인 기제가 되어버린 개혁기에도, 탄광기업 내부에서 착취, 임금체불, 노동조건 악화 등의 문제가 심각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유화를 통해 사영기업이 된 이후에는 기업 노동자도 현지 촌민(村民)이 아니라 외지 농민공을 고용하고 착취, 임금체불, 노동조건 악화 등의 문제 가 심각해지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채광 과정에서 안전수칙, 환경보호 규정 등을 준수하지 않아서 각종 사고 및 환경오염으로 주민생활에 심각 한 위협을 초래하기도 한다. 또한 개혁기 GDP로 상징되는 해당 지방의 경 제성장이 지방국가 간부 및 관료의 승진과 보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GDP 증가에 도움이 된다면 지방국가는 탄광 기업들의 문제들에 대해서 눈을 감거나 심지어 적극적으로 비호하기도 한 다. 이렇게 메이라오반에게 공공의 이익에 관한 사회적 책임을 강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의 부재가 사유화 이후 기층사회의 공공성 상실을 초래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분석했듯이 지방국가가 주도하는 산시성 국유기업, 집체기업 탄광기업의 사유화를 통해 메이라오반이 출현했고, 그 과정에서 ‘국유 자산에 대한 약탈’이 이뤄졌다. 국유자산은 곧 국가가 모든 인민을 대리하여 소유하는 자산을 가리키는데,이 국유자산에 대한 약탈은 세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국유기업, 집체기업의 사유화 과정에서 이들 기업에 대한 엄밀한 자산평가 없이 관료와 사영기업가의 결탁, 혹은 관료 스스로의 사영기업가로의 변신을 통해 저비용에 의한 사유화가 이뤄짐으로써 국유자산이 평가절하된 만큼 사영기업가는 폭리를 취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표면상 집체기업인 사영기업이 온갖 종류의 세금, 대출, 임대, 에너지, 관리감독, 행정업무의 혜택과 편의를 제공받으면서도 난개발, 자연훼손, 안전사고 등을 일으키면서 국유자산인 탄광에 대한 채광을 시행함으로써, 채광으로 인한 폭리를 사유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셋째, 이러한 사유화의 결과 현지 주민들은 소득과 복지수준 저하, 노동조건 악화, 환경오염 등의 피해를 겪게 된다는 점이다.
4. 결론
이 논문은 중국이 사회주의에서 포스트사회주의로 이행하기 시작한 개혁기에 과거 건국 초기에 소멸되었던 자본가가 어떻게 재탄생하였고 그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하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선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과 차별성을 가지는 중국 사회주의의 특징인 ‘분권화된 사회주의’를 배경으로 ‘사실상의 지방정부 재산권’을 가진 지방국가가 개혁기 그 사회경제적 조건에 부합되 는 경제 발전을 추구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다음으로 개혁기 지방국가의 모델을 지방국가조합주의, 기업가주의, 발전주의, 약탈국가로 분류한 후 1980년대 초기 중앙정부가 산시성 ‘에너지 중화학 공업기지’ 건설 전략 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지방국가가 기존 국유기업, 집체기업을 사유화시키 면서 메이라오반이 탄생하는 메커니즘을 분석하였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메이라오반은 지방국가의 결정과 허가로 탄생했으며, 특히 기층사회의 당정(黨政) 간부나 관료가 형태상 집체기업이지만 사실상 사유화된 탄광기업을 소유하고, 간부가 관료 직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기업에 정치적 비호와 경제적 기술적 지원을 저비용으로 제공하는 방식을 통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사영기업가로 변신하여 지방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을 통해 거액의 수익을 획득하게 되는 양상을 규명했다.이러한 국유 및 집체 탄광기업의 사유화는 그 자체로 국유자산에 대한 ‘약탈’이고, 사유화된 탄광기업은 그 운영 과정에서도 착취, 임금체불, 노동조건 악화는 물론 안전사고, 환경오염의 문제를 발생시키며, 해당 지방 주민의 소득과 복지 수준을 저하시키는 것을 대가로 거대한 수익을 거둠 으로써 국유자산에 대한 약탈이 이뤄진다.
앞서 언급했듯이 지방국가의 성격은 국내외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한 모델에서 다른 모델로 변화하기도 한다. 최근 산시성의 메이라오반도 지방국가 모델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특히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 융위기에 의한 제조업 경기침체의 영향으로 중국에서는 석탄(煤炭)과 코크스(焦炭) 등 에너지 자원 수요가 급감하여 탄광기업들의 조업 중지와 폐업이 속출했다. 그러자 산시성 정부는 기술개발 등에 의한 생산성 향상, 인수합병에 의한 규모의 경제실현, 농업 관광업 부동산금융 등으로의 업종 전환 등의 방식을 통해 탄광기업들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기존 메이라오반도 지방국가와의 관계를 재조 정하면서 새로운 자본가로 재탄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향후 이러한 국내외 조건의 변화에 의한 산업구조조정이 가져온 국가와 자본가의 구조적 관계의 변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산시성 메이라오반으로 표상되는 개혁기 중국 자본가의 탄생과 진화를 지방 층위에서 보다 장기간을 대상으 로 조망할 필요가 있다.
