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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카페 게시글
시 창작 연구 스크랩 * 신현림 시인 ( 시모음 )
은하수 추천 0 조회 236 16.03.05 14: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신현림 시인 ( 시모음 )

 신현림 시인
1961년 경기 의왕 출생. 아주대 국문과 졸업.
사진작가,시인
1990년 「현대시학」에 "초록말을 타고 문득" 외 9편을 발표하면서 등단
시집「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세계사 1994)
「세기말 블루스」(창작과 비평사1996)를 간행함.
현재 상명대학교 디자인 대학원에서 사진학 전공중

 

 

 

나는 나에게로 돌아간다

그때 책이 가득 든 가방이 있었고
낙서판 같은 탁자마다 술이 넘쳐 흘렀네
괜찮은 사내며 계집이며
가까워질수록 잃을까 불안한 심정이며
시대가 혼란스럽고 취직이 힘들수록
쟁기처럼 단단해져야 할 마음이며
"아침이슬"과 미칠듯이 파고드는 러시아 민요
"검은 눈동자"를 들으며 몸 저리게 서러웠네

세월의 징검돌을 밟고
그들은 내 곁을 스쳐갔네
다시 칠 년 다시
소독약보다 지독한 시간이여

청춘의 횃불이 꺼져간다
괴로워야 할 치욕도 상처의 저수지도 잊어가고
우리의 숙명인 열정도 식어간다
근근이 살아가는 고달픔이란,
너는 허기져 삽살개를 찹쌀개로 헛발음하고
시계 사준다는 말이
나는 시체 사준다는 말로 들리고

혼자가 싫어 드라큐라라도 함께 있고픈 주말
사나운 날씨를 못 견뎌 헤매는 오후 네시
울지 않으려고 웃으면서
나는 나에게로 돌아간다

 

 

 

 

 

활짝 핀 살코기의 공허함을 아세요?

결혼해서 애를 낳아봐야 인생을 안다구요?
당신은 인생 좀 아세요?
고독과 슬픔의 최전방지대를 지나가보셨나요?
활짝 핀 살코기의 공허함을 아세요?
그래요. 남편과 아이는 잘하면 피난처고 복지국가죠
저라고 남편이란 해시계가 그립지 않겠어요
그래요. 저도 상상임신을 하지요
그럴 때면 아랫배에서 사이렌이 무섭게 울려요
종잡을 수 없는 인생이기에 불안하고 두렵군요
그래요. 끓인 밥마다 후회의 누룽지가 엉겨붙구요
그래요. 흰 장갑 낀 손들이 저를 따라다녀요
철컥, 치욕의 수갑이 제 손을 채웠어요
철컥, 치욕의 수갑이 제 목을 졸라요
욕망의 갈코리도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이 괴로운 살코기를 석방시켜 주시든지
오래 기댈 수 있게 당신 어깨를 빌려주시든지
제 눈은 또 오염된 바다예요
원 이래서야 세상 깨끗해지겠습니까 쓰레기만 불리고
인생께 미안한 마음 뿐입니다 죄송하지만
샌드페이퍼 같은 당신 혀로 제 눈깔 핥아주시고
물고기며 해초며 어선 한 척 띄워
살벌하게라도 웃게 해주세요
애국가가 울려퍼지면
한 번만이라도 크게 울게 두 눈을 쑤셔주세요
제 몸에 뿌리박힌 절망한 자들을 뽑아 잠재우고
죄란 죄 면죄부로 가려주시고
악몽과 불면의 고문실을 폐쇄시켜 주세요
아니면 낙동강에 저를 던지세요
가져가세요 절 좀 가져가세요 제발!

