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42장 5-6절 Why me 2026.8.19 수요예배 김태상목사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은 돈이 없을까? 왜 가진 돈의 양이 다를까? 경제학적으로 밝혀진 것은 경제학적 관점으로 볼 때 그것은 운이라 합니다. 무슨 경제학자들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하지만 실제 조사한 결과 그렇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경제적 능력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어디에 있을까요?
지금의 경제적 능력을 100%로 가정했을 때 50%를 차지하는 가장 큰 요인은 태어난 나라와 환경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의 1인당 평균 국민소득이 자신의 소득을 결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한 개인이 선택하거나 바꿀 수 없는 환경적 요소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면? 아니면 같은 한반도지만 북쪽에서 태어났다면? 우리가 어떤 나라에서 태어났는가, 어떤 시대에 태어났는가, 어떤 부모 밑에서 자랐는가 하는 것들은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조건들입니다. 전쟁 중인 나라에서 태어난 아이의 노력과, 평화롭고 부유한 나라에서 태어난 아이의 노력은 같은 무게로 같은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일본에서 살고 있지만, 어느 시대에 태어나 어느 곳에 사는가? 는 천지 차이입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제가 사는 미국에서 한국인이라 하면 약간 무시당하는 느낌으로 차별을 받았는데 지금은 완전히 반대입니다. 미국사람들이 저희 교회 한글학교에 등록해서 한국말을 배우려 하는 사람도 있고, 2세들도 한국말을 배우려 노력합니다. 현재 120명의 학생들이 한글을 배우려 매주 토요일마다 교회에 옵니다. 이 모든 것도 한류의 영향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정말 좋은 시절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약 14억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으며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공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고, 간신히 입에 풀칠만 할 정도로 생계만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11억 명에 달한다 합니다. 이렇게 전 세계 인구의 40%에 가까운 이들이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또한, 33%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요인과 성장 과정에서의 환경(교육, 영양, 정서적 지원 등)이 소득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노력할 수 있는 체력과 인내심, 성실한 기질조차도 상당 부분은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것이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아가며 마주하는 성공이나 소득은 80%~90% 이상이 통제할 수 없는 '운'의 영역에 있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빈손으로 태어났다 말하지만, 세상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각자 다른 시작점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다른 출발점에서 인생을 시작하고, 또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원치않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를 만나면서 우리 인생의 궤도가 틀어지기도 합니다. 누구나가 다 행운을 원하고, 편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바람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몇 주전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어느 성도 한 분과 대화를 잠깐 나누었습니다. 그분에게 갑자기 예기치 않게 암이라는 질병이 찾아왔습니다. 그 분이 제가 묻습니다.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 목회자로서 대답해 주기 힘든 것 중의 하나가? ‘설명되는 고난’보다 ‘설명되지 않는 고난’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고난이 사람을 더 힘들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이유만 알면 어떻게든 견딥니다. 그러나 이유를 알 수 없을 때,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을 때, 우리는 마음이 더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여러분에게 찾아온 인생의 고난을 다 해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제가 하나님이 되는 방법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짧은 인생을 통해서 드릴 수 있는 답은? 우리가 갑자기 찾아온 인생의 파도에 대한 원인과 이유를 잘 알지 못하지만, 때론 결과를 통해서 깨닫게 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건강을 마치 공기처럼 당연한 것으로 여기다가, 어느 날 문득 진단서 한 장 앞에서 인생의 좌표가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어제까지 분명했던 일상, 출근길의 커피, 가족과의 저녁 식사, 다음 주의 약속들이 한순간 낯설고 멀어집니다. 질병은 단지 몸의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 전체에 균열을 내는 사건이며,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과 정직하게 마주하게 되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질병 앞에서 인간이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은 거의 언제나 같습니다. “왜 하필 나인가?” 이 질문은 신학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의학적으로도 완전한 답을 얻지 못합니다.