박철현
국민대학교 중국인문사회연구소 HK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사회학을 전공했고, 최근의 관심 주제는 중국 도시, 공업도시, 기층사회, 동북 지역, 지방국가, 노동, 만주국 등이다. 대표논저로 『도시로 읽는 현대중국 1, 2』(공 저), 「중국의 도시재생과 기층 사회관리 체제의 변화」, 「중국 개혁기 사회관리 체제 구축과 스마트시티 건설」, 「중국 동북 지역 연구의 새로운 가능성 ‘노후공업도시’」 등이 있다.
참고문헌
민신 페이 저, 황성돈 역, 『불확실한 중국의 미래』, 책미래, 2011.
박철현, 「중국 동북 지역의 전형단위제와 ‘창판대집체기업(廠辦大集體企業)’」, 『만주연
구』 제25집, 2018. 「山西省人民政府辦公廳轉發省國土資源廳關於煤鑛企業兼幷重組所涉及資源採鑛權價
款處置辦法的通知)」(2009年 4月15日).
李利宏, 「煤鑛産權結構與資源型村莊治理: 基於山西五村的調査」, 山西大學博士論文,
2014.
Marc Blecher, “Developmental State, Entrepreneurial State: The Political Economy of Socialist Reform in Xinji Municipality and Guanghan County”, Gordon White (ed), The Chinese State in the Era of Economic Reform: The Road to Crisis, Macmillan Press, 1991.
Bruce J. Dickson, Red Capitalists in China: The Party, Private Entrepreneurs, and Prospects for Political Chan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Barry Naughton, Growing out of The Plan: Chinese Economic Reform 1978~1993,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Jean C. Oi, “The Role of the Local State in China’s Transitional Economy”, The China Quarterly, No. 144, 1995.
Tony Saich, “The Blind Man and the Elephant: Analysing the Local State in China”, Luigi Tomba (ed), East Asian Capitalism: Conflicts and the Roots of Growth and Crisis, Feltrinelli, 2002.
주
001 1988년 4월 제7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수정안 (中華人民共和國憲法修正案)」 제1조 수정안을 통과시켜서, 기존 헌법 제11조에 “국 가는 사영경제(私營經濟)가 법률이 규정한 범위 내에서 존재하고 발전하는 것을 허 용하고, 사영경제는 사회주의 공유제(公有制) 경제의 보충이다. 국가는 사영경제의 합법적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고, 사영경제에 대해서 지도, 감독, 관리를 실행한다”는 규정을 추가하였다.
002 사영경제는 사영기업(私營企業)과 개체공상호(個體工商戶, 개인상공업자)로 양분된 다. 사영기업은 다시 1인이 만든 독자(獨資)기업, 2인 이상이 만들고 공동경영, 수익 공유, 채무에 대한 무한책임을 특징으로 하는 합화(合伙)기업, 유한책임을 특징으로 하는 유한책임공사(有限責任公司)로 나뉜다.
003 공사합영은 1950년대 중국이 자본주의 상공업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진행하기 위해 서 취한 방법으로, 사영기업의 국가지분을 점차 증가시키고 국가가 파견한 간부가 기존 자본가를 대신하여 기업 경영권을 장악하는 것이다. 자본가는 제한된 기간 동 안 고정이자만 받다가, 기간 만료 후 기업을 국영기업으로 전환하여 사회주의적 개 조를 완료한다.
004 Barry Naughton, Growing out of The Plan: Chinese Economic Reform 1978~1993,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pp. 26~56.
005 중국 집체기업의 문제를 사회주의 시기 동북 지역의 사회정치적, 경제적 문제와 연 관시켜 분석한 연구는 다음을 참고. 박철현, 「중국 동북 지역의 전형단위제와 ‘창판 대집체기업(廠辦大集體企業)’」, 『만주연구』 제25집, 2018.
006 이러한 급격한 감소는 이듬해인 1966년 문화대혁명의 시작으로 국가기구 상당부분 이제대로작동하지못하게된것이그주된원인이다.
007 중국 정부의 조세수입은 예산 내 자금과 예산 외 자금으로 양분되는데, 전자는 중앙 정부의 공식예산에 귀속되고, 후자의 경우 공공시설 부담금, 도로 유지 비용, 각종 세 금, 각종 지방정부 소유기업 수입들로 이루어진다. 모두 지방정부가 통제 관리한다.