 

 

 

 

 

노란꽃을 드릴께

아귀다툼의 바닷물을
오래 끌고 다니면
어둠은 하얘지기도 했어
철로 위엔 노란 꽃도 피어났어
무덤들은 흙을 풀어헤쳐 쉬기도 했구

물결치는 관 위에
호수를 띄우기라도 하면
웃음의 향기가 메아리쳤어
철로 위의 노란 꽃도 손에 와 앉았어
손가락 새로는 세상의 눈물도 보이구

푸른 빵에 주린 몽유병으로
강물을 오르면 넘어지기도 하겠지
이 큰 눈에 가득 담겨오는
헐벗어서 더욱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면 노란 꽃을 드릴께

 

 

 

 

 

우울한 스타킹

진흙눈이라도 퍼부을 듯이 하늘이 우울하다
유언장처럼 십이월은 우울하다
매년, 일년은 사서 금방 올이 나가는 스타킹이다
스타킹 끝을 잡은 당신은 쓸쓸해서
살바도르 달리의 시계처럼 흐물흐물해질 것 같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탄광의 석탄처럼 쏟아져나온다
뭐 하나라도 움켜쥔 자의 저쪽,
으스대는 망년회 촛불들은 몽둥이만 같구나
하늘에게 빈 손을 내저으며 구원을 부르짖지만
여태 난 뭘했나? 대체 당신은 그렇게 살아도 되나?
무력감을 잊도록 위로하는 건 제대로 없다
흑맥주를 마시며 떠들어대봤자, 전화질을 해봤자
공허감의 톱날은 가슴을 자르며 지나갈 것이다

잘 열리지도 않는 문을 계속 두드리는 사람들
소멸로 운반하는 전지전능한 절망감을 넘어
나의 당신, 돌고래처럼 튀어올라라

 

 

 

 


이별한 자가 아는 진실

담배불을 끄듯 너를 꺼버릴꺼야

다마시고 난 맥주 캔처럼 나를 구겨버렸듯
너를 벗고 말거야
그만, 너를, 잊는 다,고 다짐해도
북소리처럼 너는 다시 쿵쿵 울린다

오랜 상처를 회복하는데 십년 걸렸는데
너를 뛰어넘는 건 얼마 걸릴까
그래, 너는 나의 휴일이었고
희망의 트럼펫이었다
지독한 사랑에 나를 걸었다
뭐든 걸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했다
네 생각없이 아무일도 할 수 없었다

너는 어디에나 있었다 해질녁 풍경과 비와 눈보라,
바라보는 곳곳마다 귀신처럼 일렁거렸다
온몸 휘감던 칡넝쿨의 사랑
그래, 널 여태집착한거야

사랑했다는 진실이 공허히 느껴질때
너를 버리고 나는 다시 시작할거야

 

 

 

 

 

나의 싸움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과
저승냄새 가득한 우울과 쓸쓸함
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당신의 참 쓸쓸한 상상

더도 말고 보름간만
호텔 룸 서비스를 받으며
호사스런 식사를 하겠다고
아이스크림같이 녹아내리도록
그녀 품에 안겨 애무를 받겠다고
뜨거운 함박눈 속 바위처럼
다만 파묻히고 싶다고
더러워진 와이셔츠, 고뇌의 쇠사슬을 죄다 풀어
태풍 부는 해안처럼 울고 싶다고

어쟀거나 지 임자도 있으면서
엉큼한 당신, 쓸쓸한 육신
어리석고 서글픈 우리네 육신

 

 

 

 

 

가족

왜 집이 자주 황량한 장독이어야 하죠

장독 한 채에 온 식구 쌓아넣고
해 뜨는 땅으로 아버지는 떠났다
매일 파산만 하고 돌아온 아버지
다시 해를 가지러 떠났고
홀로 감자알 같은 자식을 다스리는 어머니
노을 지는 강이 되고
토막난 갈치가 되어 은비늘 날개를 털며
밤상 위에서 서럽게 웃고 계셨다
자식들의 언덕, 그 가파른 혹을 오르내리셨다

풍운의 아버지, 장독이 깨질 것 같아요
쓰러지세요 해 뜨는 땅이란 없나 봅니다
저희들이 해가 돼드릴게요
뜨끈뜨끈한 밥덩이가 될게요
어머니의 정글이 고통의 톱날에 마구 베어집니다
추워요 무서워요
다신 떠나지 마세요

 

 

 

 

 