저는 28년 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저는 비교적 운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한국은 IMF 때라 비자가 나오기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미국 비자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학비는커녕 생활비도 없어서 학교를 등록한다는 것은 그 당시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졸업한 New York Theological Seminary에서 장학금을 주겠다고 했고, 저는 50%의 장학금을 받고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웠지만 정말 운 좋게 일도 하면서, 공부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딸이 태어나면서 갑자기 제 인생의 궤도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제 딸이 태어난 지 3일이 지난 후 갑자기 병원에서 급하게 연락이 왔습니다. 아기를 데리고 빨리 병원으로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는 즉시 중환자실에 입원해야 했고, 의사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제 딸은 평생 단백질을 먹지 못하는 연약함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백질을 먹일 수 없다는 것은 단순히 음식을 조절하면 된다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단백질을 먹지 못함으로 오는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감정조절, 지능 발달, 행동 장애 등 모든 뇌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기가 감기만 걸려도 병원에 몇 일 몇 주를 입원해야 했습니다. 제 딸이 고통 속에서 몸부림을 칠 때마다 자식을 놓고 울며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 고쳐주세요, 고쳐주세요.” 근데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음이 생겼어요. “왜 하필 저입니까?”
제가 뭘 그리 잘못을 했기에? 이런 일이 반복이 되니 나중엔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도 까닭 없이 찾아온 고난을 겪으면서 그 이유를 끝내 듣지 못해 저와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 하필 왜 저 입니까?”
욥기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뭘까요? 욥의 고난은 욥만 경험했던 고난이 아니라 이 땅을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기는 자신에게 찾아온 불행의 원인을 찾는 것보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떠난 보낸 C. S. 루이스는 ‘헤아려 본 슬픔’이란 책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다. 그분은 우리의 즐거움 속에서 속삭이시고, 우리의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우리의 고통 속에서 외치신다.” 질병은 우리가 평소에 듣지 못하던 음성을 듣게 하는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건강할 때 우리는 시간이 무한한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병상에 누우면 비로소 하루가, 한 끼의 식사가, 한 사람의 손길이 얼마나 귀한지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질병은 본질적으로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평소 우리는 자립과 자율을 미덕으로 삼지만, 병이 들면 누군가의 손이 없이는 물 한 잔도 마실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이 연약함의 자리야말로 은혜가 흘러들어오는 통로가 됩니다.
질병은 인간의 자족 신화를 무너뜨리고, 우리를 본래의 자리, 곧 ‘피조물의 자리’로 돌려보냅니다.
평상시 보이지 않던 관계의 진실이 병상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누가 진짜 곁에 머무는 사람인지, 누가 말없이도 손을 잡아 주는 사람인지가 분명해집니다. 동시에 우리 자신이 누군가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질병은 관계의 시금석이며, 사랑의 진정성을 시험하는 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질병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죽음과 가까워진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죽음을 직시하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농도를 짙게 만듭니다.
질병은 분명 예기치 않은 손님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질병은 우리에게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가장 정직한 스승이기도 합니다. 건강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저에게 질문했던 분과 대화를 나눌 때 ‘Why me’ 라는 책을 쓰셨던 김춘근 장로님이 생각났습니다. 김춘근 장로님은 단돈 200불을 들고 미국으로 건너간 가난한 유학생이었습니다. 하루에 단 3시간만 자면서, 시체 치우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고 공부했습니다. 그 결과 동양인 1세로서는 누구도 하지 못한 미국 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108대 1의 경쟁을 뚫고 Pepperdine University 교수가 되었습니다. 부임 4년 만에 최우수 교수상까지 받았으니,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활짝 핀 봄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37세 되던 해,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8살 딸과 2살 아들을 둔 한창때의 가장에게 의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간은 손쓸 수 없을 만큼 망가졌습니다. 수술도 불가능합니다. 1년 안에 사망할 것입니다.” 배는 점점 부풀어 오르고 숨쉬기조차 힘들어졌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부르짖었습니다. “Why me?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면서 그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목숨 걸고 공부해서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아내와 어린 자녀들은 이제 어떻게 하라고 이러십니까?” 모든 것을 포기한 그는 아내와 함께 LA에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빅베어 마운틴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산 아래로 내려보낸 뒤, 산장에 홀로 남아 죽음을 기다리며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1977년 6월 24일, 바로 그날 밤이었습니다. 갑자기 하나님께서 그의 입을 여시고 큰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지금 육신적으로 죽는 것은 네 피 속에 있는 독소 때문이지만, 네가 정녕 죽는 것은 네 영혼 속에 있는 독소 때문임을 모르느냐?”