008 5개의 특구는 선전(深圳), 주하이(珠海), 산터우(汕頭), 샤먼(廈門), 하이난(海南)이다. 국가급 신구란 국가 전략적 차원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중앙정부인 국무원(國務 院)이 직접 지정하고 관리하며 관련된 특혜 정책을 시행하는 특구를 가리킨다.
009 Tony Saich, “The Blind Man and the Elephant: Analysing the Local State in China”, in Luigi Tomba (ed), East Asian Capitalism: Conflicts and the Roots of Growth and Crisis, Feltrinelli, 2002, pp. 75~100.
010 Jean C. Oi, “The Role of the Local State in China’s Transitional Economy”, The China Quarterly, No. 144, 1995.
011 향진기업은 농촌의 향(鄕)과 진(鎭) 지역에서 과거 사회주의 시기 인민공사(人民公 社)에 부속되어 농업생산과 관련된 철강, 시멘트, 화학비료, 석탄, 농기구 등 ‘오소공 업(五小工業)’을 생산하던 사대기업(社隊企業)이 개혁기에 들어서 일용소비품을 생 산하는 공업기업으로 변신한 것을 가리킨다. 1980년대 농촌 잉여노동력을 흡수하여 농촌소득증대와중국경제발전에핵심적인역할을했다.
012 Marc Blecher, “Developmental State, Entrepreneurial State: The Political Economy of Socialist Reform in Xinji Municipality and Guanghan County” in Gordon White (ed), The Chinese State in the Era of Economic Reform: The Road to Crisis, Macmillan Press, 1991, pp. 265~91.
013 약탈국가는 흔히 상상할 수 있는 서부내륙의 빈곤 지역에서만이 아니라, 동남연해 의 경제 발달 지역에서도 출현한다. 약탈국가에 대한 전반적 논의는 다음을 참고. 민신 페이 저, 황성돈 역, 『불확실한 중국의 미래』, 책미래, 2011; Bruce J. Dickson, Red Capitalists in China: The Party, Private Entrepreneurs, and Prospects for Political Chan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014 ‘메이(煤)’는 석탄, ‘라오반(老板)’은 사장을 뜻한다.
015 「중화인민공화국헌법(中華人民共和國憲法)」 제9조; 「중화인민공화국 광산자원법(中華人民共和國鑛産資源法)」 제3조, 제6조.
016 이하 산시성 탄광기업 체제의 변화와 메이라오반의 출현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
李利宏, 「煤鑛産權結構與資源型村莊治理: 基於山西五村的調査」, 山西大學博士論文, 2014, 145~149쪽.
017 1983년 중국 국무원은 「산시 에너지 중화학 공업기지 건설 종합규획(山西能源重化工基地建設綜合規劃)」을 발표하여, 산시성을 중국 최대의 에너지 중화학 공업기지로 건설하기 시작한다.
018 「山西省人民政府辦公廳轉發省國土資源廳關於煤鑛企業兼幷重組所涉及資源採鑛
權價款處置辦法的通知)」(2009年 4月15日).
019 리리홍은 산시성 탄광기업이 소속된 촌(村)을 기업의 소유권에 따라서 국유기업, 집체기업, 사영기업으로 나누고, 각 촌과 기업의 관계, 복지, 기층 민주의 문제를 분석 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리리홍의 연구성과를 사용하여 메이라오반의 출현 문제를 분 석한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 李利宏, 앞의 책, 149~162쪽.
020 중국에서는 이러한 관료와 탄광기업 기업주의 결탁을 ‘관매구결(官煤勾結)’이라고 한다.
021 이렇게 중국 농촌의 기층 자치조직인 촌민위원회(村民委員會)가 주도하고 촌민들이 자금을 모아서 설립한 기업을 촌집체기업(村集體企業)이라고 하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1980년대 초기 중앙정부의 적극적인 장려를 배경으로 산시성에는 촌집체소유
의 탄광기업들이 많이 생겨났다.
022 국무원은 2005년 6월 「석탄공업의 건강한 발전에 관한 약간의 의견(關於促進煤炭工業健康發展的若干意見)」을 발표하고, 경제적 효과 증대, 자원 사용의 효율성 증대, 안전사고 감소, 환경오염 감소 등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 한다. 또한 2006년에는 「산시성 석탄공업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정책조치의 실 험지역 전개 의견에 대한 국무원 동의 회신(國務院關於同意山西省開展煤炭工業可 持續發展政策措施試點意見的批復)」을 발표한다. 이후 산시성 정부는 대형 탄광기업에 의한 중소탄광기업의인수합병과지주탄광기업의설립등을통해탄광기업의 구조조정을 추진해오고 있다.
접수 2018-11-08 ● 수정 2018-11-14 ● 게재확정 2018-11-16
|
첫댓글 참고 : https://shanghaicrab.tistory.com/161524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