함몰하는 저녁에

갑자기 우리는 미친듯이
어설프게, 부끄럼도 없이
고민에 빠져서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나보코프의 이 말을 나는 좋아한다
폐선처럼 흔들려도 너를 좋아한다
피묻은 가운을 걸친 채
작업장에서 돌아와 너는 나를 원한다
날아가버린 새들을 부르면서
저녁 창가에서
그래, 서로에게 흘러가는 거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인 듯이 미친 듯이
서로의 몸 속에 긴 굴을 파는 거다

밖은 언제나 싸늘한 수술실이다
세월의 침대 위에서
너와 나는 무용한 메스였고
세상의 불길한 점인지도 모른다
너를 거절한 희망이 내 목을 조른다
세상은 우리를 초대 안했는지도 모른다
괴롭지만 내일 또한 밖을 향해 기어가기 위하여
나의 억압 너의 제복을 찢고
저 차가운 노을 끄고
너는 온몸 밀고 달린다
눈물의 앰블런스가 달린다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은 밀실로
너와 내가 죽어
처참히 살아나는
쓸쓸한 묘혈 속을 달린다

 

 

 

 

 

행복한 악몽을 위하여

눈에서 눈으로 눈물이 흘러 세상을 채우는구나

죽음의 사냥개가 뚫어지게 나를 보고 있구나

좀더 긴 청춘을 갖고 싶었어

나로부터 뛰쳐나가고 싶고

제대로 서 있기 위해 언제나 힘이 들었지

해와 강과 나무를 사랑하며

빵처럼 따뜻한 사람 기다렸어

행복하기 위해 그토록 괴로웠구나

악몽이었어 행복이란

푸른 바다 은고기떼를 부르기 위해

은고기를 안고 쉬기 위해

가슴은 어부의 그물처럼 마냥 흐늘댔구나

 

 

 

 

 

그대는 혼자가 아니리라

그대 슬픔 한 드럼통 내가 받으리라

감미로울 때까지 마시리라 평화로운 우유가 되어

그대에게 흐르리라 또한 태풍같이 휘몰아쳐

그대 삼키는 고통의 식인종을 몰아내고

모든 먹고 사는 고뇌는 단순화시켜 게우리라

술에 찌든 그대 대신 내가 술마시고

기쁜 내 마음 안주로 놓으리라

그대 병든 살 병든 뼈 바람으로 소독하리라

추억의 금고에서 아픈 기억의 동전은 없애고 말리라

그대 가는 길과 길마다 길닦는 롤러가 되어

저녁이 내리면 그대 가슴의 시를 읊고

그대 죽이는 공포나 절망을 향한

테러리스트가 되리라 신성한 연장이 되어

희망의 폭동을 일으키리라

하느님이 그대의 희망봉일 수 있다면

물고기가 되어 교회를 헤엄쳐 가리라 험한 물결

뛰어넘으리라 간절히 축복을 빌리라

그대는 혼자가 아니리라

영원히 홀로치 않으리라




자화상

울음 끝에서 슬픔은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

울음은 사람이 만드는 아주 작은 창문인 것

창문밖에서
한 여자가 삶의 극락을 꿈꾸며
잊을 수 없는 저녁 바다를 닦는다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나뽈레옹의 이 말은 10년 동안
내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송곳이었다
게으름을 피울 때마다
내 많은 실패를 돌아볼 때마다
송곳은 가차없이 찌르고 찔러왔다

모든 불행엔 충고의 송곳이 있다
자만치 말라는, 마음 낮춰 살라는 송곳
불행의 우물을 잘 들여다보라는 송곳
바닥까지 떨어져서
다시 솟아오르는 햇살의 송곳

송곳은 이제 지팡이처럼 내게 다가와
신들린 듯 거친 바다처럼 밀어간다 

 

 

오늘의 마지막 커피를 마시고

오늘의 마지막 커피를 마시고
훗날에 흐려질 기억과
한 사람으로 괴로웠다

훗날에 잊혀질 방에서
아름다운 모차르트를 틀어놓았다
훗날에 사라질 내 젊은 육체를
어두워진 창문에 걸어두었다

창 밖에 바람이 분다
창 밖의 육신이 흩날린다
창 밖의 바람이 속삭인다

"모든 건 사라지기에 아름답고
삶은 짧기에 매력이 있는 거야"