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도 교만했고, 사람 앞에서도 교만했다. 네가 남보다 조금 똑똑하다고, 공부 잘했다고, 지식을 쌓았다고 얼마나 인생을 교만하게 살았느냐?”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은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교만’이라는 무서운 죄가 그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산장 바닥에 엎드려 회개했습니다. 그날 밤, 하나님의 만지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살려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1993년 8월, 뉴욕에서 알래스카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각성”이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는 역대하 7장 14절 말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을 붙들고 미국 청년들의 영적 각성을 위해 기도하는 자마(JAMA)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김춘근 장로님의 간증에는 두 개의 “Why me?”가 있습니다. 첫 번째 Why me는 원망에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왜 하필 접니까?” 고난 앞에서 하나님을 향한 항변이었습니다. 두 번째 “Why me”는 사명의 깨달음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두셨습니까?” 살려주신 이유를 묻는 거룩한 질문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는 약속, 그런 약속은 성경에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환난이 ‘있을 수도 있다’가 아니라, ‘세상에서 반드시 환난을 당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에게 고난이 찾아온다고 해서, 그것이 신앙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 우리가 신앙의 길 위에 서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의인에게 고난이 찾아오는 것은 신앙의 실패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더 깊은 일을 하시려는 표시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원인 모를 고난 가운데 계신 분이 있다면, 먼저 이 한 가지를 마음에 새기십시오. ‘내가 고난 가운데 있다는 사실이, 곧 내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욥도 그러했고, 다윗도 그러했고, 예레미야도 그러했고, 바울도 그러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욥기 42장은 욥기의 결론 부분입니다. 예기치 않은 인생의 고난 속에서 욥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이 한 절의 말씀이 욥기 42장의 절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욥의 고난이 도달한 마지막 지점입니다.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첫째, ‘귀로 듣던 하나님’에서 ‘눈으로 뵙는 하나님’으로 옮겨갔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 결과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귀로 듣던 하나님’이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을 통해 들은 하나님, 책에서 배운 하나님, 전통과 관습으로 알게 된 하나님입니다. 욥은 분명히 의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그러나 욥의 신앙은, 고난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귀로 들은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눈으로 뵙는 하나님’은 다릅니다. 직접 만난 하나님, 부르짖음 가운데 응답하신 하나님, 내 인생의 가장 깊은 골짜기에서 만난 하나님입니다. 이 두 사이에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눈으로 뵌 하나님’ 앞에서 욥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를 내려놓고, 회개한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의 가장 큰 열매입니다. 고난은 결국 우리를 ‘우리 자신 앞에’ 데려다 놓습니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내 모습이, 고난 가운데서 비로소 정직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평탄할 때, 자기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일이 잘되고, 건강하고, 가정이 평안하면, 우리는 자신은 운이 좋고,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고난이 우리를 두드릴 때, 그제야 자신이 보입니다. 내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작은 일에도 쉽게 무너지는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내 힘만으로 살아왔는지 그런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고난은 우리에게 던지시는 하나님의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너는 정말 나를 의지하고 있느냐. 너는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 너의 신앙은 환경 때문에 좋아 보였던 것이냐, 아니면 환경과 무관하게 진짜였느냐.” 이 질문 앞에 우리를 세우는 것, 그것이 고난의 가장 깊은 목적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고난은 우리를 ‘돌이켜’ 다른 사람을 보게 합니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다른 사람의 아픔이, 내가 아파 본 후에야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고난은 절대 헛되지 않습니다. 내가 통과한 골짜기는, 언젠가 같은 골짜기를 통과하는 다른 사람을 위한 ‘길’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장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4) 내가 받은 위로가,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는 위로가 됩니다. 내가 흘린 눈물이,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 주는 손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은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문제입니다. 풀리지 않는 시험문제 같습니다.
만약 제가 인생을 계획했는데 그 계획대로 다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우리의 인생을 가만히 보면 어그러진 일들을 경험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인생을 대하는 중요한 태도 중 하나는 내가 원했던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보다, 내가 원치 않았던 일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입니다.