창 밖의 육신이 사라진다

 

 

 

 

 

죽음의 유혹

설흔의 새벽
설흔 번의 일몰이 무섭다
설흔 번의 너의 유혹이 무겁고
숨어든 욕망의 뱀인 네가 슬프다

비밀한 너의 발길, 너의 입김이
왜 괴로운 격정의 밤으로 쏟아지는지
왜 너는 술잔과 유행가에 어김없이 머무는지
가끔 내겐 월급이 조의금처럼 가슴이 저리는지
알고 싶다
왜 친한 사람들 속에서 자주 외롭고
믿었던 빛이 목발을 짚고 오는지
자랑이나 칭찬, 애정의 맹세가
무너진 방공호 같은지
왜 애인들에게 손은 제대로 가닿지 않고
더 이상 살아도 기쁨이 없을 것만 같은지
희망으로 위장된 나의 절망이
해질녘이면 더욱 견딜 수 없는지
왜 우울과 불안의 발작은 게속되는지
그것이 너 때문인지 아닌지를 알고 싶다
정말 나는 살아 있는 것인지

너를 뛰어넘고 싶다
설흔 번의 새벽
설흔 번의 일몰이 무서워
설흔 번의 유혹이 무거워
너를 뛰어넘고 싶다
언젠가 네가 흘러와
허망한 내 몸에 불 지를

검고 검은 물아 




삼십삼 세의 가을

삼십삼 세란 무엇인가

아이 하나, 둘 유아원에 보내거나

미리 죽어 목화솜 같은 바람으로 떠돌거나

우울의 강둑을 거닐며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 달래거나

좀더 넓은 아파트

좀더 안정된 살림을 위해

고되고 답답한 나날을 장승처럼 견디는 것인가

돈을 모아 자유로울 수 있다면

하고 싶은 일로 밥을 먹을 수만 있다면

성취와 만족은 얼마나 먼 등대인가

등대와 가을 태양을 보며 사무치는

나의 삼십 삼 세란

무엇에든 용감해지는 일이다

바람 속 장작불처럼 거친 외로움은

죽음의 공포쯤은 커피 마시듯 넘겨주는 일

지금껏 사랑했는가 무얼 제대로 사랑했는가

슬프다면 대신 울어주마

불쾌하다면 기분을 바꿔주마

손을 내밀어 情人들을 편안히 맞이하고

내 안의 깊은 산책길을 따라

잊고 지낸 것을 생각하는 일이다

간소하게 사는 매력과

초조하게 들린 시계소리가

얼마나 어여쁜 노래인가 느끼는 일이다 

 

 

당신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아

흰 풀뿌리 같은 목소리에 이끌려

비바람 속에서 내 발은 부푼다

비바람 속에서 당신을 찾아 떠난다

얼굴 한번 어루만지고 싶어

착한 마음 비치는 눈을 보고 싶어

멀리서 흰고래처럼 춤추는 당신

닿을 듯 닿지 않는 당신을

훔쳐만 보고 잠잠히 사라진다

 

 

 

 

사랑은 변하여도 사랑이다

왜 모든 존재는 사랑인가?
그 말없는, 끝없는 대화

사랑은 변하여도 사랑이다
그저 그런 한없는 아귀다툼이다

어떤 존재는 속이 빈 무덤

왜 오래된 밀애로
따뜻한 사체를 잉태하는가?

이젠 말하기도 싫다
고장난 시계를 풀어두고
네게 끝없이 잡아먹히고 싶다

당신이 티슈에 써준 시를 보며
<사랑은 변하여도 사랑이다>에
한참 머뭇거린다
그래, 막 구워낸 빵과 식어서
나무처럼 딱딱한 빵은 여전히 빵이다

<피차 사랑하라> 외치며
식은 빵 따순 빵 언 빵이 내게 쏟아진다
하늘에서 땅에서
내 옆구리에서 빵이 구워져 나온다

이천년이 돼도 이천년이 지나도
그 빵을 먹고 처치곤란한 기운을 쓰며
나의 모두에게 애정을 기울여도
외로움은 보험처럼 남을 것이다

당신도 그 누구도 때로 슬픔으로 다가오지만
나는 고장난 시계를 고치며
사람들의 바다에 가장 아름다운
고래 한 마리 띄울 것이다 

 



키스, 키스, 키스!

떠드는 말이 부딪혀 상처와 이별을 만들고
따뜻한 수증기로 스미면 마음의 키스가 되지
키스, 키스, 키스! 번역해서 뽀뽀는 얼마나 이쁜 말이니
삶이 아프지 않게 시원하게
말은 사려깊은 타월이 돼야지

매순간 모든 이로부터 버려질 쓰레기까지
뽀뽀하는 마음으로
"네 일은 잘 될 거야 네 가슴은 봄바다니까"
인사하는 바로 그것,
삶이 꽃다발처럼 환한 시작이야 

 

 

아무 것도 아니었지

너는 아무 것도 아니었지
순식간에 불타는 장작이 되고
네 몸은 흰 연기로 흩어지리라

나도 아무 것도 아니었지
일회용 건전지 버려지듯 쉽게 버려지고
마음만 지상에 남아 돌멩이로 구르리라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도 괜찮지
옷에서 떨어진 단추라도 괜찮고
아파트 풀밭에서 피어난 도라지라도 괜찮지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의 힘을 안다
그 얇은 한지의 아름다움을
그 가는 거미줄의 힘을
그 가벼운 눈물의 무거움을

아무 것도 아닌 것의 의미를 찾아가면
아무 것도 아닌 슬픔이 더 깊은 의미를 만들고
더 깊게 지상에 뿌리를 박으리라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느낄 때
비로소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무엇이든 다시 시작하리라

 

 

 

 

 

내 마음 속 보리알 하나

헤어져도 헤어지지 않은 것 같아
네가 날 지켜보거든
네 시선은 나를 비추는 플래쉬
어딜 가든 플래쉬 불빛이 긴 융단처럼 펼쳐지거든
어딜 가든 네 생각이 나거든
내 주머니에 넣어준 사탕 하나
내 마음에 넣어준 빛의 보리알 하나
내 눈동자에 그려준 바다 하나

바다가 푸른 건 세상이 우울하기 때문이랬지
하늘이 푸른 건 그래도 삶이 살 만하기 때문이랬지

네가 그리우면 어떡하지
그리운 내 마음은 진흙땅처럼 질퍽하지
네 마음의 뻘에 내 발이 푹푹 빠지고 있어

잊지 못할 거야 잊지 않을 거야
네 사랑으로 자신감을 얻었어
살아가는 이유를 얻었어

 

 

 

 

나의 시

나의 시는
오르는 물가를 잠재우지 못하고
병든 자의 위로도 못 되고
뜨거운 희망을 일깨우는 망치소리도 못 되고
네 상처의 주름살도 지우지 못하고
그래, 아무 힘도 못 되지

그래도 날 여류시인이라 부르진 마
여류가 뭐야? 이쑤시개야, 악세사리야?
여류는 화류란 말의 사촌 같으니
여자라는 울타리에 가두지 마 폄하하지 마

세상을 향해 품을 열어놓고
나는 돌아본다
뭣보다 진하게 느끼는 세기말을
도시의 우울과
슬픈 열정의 그림자를

사람의 욕망과 쓸쓸함을
솔직하게 비춰내고자
괴로움을 넘고자 내 노래는 출렁인다
거침없이 일렁이며 흘러가고자

사무치는 아리랑처럼 격정의 록처럼
푸른한 재즈, 블루스처럼

 

 

 

 

빵을 가진 남자

먼 빛 속에서
출렁거리는 아침바다로 오십니다
창공을 흔들고 제 가슴을 치며
야생화보다 풋풋하게 오시는

당신은 해저같이 캄캄한 제 영혼이
끝없이 다다를 역입니다

인간이 결국
무덤이라는 둥근 빵을 얻기 위해 살듯
빵을 가진 마음처럼 둥그래져야겠지요

빵 속의 해와 강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끌어안은 당신이 아름답습니다
무덤까지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나폴레옹의 이 말은 10년 동안
내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송곳이었다
게으름을 피울 때마다
내 많은 실패를 돌아볼 때마다
송곳은 가차없이 찌르고 찔러왔다