지금까지 제 딸의 장애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장애를 통해 하나님이 저를 바꾸신 부분이 많습니다. 저는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이 사람은 노력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딸들을 보면서 “세상에는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구나.” 그때부터 목회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전에는 엘리트 중심적이었습니다. “예수 믿으면 다 잘 돼야 한다, 사업에서 성공해야 하고, 아프지 말아야 하고, 좋은 학교, 직장 들어가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 딸들의 문제를 통해 이런 엘리트 중심의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떤 목회를 해야 하는지 바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에는 성공한 한국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이면 자식 자랑을 합니다. “우리 애 하버드 갔어요, 프린스턴 갔어요.” 특히 동부 쪽에서 사역을 할 땐 더 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처음에 미국 왔을 때 한국 사람들의 자녀들은 다 똑똑하고, 잘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삶으로 깊이 들어가 보니 자식 때문에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은 교회에서는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 딸을 통해 그런 사람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질문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깨닫는 것은 제 몫이지만 제 딸이 당한 고통과 아픔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이 부분에 대한 답은 아직 없습니다. 우리 삶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인생을 비극이라고 말한다면, 우리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극일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한 가지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아픈 손가락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아픔을 가지고 힘겹게 지나가는 분에게 딱 맞는 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게 되는 때가 있고, 힘들지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들은 많이 있지만, 그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질문하고 답을 얻고, 그리고 우리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달아 가는 것이 신앙의 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의 여정은 모두에게 동일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더 험한 길을 가야 하고, 누군가는 조금 더 편안한 길을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으로 성공과 실패를 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 중 하나가 요셉입니다. 그래서 심방을 할 때마다 요셉 이야기를 자주 전합니다. 요셉에겐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바로 ‘형통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인생을 보면 형통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어린 시절 자기 잘못도 아니고, 꿈을 꾸고 형들에게 이야기했는데 그 때문에 미움을 받아 팔려 갔습니다. 팔려 갔다는 것은 내 의지대로 되지 않고 누군가에 의해 내던져진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아마 우리가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느끼는 감정이 이와 같을 거예요. 그럼에도 그런 요셉에게 ‘형통한 자’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prosper”라는 단어를 쓰는데, “앞길이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팔린 인생,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이었는데도 그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때문에 그의 앞길은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공한 인생은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계획한 대로 되는 인생이 아니라 팔린 인생 같아도 그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인생입니다. 성경은 팔린 인생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신다고 말합니다.
우리 인생은 주식처럼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상한가를 기록할 때도 있고, 하한가를 기록할 때도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노예로 떨어집니다. 노예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이 그를 형통케 하셔서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인정받아 노예 중 최고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갑자기 누명을 쓰고 감옥에 떨어졌습니다. 감옥에서도 형통함을 경험하며 최선을 다했고, 간수장의 인정을 받았어요. 그리고 왕 신하의 꿈을 해석해주었지만, 또 2년 동안 잊힌 채 지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완벽한 타이밍에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되었고 총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총리’라는 결과에 집중하지만 사실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그의 모든 인생 속에 함께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창세기 50장 20절에서 요셉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님들은 나를 해하려 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이 고백은 그의 인생이 잘 되었기 때문에 하는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목사로서 모든 사람에게 모든 답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거예요. 제가 다 아는데 하나님을 왜 믿겠습니까?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부분들이 나에게 믿음을 필요하게 만들고, 용기를 필요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사도 바울이 “내 약함이 강함입니다”라고 고백한 이유를 이제 이해합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약함들이 우리를 하나님께 붙들어 매는 끈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게 믿음의 역설입니다. 그래서 지금 “Why me” 라는 질문을 갖고 사는 분들에게 드릴 수 있는 말씀은 모든 사람이 나름대로 문제를 가지고 살지만, 그 문제 속에서 인생의 깊이가 더욱 깊어질 기회라는 것이고, 귀로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볼 기회가 된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고난을 당할지라도 그 고난을 해석하는 힘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환경에 묶이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인들 가운데에도 ‘온도계’와 같은 사람이 있고 ‘온도 조절기’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온도계는 날씨가 추우면 내려갑니다. 날씨가 더우면 올라갑니다. 이런 사람은 환경에 따라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신앙생활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기쁨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온도 조절기는 조절기에 따라 방 안 온도가 오히려 달라집니다. 환경에 지배당하는 삶이 아니라 환경을 지배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이요 능력입니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온도계를 살펴보면, 어떤 사람들은 돈이 온도계, 주식이 온도계입니다. 매출이 올라가거나 주식이 올라가면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식 성적이 온도계입니다. 성적이 올라가면 세상 살맛이 납니다. 이것이 온도계 인생입니다. 이런 온도계에 집중하여 살면 환경 때문에 울고 웃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온도조절기는 내가 주관적으로 내 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을 말하는 것입니다.