모든 불행엔 충고의 송곳이 있다
자만치 말라는, 마음 낮춰 살라는 송곳
불행의 우물을 잘 들여다보라는 송곳
바닥까지 떨어져서
다시 솟아오르는 햇살의 송곳

송곳은 이제 지팡이처럼 내게 다가와
신들린 듯 거친 바다처럼 밀어간다

 

 

 

 

따뜻한 다리를 꿈꾸며

꽃상여 같은 가슴 뒤흔들고
오래 함께 있어야 할 사람들이 사라진다
언제 무엇이 산산조각난 시계가 될지 모른다
겨울나무만큼 여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해가 기울 때처럼
발 아래 땅이 허물어지는 기분을 어찌 견뎌야 할지
삐걱거리는 다리마다 문마다
저승으로부터 울려오는 오열이 흐른다
죽음보다 뼈아픈 슬픔을 이기려는 울음소리가

창밖 강물이 깃발처럼 굽이친다
사라진 자들이
희망의 호롱불을 켜라 한다
사람과 사람이 손을 잡듯
삶을 이어주고 만나게 하는
부드러운 다리를 만들라 한다
따스해서 끊어지지 않는 다리
헤어져도 헤어지지 않는 다리를

뭐든 다시 시작해야 한다

 

 

 

 

깨어 펄럭이는 여자

온 강산에 폐수의 작두가 굽이친다
물고기와 물새들이 말없이 으깨진다
꽃과 나무가 마른다 마른 바람에
뜨거운 무덤들이 흘러온다
독초의 인간들이 흐른다

지구는 공해의 박람회장
지구는 울부짖는 모래밭

허공에 뜬 돌이 된 빵과
불행한 밤들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
깨어 흐느끼는 시간
깨어 펄럭이는 인간이길 바란다
불행 줄이기를 열망한다
나만 살다 끝날 세상의 아니니
무지와 무관심은 파멸이다
도처에 문명의 배설 쓰레기 폭설이다
아이들 몸까지 꿈 속까지 무섭게 밀려온다

아이들을 사랑한다 지옥이라도 내 땅
내 마지막 터전을 사랑한다
목숨을 나눈 대자연 앞에
인간임이 부끄러워 참회록을 쓴다.

인간임이 부끄러워..

 

 

 

 

겨울 정거장

겨울은 외투주머니에서 울고
추운 손들은 난로 같은 사람을 찾는다
오후의 저무는 해 아래 모두
깡마른 기타처럼 만지면 날카롭게 울부짖을 듯하다
싸구려 운동화처럼 세월이 날아가는데
생활은 변한 게 없고 아무도 날 애타게 부르지 ?고
특별한 기억도 없다 어리석은 열망으로 뭉친
얼음덩이처럼 서로 가까워지는 일은 불가능한 듯
침묵의 물살에 떠밀려가는 것이 강물빛이 변하고
벌써 늙어간다는 것이,
어두워지는 창공에 흰 백지장이 나부낀다
내 장갑을 누군가에게 벗어줄 기쁜 위안이 그립다

희망의 작은 손전등을 들어
내게 오는 자를 위해 길을 비춘다
나는 즐거운 타인이 있으므로 살아가고
삶은 그들에게 벗어나려 할 때조차
그들에게 속하려는 끝없는 노력이므로
감미로운 고통에 싸여 길을 비춘다

 

 

 

 

내 여인이 당신을 생각한다

저녁 태양은 빵같이 부풀고
언덕은 아코디언처럼 흘러내립니다
거리에 북풍이 넘치도록 그녀는 당신을 생각합니다
우연히 만난 길과
알 수 없는 희망에 들뜬 날들을
소리가 아픈 풍금이 북풍따라 노래하고
당신에게 나던 사막의 붉은냄새가 몰려옵니다
잠시 바라보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렸나요
그냥 앞에 계시는 것만으로 기쁨에 넘쳐 봤든가요
소중해서 숨긴 애정의 힘이 비탈길을 오르게 합니다
정든 이의 행복을 빌고 하늘에 새들이 날아드는
가장 아름다운 시간에 헤어져야 합니다
그녀는 당신이 그린 수묵화입니다
수묵화 한 장이 비바람에 젖습니다
뱃사람이 풍랑을 이기며 바다를 밀고 가듯
사람들은 저마다 추억을 견디며 오늘을 건넙니다

 

 

 

 



이상하지요 비통하도록 아름다운 것을 보면
온몸이 대책없이 부풀어 올라요
터질 것 같은 애드벌룬처럼 말이죠
적요한 방과 흰 애나멜로 칠한 문, 가구의 나무냄새
오후 여섯 시 회사복도에서 본 창 밖의 세계
이미 없는 푸른 물의 기억이라든가
장례식 행렬 더럽혀진 작업복
겸손히 흐느끼는 굽은 등과 빵 같은 아가
아, 은밀한 침묵에 쌓인 책장 그리고
몸서리치는 은사시나무 나뭇잎
상실에 저항하는 것들...

모두 말아먹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갖고 난 후의
무서운 허탈감을 상상하면 견딜 수가 없어요
끌어안은 사람이나 사물이 갑자기 서류뭉치처럼
구겨져버리거나 내 자신이 고드름처럼 녹아버리거나

삼십센티만 떨어 앉지요
저는 이 거리를 집착해요 안전하고 자유롭지요

닭갈비를 뜯다보니 제가 닭이 되는 기분입니다
털이 몽땅 뽑힌 비밀이 없는 슬픔
생계의 짐, 추억과 죽음의 짐, 정욕의 짐
운명의 갈빗대가 휘지 않도록 개갈비 돼지갈비 쇠갈비로
영양보충한다는 슬픔
오늘 밤하늘이 서럽도록 작렬하네요

 

 

 

 

갑자기

갑자기 한바구니 오렌지가 먹고 싶고
갑자기 커피 냄새 나는 사람이 그립고
그 사람과 신나게 춤을 추고 싶고
풀밭의 호랑나비처럼 태양을 입고 날고 싶다

갑자기 행인들이 둥둥 떠다니는 환상을 본다
꾸질꾸질한 재개발아파트가 무너질 듯 비바람이 불면
아랫집 옆집 연탄가스가 수의처럼 날려온다
창을 열고 산성비에 천사가 녹아버렸다
빌어먹을 인간들! 나는 욕하면서 부끄러웠다
왜 이렇게 살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
나 자신이 답답해 죽고만 싶었다

액자 속의 그림같이 조용히 살다가도
갑자기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초록 말을 타고, 문득

돌아본다
세월의 넝쿨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산
여전히 검다

산은 구겨진 땅에 욕된 얼굴들을
쏟아내고 흐린 빛을 깨문다
폐 속에 이끼를 뜯어내고
나는, 초록 말을 꺼내 탄다

하늘은 멀고 갈 길이 아득할 수록
지상은 연한 환희로 가득 차 보인다
자주 늘어나는 목에선
우울의 가래가 튀어나온다

사람마다 지르는, 길고 축축한
비명에 뜨거워지는 철로변에서
얼마나 격렬히 끌어안아야 하나
이 죽음의 민둥산을

 

 

 

 

혼자 사는 일

일어설 수도 없이

마음은 가랑비처럼 부서져내린다

꿈도 희망도 없이

헤매던 맨발은

죽음 가까이 아주 가까이

저녁 강 따라 흘러간다

먼 창가 흰 등불 비쳐나면

환한 웃음 메아리치는

아늑한 집이 그리워

쓸쓸한 내 손 잡아줄

당신이 그리워

 

 

 

 

술자리

이들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앞으로 몇번이나 만날까

이것이 마지막이면 무슨 말을 할까

머리라도 쓰다듬어줄까

情人들과 즐겁게 술상에 둘러앉다

한명씩 떠나는 것이 인생일까

조촐한 인생이란 술자리

 

 

 

 

가을 빨래

바다가 보이는 곳에
빨래를 널어두었다

셔츠가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겠지

나무를 보면 나무를 닮고
모두 자신이 바라보는 걸 닮아가지
자신이 그리워하는 것을

기다리면 언젠가 그대가 다가오듯
가을을 그리워하니
어느새 낙엽이 떨어진다

 

 

 

 

가질 수 없는 건 상처랬죠?

가질 수 없는 건 다 상처랬죠?
닿지 않는 하늘 닿지 않는 바다
돈이 없어 닿지 않는 외투
벌릴 수 없는 방 두 칸짜리 집
닿지 않는 사랑

절망의 아들인 포기가 가장 편하겠죠
아니, 그냥 흘러가는 거죠
뼈처럼 흰구름이 되는 거죠

가다보면 흰구름이 진흙더미가 되기도 하고
흰구름이 배가 되어 풍랑을 만나고
흰구름 외투를 입고
길가에 쓰러진 나를 발견하겠죠

나는 나를 깨워 이렇게 말하겠죠
<내가 나를 가질 수 없는데
내 것이 아닌것을 가져서 뭐하냐구요





세월, 갈 테면 가라지요

멸종된 인간은 그리움이지만
멸종된 시간은 두통이다

사라진 어제를 향해
"그래, 네 맘대로 가라"
문을 열었다 닫는 순간
팔십년대의 그림자가 피걸레처럼 뒹굴고
투사의 외로운 운동화가 쓰러진 곳에
우르르 삐삐와 쇼핑백을 든 이들이 몰려갔다
가는 곳마다 종말의 쇠사슬인 차가 밀렸다
사람들은 제멋대로 흩어졌다
어떤 친구는 따분하다며 무덤으로 갔고
나의 할아버지는
밥 한끼 먹었을 뿐인데 백년이 지났단다
기계의 나사가 빠지면 재빨리 갈아끼우듯
세대교체는 간편했다
세월은 구름처럼 단조롭고 졸립지요
영화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을 보니
노을만큼 눈이 화악 떠집디다
비디오는 이 시대의 마약입니까?
저승 가는 길에도 비디오방에 들르시오
잠옷처럼 편한 바람이 불면
그날만큼은 TV를 끄고 시를 읽어주세요

제 청춘의 바통을 받으시고
흐지부지 끝나는 인연만큼이나 슬프지만
세월, 갈 테면 가라지요
그만 커튼을 내리시고 전기불은 꺼주세요
불빛이 꺼지면 나나 당신들
아예 지구에서 사라지면 어떡하죠
빨간 잉어가 왕겨 같은 눈물을 흘립니다
세월, 갈 테면 어서 가시지요

 

 

 

 

포기 못할 사랑

답답한 일, 술 마시지 않아도 속쓰린 일
전화가 없는 너를 잊으려고
긴 머리칼을 잘랐다 선인장 같은 머리칼
구두 산 날은 걸어가는 구두만 보이듯
긴 머리칼의 여자들 샹들리에처럼 현란하다
잊자 뭐든 지나간다
그래도 지나치지 못할 것들
포기 못할 사랑으로 늘 가슴이 아프다

 

 


푸짐한 포옹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더랬어
맹물에 밥 말아먹고 커피 마셔도
그가 털스웨터처럼 나를 감싸안으면
몸은 빨간 열대어가 흔들어대는
이십 평 어항이었더랬어

 

 

 

 

상 처

마음은 상처로 만든 영화이든가
한편의 마음엔
우박 같은 분노, 욕설을 삭이면서 우울의 피고름
을 흘리면서 집착의 담쟁이덩굴은 온 마음을 덮고 고
독의 움막 속에 사랑과 이별의 뜬구름을 싣고 배반과
애증의 교차로를 지나 욕망의 빙산은 달리고 슬픔이란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잦은 실패 치욕.....가장 큰 상
처는 죽음의 밀렵꾼이 호시탐탐 노리는 것

아, 살기 등등한 모자이크로다
상처만 클로즈업하니 관 속에서 숨쉬는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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